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사랑일까 - 개정판
알랭 드 보통 지음, 공경희 옮김 / 은행나무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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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올해 초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라는 책의 마력에 두어 달 가량을 미치도록 휩싸였었다. 도저히 리뷰를 쓸 자신이 없었다. (뭐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리고, 여름이 막 시작되려고 할 때, 보통씨(저자-표현이 왠지 이게 정감이 감)의 또다른 사랑이야기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한 명의 남자는 다수의 여자 무리 속에서 한 없이 약하지만, 다수의 남자 속에 있는 한 명의 여자는 강하다' 어느 낙서에 본 것 같은데, 여자와 남자를 구분짓는 말들이 정말 많다.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라는 책이 빅히트를 친 이유도, 아무래도 우리가 매일 매일 부딪히는 일상에서의 여성의 시각과 남성의 시각을 잘 설명해주고, 표현해 주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역시 그 책을 읽으면서도 내내 끄덕거리게 되고, '음.. 그 친구가 그래서 그때 그랬군..' 또는 '아.. 그러면 안되는거였구나' 라든가, '그때 이렇게 말해줄걸..' 등등의 자연스런 자아비판의 형태가 취해지길래 무서운 책이구나.. 라는 생각도 함께했던 기억이 난다.

'우리는 사랑일까'는 전작이 그러했듯이 앨리스와 에릭이라는 두 연인에 대한 사랑의 시작과 끝을 보여주는 내용이다. 보통씨의 책들은 이야기에 대한 Fact들을 나열하는 연애소설이라기 보다는, WHY와 HOW에 더 많은 부분을 할애한다. 그리고, WHY라는 부분을 상당히 깊게 파고들어서 이게 심리학 개론서인지, 철학책인지 가끔 혼동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오히려 그러한 부분이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말로는 표현되지 않았으나 당연히, '내'가 혹은 '그녀'가 어떠한 Spot에서 떠올렸을 법한 상황들을 무척이나 친절하게 머릿속의 대사들을 묘사해 준다는 점이다.

  그녀는 지난 주 국립극장에서 사뮈엘 베케트가 희곡을 쓴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보았다. 평론은 황홀했고, 연극을 본 사람들은 엄숙하지만 화려한 미사여구를 구사했기에, 앨리스는 에릭에게 표를 살 테니 가자고 권했다. 그러나 극장에 들어서기 무섭게 하품을 참기 힘들었다. 부자연스럽고 질질 끄는 대사에, 중간중간 뜸을 너무 들여서 연속성이 깨졌다. 두 부랑자의 세계에서 그녀가 공감할 수 있는 면은 하나도 없었다. 가난과 슬픔과 모순은 그녀가 피하고 싶은 것들이었다.
  1막 중간에 에릭이 팸플릿을 떨어뜨리자, 그녀는 허리를 굽혀 주우면서 그 남자를 향해 웃어 보였다. '끔찍하지 않아요?' 라는 의미로 보일 수도 있지만, 반대로 해석할 수도 있는 표정이었다. 중간 휴식시간에 앨리스는 신중하게도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다. 에릭이나 그가 초대한 은행의 세 동료와 다른 견해를 말하면 곤란하니까.
  "20세기가 낳은 연극 중 최고작으로 꼽힐거에요."
  붐비는 바 한구석에서 에릭은 진에 토닉을 따르며 조용히 말했다. <타임즈>지의 예술 난에 실린 비평처럼 권위 있는 말투였다.
  "지난 15년간 런던에서 제작된 연극 중에서는 최고가 틀림없고요."

... 중략

  더구나 2막이 시작되자, 그녀는 지루하지 않았고 실제로 공연을 즐기기 시작했다. 극장을 나설 때 그녀는 베케트가 정말 인상적이고 감동적인 작가이며, 앞으로 그의 작품을 더 봐야겠다고 거리낌없이 말했다.


앨리스와 에릭이 <고도를 기다리며> 연극을 본 상황은 사실 남자이기 때문에, 혹은 여자이기 때문에 감정의 이완이 권력을 쥔 누군가에게로 흘러갔다는 느낌은 좀 과장된 부분일 수 있다. 사실 이 부분은 그저 사랑하는 사람의 의견에 '동조'하는 지극히 당연한 방향이 될 수도 있다. 지금 현재 무척이나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충분히 공감해 줄 수 있는 '배려'일 수도 있다.

하지만, 다음은 좀 다르다.
잠시 후 앨리스가 소파 가장자리로 가서 곁에 앉아 그 남자에게 팔을 두르고, 화면을 응시하며 방송 내용에 집중하는 그를 애정 어린 눈길로 바라보았다.
  "왜 그래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런데 왜 날 보고 있어요?"
  "이유 없어요. TV에 몰입한 모습이 너무 멋있어서요."
  "그래요. 그럼 쉿. 저 회사 사람들이랑 거래해야 하니까 가만 있어요."
  "내가 방해 안 하고 조용히 키스하면 어떨까요?"
  앨리스가 장난스럽게 묻고, 미끄러져 내려와 그 남자의 입술에 쪽 입을 맞추었다.
  "앨리스, 제발 나 좀 내버려둘래요? 난 이 프로그램을 보고 싶은데, 당신이 성가시게 굴면 볼 수가 없다구요."
  "미안해요."
  "만날 자기 하고 싶은 대로만 하지 말고, 잠시라도 다른 사람 생각을 해봐요."
  "미안하다고 했어요."

남자는 공간을 '독점'하고 싶어했고, 여자는 공간을 '공유'하고 싶어했다. 물론 지극히 여성예찬론자들이 읽기에는 다소 끔찍하리만큼 무리가 있는 장면이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사랑이 시간적인 흐름을 타고 어떤 지점을 지나게 되면, 남자와 여자는 각각의 다른 곡선을 그리게 된다. 흔히들 그러한 부분을 어떻게 잘 견디느냐 혹은 잘 타협하느냐에 따라서 그들의 관계가 지속되느냐 그렇지 않느냐로 나누어지기도 한다.

남자도 여자도 서로간의 특징에 대한 '합의'를 이루어내면, 그러한 것들을 커뮤니케이션이라는 완전 좋은 인간의 도구를 통해서 해결을 해야한다. 대화가 없으면 이미 관계는 명목상 유지일 뿐이다. '밥 먹었냐,', '내일 뭐할까?'는 대화가 아니다. 좀 더 친절한 또는 멋진 사랑을 위해서는 조금 더 많은 대화를 오랫동안 할 수 있어야 할 것 같다. 그녀를 이해하고, 나를 이해하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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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다예요 2006-09-26 1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저도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와 <우리는 사랑일까> 둘 다 벌써 예전에 읽었는데.. 도저히 솜씨있게 리뷰를 쓰기가 힘들어서 지금까지 망설이고 있었는데...이 글을 읽게 됐네요. 알랭드 보통은 정말 보통이 넘는 거 같아요, 특히 저는 <왜 나는..>을 읽고 너무 가슴이 벅차서 정말 리뷰를 못 쓰겠더라고요. ^^ 그런데 그 책을 네 명에게 선물 했는데.. 두 명은 읽지도 않는군요. 너무 어렵다고. 쿨럭ㅠㅠ

sigistory 2006-09-26 16: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천한 리뷰를 읽어주시고, 덧글까지..흑흑..감사합니다..ㅠ.ㅠ

에고.. 저도 <우리는 사랑일까>도 사실 리뷰 쓰기가 좀 쉽지 않았는데, <왜 나는..> 이건 더 못쓰겠더라구요. 언제 선선한 날 잡아서 다시 읽고 리뷰에 도전을 해볼까 합니다. ^^ 저도 <왜 나는..>을 먼저 읽은터라 소문들을 내봤는데, 어째 아직들 소식이 없네요.ㅋㅋㅋ 자신의 생각을 글로 훌륭하게 써내려가는 기술이 참 대단한 사람인 것 같습니다~ 좋은 날 되세요! ^^
 
니코스 카잔차키스 영혼의 일기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김순하 옮김 / 거송미디어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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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영혼의 일기(Report to Greco) - 니코스 카잔차키스
★★★☆☆

글쎄. 워낙 방황하고, 뭐 꿈을 찾아 떠나는 이야기와 수필에 대한 메리트를 늘 높게 추구하는 나로써는 이 책의 목차만 보고 후딱 사서 읽어버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산지도 일년이 다 되어가는데, 생각처럼 손에 잡히질 않았고, 차라리 조금 우회해서 니코스 카잔차키스를 읽는데 사전 공부겸 그에 대한 이야기들을 먼저 살짝 훔쳐볼겸 해서였다.

아.. 목차.. 목차를 보고서, 읽지 않을 수가 없는 책이다. 일단 시작부터 방황이다. 그리고, 단순한 방황도 아니고, 신을 찾아 떠나고, 그런 사람을 지탱해 주었던 사랑을 이야기한다.. 매력적이지 않은가?
 
제 1 부 유년의 기억과 뜨거웠던 청춘
제 2 부 신을 찾아서
제 3 부 나의 사랑 레노츠카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1883년 터키의 지배령에 속해 있던 그리스의 크레타섬에서 태어났다. 그의 생애와 그의 작품들은 사실 꽤 오래전부터 뭍 사람들의 입에 오르락 내리락 거렸고, 이윤기씨의 '그리스인 조르바'로 인해서 더욱 대중적이 된 작가이다. 뭐 그 덕에 나 역시도 궁금해 했던 사람이 되었고.

사실, 이 책만으로 니코스 카잔차키스를 어떠한 인물로, 어떠한 사상과 작품을 그리고 있는지 감을 잡기는 참 힘들다. 대화체로 나와 있는 문장들은 대부분 너무 문어체적인 형태를 띄는 경우가 많고, 읽어내려가다 보면 그런 부분으로 인해서 맥이 끊기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번역서가 책에 대한 가치를 좌우하는 경우가 많다고 느껴질 수 밖에 없다. 또한, 그가 겪었다는 '처절한 내부 투쟁 기록'은 그가 직접 집필한 작품에서는 어떻게 표현되고, 어떻게 캐릭터가 살아나는지는 적어도 이 책에서는 부족하다 싶을 정도로 '운'정도만 띠우고 있지 않은가하는 생각을 해본다. 자유를 찾아 떠나는 여행길도 전체적인 목정성 보다는 큰 점들만 찍혀지고 그 점들을 들여다 보려면 다시 독자가 알아서 해야하는 고달픈 부분들이 있다.

하지만, 적어도 분명 그는 오랜 세월을 신을 찾아서 헤메이며, 고통에 대한 내면의 소리를 글로써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이었고, 그렇기에 오히려 자유로운 사람이었을게다. 다시 그를 만나기 위한 여정에 조금 서운한 가이드북을 만났지만, 그래도 알아서 찾아가는 기쁨 정도는 일부러 남겨준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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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사는 즐거움
법정(法頂) 지음 / 샘터사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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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는 모습은 어떠한가. 

법정 스님의 글은 언제나 '느리'다.
한 단어, 한 줄 읽어내려갈 때마다, 숨가쁘게 읽고 착착 책장이 넘어가지는 않는다.
한 단어, 한 줄을 오래 간직하고 싶기 때문이다. 

지리산 여행을 하면서 진주로 내려가는 동안에
그리고,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 '홀로 사는 즐거움'을 읽으면서,
여전히 시공간을 넘어서는 스님의 잔잔하면서도 가슴을 채우는 이야기들로 내내 충만해졌다. 

자꾸만 비워야 한다는, 그리고 현재 자신의 모습에 충실하게 하루 하루를 살아가야 한다는,
어쩌면 작은 진리가 오랜 수양과 덕을 쌓아오신 스님을 통해서 더욱 간절하게 전해진다. 

사는 일이 너무나도 답답하고, 자꾸만 뒤쳐지는 것 같고,
무엇인가 한시라도 손에 놓고 있지 않으면 불안해 하는 우리들에게,
매번 스님의 잠언과도 같은 따뜻하고 조용한 울림은
'천천히, 하지만 채우며 버릴 줄 아는' 지혜를 말씀해 주신다. 

김규항의 블로그를 매일 들락거리면서,
법정 스님의 속세의 제자가 이 분이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생각.

※ 자주 들여다 봐야 하는 이야기들. 스님의 가르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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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하루 내 살림살이 p19

당신은 오늘 무엇을 보고, 무슨 소리를 듣고, 무엇을 먹었는가.

그리고 무슨 말을 하고 어떤 생각을 했으며 한 일이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현재의 당신이다.

그리고 당신이 쌓은 업이다.

이와 같이 순간순간 당신 자신이 당신을 만들어간다. 명심하라.

 

당신은 행복한가 p22

우리가 불행한 것은 가진 것이 적어서가 아니라 따뜻한 가슴을

잃어가기 때문이다...스스로 묻는다. 나는 행복한가, 불행한가?

더 물을 것도 없이 나는 행복의 대열에 끼고 싶지 불행의

대열에는 결코 끼고 싶지 않다. 그렇다면 내가 내 안에서 행복을

만들어야 한다. 행복은 이웃과 함께 누려야 하고 불행은 딛고

일어서야 한다. 우리는 마땅히 행복해야 한다.

 

아무것도 갖지 않은 자의 부 p32

'...아마도 당신들은 당신들이 갖고 있는 좋은 옷과 가구와 재산이

너무 많기 때문에 거기에 시간과 기운을 빼앗겨 기도하고

명상하면서 차분히 자신을 되돌아 볼 시간이 없을 것이다.

당신들이 불행한 것은 가진 재산이 당신들에게 주는 것보다도

빼앗는 것이 더 많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 세상에서 나 자신의 인간 가치를 결정짓는 것은

내가 얼마나 높은 사회적인 지위나 명예 또는 얼마나 많은 재산을

갖고 있는가가 아니다. 내가 나 자신의 영혼과 얼마나 일치되어

있는가에 의해 내 인간 가치가 매겨진다. 따라서 내가 하고 싶은

일에 열정적인 힘을 부여하는 것은 나 자신의 사람됨이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일도 이와 같다. 순간순간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으면서 산다. 문제는 어디를 향해 내딛느냐에 있다.

당신은 지금 어느 곳을 보고 한 걸음, 한 걸음 내딛고 있는가.

 

걷기 예찬 p53

걷는다는 것은 침묵을 횡단하는 것이다. 걷는 사람은 시끄러운

소리에서 벗어나기 위해 세상 밖으로 외출하는 것이다.

걷는 사람은 끊임없이 근원적인 물음에 직면한다.

'나는 어디서 왔는가? 나는 어디로 가는가? 그리고 나는 누구인가?'

 

그대는 지금 어느 곳에 있는가 p110

'혼자서 자란 아이들은 혼자 살 수밖에 없도록 길들여져 있다.

그는 혼자 있는 것이 좋았고 그렇게 훈련되어 왔다.

혼자서 자란 아이들은 결국 누구나 혼자라는 사실을 이해한다.

그래서 혼자가 되는 이런 순간에 맞닥뜨릴 것에 대비하여

미리 연습하면서 살아간다...'

 

지금 이 순간을 놓치지 마라 p125

명심하라. 지금 이 순간을 놓치지 말라. '나는 지금 이렇게 살고

있다'고 순간순간 자각하라. 한눈팔지 말고, 딴 생각하지 말고,

남의 말에 속지 말고, 스스로 살피라. 이와 같이 하는 내 말에도

얽매이지 말고 그대의 길을 가라. 이 순간을 헛되이 보내지 말라.

이런 순간들이 쌓여 한 생애를 이룬다.

 

영혼에는 무엇이 필요한가 p136

세상의 모든 행복은 남을 위한 마음에서 오고,

세상의 모든 불행은 이기심에서 온다.

하지만 이런 말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 이익에만 매달리고

지혜로운 사람은 다른 사람의 이익에 헌신한다.

그대 스스로 그 차이를 보라.

 

겨울 가고 봄이 오니 p181

하나 속에 모든 것이 있고

많은 것 속에 하나가 있으니

하나가 곧 모든 것이고

많은 그것이 곧 하나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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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 04.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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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급 좌파 - 김규항 칼럼집
김규항 지음 / 야간비행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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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보는 눈, 세상을 말하는 입 그리고, 세상을 담는 마음

'사람은 누구나 좌파로 살거나 우파로 살 자유가 있지만 중요한 건 그런 선택을 일생에 걸쳐 일상 속에서 지키고 감당할 수 있는 수준으로 한정하는 일인 것 같다. 좌파로 사는 일은 우파로 사는 일에 비할 수 없이 어려우며, 어느 시대나 좌파로 살 수 있는 인간적 소양을 가진 사람은 아주 적다. 우파는 자신의 양심을 건사하는 일만으로도 건전할 수 있지만, 좌파는 다른 이의 양심까지 지켜내야 건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의 글 서두에는 좌파로 살아가는 자신의 신념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래서, 그의 글을 읽고 있노라면, 이념과 사상이라는 테두리를 떠나서 그의 용기가 오히려 돋보일 수 밖에 없다. 좌파로 살아가기 위해서 자신이 버려야만 하는 것들 뿐만 아니라, 자신이 좌파로 살아가기 위해서 거두어 들이고 계몽시켜야 할 의무를 그는 결코 묵묵하게 혹은 조용하게 치뤄내지 않는다. 그는 목소리를 높여 늘 용기와 깨어있는 지성을 말한다.

리뷰와 조금은 상이한 이야기이지만, 나는 광고를 무척 싫어한다. TV라는 매체가 가지고 있는 유익한 점들 보다, TV가 긍정적으로 제시하고 보여주려고 하는 '집단지성'의 획일화를 싫어한다. 광고는 그 집단 지성과 획일화를 위해 그가 이야기하는 것 처럼, 지독히도 전략적인 사기다. 생산과 그 생산을 위한 인간이 중심이 되지 않는 광고는 늘 소비와 집단 최면을 향해 치닫는다. 우습게도, 골때리게도 나 역시 광고라는 큰 테두리 안의 직업군에서 일을 하고 있음에도, 광고가 가지고 있는 파워와 영향력을 잘 알고 있음에도 나는 광고를 둘러싸고 있는 집단과 직군과 직업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물론 나의 직업과 역량을 부끄러워해 본 적은 없었지만, 반대로 그것에 대한 궁극적 우상화나 어떤 대단한 직업이어서 여타의 추종을 받으면서 나 이런거 하는 사람이다.. 라면서 말해 주는 것을 많이 부끄러워 한다. 친한 친구와 선전과 광고, 광고란 무엇인가에 대해 어설프리만치 단순한 설전을 펼친 적도 있었지만, 짝다리 짚고 서 있는 내 자세로써는 글쎄. 그저 과자 한 봉지, 컴퓨터 한 대, 자동차 한 대를 팔아치우기 위해, TV로 모여드는 '멍'한 상태의 소비자를 찾아 다니는 고도의 상술일 뿐이라고 치부해 버린다.

그가 이야기한 것 처럼, 소위 자본주의의 급물살을 타게 된 90년 대 이후로 우리나라는 '프로'라는 타이틀로 광고대행사의 AE라는 전문가들로 불리우며 찬미받는 존재를 양산하고, 자본주의의 꽃으로 불리는 광고라는 노선에 그들을 선봉장으로 이끌며 만들어온 사회가 현재의 대한민국이 아닌가. 월드컵을, 아니 2002년 대한민국을 월드클래스로 만들어 준 선봉장들 역시 그들이었고, 여전히 그들 안에서도, 밖에서도 그들만의 성전을 꾸미며 짐짓 프로이며, 지식인인 양 행동하는 사람들도 그들이다.

문자상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그저, 직업이라는 커다란 테두리 안에서 적어도 광고를 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만이 화이트 칼라에, 최상위 직업군에, 미적, 예술적, 과학적, 심미적인 모든 것들을 알고 있고, 그렇게 우월하기 때문에(?) 자랑할 만한 짓을 하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라고 말하고 싶을 뿐이다.

다시 리뷰로 돌아와서,(-_-;;)

작가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의 세상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한다. 물론 작가의 각 칼럼이 게재된 때가 1999년도 부터 2001년도 경 까지이니 2006년도의 현재와는 조금 다른 상황으로 인한 다른 해석이 나올 수도 있으나, 그는 분명 통쾌하리만치 글을 잘 토해낸다.

"제가 옛날에 구사대였거든요." "구사대? 구사대가 뭐지?" "제가 옛날에 구사대였거든요." 구사대라, 회사를 구하는 대다 이건데, 어쨌든 그래서요." 30대 여자 코미디언과 40대 남자 가수는 어물쩍(방송용어로 순발력이라고 하는) 넘어간다. '구사대'라는 말을 모르는 30대 여자와 40대 남자를 어찌 생각해야 할까. 나는 당혹스럽다. 나는 '교양'에 대해 생각한다. 교양이란 무엇인가. 교양이 문화적인 지식이나 감정표현의 절제, 우아한 말과 행동 따위라는 생각은 봉건적이다...(중략).. 아마도 교양이란 '사회적인 분별력'일 것이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의 옳고 그름을 따지고 그 뜻과 관계를 파악하는 능력(반드시 자기 힘으로가 아니어도.) 그게 교양이다... - 교양 p61~64

과연 한국 영화인들은 '국민의 지지'를 받을 만한 사람들인가. 제 밥그릇이 걸린 일에는 '자신들이 놀랄 정도'로 열심인 영화인들은 남의 밥그릇에는 어떤 관심을 보였던가. 자신들의 불행을 언제나 민족이라는 이름에 호소하는 영화인들은 정작 민족이 불행할 때 어디에 있었던가...(중략).. 이번 싸움에서 한국 영화를 '민족 고유의 것'으로 해석하던 영화인들은 농민들이 신토불이를 외치며 미국쌀과 싸울 때 어떤 지지를 보냈던가. 이 나라의 유한 계급을 뺀 모든 백성들이 불행해진 구제금융 시대가 일년을 넘기고 있지만 그 동안 영화인들은 그 잘난 영화 예술로 세상의 어떤 모습을 그려냈던가.. - 염치 p89 ~92

폐업에 나선 의사들은 "이럴 바에는 개업할 돈으로 차라리 카페나 당구장을 하는 게 낫다"고 말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개업하지 말고 카페나 당구장을 하면 될 것이다. 카페나 당구장을 하는 인간은 의사보다 하등하단 건가. 자신들이 더 이상 특권층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도 여전히 특권 의식을 버리지 못하는 의사들의 이중의식은 그들의 권리주장의 공정성을 손상한다.. - 돌팔이2 p221 ~224

내 일생을 보내는 한 방법으로 이민이 등장한 건 지난 여름 어느 날 후배 녀석에게서 캐나다 벤쿠버의 무색무취한 삶 이야기를 듣고서다. 주 5일 노동으로 먹고사는 일을 걱정하지 않는다는, 집을 마련하는 데 반생을 바칠 필요가 없다는, 교육과 의료가 무료이며 도무지 세상을 갈아엎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는, 다른 이의 삶에 대해 간섭하지 않고 오염되지 않은 광활한 자연 곁에서 조용히 살아간다는, 벤쿠버의 무색무취한 삶은 이민에 대해서라면 어린 시절의 반감만 존재하던 나를 뒤흔들었다... - 이민 p253 ~256

세상을 보는 눈은 반드시 신문의 경제면을 펼쳐들고 부동산의 흐름과 주가 동향과 저축 금리를 따지며 '흐흠...'하고 손익계산을 할 수 있는 능력만은 아닐 것이다. 나를 돈독히 다스리고, 내 가족을 살피며, 내 동료와 내 주변의 지인들의 삶을 참견하고, 그리고, 더 크게는 나와 우리가 속한 공동체의 삶을 보다 합리적이고 투입에 대한 충분한 산출이 나오는 세상을 만들며 살아가는, 그런 것들을 돌보는 눈이 세상을 보는 눈이 아닐까.

30만원, 50만원, 100만원짜리 적금을 매달 부으며, 20~30년을 오로지 내 집 마련을 위한 융자 갚아나기와 아이들의 교육비로 평생 모으는 돈은 그렇게 어찌보면 허망할 수도 있는 우리의 삶은 누구나 그렇게 하니까.. 라는 핑계로 하루를 보내며 살아간다. 그렇게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커다란 의미를 부여받지 못하고 있을 때, 우파의 소신보다 어렵고 힘든 좌파를 택하였다는 그의 말이 담긴 'B급 좌파'라는 책은 오히려 반대로 세상을 보는 눈과 마음이 더 잘 보이고, 어떻게 더욱 사람 냄새가 나는 것일까. 도무지 이 사람은 너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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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와 악마 1
댄 브라운 지음, 양선아 옮김 / 북스캔(대교북스캔)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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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는 과연 우리의 삶과 미래를, 그리고 보이지 않는 다음 세상을 평안하게 해 주는 것일까. 혹은 현세를 사는데 있어서 더 나은 행복을 줄 것인가. 그렇다면 과학이 우리에게 주는 혜택은 무엇인가. 과학이 발전함에 따라 과연 신의 영역을 넘 볼 수 있는 것인가. 종교는 선이고 과학은 악인가. 많은 사람들이 종교를 쫒기 보다 과학을 따르고 믿는 것은 신을 이해하려는 것인가, 신을 모독하는 것인가..

서론 완전 길다. 하지만, 결국 읽는 내내 드는 생각은 저런 답 없는 물음 뿐이다.

다빈치코드가 미술과 오컬트에만 초점을 맞춘 블록버스터급 소설이라면, 오히려 댄브라운이 먼저 집필했던 천사와 악마는 미술사와 오컬트에 그럴 듯한 SF같은 과학에 대한 이야기를 첨가함으로써 오히려 후작보다 탄탄한 느낌을 준다.

정사(正事) 보다 야사(夜事)가 더욱 흥미진진하고 호기심을 자극하듯이, 우리는 음모론을 언젠가부터 즐거워하고 어느덧 익숙해져 있는 듯 보인다. 모든 일에는 분명 정부의 호박씨까기가 있을거라고, 모든 이야기와 결과는 결국에 누군가 거대한 조직과 그 조직의 수장이 만들어낸 서사시라고 믿고 싶어한다. 뭐 결국은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지만, 황우석의 뒷 배경에는 미국이라는 어마어마한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을거라고, 미국이 황우석을 죽인거라는 영화에서나 보던 흥미진진한, 우리가 결코 캐내기 어려운 그런 음모가 도사리고 있을 것이라고 믿는 것 처럼. 60년대 박정희가 죽였을지도 모른다는 이휘소 박사의 이야기처럼 말이다.

그래서, 천사와 악마는 그런 우리들의 심연에 자리잡고 있는 '음모론'을 살살 간지럽히는 책이다. 읽는 사람에 따라 각양 각색의 리뷰와 느낌이 나올 수 있겠지만, 어쨌든 매 Chaper마다 액션과 스릴과 '인디아나존스'식의 모험극이 펼쳐지는 이 소설은 머리가 완전 복잡하고, 완전 심심한 주말에, 잠깐이지만 완전 무언가에 미치고 싶을 때 읽기에 더 없이 좋은 오락거리가 되리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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