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전 손택의 말 - 파리와 뉴욕, 마흔 중반의 인터뷰 마음산책의 '말' 시리즈
수전 손택 & 조너선 콧 지음, 김선형 옮김 / 마음산책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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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전 손택이라는 이름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그녀를 자세히 접한 건 이 책이 처음이었다. 수전 손택의 작품을 읽어본 것도 아니었고, 그녀의 삶이나 행보에 대해 잘 알지도 못했지만, 이 책을 보는 순간 왠지 모르게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책들 사이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보라색에, 특유의 분위기가 느껴지는 수전 손택의 사진이 실린 표지에 저절로 손이 갔다는 게 맞을 것이다. 결정적으로 이 책을 읽기로 결심한 건 인트로 텍스트 때문이었다. 마음산책 출판사에서 출간하는 모든 책에는 본문에서 발췌한 문장이 인트로 텍스트로 들어가는데, 이 인트로 텍스트를 보는 순간 읽고 있던 책을 제쳐두고 이 책을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책은 <롤링스톤>지의 에디터 조너선 콧이 수전 손택을 인터뷰한 책이다. 다양한 매체의 인터뷰를 엮은 것이 아니라, 하나의 긴 인터뷰를 원래의 호흡대로 담았다. 인터뷰어인 조너선 콧은 그녀가 컬럼비아대학교에서 강의하던 시절 학부 수업을 들은 학생이었다. 졸업 후에도 꾸준히 수전 손택과 교류를 이어갔던 그는, 오랜 기다림 끝에 『은유로서의 질병』 출간을 앞두고 인터뷰를 제의했다.

인터뷰가 이뤄진 1978년은 수전 손택에게 중요한 시점이었다. 1977년에 대표작인 『사진에 관하여』를 출간해 한창 주목을 받고 있었고, 1974년 유방암 선고를 받고서 수술과 투병으로 보낸 2년여 동안 구상한 또 다른 저서 『은유로서의 질병』이 출간된 시점이었다. 마흔다섯, 죽음을 관통해 생의 한가운데로 돌아온 그녀는 모두 열두 시간에 걸쳐 이루어진 인터뷰에서 자신의 글과 철학과 취향과 생활을 꾸밈없이 풀어놓았다. 수전 손택에게 가장 중요한 시기에, 사제 간의 끈끈한 교집합을 통해 그 어떤 인터뷰보다 '군더더기 없고, 정확하고, 요란하지 않고, 꾸밈없'이 수전 손택의 모습을 담게 된 것이다.


P.203 '옮긴이의 말' 중에서
이미 그해 <롤링스톤>지에 인터뷰 기사를 게재한 바 있는 콧이 손택의 사후에 편집도 논평도, 그 어떤 다른 매개도 없이 열두 시간에 걸친 긴 대화 속에서 포착한 그녀의 '육성'을 그대로 다시 한 번 '옮겨 적어'야겠다고 결심한 건, 아마도 인터뷰어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첨언과 해석의 권리를 포기하고 불필요한 신화의 양산에 동조하지 않겠다는 뜻일 것이다. 그리하여 이 책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몰개성적 '글'이 아니라 1978년 싱그러운 어느 여름날, 파리와 뉴욕이라는 특수한 시공간에서 발화된 사적이고 특수한 '말'을 성실하게 포착한다. 추임새와 웃음소리를 포괄하는 이 대화 속 수전 손택의 말에는 목소리가 있고, 체온이 있고, 감정이 배어난다. 그녀의 삶을 종단하는 서사는 없지만, 그녀 삶의 짧은 한 순간을 함께 횡단하는 체험이 있다. 


여느 인터뷰들이 근황을 묻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듯, 그녀의 투병 생활과 저서 『은유로서의 질병』 이야기로 시작한 인터뷰는 대표작들의 표지를 어떻게 골랐는지에 대한 소소한 에피소드서부터, 수전 손택의 글쓰기론에 대해 진중하게 풀어내기도 하고, 그녀가 좋아하는 작가와 뮤지션 같은 예술적인 취향, 성과 사랑, 영감이 되는 도시들의 이야기 등 다양한 주제에 걸쳐 손택의 모습을 담고 있다.


P.16-17 '서문' 중에서
"나는 인터뷰라는 형식을 좋아해요." 그녀는 언젠가 내게 말했다. "대화를 좋아하기 때문에, 문답을 좋아하기 때문에 인터뷰를 좋아하는 거죠. 그리고 내 사고의 상당 부분이 대화의 소산이라는 걸 알고 있어요. 어떤 면에선 글쓰기에서 가장 어려운 점이 혼자 해야 하고 그래서 나 자신과의 대화를 꾸며내야 한다는 사실이에요. 이건 본질적으로 자연스럽지 못한 활동이거든요. 저는 사람들에게 말하는 걸 좋아해요. 그래서 은둔자가 되지 않을 수 있는 거죠. 그리고 대화는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낼 기회를 주죠."


P.33-34
콧: 베트남 방문에 대한 에세이에서 선생님은 수치와 죄책감의 문화가 어떻게 다른지를 논하시죠.
손택: 뭐, 분명히 겹치는 부분이 있기는 하지요. 어떤 기준을 충족하지 못했기 때문에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끼는 거니까요. 그렇지만 사람들은 병들었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느낍니다. 개인적으로는 책임감을 느끼고 싶어요. 사생활에서 곤경에 빠졌다는 느낌이 들면, 예를 들어 잘못된 사람과 얽혔다든가 아니면 어떤 식으로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상황이 되면 – 누구나에게 일어날 수 있는 그런 일들 있잖아요 – 나는 항상 상대의 잘못을 탓하기보다는 책임을 지는 쪽을 선호합니다. 나 자신을 희생자로 보는 게 정말 싫어요. 차라리 뭐랄까, 내가 이 사람과 사랑에 빠지기를 선택했는데 알고 보니 개새끼였어, 이렇게 말하는 게 나아요. 그건 '내가 한' 선택이었으니까요. 더욱이 다른 사람을 탓하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 남을 바꾸기보다는 나 자신을 바꾸는 게 훨씬 쉽거든요. (…) 제가 보기에는, 병이 들어서 치명적인 질환을 앓는 건 마치 자동차에 치이는 것과 마찬가지니까, 무엇 때문에 이렇게 앓아눕게 됐나 걱정해봤자 별로 의미가 없다는 거죠. 의미가 있는 행동이라면, 최대한 합리적으로 올바른 치료를 모색하고 진심으로 살고자 원하는 것입니다.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질병과 공범이 될 수도 있어요.


P.66
그래요. 독서는 제게 여흥이고 휴식이고 위로고 내 작은 자살이에요. 세상이 못 견디겠으면 책을 들고 쪼그려 눕죠. 그건 내가 모든 걸 잊고 떠날 수 있게 해주는 작은 우주선이에요.


P.160

여러 갈래의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은 확실히 했는데, 그렇게 여러 삶을 살면서 남편을 두는 건 아주 어려워요. 적어도 제 결혼은 그랬죠. 말도 못하게 치열한 관계였으니까. 우리는 항상 함께 있었어요. 하루 24시간 내내 어떤 사람과 함께 살면서 오랜 세월 절대 헤어지지 않으면서 동시에 성장하고 변화하고 마음 내키면 훌쩍 홍콩으로 날아가는 그런 자유를 누릴 수는 없는 법이에요… 그건 무책임한 거잖아요. 그래서 어느 시점이 되면, 삶과 기획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말하는 거예요.


P.187
1년 열두 달, 아니 심지어 열 달이어도 뉴욕에서만 살 수는 없어요. 이건 완전히 인위적인 삶이죠. 그렇지만 뭐 어때요? 자기 공간은 스스로 창조해야만 해요. 침묵과 책들로 가득한 공간 말이에요. 


이 책을 읽는 내내 수전 손택의 지성과 매력과 취향에 감탄하며 밑줄을 긋고 또 그었다. '나는 어떤 존재인가, 어떤 사유를 하는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어떤 존재로 보이고 또 기억될 것인가'를 끊임없이 고민하며 나아가는 수전 손택의 모습에서 나 역시 삶의 나아갈 방향을 가늠할 수 있었다. 자신과 주변을 돌아볼 새도 없이 매일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사유와 철학을 권하고, 열정과 탐구심을 자극하는 그녀, 수전 손택. 나에게 수전 손택이라는 인생의 북극성을 만나게 해준 이 책이, 더 많은 이들의 머리맡에서 환하게 빛나길 바란다.


P.204-205 '옮긴이의 말' 중에서
마흔다섯, 죽음을 관통해 생의 한가운데 다시 선 그 순간의 그녀는, 이 인터뷰 속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의 패기를 당당히 드러낸다. 좋은 세상은 주변적인 인간들에게 너그러워야만 하며, 그 누구도 늙었다는 이유로 또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주눅 들거나 차별받아서는 안 되며, 객관적 세계의 실재를 부정하는 유심론의 신화와 폭압을 타파해야 한다고 외친다. 살기를 원하지 않는 자는 질병과 공범이라고 말하며, 삶을 긍정하고 삶을 위해 투쟁해야 한다고 말한다. 가슴을 뛰게 만들고 세상을 바꾸는 음악과 예술의 힘은 대중•순수미술이라는 간극을 뛰어넘는다고 말한다. 그렇게 모든 이항 대립과 클리셰의 허위와 착시를 뒤흔들고, 진실을 복잡하고 심오하게 만드는 비판적 사유의 가치를 열렬히 옹호한다. 그리고 이 대화 속에서, 그렇게 마성의 매력을 지닌 사적인 사람 손택과 준엄하고 엄정한 공인 논객 손택의 무의미한 신화와 이항 대립은 허물어진다. 이 물 흐르듯 이어지는 ‘말’들의 풍요로운 향연은 그녀 자신의 말대로 준엄한 “윤리주의자”와 “정신 나간 탐미주의자”가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지를, 나르시시스트와 자기 성찰이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지를, 모성과 자기애가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지를, 대중문화에 대한 관심과 정전에 대한 헌신이 어떻게 한 사람 속에 어우러지는지를 날카롭게 일별하게 하고 신화의 장막을 뛰어넘어 인간 손택에게 다가가는 길을 열어준다.


"우리가 사람을 풍문으로 알 수 없듯이, 오로지 만남으로만 알 수 있듯이, 이 책의 인터뷰는 그 순간 승리자로서 생의 정점에 서 있던 손택을 '만나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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