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표류
다치바나 다카시 지음, 박연정 옮김 / 예문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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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로 '희망'을 담은 글들을 읽게 되면(특히 아침에) 작은 사소한 일상의 변화나 느낌까지도 고맙게 느껴지는 때가 있다. 현재 상황과의 비교우위를 판단하게 되므로 당연한 이치가 되겠지만, 그래도 얻고 느끼고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은 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더군다나, 靑春이라는 멋드러진 한자에다가, 거기에다가 방황하고 떠돌아다니는 젊음을 상징하는 漂流라는 단어까지 합쳐졌으니 이 얼마나 흥미로운 이야기일까.

..라는 판단은 실수였다.

청춘표류는 이런 저런 지식인으로 유명한 작가 다치바나 다카시의 글이다. 그의 글은 글인데, '됴쿄대생은 바보가 되었는가', '나는 이런 책을 읽어왔다' 등에서 보여준 그의 가끔 독설적인 표현들 보다는 그저 '타인의 힘겨웠던 일상읽기' 정도로만 그친게 아닌가 생각된다. 대부분 30대 초반에 일본의 젊은이들의 '장인'과도 같은 진로에 대한 선택 들을 인터뷰 형식과 전기 형식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글쎄. 깊은 공감을 끌어내기에는 그들의 직업 자체가 psp, mp3p 등으로 대변되는 지금 우리 세대와 너무 다른 offline의 너무나도 동떨어진 '장인'이기 때문일까..

지루했다..-0-
왠지 제목이 조금 아깝다는 생각..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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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택트 1
칼 세이건 지음, 이상원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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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택트 - 칼 세이건
★★★★★

하늘의 별을 보면서 아주 잠깐만이라도 그저 자연의 아름다움에 빠져보지 않은 사람은 없으리라. 굳이 별자리를 술술 외워서 누군가에게 자랑하듯이 설명해 주지 않더라도, 별을 바라보고 있는 그 자체만으로도 즐겁지 않을까. 우리가  수 많은 별들 중에서, 그것도 어느 정도는 축복받은 행성에서 태어난 아주 작은 존재임을 깨닫게 되는 것 또한 말이다.

SF라는 장르를 여전히 좋아하지만, 사실 콘택트를 영화로 본 것은 일년이 채 안되었다. 즐거운 호기심을 잔뜩 유발하는 기호와 상징, 소수, 미지의 세계와 그 세계의 주인, 시간 여행, 웜홀, 블랙홀 등은 마치 상대성 이론을 수박 겉할기 식으로만 이해하게 되더라도 돌아오는 지적인(하지만 얄팍한) 포만감에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다.

몇십 광년이나 떨어진 행성에서 보내진 메시지. 문자가 아닌 우리의 지식 체계로 이해할 수 있도록 보내진 소수의 끝없는 연속. 해독을 통해 얻어진 자료들. 자료들을 토대로 만들어진 어떤 것. 그 어떤 것이 어떤 역할을 할지, 어떤 세상으로 어떻게 데려다 줄지 모르는 그래서 읽는 내내(사실 영화를 보지 않았더라면 더 즐거운 상상을 했을텐데) 손을 떼기가 쉽지 않았다.

자연과학 책을 읽다보면, 그저 얕은 지식으로 머물고 있지만, 왜그런지 어릴 때는 단 한번도 꿈 꾸어보지 못했던 과학자의 삶을 동경하게 된다. SF 소설, 영화 등을 통해서 그리 멀지 않은 미래를 그리고, 또 점차 현실화되어 가는 과정을 살면서 눈으로 직접 보고있노라면 자연에, 문명에 그리고 기술에 도전하는 인간의 존재가 참으로 대단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반대로 어느 과학자가 그랬던 것 처럼, 과학의 영역에 점점 더 깊이 들어갈 수록, 자연의 법칙을 만들어 놓은게 정말 자연적인게 아니라, 더욱 더 창조주를 믿지 않을 수가 없게 된다고 했던가. 그만큼 우주의 질서가 그렇게 많은 것들을 알고, 연구하고, 증명해 왔던 과학자들에게도 믿기 어려울 만큼 완벽하다는 사실에 경이로움을 표하기도 한다.

꽉 짜여진 스케쥴 속에서 미친듯이 달리며 지내고 있는 우리들 틈에서, 이렇게 넓고 멋진 우주속에서 우리는 작은 먼지 조차로도 보이질 않을텐데, 참 재미없게 살고 있는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현실을 버릴 이유도 없고, 그래서도 안되지만, 그래도 혼자 있는 여유로움이 즐거울 때면, 마음의 넓이를 조금씩 짜여진 틀에서 한 단계, 한 단계 위로 올라가서 먼 우주를 그려보는 것도 건강에 좋을 듯 하다.

책에는 나오지 않은 대사이지만, 영화를 통해서 남겨진 마지막 대사가 여전히 기억에 남는다. 실제로 칼세이건이 했던 말이라고 한다.

우주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넓단다. 만일 이 광활한 우주에 인간만 존재한다면 그건 엄청난 공간의 낭비지.. 우주에 우리 뿐이라면, 엄청난 공간의 낭비가 아닐까... - 칼 세이건

- 2006.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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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미쳤다고 말한 외로운 수학 천재 이야기 - 수학소설 골드바흐의 추측
아포스톨로스 독시아디스 지음, 정회성 옮김 / 생각의나무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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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읽고 나면, 수학자의 삶과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일생을 바칠 수 있는 사람도
있다는, 그래서 오히려 동경하게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품게 된다. 하나의 미스테리와 같은 구조를
소설이라는 형식을 빌려 재미있는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 때문에 즐겁게 책장을 넘기게 된다.

사람들이 미쳤다고 말한 외로운 수학 천재 이야기(제목 너무 길다..)는 부제(사실은 부제가 이 책의
타이틀이었으나, 쉽게 호기심을 끌지 못하기 때문에 생각의 나무 출판사가 '호객행위'를 위해서 제목을
변경한 듯 싶다.) '골드바흐의 추측'이라는 다른 이름을 달고 있다.

일생의 목표를 오직 단 하나만을 위해서 일생을 살아간다... 속된 말로 굳은 심지가 단단히 박힌 사람이다.
포기해야 할 시점을 모르는 것인지, 포기해서는 안된다는 의지가 강해서인지, 책속의 수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수학적인 환희와 어떤 희열이 있나보다. 솔직히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와
자꾸 비교가 되는 건, 정수론에 많은 업적을 남긴 페르마와 페르마 이후의 많은 수학자들 그리고, 결국
1994년 '악명높은' 그 정리를 앤드류 와일즈 교수가 증명해 내는 과정까지를 생생하고, 흥미롭고, 긴장감
있게 표현해 주었기 때문이 아닐까. 골드바흐의 추측은 결국 증명해 내지 못한(증명한 듯, 안한 듯 무언가
꺼름직함만 남긴) 페트로스의 실패 때문일까. 분명 무언가 서운하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가 쉽게 접해볼 수 없는 수학자의 삶을, 한가지 목표를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하고,
풀어가려는 한 인간의 삶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는 좋은 기회임은 틀림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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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불온한가 - B급 좌파 김규항, 진보의 거처를 묻다
김규항 지음 / 돌베개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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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고를 때 늘 제목과, 표지 디자인과, 내지의 깔끔한 타이포를 최우선으로 삼던 나는
언젠가부터 인터넷 서점에서 타인의 리뷰로 살짝 맛을 본 다음에야, '강추'와 비슷한 타이틀이
있어야만 책을 사고 있다.  그래서일까. 선택은 어지간해서는 틀리지 않는다.
하지만, 이 책에 대한 선택으로 인한 내 선택은 '사고'와 '글', '인간', '사는 것'을 감동으로,
흥분으로, 부끄러움으로, 분노로 만들어버려, 결국 내 학습 분량을 최고로 방대하게 해 주는
고약한 즐거움이 되어버렸다.

홍세화와 진중권이라는 기껏해야 이름 석자들만 간간히 기억하고, 몰라서는 안되는 사람이라는
미천한 호기심 때문에 '산'을 오르는 노고들을 감행했지만, 고작 이제서야(!) 김규항이라는, 그의
표현을 빌려 나를 무척이나 불편하게 만들고, 내가 무식하다는 것을 두번, 세번, 매 페이지마다
가차없이 일깨워 주었다. 하지만, 눈을 크게 뜨는 법을 이제야 알았을 뿐, 과연 그가 말하는
부끄러움과 불편함을 누구에게도 떳떳함으로 바꿀 수 있을지가 문제다.

스스로를 소시민이라 하고,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어쩔 수 없다며 '성공'의 가도를 쫒으며, 높은
빌딩의 꼭대기 그것도 펜트하우스에 있는 삼성이라는 그림을 부러워하며, 그 삼성을 움직이는
이건희라는 인물을 대단한 지식인으로 인정하며, 처세술, 경제, 경영, 마케팅 등을 끊임없이
학습하고, 몸 값을 올려 연봉을 높이고, 그래서 결국 돈을 손에 쥐기 위해서 평생을 살아야 할
걱정을 하고 있는 내게 분명 이 책은 사실 껄끄러운 책임에 틀림이 없다.

이 책은 분명 내가 가지고 있고 품고 있던 많은 것들을 부끄럽게 만든다.

하나.
이미 너무 많은 것들이 우리에게 '거저' 주어진 90년대 대학 생활에서 그저 난 노래 부르는 걸
좋아해서 민중가요 노래패에 들어갔다. 당시 나는 학생운동과 사회주의에 대해서 자뭇 진지한
학습을 진행하였고, 우러르던 한 선배의 목소리와 그의 행적을 동경했었다. 물론, 내가 아닌
숱한 무리들이 그러하였고, 우리는 늘 한배를 탄 '동지'라며 술을 마시며 대학의 사치스러움과
주어진 자유에 서글퍼했다.  수 년이 지나 같은 동아리의 후배들을 보면서, 선배들, 동기들과
나는 이야기한다. "그때 우리는 그랬는데, 요즘 애들은 왜 이래?"
- "그렇다면, 너희들은 오늘 어떻게 살고 있나." - p. 48

소식이 전해지지 않아서일지 모르겠지만, 내가 동경하던 그 선배는 지역 신문사에서 기자를
하고 있다고 한다. 결국 '그'만 살아남은 것일까. '그'만 그가 그토록 '투쟁'을 부르짖고, 수배와
도피를 일삼던, 그렇게 절실하게 투쟁을 하던 '그'만 세상을 일깨우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인가.
현재 후배에게 혀차는 소리를 하고 있는 과거와 현재가 부끄러웠다.

둘.
안다는 것은 행하는 것이라고 우리는 배워왔다. 하지만, 나이를 먹으며, 세상을 살아가면서,
각종 미디어가 쏟아내는 정보의 바다에 파묻혀 지내면서도 우리는 행하지 않는 善을 말한다.

얼마전, 무료로 기독교 대학을 운영하고 있는 친척형과 조용한 레스토랑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기독교인이 아닌 나를 기독교인'화'하려는 형의 의도를 알고 있었기에 사실 부담스러운 자리였다.
나 개인에게 있어 기독교, 예수는 사실 철지난 믿음이었다. 주변 지인들과 조금 떨어진 교인들이
보여주는 기독교와 교회의 행태는 내게 더이상 믿음의 가치를 내 자신에게 부여할 수 없는,
그저 '겉과 속'이 다른 무리들일 뿐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나와 형이 대화를 나눈지 십분이
지났을까. 너댓 무리의 교복입은 중학교 여학생들이 왁자지껄 들어왔다.
바로 우리 옆 테이블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앉자마자 그네들은 라이터를 테이블에 던지고, 담배를 함께 피우기 시작했다.
"야야! 담배 꺼. 니들 중학생 아냐? 여기 이렇게 어른이 있는데 담배를 펴도 되는거야?"
부끄러웠다. 내가 먼저 그들에게 그런 말을 꺼내지 못한 것이 부끄러웠던게 아니었다.
당시 그 상황에 처해 있는, 그 말을 꺼낸 사람이 내 일행이라는게 부끄러웠던 게다.
처절히도 비겁했으며, 내가 알고 있는 善을 행하지 못하고, 그 善을 행한 사람을 부끄러워했다.
우리가 초중고, 대학교까지 16년 넘게 배워온 '인간'이 행해야 하는 기본적인 도리와
윤리, 도덕, 용기, 이런 '좋은' 의미의 단어들은 도대체 내 어딘가에 있다는 말인가.
부끄러워했음을 나는 한동안 지독하게도 부끄러워하고 있다.

셋.
왜 일부러, 꼭, 사서 무대위에서 20분 '쇼'와 같은 결혼식을 해야 하는 것인가.
내가 언젠가 그를 축하해 주러 갔었기 때문에 '빚' 갚으러 참석한 듯한 무리들의 냉냉한 박수를
받으며, 왜 진심으로 기뻐하지 않는 무리들 속에서 쇼를 해야하는 것인가.
서른 명이 안되도, 고작 열명 남짓 모여있어도, 하루 내내 '우리'의 이야기를 하며, 이들이 있어
내가 행복한, 그녀가 행복한 그런 결혼식을 하면 왜 안되는 것인가.
다른 사람을 누르지 않고서는 일어날 수 없고, 하루 하루를 경쟁속에서 살아야 하는 이 대한민국에서
무엇하러 아이를 낳고, 고생을 하며, 가사분담, 고부갈등, 집안경제, 양육문제 등등, 정말
짧기만한 우리 인생을 왜 아이를 낳아 재미없이 살려고 하는 것일까. 어차피 아이를 낳아도 키우는데
힘들고, 남은 일생을 아이를 위해 출근하고, 퇴근하고 우리네 부모님처럼 왜 버려야 할까...
그가 키우는 아들과 딸의 이야기가 그런 나를 또 부끄럽게 만든다.
결국 나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는다는 아이 기르는 것 자체만을 두려워하며 피하려 하는 것이었다.
이상이 아닌, 현실에서 '사람'으로 커가는 모습을 바라보는게 행복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그린 상하, 좌우 선 안에서 지금 나는 어디에 위치하고 있을까.
그리고, 어느쪽이든 선택해야만 했을 4,50년대와 치열할 수 밖에 없었더 70년대의 역사속에서
나는 그가 그려봤을만한 선 안에서 어디에 위치하고 있었을까. 부끄러웠다.
상황과, 환경과, 주변 인물들과, 내 삶속에서 나의 선택이 과연 어디에 있었을까 하는 길고도 오랜
고민 자체가 부끄러웠다. 그가 알고 있는, 그가 고작해야 300페이지가 조금 넘는 이 책을 통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많은 그의 글들은 자꾸만 오히려 일부러 우리를 불편함속으로
이끌려고 하고 있다. 신기한 것은 그 불편함이 자꾸만 즐겁게 만들 것 같다는 점이다.

- "좋은 글은 사람을 불편하게 하며, 좋은 음악은 가슴이 아프다." - p. 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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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산맥 - 전10권 조정래 대하소설
조정래 지음 / 해냄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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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쓰고나니 너무 거창하게 서두를 시작한게 아닌가싶다.
거의 한달 꼬박 태백산맥의 염상진과 김범우와 하대치 들과 함께 보내고
마지막 10권을 덮는 마음이 쓸쓸하지 않을 수가 없다.

반공 표어를 만들고, 반공 포스터에 반공 서적을 읽으며 자라왔던 유년기를 그려보면서,
아픔의 근현대사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민족'이라는 말을 되뇌여본다.
다소 편파적이며 편향적이라는 리뷰도 있지만, 분명 태백산맥은 그시대를 경험하지 못했던
우리 세대에게 놓칠 수 없는 기록임에 틀림이 없다.

도서관 구석 서고에서 한강을 읽으며 안타까워하고, 내가 그자리에 있었더라면
과연 나는 당당하게 '자유민주주의'를 외칠 수 있었을까 하는 물음이 꼬리를 물었던 것 처럼,
내가 공산주의자가 되었을까, 그저 기회를 잘 타는 인간이 되었을까. 아니면,
지금처럼 여전히 무지한 백성으로만 남았을까 하는 물음이 마찬가지로 생겨나게 되었다.

나를 알려면 민족, 민족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는 거창한 수식어구가 아니더라도,
우리 부모님 세대가 겪었던, 부모님의 부모님이 겪었던 가족사가 될 수도 있는
실로 한 맺힌 이야기들. 아주 나중에 내 아들에게 언젠가 쓸쓸하게 들려줘야 할 아픈 이야기들.
끊어져서는 안될 '우리'의 이야기를 담은.

역사는 승리자의 기록이라 했던가. 몇 십년 후면 어디서도 들을 수 없게 될지 모르는
'패배자들'의 이야기들. 역사를 담은 소설에서 그들의, 우리의 이야기를 빼곡히 기억해두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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