캐시 컴 홈(Cathy Come Home, 1966)

데뷔작을 보면, 괜히 작가와 친해진 기분이 듭니다.
토요일에 새벽같이(오전 9시 반. -.-v) 일어나 동숭동 하이퍼텍 나다로 달려간 것도,
좀처럼 오기 어려운 기회(켄 로치의 데뷔작을 볼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서였지요.
사실, 여태까지 켄 로치의 데뷔작이 뭔지도 모르고 살았는데,
일단 알고 나니 못 보면 후회할 듯 열이 오르지 뭐예요.

[캐시 컴 홈]은 캐시라는 젊은 여자가 답답한 시골집을 떠나 도시에서
직장을 얻고, 한 남자와 사랑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실직을 경험하고, 중산층의 환상이 너무도 쉽게 몰락하는 과정을
다큐멘터리처럼 이야기합니다.
몸 다친 데 없이 직장에서 월급을 받는 동안,
우리는 마치 안정된 중산층인 양 착각하지만,
사실은 한 발 삐끗하면 누구나 홈리스가 될 수 있음을 알려줍니다.
누구나 될 수 있는 홈리스를,
게으르고 지저분한 별종 인간(“집시”) 취급하며
아주 쉽게 배제해 버리는 ‘주류 사회’의 인식이 얼마나 터무니없는가도.
이 영화에 나오는, 1960년대 영국 도시 빈민가의 모습은
50〜60년대 흑백 사진에 보이는 한국의 달동네 풍경과 그리 다르지 않더군요.

오늘 저녁엔 켄 로치의 세 번째 작품 [케스]를 보러 갑니다.
[케스]는 전에 아주 인상 깊게 보았던 소설(http://www.aladin.co.kr/blog/mypaper/459411) 인데,
켄 로치가 이 소설을 가지고 영화를 만들었다는 건 이제 알았어요.
진창 속의 흑요석 같은 이 소설을 어떻게 영화로 만들었는지 꼭 봐야겠습니다.
위에 올린, 특별전 리플렛 사진이 바로 [케스]의 한 장면입니다.

하이퍼텍 나다에서 11월 9일까지 열리는 켄 로치 특별전에 대해
알려주신 바람구두님께 감사~ ^^



하이퍼텍 나다 상영관 안에서. 영화 상영 전후에는 커튼을 열어놓는데,
좌석에 앉아 항아리가 놓인 소박한 바깥정원을 보는 것도 그윽한 맛이 나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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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blue 2006-10-30 16: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나다에서는 조그마한 정원을 보는 맛이 있지요. ^^

가랑비 2006-10-30 1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루님, 이번에 한번 행차 안 하시나요? ^^
속삭이신 님, 맞다. 그게 있었군요. ^^
 

170-171쪽
무엇이 성폭력인가 하는 성폭력 정의(定義)의 배제와 포함의 원리를 살펴보면, 우리 사회의 반(反)성폭력 담론이 여성의 인권을 위해서가 아니라 부계 가족 보호라는 남성 공동체의 이해에 더 기능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1996년 대법원은 트랜스젠더 여성(성 전환 여성)을 남성 3명이 길거리에서 승용차로 납치하여 집단 강간한 사건에 대해, “피해자를 여성이라고 볼 수 없고, 생식 능력이 없다.”는 이유로 가해자에게 제1심과 제2심 판결에 이어 무죄를 판결했다. 이 사건은 성폭력의 정의뿐 아니라 남성 중심 사회에서 남성의 시각에 부합하는 ‘진짜’ 여성은 누구인가를 묻고 있다. 현행 성폭력 특별법, 가정폭력 방지법은 여성운동의 성과물이긴 하지만, 여성의 섹슈얼리티가 여성 자신의 것이라는 인권의 시각에서 제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여성 섹슈얼리티에 대한 가족주의의 규범과 통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현행 성폭력 특별법에서 강간은 남성의 성기가 여성의 성기에 삽입되었을 경우에 한정된다. 성폭력을 피해자의 인권 침해가 아니라 ‘임신 가능한 부녀자 보호’라는 가부장적 시각에서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군대에서 남성 간 성폭력, 성 전환자에 대한 강간, 여성 성기에 이물질 삽입 등은 강간이 아니라 추행죄가 적용되어 강간보다 형량이 낮다. 피해자가 여성이든 남성이든 성 전환자든, 성기 삽입이든 이물질 삽입이든 피해자의 입장에서 보면 모두 인권 침해이고 성폭력이다. 가부장제 사회가 ‘임신 가능한 부녀자’만을 ‘여성’으로 볼 때, 성폭력은 개인의 인권을 침해하는 범죄가 아니라 남성 각자가 소유한 ‘임신 가능한 부녀’에 대한 침해죄―‘사유재산권’ 침해―가 된다. 이러한 문화적 규범 때문에 성폭력 특별법이 있어도 아내나 성판매 여성에 대한 강간은 처벌하기 어렵다. 자기 아내나 성판매 여성에 대한 성폭력은, 다른 남성의 ‘가임 가능한 부녀자’가 아니므로 남성 연대의 가부장제 질서를 위협하지 않기 때문이다.

171-172쪽
한국 사회에서 여성에 대한 폭력은 범죄나 인권 침해의 문제가 아니라 도덕적인 문제로 인식되는 경향이 강하다. 여성에 대한 폭력을 명예나 도덕과 관련한 문제로 인식하게 되면, 여성은 피해 사실에 분노하기보다 수치심을 느끼게 되고 피해 여성은 자신이 속한 집단의 명예를 ‘더럽힌’ 존재가 된다. 그러므로 자신이 당한 폭력을 거론하는 여성은 공동체 내부의 치부를 폭로한 ‘배신자’로 간주된다. 성폭력 피해를 문제화하려는 여성이 가장 많이 듣는 말은 ‘남자 앞길 망친 여자’라는 비난이다. 폭력 피해 여성들도 자신의 고통과 피해를 중심으로 생각하기보다는, 가족이나 직장, 조직, 학교 등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명예를 먼저 걱정하는 경우가 많다. 사회적으로 피해 여성의 고통보다 가해 남성의 명예가 더 중요하다고 간주되기 때문이다.

178쪽
정의(justice)로서 평등한 인권은 같아짐(same)이라기보다는 공정함(fairness)을 추구하는 것이다. …… 이제까지 양성 평등은 …… 여성이 남성과 같아지는 것을 의미했다. 여성은 ‘공적 영역’으로 진출했지만, 남성은 그만큼 ‘사적 영역’으로 진출하지 않았다.

179쪽
휠체어를 사용하는 장애인과 두 발로 걷는 비장애인에게 동일한 조건에서 달리기 경쟁을 하라는 것은 평등이 아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우리 사회에서 ‘평등’은, 장애인이 장애를 ‘극복’하고 비장애인과 같아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사회적 강자의 기준을 강요하는 것이지, 평등이라고 볼 수 없다.

207쪽
성판매 여성은 변화하지 않는 고정된 ‘정체성’이 아니다. 성판매 여성은 인간의 성 활동이 남성 성기 중심 섹스로 환원되고, 상업화된 성과 이성애 가족 제도 내부의 성이 명확하게 분리되어 있다는 환상 속에서만 가능한 범주다. 사회는 “‘사창가’라는 집단적 공간에서 평생 전업 성매매에 종사하는 여성”을 성판매자로 생각하고, 여성주의 진영의 인식도 크게 다르지 않다. 성판매 여성을, ‘그들도 우리처럼’, 과정 속에서 생성되는 ‘유목적 주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211쪽
한국의 성매매는 인신매매, 여성의 가족 부양, 소비 자본의 욕망, 입시 제도, 강력한 가족주의, 학연, 가족 내 성폭력, 전무하다시피 한 사회복지 등으로 인한 남성과 여성, 여성과 여성의 계급 차이가 성판매 여성의 ‘선택’으로 실현되었다고 생각한다.

227쪽
‘윤락’은 이 문제를 사회적 · 정치적 사안이 아닌 개인의 도덕적인 문제로 보아 낙인을 전제하는 성 보수주의 시각이라는 점에서, ‘매춘’은 사는 사람, 수요자인 남성이 가시화되지 않기에, ‘매매춘’은 성(性)을 봄(春)이라는 자연 현상으로 비유하여, 성을 사고파는 행위를 만들어진 제도가 아니라 ‘생물학적 본능’으로 간주한다는 점에서 비판받았다.
그러나 현재 가장 많이 통용되고 있는 ‘성매매 여성’이라는 용어도 문제적이다. 여성은 성을 매매(賣買)하지 않는다. ‘팔기만 한다’. 여성이 남성의 성을 사는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남성이 여성의 성을 구매해 온 역사와 규모에 비할 수는 없다. ‘성매매 여성’이라는 말은, 가정폭력, 배우자폭력, 부부폭력이란 용어가 아내폭력의 성별 권력 관계를 은폐하는 중립적 용어이듯이, 성매매의 명백한 남성 권력을 안 보이게 한다.
여성은 성을 사는 집단이 아니라 주로 파는 위치에 있으므로, ‘성매매 여성’이 아니라 ‘성판매 여성’ 혹은 ‘성산업에 종사하는 여성’이라고 표현해야 한다. ‘성매매 피해 여성’이라는 말은 더욱 논쟁적이다. 이 용어에 성매매에 대한 모든 논쟁이 함축되어 있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229쪽
자본주의 사회에서 남성이 파는 것은 몸이지 성이 아니다. 그러나 여성의 몸은 그 자체로 성으로 간주되며, 여성의 성은 팔거나, 팔리는 상품이 된다. 남성 노동자가 파는 것은 성이 아닐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의 남성 노동자는 노동자일 뿐 팔리는 노예가 아니다.


252쪽
군사주의가 작동하기 위해서는 싸워야 할 적, 지키는 주체, 보호의 대상이 있어야 한다. 가부장제 사회의 ‘보호자 남성, 피보호자 여성’이라는 전형적 성역할은, 이 세 가지 요소의 모델이다. 군대의 존재가 설득력을 갖기 위해서는, 남성이 군대에 복무하지 않으면 자신들의 남성다움을 검증할 수 없다고 느끼도록 해야 하고, 그들의 경험은 여성에 대한 지배와 보호, 여성들의 고마움에 의해 증명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적과 피보호자를 상정하는 군대가 존재하는 이상, 여성이 군 복무에 남성과 평등하게 참여한다고 해서 시민권이 보장되지는 않는다. 성별에 상관없이 전 국민 징병제인 이스라엘이나 북한의 경우를 보면, 군대 자체가 성별화되었기 때문에 여성이 병역을 이행하려면 여성성을 부정해야 하고, 배제되면 2등 국민이 되는 이른바 ‘같음과 다름의 딜레마’가 반복된다. 평등의 기준 자체가 남성을 기준으로 했기 때문이다. 이때 평등은 공정함(fairness)이라는 정의(justice)가 아니라, 남성과의 같음(sameness)을 강요하는 남성 동일화(identification)이다. 때문에 여성의 ‘평등한’ 군대 참여는, 역사상 어느 국민국가에서도 채택된 적이 없고, 어떤 여성해방 이론에서도 주장된 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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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줄 평 : 절대적인 남성 권력 사회에서 예쁘고 똑똑한 여자의 생존 전략.

(좀 길게 말하면)
이 영화를 보고 나니 비로소 [햄릿]이 이해된다.
고등학생 시절 [햄릿]을 읽었을 때,
도대체 이 책을 왜 불후의 명작이라고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랬구나. [햄릿]은 남성들의 권력 투쟁을 표현한 작품이었구나.
남성 권력 사회에서
권력은 같은 항렬 사이뿐 아니라 세대 간에도 쟁탈의 대상이 된다.
권력을 쥔 승자는 여러 가지 전리품을 취하게 되는데
그중 하나가 ‘예쁜 여자’다.
그런데 ‘예쁜 여자’가 전리품 위치(언제 버려질지 모르는)에 만족하지 못하고
스스로 생존을 도모하다 보면 얻게 되는 이름이 ‘팜므 파탈(femme fatal)’이다.

남성들 간의 권력 투쟁이 비극으로 끝날 경우
경쟁 당사자인 남성들의 선택은 숭고한 것이 되고
(사랑을 지키고자 죽는다는 둥, ‘황제’라는 죄 많은 호칭을 거부한다는 둥)
파멸의 원인은 흔히 팜므 파탈에게 돌려지는데
(남자가 망하는 건 다 여자 잘못 만난 탓이라나),
팜므 파탈이 나쁘다는 걸 더 분명히 드러내려면
정반대되는 여성상이 하나 필요하다.
그래서 등장하는 것이 ‘순결한 오필리아’ 아니겠는가.
자신을 강간한 남자도 지고지순하게 사랑해버리는 여자.

[햄릿]의 구도를 빌려서 영화를 만들었기 때문인지,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것은 다 중국의 것을 소재로 했는데도
왠지 서양풍으로 느껴졌다.
‘민요’라는 처녀사공의 노래도 현대 뮤지컬에 나오는 노래 같고,
배경이 되는 궁궐의 여러 장소도
중국 전통의 것에 현대적인 디자인을 가미했다고 할까.
왕자 우루안이 숲에서 가무에 몰두하는 장소도
마치 고대 그리스나 로마의 원형극장 느낌이 난다.



[햄릿]을 이해하게 해준 것은 고맙다만,
사실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갈지 너무 뻔하고
인간에 대한 애정도 느껴지지 않아서
감동은 전혀 없었다.
요 몇 년 사이 보는 중국 영화가 다 그렇다.
화면은 기막히게 아름답지만(정말 예술이다)
그뿐, 이야기는 아무런 감동도 주지 못한다.

아무튼 장쯔이는 무지하게 예쁘고,



형을 죽이고 형수와 결혼한 새 황제 역할을 한 이 배우(갈우葛優, You Ge)도 볼수록 멋지다.



야연 (夜宴: The Night Banquet, 2006)
감독 : 펑샤오강(馮小剛, Xiaogang Feng)
출연 : 장쯔이(章子怡, Ziyi Zhang), 다니엘 우(吳彦祖, Daniel Wu), 갈우(葛優, You Ge), 저우쉰(周迅, Xun Zh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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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blue 2006-10-12 17: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왜 요즘 중국 영화들은 멋진 화면 만들기에만 열중하고 있나 몰라요.

가랑비 2006-10-12 19: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자요 마자요. 쏟아져 들어오는 자본을 티낼 데가 그것밖에 없어설까요?

BRINY 2006-10-12 2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어쨋든 멋졌습니다. 전 음악에도 반했어요~

가랑비 2006-10-13 1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멋지긴 하죠? ^^
 

어른이 더 재미있게 볼 듯. ^^
약수터로 가는 길에는 놀 것이 그리 많은데 엄마는 무엇이 그리 바쁠까.
말놀이와 숨바꼭질로 아이들의 발걸음을 재촉하는 엄마의 기술(^^)이 재미있다.

약수터 가는 길 - 비룡소 창작 그림책 11
정지영, 정혜영 (지은이) | 비룡소
정   가 : 8,500원
출간일 : 2002-04-22 | ISBN : 8949100290
양장본 | 48쪽 | 257*258m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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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호인 2006-10-09 2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원한 약수터물이 있는 곳은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이기에 정겨움이 넘쳐나는 곳이 아닐까 합니다.

가랑비 2006-10-10 1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갑자기 시원한 약수가 마시고 싶어졌어요. ^^ 전호인님 댁 근처에는 약수터가 있나요? 이 그림책에서 보여주는 건 약수터 자체보다 "엄마와 두 아이가 함께 길을 간다는 것"인데요, 가벼운 산길을 걷다가 마시는 약수처럼 그림이 청량하답니다.
 

지난 설날에 시조카에게 이 책을 선물했는데, 직접 읽어달라기에 읽어주었다.
소리 내어 읽어보니 눈으로 보기보다는 운율이 입에 딱딱 맞지 않았지만
(시나 노래가 아닌 이야기 책이라 해도 아이에게 읽어주려면
운율이 입에 붙는 게 좋겠다는 걸 깨달음),
두 쪽으로 이루어진 장의 끝말이 다 "나 너 좋아해"라서,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아이의 눈을 들여다보며
"나 너 좋아해"라고 말할 수 있는 점이 참 좋았다.

신순재 (글), 차정인(그림) | 천둥거인(돌베개어린이)
정   가 : 7,500원
출간일 : 2001-12-05 | ISBN : 8995066997
28쪽 | 236*205m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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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6-10-09 1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도 좋아해~ 아우를^^

가랑비 2006-10-09 1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잉~  


가랑비 2006-10-09 14: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훔, 왜 그러시오, 따우님? ☞ http://www.aladdin.co.kr/blog/mypaper/959849

가랑비 2006-10-09 19: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헤, 귀엽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