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는 예술이다 - 가장 우아한 반려동물, 인간의 화폭을 점령하다
데즈먼드 모리스 지음, 이한음 옮김 / 은행나무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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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나왔을 때 단연코 눈에 띈 것은 책 표지 때문이다. 고양이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무척 귀여운 표지에 눈이 꽂히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이 고양이는 내가 키우는(?) 아니, 모시는 냥 님과 매우 닮으신 게 아닌가. 그럼에도, 고양이를 다룬 그렇고 그런 수많은 책 중의 하나이리라 생각하고는, 책 표지를 즐겁게 바라보며, 고 녀석 참 귀엽게 생겼네 하고  웃고 넘어가려고 했다. 그런데 책 저자를 보니, 어라? ‘데즈먼드 모리스’ 아닌가. 데즈먼드 모리스라면, <털 없는 원숭이>라는 매우 흥미진진한 책의 저자가 아니던가? 나는 저자를 믿고, 이 책을 읽어보기로 결정했다.

저자의 이름을 보니, 이 책은 아마도 고양이 관련 예술 작품을 해박하게 살펴보지 않을까 기대가 되었다. 실제로 이 책의 부제는 ‘가장 우아한 반려동물, 인간의 화폭을 점령하다’이다. 그렇다면 이 책 표지로 쓰인 저 귀여운 고양이 그림 또한 어떤 예술작품일 것이리라. 책을 받아들고는 전체적으로 넘겨보다가, 표지로 쓰인 그림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림과 관련한 정보를 읽다가 깜짝 놀랐다. 그림만 보면 유럽 어느 화가의 작품이려니 싶은데, 웬걸 일본 화가의 작품이다. ‘가와이 도쿠히로’의 ‘길든 고양이의 환상’이라는 작품으로 제작년도는 2006년이다.



가와이 도쿠히로, '길든 고양이의 환상', 2006



데즈먼드 모리스는 이 작품에서 동양의 미술 전통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며 매우 특이한 작품이라고 말한다. ‘길든 고양이의 환상’은 고양이 품종부터 일본 전통에서 어긋난다. 가운데를 차지한 녀석은 스코티시폴드 종으로 그 자체가 유럽적이다. 화가는 이 그림을 “세상의 왕이 되고 싶은 고양이의 영원한 만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설명했단다. 저자는 이 그림이 고양이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공감할 만한, 고양이의 품성을 잘 나타낸다고 말한다. 개는 주인에게 복종하지만, 고양이는 복종을 거부한다. ‘사람은 개를 소유하지만 그 사람은 고양이가 소유한다’(244쪽)는 말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작품이라는 것이다. 고양이의 거만하고 독립적인 정신을 동화 형태로 보여주는 독특한 그림이라고 평가한다. 고양이 주인으로서, 아니 집사로서 매우 공감 가는 설명이다.

이 책은 이렇듯 아주 오래전, 그러니까 구석기시대 벽화부터 시작해서 중세, 18~19세기, 현대에 이르기까지 고양이가 담긴 여러 나라의 예술 작품을 바탕으로 고양이와 인류의 관계를 살펴본다. 전통 회화만이 아니라, 중세의 동물우화, 거리 미술인 그라피티에서 현대의 만화, 남아메리카 부족의 문화와 아시아의 수묵화, 일본의 우키요에까지 장르와 지역, 시대를 가리지 않는다. 냥덕후들에게는 그야말로 읽는 내내 미소가 떠나지 않을, 흥미진진한 책이다.

그러는 한편, 고양이는 어쩌다 박해 받는 존재가 되었으며, 검은 고양이는 왜 유독 불길한 이미지로 그려지는지, 그런 어두운 이미지에서 또 다시 어떻게 사랑받는 존재가 되었는지,  인류에게 고양이가 어떤 의미였는지도 세밀하게 살펴본다. 이를테면 고대 그리스에서 고양이는 설치류를 잡는 기특한 녀석으로 사랑 받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인기를 잃어버리는데, 그리스 신화에서 고양이는 어둠과 마녀들의 여신인 헤카테와 관련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양이는 박해받는 기나긴 역사의 초창기부터 이렇듯 불운하게 연계되어 있었다. 마녀들과 친숙한 존재이자 악의 화신이라고 말이다.

그런데 로마군 병사들은 고양이를 행운의 동물로 여겨서 데리고 다녔다. 들끓는 쥐와 생쥐를 잡아먹으면서 번성하던 야생 고양이들 말고 애완용으로 길러지는 고양이도 많았다고 한다. 수녀원과 수도원에서 특히 그랬는데, 6세기에는 교황도 고양이를 길렀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가 고양이를 매우 아꼈는데, 그의 전기를 쓴 부제 요한네스 히모니데스에 따르면 ‘고양이를 쓰다듬는 일을 가장 좋아하셨다.’할 정도이다. 예언자 무함마드도 고양이를 무척 사랑해서 옷소매를 깔고 자던 고양이를 깨우지 않으려고 기도하러 갈 때면 소매를 잘라냈다고 한다. 이런 까닭으로 코란에 고양이는 순결한 동물로 그려지며, 무슬림 세계가 초기에 고양이에게 애착을 보인 것이 나중에 수 세기 동안 기독교 교회가 고양이를 증오하게 된 숨은 요인 중 하나가 되었으리라고 저자는 추측한다.

중세가 저물 무렵 고양이에게 본격적으로 악마 숭배자들의 사악한 친구라는 꼬리표가 붙게 되는데, 이 견해는 널리 퍼지면서 수 세기 동안 굳어졌다. 그즈음 예술 작품에서는 흔히 마녀의 친구로서 고양이가 등장한다. 데즈먼드 모리스는 고양이를 악마와 관련지은 것을 몇 가지로 정리한다. 고양이는 고대 이집트에서 신성시된 존재였다. 때문에 고양이를 기독교에 반하는 이교도에게 중요한 존재라고 여기게 되었다. 또한 고양이는 집에서 키울 때조차도 고집스럽게 독립심을 간직했는데, 그래서 고양이는 동물계에서도 이단적인 존재가 되었다. 더욱이 고양이는 보통 새까맸고, 그런 까닭에 사람들은 고양이를 죽음과 연관 지었다. 또 이교에서는 검은 고양이가 행운을 가져온다고 여겼는데, 이는 당연히 기독교인에게는 나쁘게 보였다. 게다가 야행성인 고양이가 어두운 밤에 돌아다니면서 울부짖는 소리는 당시 사람들에게 악마가 깃들어서 내는 섬뜩한 소음으로 들렸다. 이런 모든 요인들이 불합리하게 작용함으로써 고양이는 악마와 한 통속이 틀림없다고 여겨지게 된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18세기에 접어들면서 고양이는 더 이상 박해받지 않았다. 마네, 모네, 르누아르, 고갱, 마티스, 파울 클레, 피카소, 호안 미로 등 여러 거장들이 고양이를 직접 기르면서 고양이의 매력을 담뿍 담아낸 그림들을 선보였고 사람들의 눈길을 끌게 된다. 이 책에서 처음 접한 그림 가운데 파울 클레의 ‘신성한 고양이의 산(Der Berg der heiligen Katze, 1923)’과 호안 미로의 ‘머리 하얀 고양이(Tete Le Chat Blanc, 1927)’나 ‘작은 고양이(Le Petit Chat, 1951)’와 같은 그림은 소장하고 싶은 생각이 들 만큼 마음에 쏙 들었다. 루이스 웨인(Louis Wain)의 고양이 그림 또한 그렇다. 앤디 워홀이 자신의 고양이 그림들을 엮은 <샘이라는 이름의 고양이 스물다섯 마리와 파란 야옹이 한 마리>라는 작은 책자는 자비로 190부만 한정판으로 찍어서 가까운 친구들에게 선물하는 용도로 쓰였다고 한다. 그가 세상을 떠난 다음 해인 1988년에야 새로 찍어서 서점에서 판매했다는데, 이 책을 구하고 싶어서 찾아보니 절판이구나. 허허허.



Paul Klee, 'Der Berg der heiligen Katze', 1923



Joan Miro, 'Tete Le Chat Blanc', 1927



Joan Miro, 'Le Petit Chat', 1951



Louis Wain, 'Electric Cat'


 Andy Warhol, '25 Cats Name Sam and One Blue Pussy', 1954



이렇듯 이 책은 나처럼 고양이를 좋아하는 사람은 한 번 더 고양이에 대한 애정이 샘솟게 해주며, 꼭 그렇지 않은 사람이더라도 고양이를 그린 예술 작품을 통해 인류와 고양이의 관계를 흥미진진하게 읽어나갈 수 있다. 무엇보다 <고양이는 예술이다>를 읽노라면, 고양이는 그저 고양이일 뿐인데, 고양이에게 때로는 좋은 의미를, 또 때로는 나쁜 의미를 덧붙인 것은 결국 인간. 인간의 필요에 따라 고양이의 목숨이 좌지우지된 역사가 너무나도 많았음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인류 역사가 지속되는 한 고양이의 지위가 인간의 이기에 따라 또 어떻게 달라질지 알 수는 없지만, 그저 고양이가 또 다시 박해받는 존재가 되어 학대당하거나 목숨을 잃는 잔혹한 역사만은 되풀이 되지 않기를 조용히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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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을 행복하게 보내는 법 중 하나는, 금요일 오전에 책을 주문하는 것이다. 그러면, 퇴근하고 집에 갔을 때 책이 나를 기다리거나, 운이 좋다면 내가 집에 먼저 도착해서 책이 오는 순간을 직접 맞이할 수 있다. 한 달에 두세 번 금요일마다 이렇게 책을 사지 않고는 못 배긴다. 생각해 보니 나는 책을 읽는 순간만큼이나, 책을 기다리는 순간, 그리고 책을 받아들고 처음 그 책과 서로 인사를 나누는, 그 순간을 무척이나 사랑하는 것 같다. 주말을 앞둔 금요일 저녁 새 책과의 만남은 언제나 행복 그 자체이다. 물론, 그 덕분에 미처 다 읽지 못한 책들이 나날이 책장에 쌓여가기는 한다.

지난주 금요일에는 도리스 레싱의 <19호실로 가다>를 주문했다. 사 둔 책이 많아서 이번 달은 책을 사지 말아야지, 굳게 결심했지만 결국 굴복하고 말았다. 퇴근하니 책이 나보다 먼저 집에 와 있었고 나는 기쁜 마음으로 알라딘 상자를 열었다. 다섯 권을 주문했는데, 그중에 레싱의 단편집을 가장 먼저 펼쳐들었다. 그때 나는 이탈로 스베보의 <제노의 의식>을 읽던 중이었는데, 제노 그 양반을 잠시 쉬게 하고 레싱의 단편집에서 첫 번째 작품 「최종 후보명단에서 하나 빼기」를 읽어 나갔다. 그리고 잠시 뒤 나는 여러 차례 감탄을 하기 시작했다.

하, 도리스 레싱, 이 사람 대체……. 어쩜 이런 소설을 쓸 수 있지? 첫 번째 단편을 몇 장 읽다 보니 문득, 레싱 주변에 찌질한 남자가 많았거나, 아니면 그런 이들을 관찰할 기회가 많았거나, 레싱이 그런 남자들의 심리를 꿰뚫어보는 대단한 눈을 지녔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이 세상에 찌질한 남자들이 너무도 많아서 그녀가 살면서 느낀 것을 글로 적으면 이렇게 되는 것일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최종 후보명단에서 하나 빼기」에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찌질하기 짝이 없는 남자가 등장한다. 그의 이름은 ‘그레이엄 스펜스’. 한때는 글도 좀 끼적거린, 작가라고 불리기도 한 그 남자는 이제는 자신의 작품을 쓰기보다는 라디오와 텔레비전과 관련된 일을 하거나 다른 사람들의 책에 대한 서평을 쓰면서 살아간다. ‘다른 사람들의 재능으로 돈을 버는 사람’(18쪽)이 된 것이다(레싱의 이런 표현에 감탄했다).

그런데 그레이엄은 어느 파티에서 우연히 바버라 콜스를 보게 되고 그녀를 욕망하게 된다. 그런데 그 욕망은 사실 사랑도 뭣도 아니다. 단지 호기심 또는 자신의 남자로서의 능력이랄까 이런 것을 시험해 보고자 하는 비뚤어진 욕망일 뿐이다. 그가 애초에 그녀에게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순전히 누군가가 "저 여자가 존슨의 새 여자야"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존슨이 바버라에게서 과연 무엇을 보았는지 궁금했던 것이다. 또는 권태로운 결혼생활에서 잠시 일탈해보고 싶은 하나의 탈출구 같은 대상이랄까. 도리스 레싱은 그레이엄 스펜서의 결혼생활을 짧게 묘사하면서도 ‘결혼’이라는 제도의 맹점을 통렬하게 까발린다.



그는 결혼생활 20년째였다. 처음에는 폭풍처럼 고통스럽고 비극적이었다. 헤어짐, 배신, 그리고 달콤한 화해로 가득했다. 적어도 10년이 흐른 뒤에야 그는 마음과 오감으로 그토록 많은 놀라운 일들을 겪으며 살아낸 이 결혼생활이 전혀 특별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가 아는 사람들 대부분의 결혼생활이, 그것이 초혼이든 재혼이든 세 번째 결혼이든 상관없이, 그의 결혼생활과 똑같았다. 젊은 여자와의 진지한 연애조차 전형적이었다. (<19호실로 가다>, 「최종 후보명단에서 하나 빼기」, 17쪽)


바버라 콜스에게 접근할 기회만을 엿보던 그는 마침내 그녀를 인터뷰하게 되고, 그때부터 이 남자의 뻔뻔하기 짝이 없는 진상 짓은 놀랍도록 생생하게 펼쳐진다. 그의 참을 수 없는 찌질함에 욕과 웃음이 여러 차례 터져 나온다. 그레이엄은 인터뷰 대상자인 바버라를 육체적으로 소유할 생각에 불타서 어떻게 하면 그녀를 자기 권력 아래 마음대로 부릴 것인가에만 몰두한다. 바버라가 제안하는 레스토랑도 무시하고, 멋대로 자기가 원하는 장소로 그녀를 끌고 가며, 그녀가 원하지도 않는데, 술을 마시면서 인터뷰를 어떤 식으로 할 것이라는 둥 시종일관 자신이 ‘주도권’을 잡으려고 애쓴다. 혹시라도 바버라가 주도권을 잡는 듯하거나 자신의 뜻과는 달리 그녀가 지적이고 차분한 모습을 보이면 속으로 온갖 욕을 하면서 그녀를 깎아내리지 못해 안달이다. 그렇게 해야만 자신이 둘 사이의 권력 관계에서 우위를 점하게 될 테니까 말이다.

방송국에서 인터뷰도 마치고 볼일을 다 봤으면 이제 헤어져서 가야 할 텐데, 이 집요한 남자는 자신의 목적(!)을 이룰 때까지(그러니까 바버라를 침대로 끌고 가기 전까지)는 떨어지지 않을 기세다. 그리하여 마침내 ‘차 한 잔 대접’하라는 부탁을 가장한 강요 끝에 그레이엄은 바버라의 집까지 가는데 성공한다. 그 다음부터 벌어지는 일들은 정말 처절한 블랙 코미디 한 편을 보는 듯하다. 그레이엄의 시선으로 그려지는 바버라는 줄곧 차분하다. 일로 만난 상대를 예의에 어긋나지 않게 대하고자 인내하면서 노력한다. 그리고 그런 차가운, 철벽을 두른 태도에 그레이엄은 혼자 신났다가, 화를 냈다가, 증오하다가 등등 북 치고 장구 치고 난리도 아니다. 그 꼬락서니가 어찌나 가관인지 혀를 내두르게 된다.

결국 자신의 목적을 달성(?)한 듯 보이는 그레이엄- 그러나 사실 이 작품을 읽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렇게 느끼겠지만 그는 완벽하게 바버라에게 패배하고 만다. 그 까닭은 바버라의 태도에서 기인한다. 철저한 무시. 일을 위해 만난 상대로서 배려는 해주지만, 그 이상은 허락지 않는, 감정적으로 그와 전혀 얽히지 않는 태도. 한 치의 마음속 공간도 허락하지 않는 냉담한 무시로서 상대에게 씻을 수 없는 굴욕감을 안겨주는 것이다. 바버라가 자기 뜻대로 되지 않을 때 그레이엄은 ‘헤픈 년, 멍청한 암소, 건방진 년, 매춘부’ 등등 온갖 욕을 하면서 그녀를 증오한다. 이토록 찌질할 수가! 그럼에도 바버라는 꿈쩍하지 않는다. 그저 피곤하기 짝이 없는 이 진드기를 떼어버리고 싶은 생각뿐이다.

두 번째 작품인 「옥상 위의 여자」는 예전에 ‘창비세계문학단편선 영국 편’에서 ‘지붕 위의 여자’라는 제목으로 읽은 적이 있다. 이번에 한 번 더 읽었는데, 이 작품 또한 「최종 후보명단에서 하나 빼기」처럼 여자에게 시선을 보내는 남자들과 그 시선의 대상으로 존재하는 여자)가 등장한다. 뜨거운 한 여름, 지붕을 고치던 세 남자- 해리, 스탠리, 톰은 대단한 눈요깃거리를 발견한다. 건너편 건물 옥상 위에서 한 여자가 비키니 차림으로 일광욕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들은 흥분한다. 그들이 있는 곳보다 조금 낮은 건너편 건물은 옥상 위에서 그녀가 무엇을 하는지 낱낱이 엿볼 수 있다.

여자는 자그마한 빨간 팬티 하나만 아슬아슬하게 걸쳤을 뿐이다. 그들에게 다분히 도발적으로 보였으리라. 남자들은 휘파람을 불고 난리가 났다. 그런데 여자는 철저히 무반응이다. 이들은 여자의 그런 태도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다. 화들짝 놀라면서 그들의 시선을 피하는 것도 아니고, 남자들의 휘파람에 그들이 기대했을 반응-그러니까 어떤 식으로든 성적으로 여지를 주는 응답-은 더더욱 없다. 그저 철저히 남자들을 보이지 않는 사람 취급을 한다. 여자의 태도에 그들은 당황하더니 마침내 크게 분노한다. 자신들의 뜻대로 되지 않자 여자를 향해 나쁜 년 운운하면서 욕을 한다. 그 모습은 「최종 후보명단에서 하나빼기」의 그레이엄과 매우 닮았다. 그레이엄이 성적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바버라와 권력 싸움을 하듯이, 옥상 위의 남자들과 여자는 바라보는 남자와 대상으로서의 여자, 즉 시선의 권력 싸움을 벌인다.

아무렇지도 않게 지켜보는 남자와 남자의 시선에는 마땅히 어떤 식으로든 반응해야 하는 것처럼 존재하는 여자. 여자는 남자의 시선에 언제나 ‘대상’일 뿐이다. 그렇기에 남자가 시선을 주면 어떤 식으로든 반응해야 하는 존재이다. 부끄러워하거나 놀라거나 당황하거나 수줍어하거나 아니면 그들이 바라는 대로 무엇인 성적으로 질펀한 반응을 하거나. 그런데 마음대로 시선을 굴릴 권리가 있으신, 그 '대단하신' 남자들의 시선을 여자는 단칼에 무시한다. 아예 없는 사람, 존재하지 않는 취급을 한다. 이렇게 도리스 레싱의 「옥상 위의 여자」는 여성의 몸과 남성의 시선을 전면에 놓으면서 젠더와 권력 문제를 짧지만 강렬하게 표현한다.

<19호실로 가다>에는 도리스 레싱이 직접 쓴 서문이 있다. 레싱은 ‘성적인 관계는 대부분 상대보다 한발 앞서서 상대를 지배하려는 권력 게임이다. 매력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사랑, 다정한 사랑은 말할 것도 없다.’ 말한다. 「최종 후보명단에서 하나 빼기」와 「옥상 위의 여자」 이 두 작품은 바로 그런 권력 관계를 다룬다. 남자들은 자신이 권력의 위에 있다고 여기고, 마음대로 행동하지만 어느 순간 그 권력은 여자들의 태도에 따라서 뒤집어진다. 이 두 작품은 바로 그 순간을 예리하게 포착함으로써 자신들의 욕망이 어그러지고, 권력을 여자에게 빼앗긴 그들이 어떻게 분노하며 여자들을 괴롭히는지를 낱낱이 보여준다. 그녀들의 무심함과 그 남자들의 참을 수 없는 찌질함. 단 두 작품만으로도 짜릿한 통쾌함을 느낀다. <19호실로 가다>는 다 읽고 나서도 리뷰를 쓸 예정인데, 일단 두 작품만으로도 할 말이 많아서 이렇게 끼적여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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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 2018-07-13 1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소설을 읽지도 않았는데 위에 말씀하신 소설 속 그레이엄 이라는 남자 정말 극.혐이네요. 그런데... 저 그레이엄이라는 남자처럼 생각하는 남자가 어마어마하게 많다는 게 슬픈 현실.
여자가 당연히 자기에게 뭘 해줘야 한다는 (그게 반응이든 성관계든 연애든 집안일이든) 사고방식의 남자들 너무 많죠. 은연 중에 그런 태도를 보이는 남자들도 많고... 그런 찰나의 태도를 예리하게 포착해 내는 사람들이 또 소설가들인 것 같습니다.

평론 쓰는 사람들보고 ‘남의 재능으로 먹고 사는 사람‘ 진짜 일리 있네요. ㅋㅋㅋㅋ 정작 창작자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면서 가끔 자기들이 갑인양 구는 거 보면 엄청 웃겼는데. 그런 평론가들의 모습을 정말 잘 표현한 말이란 생각 듭니다.

잠자냥 2018-07-13 12:11   좋아요 1 | URL
ㅋㅋㅋ 읽다 보면 정말 욕이 막 튀어나와요. 너어어-무 찌질해서 ˝어머어머... 어쩜 좋아˝ 이런 말도 저도 모르게 막 튀어나온달까요. ㅋㅋㅋ

‘최종 후보명단에서 하나 빼기‘에는 그것 말고도 감탄할 만한 표현이 여러 번 나오는데요, 그중 하나 지금 기억나는 게 어떤 남자를 설명하면서 ‘어둠이 녹아내린 듯한 미남‘이라고 했던가... 그 비슷한 표현이 있었는데, 거기서 또 한번 캬... 했더랍니다. ㅎㅎㅎ
 
제노의 의식 대산세계문학총서 143
이탈로 스베보 지음, 한리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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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남자의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느라 읽는 데 오래 걸렸다. 자신의 병을 성찰하다가 세계의 병으로 자아를 확대하는 제노. 위기와 포기를 거듭하고, 좋아졌다 나빠졌다를 반복하는 질병과 삶의 닮은 점을 포착하는 통찰력에 감탄하게 된다. 한 사람의 인생을 정신분석적으로 그리면 이렇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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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18-07-11 16: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다른 출판사에서 나온 걸로 읽었습니다만, 좀 오래 전이라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게 아마 중역본이었던 듯합니다.
이 작품이 세계적으로 꽤 유명한 반면, 읽은지 좀 됐다고 하더라도 지금 전혀 내용을 기억하지 못하는 건, 틀림없이 제가 돌머리란 증거일 겁니다. ㅠㅠ

잠자냥 2018-07-12 09:55   좋아요 0 | URL
ㅋㅋ 아마도 스토리 자체는 기억에 남을 만한 사건이나 설정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요. ㅋㅋㅋ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고다르’는 피할 수 없는 이름이다. 영화광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나 또한 고다르의 작품을 여러 편 보았다. 고다르의 이름을 내게 각인시켜 준 사람은 수잔 손택이다. 손택은 <해석에 반대한다 Against Interpretation>와 <급진적 의지의 스타일 Styles of Radical Will>에서 여러 차례 그의 이름을 언급한다. 손택에게 고다르는 열광의 대상이었다. 손택은 고다르를 이렇게 말한다.


예술적 발전이 훨씬 개인적이지도 실제적이지도 못한 대부분의 영화감독과는 달리, 고다르의 작품은 전부 볼 만한 가치가 있다. 아니, 결국에는 전면을 다 보아야만 한다. 고다르의 예술이 갖는 가장 현대적인 한 가지 국면은 그의 작품 하나하나의 가치가 좀 더 큰 기획, 필생의 역작 한 부분들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급진적 의지의 스타일>, 「고다르」, 226쪽)


왜 고다르를 브레송과는 달리 문화의 영웅이라고 할 수 있을까.(그리고 브레송과 같이 현대 대예술가의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 이유는 바로 그의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의 분출, 극명한 모험정신, 철두철미하게 상업화되어 버린 종합예술을 마음대로 주무르는 그의 이상야릇한 개인주의에 있다. 그러나 고다르가 단순 지적인 우상 파괴자는 아니다. 그는 의식적으로 영화를 파괴하는 '파괴자'이다. (<급진적 의지의 스타일>, 「고다르」, 228쪽)


한때 나는 고다르보다 수잔 손택이라는 이름에 더 열광했었다. 그녀의 자유롭고도 깊은 사유와 글쓰기 스타일에 완전히 반했었다. 손택이 고다르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손택이 그토록 열광했던 대상인 고다르에게까지 나의 관심이 확장해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녀가 찬탄하는 고다르에게는 무엇이 있는지,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고다르의 영화를 보기 전에도 그녀의 글을 읽었고, 보고 난 뒤에도 그녀의 글을 읽는다. 고다르의 영화는 불친절하다. 그럼에도 그의 영화 가운데 몇몇 작품은 내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다. 그중 한 작품이 바로 「그녀의 생을 살다 Vivre sa vie」이다. 손택 또한 이 영화를 무척 좋아했는데, 그녀는 이 작품을 이렇게 말한다.


「그녀의 생을 살다」는 완벽한 영화로 보인다. 이 영화는 고귀하면서도 복잡한 그 무언가를 제시하고자 했으며, 완벽하게 성공한 것이다. 고다르는 아마도 ‘철학적 영화’에 관심을 갖고 있으면서 그 임무에 걸맞은 지적 능력과 재량을 소유한 오늘날의 유일한 영화감독일 것이다. (....) 고다르는 사상을 진지하게 다루기 위해서는 사상을 표현할 수 있을 새로운 영화 언어를 창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제대로 파악한 최초의 감독이다. 그는 이 발견을 「작은 병정」, 「그녀의 생을 살다」, 「기관총 부대」, 「경멸」, 「결혼한 여인」, 「알파빌」 같은 영화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실험했다. - 내 생각에는 「그녀의 생을 살다」가 가장 성공한 작품이다. (<해석에 반대한다>, 「고다르의 ‘그녀의 생을 살다’」, 310쪽)


손택처럼 내가 고다르의 영화에서 많은 것을 볼 수 있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녀처럼 무언가를 느낄 수 있기를 바라며 「그녀의 생을 살다」를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영화는 뜻밖에도 많은 것을 남긴다.





70년대나 80년대 초반의 한국 영화를 보면 「영자의 전성시대」 류의 영화들이 많았다. 산업화가 급격하게 진행되면서 여자들도 돈을 벌기 위해 도시로 떠나는 영화들. 그러나 가진 것도 배운 것도 없는 그녀들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그들 스스로 ‘몸을 팔면서’ 돈을 벌어 고향에 있는 자신의 가족들을 먹여 살리게 된다. 「영자의 전성시대」 류는 주로 그런 내용을 다루며 이런 영화들을 일컬어 ‘호스티스 영화’라고 부르기도 한다.


고다르의 「그녀의 생을 살다」는 어쩌면 ‘영자의 전성시대’ 류의 영화와 비슷하다. 하지만 그 전달 방식은 무척이나 다르다. ‘영자의 전성시대’ 류의 영화들이 관객이 주인공인 ‘영자’에 완벽하게 감정이입하거나 혹은 영화에 푹 빠져서 불쌍한 ‘영자’의 삶을 보며 눈물 콧물 흘리게 한다면 「그녀의 생을 살다」는 철저하게 주인공 ‘나나’의 삶을 관객이 그저 바라보게만 한다.


‘나나의 인생 12장’이라는 부제가 말해주듯 이 영화는 총 12장으로 이루어진다. 나나의 삶에 대해 그 어떤 설명도 친절하게 해주지 않는다. 제1장부터 불친절하다. 나나와 한 남자의 뒤통수가 나오는 장면들- 그들의 대화를 통해 관객은 나나와 그 남자의 관계, 나나의 현재 상태 등을 유추해야만 한다. 마치 카페에서 전혀 모르는 남녀의 대화를 우연히 들으며 그들의 관계와 현재의 상태를 대충 그려보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데 사실 생각해보면 우리가 누군가의 삶을 들여다본다는 것은 어쩌면 이렇게도 피상적인 모습에 그치고 마는지 모른다.


카페의 대화를 통해 관객이 알 수 있는 것은 나나는 ‘폴’이라는 이름의 이 남자를 떠나고 싶어 한다는 사실. 남자친구인가? 하려는 찰나 이 남자는 ‘남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떠나려는 이유조차 명확하지 않다. 나나의 꿈이 영화배우가 되고 싶어 한다는 것 정도? 그리고 계속되는 에피소드들을 통해 나나는 경제적인 어려움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관객에게 드러내고(그러나 무슨 이유로 경제적인 어려움에 처했는지는 또한 구체적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이런 압박을 견디다 못해 결국 나나는 매춘부의 길을 택하게 된다. 매춘부가 된 나나는 그렇다면 불행할까? 행복할까? 이조차도 명확하지 않다.


매춘부가 된 나나가 첫 번째로 맞이하는 남자가 키스를 하려고 하자 괴롭게 피하는 모습을 보면 매춘을 그녀가 그렇게 원해서 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으나, 카페에서 포주에게 자신이 매춘부가 되길 원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구구절절 쓰는 장면을 보면 나나에게 있어 ‘매춘’이란 어떻게 보면 ‘도덕적’으로 옳고 그르다는 판단을 내릴 선택의 여지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살기’위해서 ‘살아가기’위해서 해야만 하는 ‘일’과 같다는 생각을 들게 한다. 포주에게 쓰는 편지에 자신의 몸매를 설명하기 위해 카페에서 일어나 한 뼘 한 뼘 키를 재는 나나의 천진한(?)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관객 또한 매춘에 대해 ‘도덕적으로’ 옳고 그른 판단을 하기 전에 인간으로서 살아남기 위해 나나가 내린 선택에 알 수 없는 슬픔 같은 것을 느끼게 된다. 물론 이 슬픔은 질퍽거리는 슬픔이 아니라 매우 건조한 슬픔이다.


매춘부의 삶을 살기 시작한 나나는 돈을 벌고 젊은 남자의 사랑을 확인하기도 하지만, 가끔 궁금해 한다. ‘내 삶이 정말 행복한가?’ 그렇지만 그에 대해서도 딱히 어떤 설명을 하지 않는다. 나나의 움직임, 친구 이베트 혹은 낯선 노인과의 대화를 통해 유추해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냥 나는 내 삶을 살고 있을 뿐’이라는 나나의 태도. 그러니까 사실 그 누구도 ‘나나’의 선택과 ‘나나’의 삶에 대해 왈가왈부할 수는 없다.


프랑스 자연주의 소설가 에밀졸라의 「나나」와 이름이 같은 ‘나나’- 어쩌면 이 이름 안에서 관객은 ‘나나’의 삶을 대강 그려볼 수 있을지 모른다. 에밀졸라의 '나나'처럼 고다르의 ‘나나’ 역시 결국 거리의 여자로 살다 비참하게 최후를 맞는다. 하지만 여기서 ‘비참’이라는 단어는 이 영화를 보는 순간에는 떠오르지 않는다. ‘비참’이라는 단어가 떠오르는 것은 영화가 끝나고 나서다.


영화는 줄곧 건조한 카메라를 통해 관객과 등장인물 사이의 거리를 철저하게 지킴으로써 관객이 섣불리 어떤 판단도 내리지 못하게 하며 나나 역시 ‘내 삶은 내 책임이야’라는 조금은 당돌한 태도로 일관한다. 그러나 영화가 끝난 뒤 과연 나나는 그저 그녀의 삶을 살아갔을 뿐인가? 하는 생각을 들게 한다. 가진 것이라고는 젊은 육체뿐인 여자가 파리에서 살아남기 위해 내린 매춘이라는 ‘선택’은 어쩔 수 없이 내려진 강요된 선택은 아니었을까. 포주들이 하나의 ‘물건’처럼 ‘나나’를 주고받는 장면을 보면 더욱 이런 생각이 든다. ‘Vivre sa vie’라는 영화 제목은 그래서 더욱 역설적으로 슬프게 다가온다.


한편, 손택은 「그녀의 생을 살다」에서 그려진 매춘을 이렇게 표현한다. 



「그녀의 생을 살다」에서 우리는 나나가 옷 벗는 장면을 본다. 영화는 나나가 자신의 '겉', 즉 이전의 정체를 벗어던지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몇몇 에피소드에서 그녀는 창녀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얻는다. 그러나 고다르의 관심사는 매춘의 심리학도, 사회학도 아니다. 그는 인생을 구성하는 요소에서 분리되는 상황을 가리키기 위해 매춘을 가장 급진적인 은유로 택한 것이다. 인생에서 본질적인 것이 무엇인지, 불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고찰하기 위한 가혹한 시험 무대로서. (<해석에 반대한다>, 「고다르의 ‘그녀의 생을 살다’」, 304쪽)


고다르는 자유와 책임의 문제를 다룬 이 영화-에세이의 좌우명을 몽테뉴에게서 따왔다. "우리는 자신을 타인에게 빌려주며, 자신을 자신에게 주어야 한다." 물론, 창녀의 삶은 자기를 남에게 빌려주는 행위를 가리키는 가장 극단적인 은유일 것이다. (<해석에 반대한다>, 「고다르의 ‘그녀의 생을 살다’」, 306쪽)


그렇다면 이 영화를 만든 고다르는 「그녀의 생을 살다」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해석에 반대한다>의 「고다르의 ‘그녀의 생을 살다’」 맨 뒤에는 부록으로 「그녀의 생을 살다」가 파리에서 처음 개봉했을 때 고다르가 직접 작성했던 광고문구가 실려 있다. 이 문구를 보는 것 또한 독자이자, 관객으로서 무척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손택도 그러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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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기의 말들 - 안 쓰는 사람이 쓰는 사람이 되는 기적을 위하여 문장 시리즈
은유 지음 / 유유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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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고 4개월 만에 글(창작)을 썼다. 비록 더 오랜 퇴고의 과정이 기다리고 있지만 그래도 행복하다. 한동안 멈췄던 글쓰기에 다시 불을 지펴준 고마운 책. “쓰는 고통이 크면 안 쓴다. 안 쓰는 고통이 더 큰 사람은 쓴다.”(75쪽). 글을 썼으므로 행복한 나를 깨닫게 해준 고마운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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