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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사랑일까 - 개정판
알랭 드 보통 지음, 공경희 옮김 / 은행나무 / 2005년 11월
평점 :
사실, 올해 초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라는 책의 마력에 두어 달 가량을 미치도록 휩싸였었다. 도저히 리뷰를 쓸 자신이 없었다. (뭐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리고, 여름이 막 시작되려고 할 때, 보통씨(저자-표현이 왠지 이게 정감이 감)의 또다른 사랑이야기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한 명의 남자는 다수의 여자 무리 속에서 한 없이 약하지만, 다수의 남자 속에 있는 한 명의 여자는 강하다' 어느 낙서에 본 것 같은데, 여자와 남자를 구분짓는 말들이 정말 많다.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라는 책이 빅히트를 친 이유도, 아무래도 우리가 매일 매일 부딪히는 일상에서의 여성의 시각과 남성의 시각을 잘 설명해주고, 표현해 주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역시 그 책을 읽으면서도 내내 끄덕거리게 되고, '음.. 그 친구가 그래서 그때 그랬군..' 또는 '아.. 그러면 안되는거였구나' 라든가, '그때 이렇게 말해줄걸..' 등등의 자연스런 자아비판의 형태가 취해지길래 무서운 책이구나.. 라는 생각도 함께했던 기억이 난다.
'우리는 사랑일까'는 전작이 그러했듯이 앨리스와 에릭이라는 두 연인에 대한 사랑의 시작과 끝을 보여주는 내용이다. 보통씨의 책들은 이야기에 대한 Fact들을 나열하는 연애소설이라기 보다는, WHY와 HOW에 더 많은 부분을 할애한다. 그리고, WHY라는 부분을 상당히 깊게 파고들어서 이게 심리학 개론서인지, 철학책인지 가끔 혼동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오히려 그러한 부분이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말로는 표현되지 않았으나 당연히, '내'가 혹은 '그녀'가 어떠한 Spot에서 떠올렸을 법한 상황들을 무척이나 친절하게 머릿속의 대사들을 묘사해 준다는 점이다.
그녀는 지난 주 국립극장에서 사뮈엘 베케트가 희곡을 쓴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보았다. 평론은 황홀했고, 연극을 본 사람들은 엄숙하지만 화려한 미사여구를 구사했기에, 앨리스는 에릭에게 표를 살 테니 가자고 권했다. 그러나 극장에 들어서기 무섭게 하품을 참기 힘들었다. 부자연스럽고 질질 끄는 대사에, 중간중간 뜸을 너무 들여서 연속성이 깨졌다. 두 부랑자의 세계에서 그녀가 공감할 수 있는 면은 하나도 없었다. 가난과 슬픔과 모순은 그녀가 피하고 싶은 것들이었다.
1막 중간에 에릭이 팸플릿을 떨어뜨리자, 그녀는 허리를 굽혀 주우면서 그 남자를 향해 웃어 보였다. '끔찍하지 않아요?' 라는 의미로 보일 수도 있지만, 반대로 해석할 수도 있는 표정이었다. 중간 휴식시간에 앨리스는 신중하게도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다. 에릭이나 그가 초대한 은행의 세 동료와 다른 견해를 말하면 곤란하니까.
"20세기가 낳은 연극 중 최고작으로 꼽힐거에요."
붐비는 바 한구석에서 에릭은 진에 토닉을 따르며 조용히 말했다. <타임즈>지의 예술 난에 실린 비평처럼 권위 있는 말투였다.
"지난 15년간 런던에서 제작된 연극 중에서는 최고가 틀림없고요."
... 중략
더구나 2막이 시작되자, 그녀는 지루하지 않았고 실제로 공연을 즐기기 시작했다. 극장을 나설 때 그녀는 베케트가 정말 인상적이고 감동적인 작가이며, 앞으로 그의 작품을 더 봐야겠다고 거리낌없이 말했다.
앨리스와 에릭이 <고도를 기다리며> 연극을 본 상황은 사실 남자이기 때문에, 혹은 여자이기 때문에 감정의 이완이 권력을 쥔 누군가에게로 흘러갔다는 느낌은 좀 과장된 부분일 수 있다. 사실 이 부분은 그저 사랑하는 사람의 의견에 '동조'하는 지극히 당연한 방향이 될 수도 있다. 지금 현재 무척이나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충분히 공감해 줄 수 있는 '배려'일 수도 있다.
하지만, 다음은 좀 다르다.
잠시 후 앨리스가 소파 가장자리로 가서 곁에 앉아 그 남자에게 팔을 두르고, 화면을 응시하며 방송 내용에 집중하는 그를 애정 어린 눈길로 바라보았다.
"왜 그래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런데 왜 날 보고 있어요?"
"이유 없어요. TV에 몰입한 모습이 너무 멋있어서요."
"그래요. 그럼 쉿. 저 회사 사람들이랑 거래해야 하니까 가만 있어요."
"내가 방해 안 하고 조용히 키스하면 어떨까요?"
앨리스가 장난스럽게 묻고, 미끄러져 내려와 그 남자의 입술에 쪽 입을 맞추었다.
"앨리스, 제발 나 좀 내버려둘래요? 난 이 프로그램을 보고 싶은데, 당신이 성가시게 굴면 볼 수가 없다구요."
"미안해요."
"만날 자기 하고 싶은 대로만 하지 말고, 잠시라도 다른 사람 생각을 해봐요."
"미안하다고 했어요."
남자는 공간을 '독점'하고 싶어했고, 여자는 공간을 '공유'하고 싶어했다. 물론 지극히 여성예찬론자들이 읽기에는 다소 끔찍하리만큼 무리가 있는 장면이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사랑이 시간적인 흐름을 타고 어떤 지점을 지나게 되면, 남자와 여자는 각각의 다른 곡선을 그리게 된다. 흔히들 그러한 부분을 어떻게 잘 견디느냐 혹은 잘 타협하느냐에 따라서 그들의 관계가 지속되느냐 그렇지 않느냐로 나누어지기도 한다.
남자도 여자도 서로간의 특징에 대한 '합의'를 이루어내면, 그러한 것들을 커뮤니케이션이라는 완전 좋은 인간의 도구를 통해서 해결을 해야한다. 대화가 없으면 이미 관계는 명목상 유지일 뿐이다. '밥 먹었냐,', '내일 뭐할까?'는 대화가 아니다. 좀 더 친절한 또는 멋진 사랑을 위해서는 조금 더 많은 대화를 오랫동안 할 수 있어야 할 것 같다. 그녀를 이해하고, 나를 이해하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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