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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맹 가리와 진 세버그의 숨 가쁜 사랑
폴 세르주 카콩 지음, 백선희 옮김 / 마음산책 / 2012년 6월
평점 :
숨 가쁘게 읽어갈 생각이었다. 그러질 못했다. 가다가 쉬고 가다고 또 쉬고 숨을 골라야했다. 은유적 문장과 압축된 행간의 말도 곱씹어 소화해야 했고 이들의 생을 관통하며 탄생한 위대한 작품들(수많은 소설과 영화)이 나올 때마다 잠시 숨을 쉬어야했다. 두 사람의 일생을 교차하며 파노라마로 펼쳐지는 '하나'의 삶에 때론 한숨을 때론 격정을 느끼며 쉬어가야 했다. 로맹 가리와 진 세버그의 사랑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사랑 그 이상의 격랑으로 나를 휘감는 느낌이었다.
내가 만난 로맹 가리는 9년 전에 만났던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는다'와 에밀 아자르 라는 필명으로 문단에 종주먹을 날린 '자기 앞의 생'이 모두였다. <로맹 가리와 진 세버그의 숨 가쁜 사랑>은 그들 두 사람을 좋아하는(적어도 이름을 들어본) 사람들에게 로맹 가리의 다른 작품들과 진 세버그의 옛 영화들을 찾아볼 동기부여가 되겠다. 내게도 그러하다. 누벨바그의 아이콘 장 뤽 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의 히로인, 숏커트가 아주 잘 어울리는 발랄하고 영민한 얼굴을 한 그녀는 한 마디로 가련한 여자였다. 어쩌면 그녀 생 절정의 봄날이었던 '네 멋대로 해라'의 시절을 지나고부터 - 열심히 하는 사람도 운이 있는 사람을 못 당한다고 하더니 - 그녀는 운이 조금 부족한 경우가 아니었나싶다. 운명이다. 피할 길 없는, 슬프고도 강렬한. 그녀의 해맑은 웃음 뒤로 사뭇 먹구름이 보였던 이유를 이 책을 읽으며 알 수 있다. 내면을 흔드는 굽이치는 열정의 파도를 어떻게 다스리며 살아야 한단 말인가. 화려한 이력과 염문도 만만지않은, 자신만만하고 세심하고 교양이 풍부한 대작가와 다소 불운했지만 시대를 풍미한 아름다운 여배우가 도저한 강을 거슬러 올라가려는 열정이 이러한대.
두 사람의 사진을 아래위로 배치한 흑백 앞쪽 표지에 샛노란 뒤쪽 표지가 상큼한 이 책은 사실을 기반으로 한 소설, 일종의 전기소설로 읽힌다. 저자 폴 세르주 카콩의 플롯이나 문체, 주관적 느낌을 서술한 문장에 이르기까지, 한 권의 숨 가쁜 소설같다. 하기야 어느 누구의 삶이든 사랑이든 소설 같지 않을까. 이들의 삶과 사랑을 무어라 말할 수 있을까. 첫눈에 반해 8년의 결혼 생활과 이혼, 그후 12년 간 지속된 끊길듯 끊이지 않은 인연의 세월은 한 권의 소설 그 이상의 숙명으로 느껴졌다. 유일한 아들이 세심하게 많은 일을 해내는 아버지 가리를 회상하는 짧은 말과 진이 아들에게 유언으로 남긴 말은 혈육이 갖는 보편적 감정 이상으로 진하게 전해온다.
진이 1979년 9월 타국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경제적으로나 심정적으로나 지원과 배려의 끈을 놓지 않은 로맹 가리는 단순히 입에 권총을 물고 생을 마감한 작가로 알기엔 출생의 슬픔과 생의 수많은 이력이 예사롭지 않다. 유대인이라는 명찰을 죽을 때까지 달고 자유프랑스군에 헌신한 공로로 받았던 훈장과 외교관으로서 이룬 업적까지 자살로 인해 제 이름값을 얻지 못한, 편견과 굴욕의 세월을 다 견디고 오로지 작품 속에서 '가면의 생'을 살며 문단을 조롱한 사람. 진지함과 숭고함, 도덕적 의무에 충실하면서도 다섯 개의 필명을 가지고 노골적으로 적대적인 문단을 쥐락펴락하고 존재의 가벼움과 농담을 즐겼던 가리는 진과 마찬가지로, 아니 우리 누구나와 마찬가지로, 여러 개의 가면을 쓰고 아직 '자신을 다 표현하지 않았다는 특별한 감정(p137)'을 느낀다. '진 또한 자신의 모습을 만들어내기 위해 가면들을 선택했고 바로 그래서 그녀 역시 연기를 결코 끝내지 못했다. (p138)'
가리는 진과 부인 레슬리 사이에서 번민하면서도 열정적으로 글쓰기에 매달려 영어로 쓴 <레이디 L>의 프랑스어 번역을 감수하는데, 드골은 가리의 모든 책 중 이 책을 가장 좋아한다고 말했다. 1959년에 썼고 1963년에 프랑스어로 출간된 이 책은 레슬리에게 헌정한 것이라는데 고독하게 단독자로 살고 싶었던 가리의 탁월한 경구들을 내놓는 기회가 되었다. 가령,
시간은 그대를 늙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가면을 받아들이게 만든다. (p120)
진의 죽음 후 일 년, 가리의 권총자살은 진과의 사랑 때문이 아니었을 수도 있고 그럴 수도 있다. 진의 사망도 약물중독일 수도 있고 FBI의 음모일 수도 있다. 인생은 어느 랍비가 말했듯, 고요한 강물이랄 수도 있고 요동치는 강물이랄 수도 있으니.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 이 책에서 눈여겨 보게 되는 건, 이들 두 사람이 살아온 시대의 강물, 24년의 차이가 나는 세대의 문제와 그 세대의 험난한 구비구비와 파란만장이다.
이건 분명 세대 문제였다. 가리의 세대, 그가 존경하는 말로(Malraux)세대의 사람들은 교양을 통해 자기 조건을
승격시켰다. 진이 세대에게 구원은 어쩌면 대마초와 기타, 까다로운 염격함으로 가장된 절망, 술 그리고 체 게바라가 준엄한 눈길로 내려다보고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그 옆 포스터에서 혀를 내밀고 있는 어지러운 방 안에서 싸움이
아니라 정사를 나눌 때 동반되는 저항 가요 속에 있었다. 그것은 세대 문제이자 모순의 문제였다. (p138)
진이 보기에 여자의 욕구는 알지만 욕망은 모르는 남자, 가리가 보기에 철이 없게도 행동에 망설임이 없고 감정에 순수한 여자. 잦은 이별과 낙담 속에서도 배신하지 않고 20년을 함께한 이들의 사랑을 어떤 잣대로 어떤 키워드로 말할 수 있을까. '행복의 그림자 뒤를 좇는 여자와 행복을 느끼지만 행복을 잡을 줄 모르는 남자'의 사랑이란 대체 무어라 말할 수 있었을까.
가리가 자유프랑스군으로 참전한 2차 세계대전, 프랑스의 68년 5월 혁명, 미국의 히피 문화와 흑인 인권운동의 정신과는 반대로 진이 태생적으로 갇혀온 청교도적인 가정분위기로 인해 받은 몰이해와 상처가 안타깝다. 블랙팬서와 블랙모슬렘의 암투를 비롯해 많은 부분 조장된 세상의 선입견과 오해와 비난을 견디고 소수자들의 인권에 관심을 갖고 행동력을 보여주려 했던 그녀는 좀더 악랄하고 노회한 집단에 의해 희생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책은 그들의 첫 만남에서 시작하여 그들의 죽음으로 맺는다. 첫 대목부터, 가리보다도 11살 연상이었던 레슬리의 눈으로 보이는 스물 한 살의 진 세버그는 어쩐지 운명을 예고하듯 애련하다. 가리의 사랑 그 이상의 애정과 보살핌이 표현되는 부분은 가슴 뭉근하다. 어쩌면 진의 사랑의 정체성은 굶주린 부성애에서 오지 않았을까, 느껴지는 대목들도 안타깝다.
로맹 가리와 진 세버그의 생을 씨실날실로 한 이 책은 사실 단숨에 읽어내려갈 수 있다. 분량이나 편집, 스토리 전개가 시원시원하면서 은유적인 표현과 행간에 의미를 함축한 아름다운 문장으로 일관한다. 이 자체로 그들의 소설같은 사랑에 버금가는 소설 같은 책이다. 책을 읽다가 궁금하거나 인상 깊어서 더 찾아보게 되는 부분이 많은데 그 중 '가리는 돈키호테였다. 그는 기사도 시대의 인간이었다(p136)'라고 표현한 문장에 이어 세르반테스에 대한 (당연하지만)긍정적 문장이 인상 깊다. 그외에도 잠시 나오지만 더 찾아볼 만한, 로맹 가리가 진과 함께 추도한 앙드레 말로, 가리의 친구 알베르 까뮈, 그리고 진이 한때 사랑에 빠진 클린트 이스트우드에 대한 에피소드도 처음 본다. 진이 쟁쟁한 경쟁률을 뚫고 발탁된 첫 영화 '잔 다르크'도 예외가 아니다. 감정에 충실하고 투명한 진과는 달리 염문이 퍼진 후 정작 발을 빼며 냉정했던 클린트는 좀 실망이랄까. 이 책으로 로맹 가리는 내가 더욱 좋아하는 작가 대열에 들게 되었다. 가령 그가 불가리아 소피아 주재 대사 비서로 임명되어 근무할 당시의 이야기는 가리가 얼마나 여유있고 능청맞으며 대담하고 자신만만하며 영리한지를 보여준다.
자유로운 인간에 대한 그의 신념을 소피아에서 드러내 보인다면 혹평을 받을 터였다. 그와 비슷한 사람들을
보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안 될 일이었다! 그는 행인들의 눈길에서 두려움을 읽지 못한 것처럼, 관청 통로에서
고문과 살인을 짐작하지못한 것처럼 행세하며 2년을 보내야 했다. 불가리아 비밀경찰은 그에게서 통찰력을,
남다른 점을 금세 포착하고 그로부터 대사관 금고 속에 잠들어 있는 좋은 정보를 끌어낼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그들은 침대에 여자를 집어넣었고, 깨진 유리창 구멍을 통해 온갖 각도로 사진을 찍었다. 됐다! 이제 그를 마음대로
쥐고 흔들 일만 남았다. 그러나 가리는 그런 일에 넘어갈 사람이 아니었다. 그를 찾아와 사진을 내미는 두 명의
비밀경찰에게 그는 침착하게 말했다.
"미안합니다. 그날 제가 몸이 좀 안 좋았어요. 기회를 다시 한 번 주세요.
이 방면에서 프랑스의 명성에 누가 안 되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군요." (p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