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르미날 2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22
에밀 졸라 지음, 박명숙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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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저 무지한 사람들에게 분노가 치밀어올랐다. 그는 그들처럼 지치지 않고 아무 때나 하고 싶은 대로 섹스를 할 수만 있다면 자신의 돈을 전부 다 줘도 아깝지 않을 것 같았다. 그들을 자기 식탁에 앉혀 꿩고기를 실컷 먹게 하고서는, 그동안 자신은 그보다 먼저 그녀들을 자빠뜨렸던 이들을 비웃으면서 산울타리 뒤에서 여자들을 마음껏 자빠뜨릴 수만 있다면! 단 하루만이라도, 그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무리 중에서도 가장 하찮은 사람이 되어 자유로운 몸으로 아내의 뺨을 때리고 이웃집 여자와 놀아날 정도로 막되게 살 수만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그는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저들에게 아낌없이 내줄 수 있을 터였다. 그의 교육과 안락한 삶, 화려한 생활, 사장으로서의 권력, 그 모든 것을! 그는 차라리 굶어죽을 수 있기를 바랐다. 그리하여 텅 빈 배가 경련을 일으켜 머리가 빙빙 돌기를 바랐다. 그러면 그의 끝 모르는 고통을 잊을 수 있지 않을까? 아!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고 짐승처럼 살면서, 가장 추하고 더러운 탄차 운반부와 밀을 도리깨질하면서 그런 삶에 만족하고 살아갈 수 있다면! (101)

다섯째 되는 날부터 에티엔은 먹을 때만 불을 켰다. 어둠 속에서는 음식이 목에 걸려 넘어가지 않았다. 그를 가장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한결같은 완벽한 어둠이 지배하는 끝없는 밤이었다. 아무리 안전한 곳에서 잠자고 배불리 빵을 먹고 따뜻하게 지내도 그 고통을 밀쳐낼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어둠이 그토록 무겁게 머릿속을 짓누른 적은 없었다. 어둠이 곧 짓눌린 채 고통받는 그의 생각 자체인 듯했다. (136)

이제 에티엔은 몇 시간이고 건초 더미 위에 누워 마냥 시간이 가기를 기다렸다. 그러는 동안 모호한 생각들이 떠오르면서 그의 마음을 어지럽혔다. 평소에는 자기가 그런 생각을 하는지도 몰랐던 것들이었다. 그것은 자신을 동료들과 다른 존재로 느끼게 하는 우월감 같은 것이었다. 배움이 점점 깊어짐에 따라 자신이 한층 더 높은 차원으로 올라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는 지금까지 자기 마음속을 이렇게 깊이 들여다본 적이 없었다. 그는 어째서 갱들을 가로지르며 광란의 질주를 벌인 이튿날 그토록 역겨움이 느껴졌는지를 자문해보았다. 하지만 차마 대답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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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체
류츠신 지음, 이현아 옮김, 고호관 감수 / 단숨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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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혁이 작품의 핵심에 있어 놀랐음. 문혁 상황을 사실적으로 그렸고 예씨가 삼체 끌어들어 끝장 내려한 제일 동기도 문혁에서 경험한 인간에 대한 환멸과 자신의 인간다운 마음의 상실이었음. 당대사 반성 통한 새 인간/문명 찾기라는 과제에 중국 본격문학과 대중문학 모두 진지하다는 사실이 인상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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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
버지니아 울프 지음 / 대흥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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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굉장히 정치하고 시적인 역작. 한 가계가 살아간 기십년을 조각조각 붙여낸 만듦새. 더욱 놀랐던 건 매 장의 앞 뒤, 때론 중간을 장식하는 계절/도시/자연/영국에 대한 조감도 묘사. 삶과 세월이란 이렇게 사소하지만 끊임없이 이어지고 때론 영원할 것만 같은 수억수조개 감각&뉘앙스로 이뤄지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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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 내 유년의 빛
베이다오 지음, 김태성 옮김 / 한길사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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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스럽고도 복합적인 작품! 아이가 느끼는 감각적 세계를 유머 있게 그린 초반부. 십대 소년의 서툴고 우스운 성장기에 문혁의 경악스러움이 더해지는 중반부. 80년 이후 가족의 흥망성쇠로 마무리. 이 작품을 쓰면서 저자 마음의 어떤 부분이 해빙되었을 것이라고 읽으면서 느꼈다. 성문이 열린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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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 내 유년의 빛
베이다오 지음, 김태성 옮김 / 한길사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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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안: 중국 문화에 익숙치 않은 독자들을 위해서 부분부분 아주 간략한 설명을 조금더 추가할 필요가 있어 보임. 좋은 작품인데, 낯설음이 문턱으로 작용하여 결국 읽히지 않는다면 너무 아까우니까. 예를 들어, 정화(정화의 원정의 그 정화)나 가산(중국인들이 집안 정원에 만들어 놓고 즐기는 가짜 산), 태호석(중국 사람들이 좋아하는 구멍 뽕뽕 난 이상하게 생긴 돌) 등은 한문 병기는 꼭 해주고, 검색하기 싫어하는 독자들을 위해 가능하다면 각주도 있으면 좋겠음. 

 


사람의 일생에서 유년기와 청소년기는 너무나 중요하다. 심지어 그다음에 오는 모든 것이 그 시기에 형성되거나 결정된다고 할 수 있다. 생명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데는 선사의 탐험처럼 깨달음의 기쁨과 슬픔이 수반된다. 멀어지는 것과 돌아오는 것이 한 가닥 길의 양 끝이라면, 멀리 갈수록 유년에 더 가까워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바로 이 최초의 동력이 나를 하늘 끝까지 날아오르게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12)

베이징 사람들이 이처럼 참기 힘들어할 때 갑자기 큰 눈이 휘날리며 도시 전체를 뒤덮었다. 큰 눈이 내리면 박하 맛이 느껴졌다. 특히 문을 나서서 처음 들이마시는 숨은 너무나 청량하고 촉촉했다. 아이들은 크게 소리를 지르면서 밖으로 뛰어나가 마스크와 장갑을 벗어던진 다음 마음껏 숨을 내쉬고 들이켰다. 그러고는 눈싸움을 하거나 눈사람을 만들었다. 질척질척한 도로가 얼음으로 얼어버리면 아이들은 그 위로 미끄럼을 타고 가다가 얼음이 끝나는 부분에서 무릎을 꿇고 탄성을 이용하여 몇 미터 더 앞으로 밀고 갔다. 이를 가리켜 우리는 "늙은이가 이불 속을 뚫고 들어간다"고 했다. (27)

이때부터 우리는 거의 해마다 전쟁연습을 했다. 진짜 실탄을 사용한 전투를 준비하는 것 같았다. 문화대혁명이 발발하던 그날, 우리는 휴지에 불을 붙이던 냄새와 첫 번째 폭죽이 터지던 소리를 떠올렸다. 문화대혁명이 방출하는 거대한 에너지와 피비린내 나는 폭력도 바로 그 또래 아이들에게서 나왔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하룻밤 사이에 어른이 되어 위장을 포기하고 장난감과 놀이들을 전부 등 뒤로 던져버렸다. (65)

한창 자라기 시작한 내 몸은 대기근이라는 압박에 시달리면서 하루 종일 안절부절못했다. 사람들은 먹는 이야기를 하면서 생존의 이치를 논하지 시작했다. 마오 주석도 이런 지시를 내렸다.
"사람들마다 음식의 적정량을 정해놓고 바쁠 때는 많이 먹고 한가할 때는 적게 먹는다. 바쁠 때는 제대로 지은 밥을 먹고 한가할 때는 죽을 먹는다. 바쁘지도 안혹 한가하지도 ㅇ낳을 때는 중간 정도로 지은 밥을 먹는다. 밥을 지을 때는 고구마나 푸성귀, 무, 콩, 토란 등을 함께 넣는다." (109, 마오주석님의 말씀이 하도 한심해서 적어 둠, 에휴~)

굶주림의 감정[굶주림의 감정??]이 우리의 삶을 물어뜯고 있었다. 부종...은 갈수록 더 보편적인 현상이 되었다. 얼굴을 마주치면 "식사했어요?"라고 묻던 것이, 이제는 "몸이 안 부었나요?"라고 물으면서 종아리를 먼저 살피게 되었다. 손가락으로 종아리를 누르면 각자의 부종 정도를 확인할 수 있었다. 어머니는 종아리를 눌러 동전을 꽂아놓아도 떨어지지 않았다. 3급이라고 했다. 이는 가장 심한 수준의 부종이었다. 사람들은 최고의 영예라도 되는 것처럼 신기해했다. (113)

유일하게 사람들을 상심하게 한 것은 가산이 사라진 것이었다. 태호석들도 한 덩이씩 거꾸로 매달려 트럭에 실리더니 연기 같은 먼지만 남기고 사라져버렸다. 그곳은 원래 우리가 숨바꼭질을 하던 최적의 장소였다. 들리는 바로는 태호석은 베이징 10대 건축물 가운데 하나인 군사박물관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트렉터가 며칠을 바쁘게 움직이더니 가산을 평지로 만들어버렸다. 그리고 그 자리에 한 줄로 미루나무가 나란히 심어졌다. 미루나무는 놀라운 속도로 자라더니 몇 년 지나지 않아 건물 3, 4층 높이까지 올라갔다. (124)

싼블라오 후퉁 1호에서 자란 아이들의 마음속에는 후퉁 건축의 아기자기함과 비가 오고 난 뒤의 물웅덩이, 초여름의 홰나무 꽃향기 그리고 저녁 무렵의 가로등이 영원히 그리운 풍경으로 남아 있다. 서양식 건물의 단순한 구조에 비해 후통의 이런 풍경에서는 평민들의 야성과 자유를 느낄 수 있었다. 여름이면 공용 수돗가에서 반라의 남녀들이 우스운 동작이나 한담으로 사람들을 웃게 했고, 아이들은 서로 쫓고 쫓기면서 뛰어놀았다. 담장 구석을 지나 작은 마당으로 들어서면 비스듬히 기울어진 집 옆에 깨진 기와와 벽돌이 잔뜩 쌓여 있었다. 그곳에는 또 다른 삶이 있었다. 조부모와 손주 3대가 한데 모여 시끌벅적하게 살면서 거친 외표 안에서 깊은 사랑을 나누고 있었다. 게다가 좌우 이웃들과도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우애와 보살핌을 나누고 있었다. (142)

‘문화대혁명‘이 터진 그해, 나는 열일곱 살이었다. 내가 다니던 베이징 제4중학은 폭풍의 중심에 있었다. 내게는 수리화... 과목의 위기가 임박한 때였다. 기말고사가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학교가 전면적인 휴교를 선포하자 나는 너무 기뻐서 펄쩍펄쩍 뛰었다. 부르주아 교육노선의 실패와 수학 및 과학 과목에 대한 열등감과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게 된 것이 너무도 반가웠던 것이다. 처음에는 문화대혁명이 일종의 광란의 축제로 다가왔다. 매일 아침 잠에서 깰 때마다 불안감을 떨칠 수 없었다. 마오 주석이 생각을 바꿀까봐 두려웠다. 그가 영원히 학교 문을 닫기로 결정하고서야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144)

독서는 공부와 아무런 관련도 없다. 독서와 공부는 별개의 일이다. 읽는다…는 행위는 교정 밖에 이고 책…은 교과서 밖에 있다. 독서는 생명의 어떤 신비한 동력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현실적인 이익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다. 하지만 독서 경험은 길을 안내하는 등불과 같아서 인생의 어두운 곳들을 환하게 비춰준다. 어둠의 끝자락에는 콩알만 한 등불이 있다. 이것이 바로 독서의 출발점이다. (169)

시대에 맞춰 앞으로 나아간 결과 가장 먼저 찾아온 대가는 굶주림이었다. 3년 곤란시기 동안 수업 중간에 쉬는 시간이 되면 모두들 모여서 하는 일이 주로 ‘정신… 회식’이었다. 당시에 유행했던 주장은 맛있는 것들은 전부 ‘소련 큰형님’이 싹 쓸어 기차로 실어갔다는 것이었다. 모두들 분노에 가득 차 주먹을 움켜쥐고 몸을 떨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그쳐야 했다. 체력을 소진한 결과는 더한 굶주림뿐이었기 때문이다. (200)

급식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학교 식당에서는 돼지를 두 마리 키웠다. 운동장에 풀어놓고 기르다 보니, 돼지들은 수업이 끝났다 하면 전교 남학생들의 추격 대상이 되었다. 돼지들은 쫓기면서 사방팔방 뛰어다녔다. 울타리도 넘고 담장도 뛰어 넘었다. 하도 뛰어서인지 피골이 상접했고 두 눈만 매섭게 빛났다. 돼지라기보다는 개에 가까웠다. 돼지의 눈으로 보면 인간들이 전부 미친 것 같았을 것이다. 종소리만 울리면 인간들은 문으로, 창문으로 쏟아져 나와 돼지에게 달려들었다. 하나같이 시퍼런 눈을 부릅뜨고 고기를 먹고야 말겠다는 신호를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200)

베이징 제4중학은 ‘귀족‘학교인 동시에 평민학교였다. 그 사이에는 일종의 분열이 내재해 있었다. 그 분열은 처음에는 그다지 뚜렷하지 않았다. 어쩌면 의도적으로 은폐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문화대혁명‘이 그 분열을 극단으로 몰고 갔고, 골이 깊게 파이고 말았다. (246)

1968년 가을, 공선대...가 장위하이를 격리시켜 조사하려 했다. ... 그는 다급한 나머지 우선 윈난 농장으로 가서 잠시 머무르다가 나중에 버마공산당 인민군에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떠나기 전에 그는 친구들에게 작별인사를 하면서 베이징은 끝내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럴 바에야 중앙정부의 손이 미치지 않는 먼 곳에 가서 자유롭게 사는 게 낫다고 했다.
1969년 봄, 장위하이는 국경을 넘어 버마공산당 인민군에 들어갔고, 그해 여름 전투에서 희생되었다. 당시 나이 겨우 스물한 살이었다. 그가 버마에서 친구들에게 보내온 몇 통의 편지는 사후에 지식청년들 사이에 널리 필사되어 유전되었다. (255)

대학입시에 낙방하자 그의 아버지가 그에게 말했다.
"학교를 다닌다는 것은 누군가의 통제를 받는 것이다. 하지만 독서와 실천은 지식을 얻을 수 있는 가장 중욯나 수업이지. 독서와 실천을 통해 배울 수 있는 권리는 네 손에 쥐어져 있다. 이런 권리는 누구도 빼앗을 수 없지. 공부를 삶의 습관으로 만들면 된다. 그것이 그 어떤 명문대학에 들어가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
첸위안카이는 아버지의 이 말을 항상 기억하고 있었다. (269)

‘아버지, 하늘에 혼령으로 계신다면 저를 꼭 이해해주시고 하고 싶은 말씀도 전부 해주세요.‘ 그날 밤 우리는 묵계에 이르렀다. 진실을 얘기하기로 한 것이다. 그 진실에 우리 자신을 해치게 되는 일이 있더라도 우리는 진실을 말해야 했다. (316)

아버지가 말했다.
"인생이란 맞이하고 보내주는 거야." (316)

1972년 설날, 온 가족이 베이징에서 한자리에 모였다. 그 자리에서 <안녕, 바이화산>...이라는 시의 초고를 꺼내 아버지에게 보여드렸다. 아버지가 당장 태워버리라고 호통을 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시 가운에 "초록색 햇빛이 틈 사이로 새어 나왔다"라는 구절이 아버지를 놀라게 했던 것이다. 나는 아버지의 눈에서 두려움을 발견했다.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하는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 다시는 내 작품을 아버지에게 보여드리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320)

나는 아버지가 되어서야 비로소 이런 폭군의식이 핏줄에서, 문화의 아주 깊은 곳에서 나온 것이라 뿌리가 튼튼하기 때문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나처럼 일탈을 좋아하는 사람도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아버지의 인생 역정을 돌아보면서 나는 내 자신의 족적을 함께 볼 수 있었다. 아버지가 걸으면 나도 걷고, 아버지가 뛰면 나도 따라 뛰는 모습이 오버랩되었다. 이런 사실이 나를 경악케 했다. (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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