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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수 좋은 날 - 우리 겨레 좋은 문학 8 ㅣ 우리겨레 좋은문학 8
현진건 지음, 이우범 그림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1년 12월
평점 :
절판
대학교 엠티때 어떤 선배가 내게 '사랑이 뭐라고 생각하냐?'고 물어왔다. 나의 답은 '희생'이었다. 마치 불교에서의 '보시'라는 개념과도 같이 사랑하는 이를 위해 기꺼이, 아주 행복해하며 보답없이 주는 봉사와 헌신... 아마도 고등학교 1학년때 현진건의 단편 '희생화'를 읽었던 그 느낌이 머릿속 아니, 가슴 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영상처럼 강렬한 이미지로 남아있었기에 그런 답을 하게 된게 아닐까..
'희생화'는 현진건이 1920년에 개벽을 통해 최초로 발표한 작품인데 혹평만 받았다고 한다. 난 이 작품을 읽고 코끝이 짜꾸만 아려 이렇게 기억 속에 지금까지 남겨두고 있는데 말이다.
하긴 이야기의 내용이 마치 옛날 '신파극'의 눈물을 쥐어짜게 하는 류의 것임에는 분명하다. 하지만 평소 현진건의 잘 알려진 작품들인 빈처, 술 권하는 사회, 운수 좋은 날, 정조와 약가, B사감과 러브레터등의 사실주의적이면서도 날카롭게 비꼬는 듯한 그의 작품들과 달라서 난 이 희생화 한 작품만으로 현진건이란 작가와 인간의 더 본연적인 면에서 교감할 수 있었던 것 같아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희생화는 제목부터가 왠지모를 아련한 아픔을 던져준다. 희생화는'국주'라는 16세 소년의 눈으로 십팔세의 꽃같은 처녀인 누나와, 누나와 같은 학교 동급생 남자 급장 사이의 아련하고 애타는 사랑을 수려한 문체로 엮어 나가고 있다. 이 연인은 용모도 수려하고 우등생인지라 학교내에서 나란히 남자급장, 여자급장을 맡고 있다.
둘은 시간이 지나면서 뗄레야 뗄수 없는 사이가 되어 둘이서 약혼까지 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둘 사이에 신분의 차이라는 구시대적인 벽을 넘지 못해 결국엔 헤어지게 딘다. 원인은 남자쪽 집안의 완고한 반대였고 남자를 강제로 다른 좋은 조건의 처녀와 결혼시키려 함으로써 남자는 이를 피해 멀리 떠나가게 되고 화자의 누이는 시름시름 앓다가 죽고만다.
내용을 보면 너무나도 일반적인 슬픈 사랑이야기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글 전체를 통해 소년이 바라본 누이의 사랑이 성숙해 가는 과정이 그렇게 서정적이고 순수할 수가 없다. 화자가 관찰한 누이의 행동 하나하나의 묘사를 통해 알 수 있는 누이의 심경변화, 그리고 너무나도 해맑은 누이의 사랑 그렇게 사랑하면서도 헤어져야만 하는 고통.. 모든 장면들이 책을 읽는 동안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화자의 누이인 'S'를 참 좋아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녀의 사랑이 이루어지길 얼마나 바랬는지 모른다. 하지만.. 슬프게 끝나버린 그녀의 사랑에 엄청 가슴이 아팠다.
하여간 제목처럼 애잔함을 주는 내용의 소설이었다. 여고 1학년이면 이런저런 생각도 많아지고 감수성이 풍부해지는 시기인지라 이 소설이 내게 주는 감동이나 의미도 더 컸던 것 같다. 그래서 '사랑'하면 '아름다운 희생'의 의미가 떠오르곤 했다. 그 희생이란 정말 고결하고 가치있기에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무엇보다 소중한 미덕이라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그 희생이란 단어에서 느껴지는 정감은 못견디게 슬프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