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도 괜찮겠네
이사카 고타로 지음, 오유리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4년 11월
평점 :
절판


하루키는 이렇게 말했다. 자신의 본업은 소설가이고 자신이 쓰는 에세이는 '맥주 회사가 만드는 우롱차' 같은 것이라 생각한다고. 세상에는 '나는 맥주를 못 마셔서 우롱차밖에 안 마셔' 하는 사람도 많으니, 이왕 그렇다면 일본에서 제일 맛있는 우롱차를 목표로 하겠다고 말이다. 나 또한 맥주보다는 우롱차 타입의 하루키를 더 좋아하는 독자 중 한 명인데, 최근 하루키의 우롱차만큼이나 따뜻하고 고소한 우롱차를 만났다. 일본의 젊은이들이 가장 따뜻한 작가로 꼽은 이사카 코타로의 산문집 『그것도 괜찮겠네』가 바로 그것이다. 하루키의 에세이가 일상의 사소한 경험도 놓치지 않고 거기서 삶의 행복을 찾는 맛의 우롱차라면, 이사카 코타로의 에세이는 답지 않게 착한 미스터리 소설가의 인생을 다독이며 사는 맛이 나는 우롱차라고나 할까. 산문집으로 그를 처음 접한 나는 '정말 미스터리 작가라고? 아동문학 작가가 아니라?' 하고 생각할 정도로 다정다감한 글이었다.


추리소설가인 이사카 코타로는 데뷔 직후 이런 제안을 받았다고 한다. "10주년 되는 해에는 에세이집 한번 내보는 게 어떨까요?" 그때 그는 10년 뒤에도 이 일을 계속하고 있지는 않겠지, 막상 그때가 되면 흐지부지되겠지, 하는 생각으로 선선히 대답했다고 한다. 그런데 웬걸. 그가 등단할 때 담당 편집자였던 신초사의 아라이 씨가 "에세이집 말인데요, 어차피 쓸 거 데뷔작이 발매된 날에 맞춰 출간합시다."라고 선언한 것. 그렇게 해서 이사카 코타로의 등단 10주년을 기념해 그동안 썼던 산문들은 모아 낸 책이 『그것도 괜찮겠네』다. 


이사카 코타로의 산문집에서만 느낄 수 있는 고소함 중 하나는 바로 '덧글'이다. 에세이집이 나올 걸 생각지 않고 에세이를 썼다가 나중에 한 권으로 묶는 과정에서 일종의 후일담이랄까, 어떤 제안으로 이 글을 쓰게 됐는지, 그 당시 상황은 어땠는지, 어떤 생각으로 썼는지 덧붙이고 싶은 내용을 덧글 형식으로 쓴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이 부분을 읽을 때가 가장 재밌어서 키득키득 소리 내어 웃을 정도였다.


P.15 '지루해? 그럼 제가 한번…'

독창적인 이야기를 만들고 싶은 마음은 늘 한결같지만 다른 이의 손으로 빚어진 영상과 문장들로부터 영향을 받는 것도 사실입니다. 앞으로도 그럴 거고요. 가능하면, 그것들을 모두 담아내면서도 뭔가 줄 것이 더 있는 그런 소설을 쓰고 싶습니다. 그렇게 저를 키울 자유는 저 자신에게 있으니까요.

덧. 이 글은 『오듀본의 기도』가 출간되기 전 신초 미스터리 클럽상을 수상하고 나서 바로 쓴 에세이입니다. 처음 받은 원고 청탁이다보니, 이 에세이를 제대로 쓰지 못하면 다음부턴 전화 한 통 없을 거라는 생각에 나름의 취향을 드러내려고 애썼습니다. 그 후로도 에세이를 쓸 때는 꼭 저만의 취향을 담아야 한다는 강박이 있습니다!


P.76 '원숭이 때문에 얼굴이 빨개져'

덧. 어느 날 센다이에 온 친한 기자 한 분이 선물을 가져왔다며 큰 상자와 작은 상자를 내놓더니, 둘 중 하나를 고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물었죠. "어느 게 좋은 겁니까?" 겉만 크고 속이 빈 것보다는 작지만 실속 있는 것이 좋겠다 싶어, 저는 작은 상자를 골랐습니다. 그랬더니 열고, 열고, 또 열어도 작은 상자들이 계속 나오는 거 아니겠습니까. 이게 대체 뭔가 하면서 계속 열다가 마침내 제일 작은 상자를 열었더니 '에세이 의뢰'가 들어 있지 뭡니까. 당시 에세이는 무조건 사양할 작정이었는데 이것 때문에 웃음이 터져, 승락했습니다. 그것이 이 에세이를 쓰게 된 사연입니다. 


에세이는 소설과 달리 창조해서 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실제로 보고 체험한 일에 대한 마음을 쓰는 것이다. 이사카 코타로의 에세이는 그게 무엇인지 잘 드러나 있다. 소소한 일상도 진심으로 대하는 법들이 가득한 이 책은 남들한테는 중요하지 않은 일에 신경을 쓰고, 작은 일에도 나다운 게 뭘까 골똘하게 생각하고, 잘해보겠다고 일을 벌였다가 흐지부지되고 만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다.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저자의 아버지에 대한 에피소드다. 캐러멜 콘에 들어 있는 땅콩의 양이 포장지에 나온 이미지와 다르다며 '모든 소비자를 위해 싸우겠다'고 제조사에 항의 전화를 한다거나, 어딜 가나 주머니에 개 사료를 넣고 다닌다거나, '개의 코가 촉촉이 젖어 있는지의 여부는 건강의 척도'라면서 코가 바싹 마른 개를 보면 손가락에 침을 묻혀 발라준다거나 하는 것들. 크고 대단한 사건이 아니라 소소한 위안을 주는 이야기들이 담겨 있어서 이 책을 읽다 보면 세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넓고 사람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착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의 글 속에 담긴 따뜻한 인생관을 보면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이만큼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살 수 있다면 참 행복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P.116-117 '나그네 비둘기'

생각해보면 도라에몽이 없었으면 저는 나그네 비둘기의 존재를 몰랐을 겁니다. 그 말은 결국 나그네 비둘기가 등장하는 소설도 쓰지 않았을 것이고, 그러면 미스터리 작가가 되지 않았을지도 모르고요. 그런 의미에서 정말 『도라에몽』은 저에게 소중한 만화라 할 수 있죠. (중략) 만약 자식이 생기면 그 아이에게 읽히기 위해서라도, 그리고 제가 생각날 때마다 읽기 위해서라도 얼른 『도라에몽』 전집을 갖춰놔야겠습니다. 이것이 지금 제일 하고픈 일입니다. 아! 그런데 전집을 수납할 공간이 없네요. '도라에몽, 내게 넓은 방과 큰 책장을 보내줘.'


P.139-140 '개 코에 침 바르기'

아버지의 바지 주머니에는 늘 개 사료가 들어 있습니다. 손수건은 없어도 개 사료는 상비합니다. 캔에 든 질척한 것이 아니라 건조시킨 과자처럼 생긴 것들인데 봉투나 상자에 넣지 않고 그대로 주머니에 넣고 답니다. 대체 그 옷을 누가 어떻게 빠는지, 잔돈과 헷갈려 개 사료를 내미는 일은 없는지…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지만, 아무튼 아버지는 그런 식으로 개 사료를 갖고 다니다가 길에서 개를 만났다 하면 어이! 인사를 하고 얼른 주머니에서 사료를 꺼냅니다.

(중략) 그리고 '개의 코가 촉촉히 젖어 있는지의 여부는 건강의 척도'라면서 코가 바싹 마른 개를 보면 "얘야, 너 괜찮니?" 하며 손가락에 침을 묻혀 개의 코에 발라줍니다. 옆에서 보면 본말이 전도된 건 아닌가 싶지만 그 역시 신경 쓰지 않습니다. 얼마 전에는 길에서 만난 어린아이의 코에도 침을 발라주는 장면도 목격했습니다. 그 아기는 할아버지가 자기한테 무슨 짓을 하는지 몰라 멍하니 눈만 깜빡이고 있었습니다. 


누군가는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이렇게 신변잡기 같은 글을 굳이 한 권의 책으로 묶어낼 필요가 있었을까? 등단 10주년 기념? 팬 서비스 차원?’ 이사카 코타로 역시 10주년이라는 타이밍은 구실이지만, 그것을 빼면 에세이집을 낼 마음이 들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모은 에세이를 다시 읽다가 자신이 얼마나 평범한 (자극 없는) 날들을 보내왔는지 알게 되었고 (당연한 일이지만) 매번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구나, 반성했다고.


물론 이사카 코타로의 팬이라면 그런 이유만으로도 충분한 책이다. 이사카 코타로가 추천하는 책과 영화, 음악들이 중간중간 언급돼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의 취향을 훔쳐보는 재미도 있고, 작가가 어떤 계기로 혹은 어떤 생각으로 작품을 쓰게 되었는지 집필 과정에 대한 이야기도 담겨 있어서 작품을 통해서만 보여지는 작가의 단면을 좀 더 확장시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P.252

또 하나는 후반부에 등장인물이 말하는 ‘오토매틱 레버(자동변속 기어-옮긴이)’ 운운하는 대사에 대한 기억입니다. 그 대사는, 당시 저 자신이 매일 육아와 글작업에 정신이 없어 조금이라도 다음 일을 떠올릴라치면 아예 다 때려치우고 싶어졌고, 또 누군가 저한테 ‘너무 부담 갖지 말고 그날그날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다보면 앞으로 나갈 수 있지 않겠느냐’는 말을 해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기 때문에 튀어나온 말이었습니다. 부끄럽지만, 지금도 가끔 정신적으로 패닉에 빠질 지경이 되면 이 대사를 떠올리며 마음을 가라앉힙니다. 어떻게 생각하실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의미에서 저한테는 소중한 단편입니다.


책에서 어렵고 무겁고 진지한 의미를 찾고 싶다면, 책을 읽는 시간의 가치를 따진다면, 나는 이 책을 추천하지 않는다. 조금은 가벼워질 필요가 있을 때, 모든 일이 시시하고 따분하게 느껴지거나 혹은 기운이 쭉 빠진 어느 날, 따뜻한 우롱차 한 잔처럼 권하고 싶은 산문집이다.


덧. 이사카 코타로의 소설을 좋아하는 팬이라면 당연히 좋을 책이지만, 나처럼 『그것도 괜찮겠네』를 통해 그의 팬이 되고 소설을 찾아 읽게 되는 독자도 분명 있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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