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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랑에 빠졌을 때
정호승.안도현.장석남.하응백 지음 / 공감의기쁨 / 2012년 8월
평점 :
품절


 

오늘아침 모 퀴즈프로그램을 잠시 보는데 출제문제 중 오 헨리의 말이 나왔다 - 훌륭한 이야기란 겉에는 설탕 발린 쓰디쓴 알약 같은 것이다. 당의정으로 둔갑해 전달되지만 쓰디쓴 현실인식을 담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리라. 스토리, 소설을 두고 한 말이지만 시도 비슷한 게 아닐까. 시적 언어의 감동까지 고려한다면 더 응축된 언어를 써야하니 시인은 어쩌면 소설가보다 몇 배는 더 고민하고 고뇌하는 사람이어야 될 거라는 생각이 든다.

 

 

여고시절 책 강매 사건(?) 후 담임선생님에게 내 나름의 억울함과 진심어린 심정을 전달하기 위해 이상화의 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시 노트에서 옮겨 편지로 전해드렸다. 당돌했지만 그 일은 선생님에게 모종의 충격을 드렸던지,  '너, 참 그렇게 빡빡해서는 세상 살기 쉽지 않겠다'는 막막한 눈빛으로 빤히 내 눈을 뚫어져라 보시며 조근조근 훈계하시던 노처녀 선생님. 그분도 지금은 어디선가 세월의 놀빛을 따라 물들어가고 계시겠지. 일흔 넘은 엄마가 소중히 갖고 계시던 조병화, 천상병 시집도 이제는 날강날강 곰팡이 나는 누런 종이가 되었다. 언젠가 시를 좋아한 엄마가 쓴 수필(굳이 분류하자면) 한 편을 내게 주셨는데 읽다가 눈시울에 젖은 나는 같은 사건의 기억으로도 엄마의 진실과 나의 진실은 이렇게 차이가 나는구나,하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났다. 그때 이후 엄마의 문학소녀 같은 감성을 좀더 일찍 펼칠 수 있게 해드렸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보라색 펜으로 시를 옮겨적던 그 베레모 쓴 여고생과 팍팍한 현실에 묻어버린 감성을 한때는 지녔던 문학소녀, 이제는 모두 사라졌지만 아직도 헤어지지 못하는 인연의 끈처럼 활자 주변을 맴돌고 글 나부랭이를 쓰고 있는 '우리가 사랑에 빠졌을 때'는 언제였을까. 

 

 

시집 같은 모양을 한 <우리가 사랑에 빠졌을 때>는 정호승, 안도현, 장석남 시인과 평론가 하응백의 연애담이다. 삶을 사는 일, 시를 쓰는 일이 연애와 같다는 공식을 두었을 때 말이다. 나는 이 공식에 동의하는 사람이고. 이들 4명이 어떠한 시와 조응하게 되는 삶의 순간들이란 명멸하는 별빛이라기보다 백일몽처럼 떠있는 새파란 하늘의 하얀 낮달 같은 것이다. 부끄러운 듯 모습을 다 드러내지 않고 상현달 조각으로 창백한 뺨 한 쪽을 내보이던 낮달. 나는 어느 포구에서 나를 내려다 보고 있던 그 낮달의 한 쪽 눈이 감길 때까지 내 마음처럼 희뿌옇던 낮달을 뚫어져라 올려다 본 적이 있다. 순간은 내가 미처 잡지도 못하는 새 조롱하듯 달아나는데, 무수한 이야기들은 먼지 되어 날아가는데...

 

 

어쩌면 시 소개서 같기도 한 이 책의 미덕은 4인의 시인이 소박하고 맛깔나게 풀어놓은 결정적 순간들에 대한 이야기와 아픈 현실의 뒷골목 빨랫줄에 널려있는 주렁주렁한 이야기들, 문학과 시쓰기에 대한 칼날같은 이야기들, 먼저 간 불운한 시인들에 대한 안타까운 이야기를 읽다가 만나게 되는 '시의 발견'에 있다. 의외성과 친숙함이 공존하면서 특별한 방식의 시선집 같기도 한데 시를 분석하거나 자신들의 감상평을 주입하는 식이 아니라 개인적인 삶의 구절구절에서 마주한 특별한 시들을 지극히 사적인 감정으로 소개한 것이라 더욱 와닿는다. 시인들의 글이다보니 그 글 자체만으로도 충만하고 시적이다. 그런데 제목만 나온 시들이 많아, 전문을 싣진 못해도 일부라도 소개해 줬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아쉬운 부분이 있다. 제목과 시인을 적어두었다가 따로 찾아보면 미처 몰랐던 좋은 시들을 만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겠다. 참 좋았던 것은 책에 실린 흑백사진들이다. 조야하지 않고 차분하고, 여백이 있어 시적인 사진들이 잔잔한 감흥을 준다. 기시감이 드는 꿈결 같은 풍경들, 아름답기만 한 게 아니라 거칠고 투박한 결이 살아있는 사진들, 나는 그 속에 한참 머물러 있곤 했다. 요즘 성향의 사진에세이집에서는 드문 사진들이다.

 

 

 

첫번째, 정호승 편 '기다리다 지치는 게 삶이라고' 에서는 나도 몇 해 전 장생포 포경선에 올라 느낀 걸 글로 쓰며 인용했던 안도현의 시 <고래를 기다리며>가 나와 반가웠다. 이동순의 <서흥 김씨 내간>이나 박해석의 <타이탄 트럭>을 들어 가난의 문학적 힘을 말하는 장에서 그 시들을 전혀 인용하지 않아 아쉽다. 신경림의 <봄날>을 말하면서도 시를 조금 인용해 주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을. 이 시에서 아흔살 외할머니를 보며 정호승은 "사랑의 가장 중요한 본질을 희생이라고 생각"한다. "희생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희생이 바탕이 되지 않은 사랑은 사상누각에 불과하다(p33)"고. 맞는 말이지 않은가. 이기적이기만 사랑은 가짜다. 

 

 

두번째, 안도현 편 '그릴 수 없는 마음의 빛깔까지도'에서 황동규의 <방파제 끝>이라는 시가 내 마음에 들어왔다.

 

 

방파제 끝 / 황동규

 

 

언젠가 마음 더 챙기지 말고 꺼내놓을 자리는

방파제 끝이 되리.

앞에 노는 섬도 없고

헤픈 구름장도 없는 곳.

오가는 배 두어 척 제 갈 데로 가고

물자국만 잠시 눈 깜박이며 출렁이다 지워지는 곳.

동해안 어느 조그만 어항

소금기 질척한 골목을 지나

생선들 함께 모로 누워 잠든 어둑한 어물전들을 지나

바다로 나가다 걸음 멈춘 방파제

환한 그 끝.

 

 

 

이 시를 읽고 난 후 얼마 전 서해 곰섬이 보이는 해변에 갔다가 저 멀리 보이는 방파제 끝에 일부러 발 딛었다. 그 끝에 새삼 서 보고 싶었다. 낚싯대를 드리우고 앉아 있는 청년들 틈, 시뻘건 칠을 한 작은 등대를 등 뒤로 하고 서서 나는 바다끝 아니 방파제 끝을 딛고 섰다. 발 아래 잔잔한 바닷물이 참방이고 무언의 바다는 눈부신 아침 햇살을 받아 유리조각처럼 빛났다. '마음 더 챙기지 말고 꺼내놓을 자리는 방파제 끝, 환한 그 끝'이 되리. 이 시를 소개하며 안도현 시인은 황동규 시인의 언어적 절제력을 찬사한다.

 

문학공부란 무엇인가, 그것은 말과 감정을 절제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중략)

시는 자아도취의 산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

자기 자신한테 빠져들기보다는 자기 자신을 냉정하게 검증해서 거기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이 뒤따를 때

비로소 시는 제대로 된 꽃을 갖추기 시작한다.  - p84

 

 

시적 언어의 힘을 강조하는 안도현을 다음 글에서도 알 수 있다.

 

그러나 김남주를 읽고 공부하는 후배들에게 나는 한마디씩 딴지를 걸곤 한다.

올곧고 진보적인 세계관으로 무장한다고 해서 과연 누구나 김남주가 될 수 있을까 하고. 다 아는 이야기지만,

시의 감동은 시적 언어의 감동에서 온다는 것을 김남주의 시를 대할 때 간과하는 후배들을 종종 보아왔기 때문이다.

나는 김남주만큼 철저한 언어의 승부사를 알지 못한다.  - p111

 

 

 

세번째, 장석남 편 '우리의 희망이 꽃피는 절망일지라도' 에서는 정현종의 시를 소개하며 쓴 다음 인용글이 인상적이다.

 

좋은 시란 그러니까 '지금 여기서'의 시 쓰기는 피투성이 말의 현장에서 다시 은어처럼 침묵을 향해 거슬러 올라가는

힘든 여정. 그것도 말이라는 지느러미로 헤엄쳐 올라가야 하는 실로 운명적인 현장. 그것이 시 쓰기겠다! 

그러니까 말 이전에 시가 있(었)다!는 말씀. 씌어지기 전에 이미 좋은 시였다는 말씀.   - p137

 

 

마지막, 하응백 편 '우리가 사랑에 빠졌을 때' 에서는 깊은 밤 자신을 오열하게 했던 기형도의 그 불온문서 같은 시집에 대한 소개가 좋다. <빈집>과 <포도밭 묘지 . 1>을 소개하며 "그의 절망은 순수한 절망이며, 흉내 낼 수 없는, 흉내 내서는 안 되는 절망"이라고 한다.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하응백 편에서 또 언급되는 시인은 박정만과 황동규다. '다정다감하고 순수하고 여린 심성의 시인일 뿐인' 박정만은 한수산 필화사건에 얽혀 모진 고문을 당한 후 폐인이 되어 살아가던 중 1987년 여름 그에게 詩神이 찾아왔다. 접신의 경지에서 이십여 일만에 삼백여 편의 시를 쓰고 1988년 서울 올림픽의 성화가 꺼진 10월 2일 "저 광활한 우주 속으로 사라졌다". 

 

 

 

작은 연가 / 박정만

 

 

사랑이여, 보아라

꽃초롱 하나가 불을 밝힌다

꽃초롱 하나로 천리 밖까지

너와 나의 사랑을 모두 밝히고

해질녘엔 저무는 강가에 와 닿는다.

저녁 어스름 내리는 서쪽으로

유수와 같이 흘러가는 별이 보인다.

우리도 별을 하나 얻어서

꽃초롱 불 밝히듯 눈을 밝힐까.

눈 밝히고 가다가다 밤이 와

우리가 마지막 어둠이 되면

바람도 풀도 땅에 눕고

사랑아, 그러면 저 초롱을 누가 끄리.

저녁 어스름 내리는 서쪽으로

우리가 하나의 어둠이 되어

또는 물 위에 뜬 별이 되어

꽃초롱 앞세우고 가야 한다면

꽃초롱 하나로 천리 밖까지

눈 밝히고 눈 밝히고 가야 한다면.

 

 

 

 

'공식이 없는 세 가지, 인생, 사랑, 시'라는 제목의 서문에서 네 사람은 이렇게 쓴다.

 

좋은 시는 사람을 변화하게도 하고, 추억의 등불에 사로잡히게도 하고, 울분의 눈물을 반짝이게도 하고,

때로는 마음의 날카로운 칼이 되기도 한다. 이 한 권의 책이 우리 모두에게 시의 왕국으로 가는 쉬운 길잡이가

되었으면 한다.

 

 

 이 한 권의 책으로 더 깊은 시의 나라로 나아가고 안 가고는 읽는 이의 몫이지만 언급되는 시와 시인들을 메모해 뒀다가

하나씩 찾아가보는 '시 나들이길'도 이 가을에 가볼 수 있는 참 좋은 길이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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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12-10-21 1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억과 열정이 다시 돋는 리뷰네요

프레이야 2012-10-21 19:21   좋아요 0 | URL
하늘바람님의 추억과 열정이 되살아나면 좋지요. 이 가을에^^

댈러웨이 2012-10-21 14: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시로 인사동을 들락거렸으면서도 정작 천상병 시인의 찻집 귀천을 방문했던 적이 있었던가 기억이 가물가물하네요. 어머니의 그 낡은 시집을 제가 갖고 싶어요 프레이야님. 장생포, 곰섬, 그냥 이름만으로도 시어잖아요. 달리 시를 쓰지 않아도 되겠는.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내 청춘아, 시들아. 마음을 죄 흔들어 놓는 것, 그래서 못 읽겠는 것. 일요일 오후, 선선한 바람 한 자락이 그곳에서 불어오나 싶어요.


프레이야 2012-10-21 19:23   좋아요 0 | URL
저도 '귀천'을 가보진 못했어요.
우리나라 지명들은 그 자체로 시어가 되는 게 많은 것 같네요, 정말.
전 오늘오후 가까운 영화관에서 'Elles'보고 왔어요. 줄리엣 비노쉬는 어쩜 그리..^^
더 말 안 할래요.ㅎㅎ 좋더라구요 영화가.

비로그인 2012-10-21 14: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끄럽게도, 이곳에서 오랜만에 시를 읽게 되네요. 시는 자아도취의 산물이 아니라는 것, 문학공부란 말과 감정을 절제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는 것, 새삼스럽게 다시 글의 의미를 곰곰 생각해봅니다. 저도 방파제 끝, 그 환한 끝으로 가서 발을 디뎌보고 싶네요. 고운 책, 고운 리뷰 잘 들여다보고 갑니다. :)

프레이야 2012-10-21 19:29   좋아요 0 | URL
방파제 끝! 전혀 특별할 것 없는 것에서도 특별함을 발견해 시어로 조탁해 내는 시인은
특별한 유전자를 가졌을까요? ㅎㅎ 시를 쓰니 시인이다,라고 하기에는 정말..
환한 햇살을 온몸으로 받고 서서 눈을 감아봤어요.
말도 감정도 절제하는 법! 저도 새깁니다.

다크아이즈 2012-10-21 2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디너들은 시 리뷰는 잘 안 올리시던데 프레이야님 같은 분이 있어서 존경스럽습니다. 시중(?)에 나가보면 시 쓰는 사람들이 긴 글 쓰는 사람들보다 훨씬 많은데 실제로 리뷰 올라오는 것 보면 시 리뷰는 많이 없거든요. 시 쓰는 사람들은 시집을 많이 읽긴 하는데 시집 리뷰를 쓰지는 않는 것 같아요. 시 쓰는데 바쁜 것 같은... 반면, 긴 글 쓰는 사람들은 제 글을 익히기 위해서라도 남의 글을 많이 읽다 보니 자연적으로 할 말이 많은 건지...

간만에 시집 리뷰 만나 좋고, 80년대 시인 박정만을 만나게 돼서 더 좋고... 감삽니다. 프레이야님...

프레이야 2012-10-21 23:02   좋아요 0 | URL
앗 느와르님 오해가ㅠ 이 책은 시집이 아니고 시를 만난 순간들에 대한 이야기에요. 시인이 쓴 시와 삶과 사랑에 관한 에세이랍니다. 박정만 시인 좋아하시는군요. 참 불운한 시인들이 많아요. 저도 시집 리뷰는 쓴 적이 없는거 같네요. 시중ㅋ에는 웬 시인이그리 많은지ㅎㅎ

다크아이즈 2012-10-21 2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레이야님 오해 아니어요.ㅋ 시인들 또는 평론가가 쓴 연애담이란 얘기 님이 한 것 봤는데, 시에 대한 리뷰와 관계 있길래 넘 반가운 맘에 제가 그렇게 표현했어요. 제 실숩니다. ㅠ 시에 관련된 리뷰는 거의 안 올라와서 넘 흥분했나 봐요. 크~

프레이야 2012-10-22 00:07   좋아요 0 | URL
네 그렇군요.^^ 느와르님 펀안한 밤 ~~~

2012-10-22 18: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12-10-22 20:58   좋아요 0 | URL
님, 이 에세이에서 시의 세계로 더 나아갈 수 있는 기회가 될 것 같아요.
저도 잘은 모르는 아리송한 길이지만 좋은 시가 많이 소개되어 있어요.
전문적인 내용이기보다 시인들 나름의 개인적인 기억과 추억과 소회가 좋답니다.
느끼는 건 개인의 몫이지 싶어요. 날이 추워집니다. 포근한 저녁 보내세요^^

블루데이지 2012-10-24 2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책을 항상 저를 꼬옥 안고 이야기해주시는것같은 프레이야님글...
어제도 오늘도 감동~~~입니다.
내일도 부탁드려요..또 감동받을 준비 다 되어있습니다.

프레이야 2012-10-25 17:49   좋아요 0 | URL
호호~ 블루데이지님 날씨도 추워지는데 이렇게나 따스한 인사^^ 마음이 노골노골해져요.
오늘 전 작은딸 사물놀이경연대회 갔다왔는데 정말 잘하더라구요. 중학생 학교별 대회요.
그동안 연습 바짝 하더니 신명나게 즐기며 하는 모습에 감동했어요. 금상도 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