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대적 공범자들
임지현 지음 / 소나무 / 2005년 1월
평점 :
품절


우리가 알고있던 상식들에 대한 도발적인 문제제기를 하는 사람이있다.

임지현이라는 역사학자인데 그 주장의 과격성은 논리를 따지게 하기 이전에

불쾌감을 불러일으킬 정도이다.

그가 다시 책을 냈는데 그동안의 주장들에 대한 묶음 형식의 책이다.

이름하여 적대적 공범자들.

적대적 공범자라? 공범이라고 하면 어떤 범죄를 저지르는데 함께 참여한다는

뜻인데 적대적이라면 서로 추구하는 바는 다르지만 방법은 같이 한다는뜻인가?

이 이율배반적인 말은 이 책을 읽어보면서 그 뜻을 알게된다.

여기서는 부시와 빈라덴의 예를 들어서 설명하고 있는데 부시와 빈라덴은

서로를 적대시하지만 결국 그들 서로서로가 그들의 존재성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는 것이다.

부시는 빈라덴의 테러에 대항하기위해 존재하고 빈라덴은 부시의 압박에 저항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런점에서 적대적이지만 서로 공존한다는 점에서 그들은 적대적인 공범자들이다.

당사자들의 입장에선 펄쩍 뛸 일이지만 그 발상이 참 신선하다.

그 주장이 크게 나쁘게 안 들릴정도로 설득력이 있다.

부시와 빈라덴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구도 자체가 그렇게 흘러가는 측면이 있다는

건 충분히 납득할만한 주장이다.

이런 구도를 우리나라에서도 찾을수있는것이 바로 박정희와 김일성이다.

그들의 정권 자체가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하면서 서로를 잡아먹을듯하지만 결국

그 대결 구도 자체가 정권의 존재이유가 된것이다.

비록 박정희가 그 내부의 모순으로 먼저 무너지긴 했지만 냉전의 사고속에서

그 틀의 변화를 기대하기란 어려웠을것이다.

그의 또다른 도발적인 주장인 민족주의는 반역이라는 주장도 여기서 볼수있다.

우리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민족주의 자체에 대해서 부정을 하고 있는것이다.

일본의 제국주의나 중국의 패권주의에 비하면 우리는 그리 나쁘지 않은 민족주의

를 가지고 있다는것이 말도 안된다는 주장인것이다.

개방적인 민족주의던 공화주의적인 민족주의던 결국 국민을 억압하고 국민의 자유

를 제한하는 요소로 작용한다는 말이다.

사실 민족주의 자체는 가치중립적이라고 생각한다.

어떻게 운용하느냐에 따라서 그 결과가 달라지는데 예컨데 일본처럼 국가주의적인

민족주의가 되면 다른나라를 침략하는 침략주의가 되는것이고 중국처럼 중화사상이

바탕이된 민족주의가되면 패권주의가 되는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식민지시절 저항의 의미로 사용되는 민족주의도 있을수 있다.

근데 그 저항적인 민족주의가 나중에 침략주의나 패권주의적인 민족주의가 될수가

있다는것이 지은이의 주장이다.

요컨데 한 사회를 이끌어가는 주된 이념으로 민족주의는 안된다는것이다.

그의 주장을 다 지지하는건 아니지만 우리의 민족주의라고 해서 일본이나 중국에

비해서 그리 선한 민족주의는 아니란것에 대해선 동감이다.

우리 내면에 민족주의적인 편견이 얼마나 많은가.

동남아시아인들에 대한 인종적인 편견도 결국 민족주의적인 면에서 생길수있는것

이다.

우리 한민족이 세상에서 제일 똑똑하고 앞으로 세상을 이끌어나갈것이란 그런 주장

도 결국 팽창주의적인 민족주의의 한 발로일것이다.

민족주의 그 자체의 가치중립성에도 불구하고 '겸손한' 민족주의란 어쩌면 존재하

지 않는것일지도 모른다.


지은이의 주장중에서 가장 격렬한 저항을 받은것은 바로 역사에 대한 인식이다.

그는 지난 고구려 역사논쟁에서 왜 고구려가 우리역사라는 그야말로 충격적인

주장을 한다.

그것은 변경사로 봐야하지 국가적인 면으로 보면 안된다는 것이다.

옛날 고구려는 그냥 고구려였지 지금의 한민족의 조상이라는 식으로 해석하면

안된다는 주장이었다.

그 주장은 어느정도 일리가 있다.

사실 옛날 고구려,백제, 신라가 쟁패할때 그들에게 민족의식이 있었을까?

그들에게 서로는 그저 섬멸해야할 적국일뿐이었다.

신라가 대동강이남만 통일해서 아쉬워하고 분개하는건 오늘날의 시각일뿐이다.

그때는 그저 살아남기위해서 죽고 죽일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고구려가 어떻게 우리의 역사가 될수있느냐는것이다.

그리고 그런 주장을 하는 중국이 바보라고 말한다. 우리도 마찬가지고.

딴은 맞다. 그런데 그럼 어쩌라고? 딴놈들은 가만히 있는데 우리만 그냥 변경사

라고 하면서 방치하자고?

흘러간 역사는 당대의 현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역사 그 자체가 현실에서 하나의 판정요소가 되는것이다.

찬란한 역사를 가졌다는것은 어느 국가의 위상과 관련되고 그 국가의 이미지와도

연결된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경제적인 면과도 연결될수있는것이다.

바로 어제까지의 역사를 내꺼가 아닌 남꺼라고 해도 별일없이 지낼 그런 문제가

아닌것이다.

그런의미에서 그 주장의 논리적 타당성에도 불구하고 지은이의 주장은 이상주의적

인 비현실적 논리인거같다.

유럽에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그런 논리도 동아시아에서 그대로 적용하기

에는 그리 적합하지 않은거 같다.

그러나 변경사로서의 고구려사나 발해사를 본다는 논리는 역사의 그 실체를 보는

한 방법으로서 시도해 볼만한 가치가있다고 생각된다.

다른 곁가지를 제외하고 그 역사의 본체를 바로 본다는 의미에서 이런 방법이 효용

성이 있을꺼 같다.


지은이의 주장들은 대부분 파격적이고 도발적인 주장이다.

하지만 화를 내고 외면할것이 아니라 그 논리적인 면을 한번 인내심을 갖고 생각

해본다면 아주 얼토당토하지 않은 것은 아니란것을 알게될것이다.

세상에 100%의 진실이란것은 없다.

역사를 보는 눈도 다양하게 마련이다. 지은이의 주장도 그런 다양한 눈중에 하나

인데 그동안 우리가 생각지 못했던 참신한 발상이 담겨있다.

자본주의는 초기와는 많은 변화를 겪었다. 초기 자본주의의 모순과 폐단에 반발해

서 나타난것이 공산주의다.

공산주의에 자극받아서 결국 자본주의는 좀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것이다.

그와같이 임지현의 이 도발적 문제제기는 우리가 역사를 대하는 태도를 단순한

단색에서 여러가지 다양한 색을 볼수있게 하는 하나의 계기로 삼을수 있을것이다.

그의 주장이 옳고 그름을 떠나서 다른면으로 생각해보는거 자체가 더 나은 발견의

밑거름이 될수 있음이다.


지은이의 주장에 대해서 때론 불쾌하고 화나기도 했으나 그 시도 자체가 가치있는

것이라서 그런 감정들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으나 이 지은이의 글쓰기는 첫 페이지

부터 끝 페이지까지 무척 화가나고 불쾌하고 분노가 치민다.

어떻게 우리나라 인문학자들은 하나같이 글을 이렇게 못쓰는가?

대체 쉬운 글쓰기란것이 그렇게 어려운것인가 말이다.

사실 이책은 보통 인문서적처럼 그리 쉽게 쓰여진것이 아니다.

솔직히 읽으면서 대충 넘어간 부분도 많았다. 어떻게 자신의 주장을 다른사람들

한테 펼치려고 하면서 이렇게 글을 쓰는지 정말 욕이 나올 지경이다.

비록 이 책이 한 주제에 대해서 글을 따로 쓴 것이 아니고 여러 곳에 기고한 글

들을 모아서 여러 주제별로 새롭게 묶은것이라고해도 독자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가

결여된 글같다.

어렵게 쓰는 글에 대한 알레르기적 반발심이 있는 나로선 지은이의 일부 주장에

대한 불쾌감보다도 어려운 글쓰기에 대한 분노심이 더했던것이 사실이다.

'적대적 공범자들'에 대한 연구보다 '쉬운 글쓰기'에 대한 공부를 더 했음 하는

생각이 든다면 너무한것인가?


책은 출판사의 이미지대로 잘 만들어진거 같다.

제본도 튼실하게 잘되어있고 글자도 큼직한게 보기가 좋다.

오자나 탈자도 거의 없는거 같다. 단지 이런종류의 책이 대부분 그러하듯

비싼 책값이 유감스럽긴 하다.

그리고 책뒤에 이 책을 추천한 사람들의 말들이 잠깐씩 나오는데 그 말을 한

사람들이 뭐하는 사람들인지 괄호안에 적어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이름만 적어놓으면 그 사람이 학자인지 일반시민인지 누가 알겠는가?


아무튼 썩 유쾌하지는 않았던 책읽기였지만 새로운 시각으로 문제에 접근하는

기회가 되어서 유익했던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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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테 콜비츠
캐테 콜비츠 지음, 전옥례 옮김 / 운디네 / 2004년 9월
평점 :
절판


캐테 콜비츠라...솔직히 첨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평소 미술에 그리 문외한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이 인물은 전혀 들어보지 못한

것이었다. 그러고보니 얄팍한 미술 지식에 조금 안다고 생각했던것이 부끄러운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 이책을 읽게된것은 미술 지식을 넓혀줄 좋은 기회였다.

캐테 콜비츠는 진보적인 미술가로서 유명한 사람이다. 여기서 진보적이라고 일컫

는 것은 그녀가 단순히 그림만 그린것이 아니라 미술의 영역에 사회적인 문제를

끌어들어서 여러 문제에 대한 사회적인 환기를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그녀의 주 전공은 판화였는데 이 판화를 통해서 전쟁이나 기아,질병, 실직 등등

사회의 여러 문제에 주의를 촉구했다.

흔히 예술을 하는사람들이 현실에 참여하냐 예술 그 자체에 매진을 하느냐로

논란을 벌이기도 하는데 그녀는 현실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결국에는 그 자신

의 미술적인 성가도 더 높이게 된것이다.

이 책은 그런 캐테 콜비츠의 면면을 살펴볼수있는 기회를 주는책이다.

일반적인 평전이 아니라 그녀의 일기를 책으로 펴낸것이라서 그녀가 평소에 생각

해온것들을 찬찬히 음미해볼수있다.

우선 책을 처음에 펼치면 수십장의 그림이 나온다.

바로 그녀의 작품들인것이다. 그녀는 판화와 소묘를 좋아했는데 그 주제를 보면

주위 사람들을 그린 편한 작품에서부터 '죽은 아이를 데리고있는 여자', '노동자'

'전쟁에 반대한다' 등의 사회 문제에 관심을 드러낸 작품까지 다양한 스펙트럼

으로 내면의 세계를 표현한것을 알수있다.

이런 작품들은 그녀가 여러가지 체험을 통해서 깨달은 진실들을 미술로서 형상화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사실 평범한 일생을 살았다면 그녀의 작품이 그리 현실적이지 않을수도있다.

그러나 아들의 죽음으로 전쟁에 대한 진정한 반대의 길로 들어선것과 같이 그녀의

사상은 겸험을 통해서 얻은 진실의 울림이 느껴진다.

그래서 더욱 더 설득력있게 다가오는 것이다.


그녀의 작품을 통해서 그녀가 어떤 스타일의 미술을 했는가에 대한 어렴풋한

느낌이 들었다면 이제 그녀의 내면을 들여다볼 차례다.

이 책은 그녀가 오랫동안 써온 일기중에서 좋은 글들을 모은 책이다.

연대순으로 적은 것이 아니라 여러가지 주제를 정하고 그 주제에 맞는 글들을

묶은것이라서 주제별로 그녀의 생각을 들여다보기 좋게 되어있다.

이 책을 보면 현실참여라는 딱딱한 행동만 하는 그녀말고 보통의 우리네 어머니같은

할머니같은 그녀를 느낄수가 있다.

이른바 '데모하는' 한 예술가로서 볼것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그녀를 바라볼수

가 있는 것이다.

사실 그녀의 행동들은 보통사람들이 절실히 느끼면서도 감히 쉽게 말하기 어려운

그런 것들이었다.

그런것들을 살면서 내내 추구했던 그 용기와 힘에 머리숙여지지 않을수가 없었다.

그녀는 우리를 가르치려 들지 않았다.

그저 그녀의 행동으로 우리가 느끼게끔 한것이다. 우리를 지키는 어머니처럼 그녀

는 부드러움과 강함으로 바른길이 어떤것인가를 몸으로 보여주고 실천한 사람이었

다.

그런 그녀를 직접 쓴 그녀의 일기를 통해서 느낄수있는것이다.

그녀가 제시했던 문제들이 아직도 해결되지 않는 이 시대에 그녀가 던진 물음표는

더욱더 의미있게 다가온다.

독일의 프로이센 출신인 그녀가 두번의 전쟁을 통해서 여러명의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고 히틀러 정권의 미움으로 말년을 힘들게 살다가 히틀러의 패망을 보지 못하

고 사망한것은 마음이 아팠다.

그녀의 개인적인 불행이나 경험들의 그녀의 사상을 단단하고도 넓게 했겠지만

좋은 세상에서 멋지게 살았었으면 좋았을꺼라는 생각도 들었다.


사실 전기나 평전같은것은 시대순으로 쓰여지게 마련이라서 인내심을 갖고 처음

부터 봐야한다.

그러나 이책은 여러 주제로 나누어서 그 주제에 맞는 글들을 모아놓았기 때문에

책 목록에서 흥미있다고 여기는 부분부터 읽어도 된다.

우리가 바라는것은 그녀가 어떻게 살았는지의 세세한 연보보다 그녀의 마음을

느끼는 것이리라..


책은 편집도 잘 되어있고 활자도 보기 좋다. 종이도 보통 단행본 책에서 보는

재질과는 다르게 촉감이 좋은 재질로 되어있어서 읽고싶은 마음이 들게하고

제본도 튼튼하게 잘 되어있다.

단, 이런 종류의 책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책값이 만만치가 않다.

선택의 문제가 직면하는데 그녀의 팬이거나 예술의 현실참여에 고민하는 사람이라

면 한번 읽어보면 좋을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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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문, 시대의 물음에 답하라 - 조선 과거시험의 마지막 관문
김태완 엮음 / 소나무 / 2004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조선시대는 과거시험의 나라였다.

과거를 통해서 인재를 선발하고 그 인재들이 나라를 경영해 나가는 나라였다.

물론 과거의 폐단은 있었으나 과거제라는 제도를 통해 조선의 역사가 지탱될수

있었던것도 분명하다 할것이다.

이 과거시험의 마지막 관문이 '책문'이었다.

시험에 응시한 수많은 선비들중에서 33명이 최종합격이 되고 이들중에서 다시

시험을 쳐서 등수를 매기는것이 책문이었다.

이때는 왕이 직접 문제를 내고 선비들이 답을 하는 형식이었는데 이 문답이

당대의 모습을 치열하게 대변하는것이다.


왕은 질문한다.

그대가 왕이라면, 그대가 재상이라면, 그대가 국가경영자라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할것인가.

그 질문은 정치,경제,사회,외교,국방등 다방면에 걸쳐서 그 시대에 가장

중요하면서도 시급한 문제들을 닮고있다.

왕은 단순히 등수를 매기기위해서 질문하는것이 아니었다.

그 자신이 백성의 안위를 살펴야하는 최고통치자로서의 고뇌가 담긴 질문인 동시

에 지혜로운 답변을 구하는 것이었고 또 인물을 시험하는 질문이기도 했다.

그러했기에 그 질문에 답하는 선비들의 자세또한 엄정했으니 임금에게 대놓고

꾸짖기까지 하였다.

바로 임숙영의 예에서 찾아볼수있는데 그때의 임금인 광해군이

'지금 가장 시급한 나랏일은 무엇인가' 라고 묻자

'전하께서는 스스로의 실책과 국가의 허물은 거론하지 않았습니다.나라의 병은 임금

의 잘못에 있습니다' 라고 바로 직격탄을 날린다.

딴은 맞다. 국정의 최고통치자로서 모든 문제의 최종책임자는 임금이지 누구겠는가?

하지만 절대군주시절에 그렇게 대놓고 임금을 통박할 사람이 과연 누가 있을까하는

생각에서 보면 소름이 끼치도록 대범함을 느낄수있었다.

물론 그 대답으로인해서 임숙영의 목숨이 위태롭기까지는 했어도 죽지는 않았을

뿐만아니라 비록 등수가 떨어지긴했어도 당당히 과거에 최종합격하게된다.

어쩌면 이것이 조선 과거제의 강점이었다고도 볼수있겠지만 한편으론 갈수록 약화

되어가는 왕권의 한 모습이라고도 할수있겠다.


또 한편의 흥미로운 책문이 있다.

세종이 내린 책문인데 여기서 답한 사람들이 잼있다.

바로 성삼문과 신숙주다. 당대의 일급 지식인이었지만 나중에 다른길을 걷게되는

사람들로 한쪽은 절개로,한쪽은 변절로 사람들의 뇌리에 남게되는 인물들이다.

이 사람들이 당시의 임금인 세종이 내린 질문에 각각 답한것을 보면 각기 일리있는

말을 하면서도 나중의 행동에 대한 단초를 알수있는 내용도 보인다.

세종이 법의 폐단을 고치는 방법이 무엇이냐고 묻자

성삼문은 법을 고치기전에 임금님의 마음을 바로잡아야 할일이라고 답했고

신숙주는 법의 폐단을 고치는것의 근본은 인재를 얻는데 있으니 언로를 열어

직언을 들으라고 답했다.

이 두사람의 글을 읽어보면 둘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왠지모를 묘한 뉘앙스의 차이를 느끼는것이 성삼문은 임금의 입장에서

서술한것이고 신숙주는 신하의 입장에서 서술한것인거 같다.

성삼문은 왕이 중심이되어서 왕이 늘 성찰하고 반성하여 왕의 마음이 주관할것을

촉구하지만 신숙주는 적합한 인재를 등용해서 그 인재가 정권을 올바르게 담당해

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있다.

이런 답에서 단종에게 일편단심 목숨을 바친 성상문과, 자신을 알아주는 세조에게

협력하여 새로운 시대를 연 신숙주의 모습의 한 조각을 느낄수있다면 너무 큰

비약인것일까?...


또다른 책문을 보자.

중종은 외교관은 어떠한 자질을 갖추어야 하느냐고 묻고있다.

이에 김의정은 재능보다 덕을 우선해야 한다고 대답한다.

재능보다 덕이라...외교관은 나라를 대표하는 자리이다. 이런 자리의 인물이

덕으로 상대국을 대하지 못한다면 나라의 격도 떨어진다는 뜻일것이다.

최근 이라크에서의 김선일씨 사건에서도 보듯이 오늘날의 우리나라 외교관들이

재능있고 똑똑하기는 하나 지나친 엘리트의식으로 재외국민들에게 좋은 소리를

못듣고있는것을 생각해보면 이 답이 얼마나 현답인것을 느낄수 있었다.


이 책은 이런 질문과 대답 형식의 책문 수백편중에서 오늘날에 되살려도 좋을 것을

여러편 골라 해설과 함께 엮는 책이다.

쉬운 우리말로 잘 번역해서 본문 내용만 봐도 뜻을 헤아리는데 부족함이 없지만

한편한편의 책문뒤에 지은이의 자세한 설명도 함께 붙어있어서 내용을 파악하고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그리고 책의 뒤에는 부록으로 출전문집과 인용문헌이 자세하게 나와있어서

좀더 깊이있게 알고자하는 사람들을 배려했고 책 본문 중간중간에 지은이의 자세한

각주를 책 뒤쪽에 실어서 좀더 자세한 상황을 알수있게 하였다.


전반적으로 어려울것이란 선입관과는 달리 책 내용이 쉽게 잘 읽히고 활자가 읽기

에도 편하다.

아주 어려운 전문적인 대책이 아니라 오늘날에서도 잘 적용할수있는 상식적인 내용

이기에 쉽게 읽히는것 같다.

여기 나온 질문과 대답들은 어찌보면 너무나 당연하고 쉬운 답변들이다.

그러나 수백년전에 우리 조상들이 주고받았던 치열한 고민들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고 또 그 당연한 대답들을 실천을 못해서 어지럽게 돌아가는 요즘 세상을

생각하면 한숨이 나오기도 한다.


여기에 나온 임금의 질문들을 스스로에게도 답해보면서 세상을 넓게보는 기회도

될수있을것같고 자기 자신이 임금앞의 신하라고 생각하거나 국가경영자라고 생각

하거나 하면서 답을 생각해보는것도 재미있을것 같다.


오랫만에 지적인 호기심을 자극하는 좋은책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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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내 사랑 레이먼드 챈들러 선집 3
레이먼드 챈들러 지음, 박현주 옮김 / 북하우스 / 2004년 8월
평점 :
절판


이번 여름은 계절적으로 인기있는 장르의 책들을 읽게되었는데 그 끝머리로

안녕내사랑을 읽게 되었다.

처음에 제목을 보고선 보통 연애소설인가 했다.

그러나 이것이 유명한 챈들러의 추리소설이라고 해서 좀 놀랬다.

이 책은 우리가 흔히 접하는 추리소설하고는 좀 느낌이 다른 책이었다.

이른바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이란다.

하드보일드? 어디서 많이 듣던 말인데 그 뜻이 삼삼하게 기억이 안났다.

하드보일드란 자연주의적인, 또는 폭력적인 테마나 사건을 무감정의 냉혹한 자세로

또는 도덕적 판단을 전면적으로 거부한 비개인적인 시점에서 묘사하는 것이다.

불필요한 수식을 일체 빼버리고, 신속하고 거친 묘사로 사실만을 쌓아 올리는 문학

수법이라고 한다.

어떻게 보면 그냥 추리소설이라고 생각안하고 읽으면 보통 소설인것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장르다.

아무튼 정통 추리소설 매니아의 입장에서는 다소 추리가 약한 면이 있다.

하지만 행동을 중시하는 면과 자세한 상황묘사등은 그 자체로 문학의 묘미를 느낄

수 있는 책이다.


내용은 아주 복잡한 추리소설은 아니다.

사립탐정 필립 말로는 센트럴 로를 걷던 중 우연히 무스 맬로이와 알게 되고

그가 저지르는 살인사건에 연루된다.

맬로이는 감옥생활때문에 못만나게 된 옛 애인은 찾고 있었는데 말로는 그녀가

어디있는지 찾아나서게 된다.

그러다가 그녀의 행방을 알고 있을 노파를 찾아나서서 어떤 정보를 얻긴했지만

나중에 노파는 살해된채로 발견된다.

그와중에 말로는 한 남자로부터 어느 귀부인의 도난당한 비취 목걸이를 찾는 데 동

행해 달라는 제의를 받고 응하는데 그 의뢰인도 살해되고 말로도 위험한 지경에

빠지게 된다.

별로 관련없는 듯한 두 사건에서 유사점이 발견되고 말로는 진실에 조금씩 접근

해 가게되는걸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아주 치밀하고 복잡한 추리의 세계는 사실 보이지 않는다.

줄거리상으론 별로 긴 이야기가 아니지만 상황이나 배경묘사가 아주 정교하고

세밀하게 잘되어있어서 이야기의 길이가 길어진것이다.

빠른 전개를 원하는 사람들한테는 사실 조금 지루할수도 있을것이다.

하지만 이야기의 겉에 장치된것들은 나중에 서로 치밀하게 연결된다는것을 알게되면

이 소설의 묘미를 느낄수있게 될것이다.

주인공도 우리가 아는 보통 사람같고 추리소설에 나오는 어떤 큰 능력을 가진

사람으로는 안 보이는것이 더 친밀감을 불러일으킨다.

뤼팽이나 홈즈같은 대단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등장하는 소설들만 봐온 나로선

주인공인 말로가 왠지 초라해보이고 힘도 약해보이기도한다.

그러나 책을 읽어내려갈수록 그가 편하게 느껴지고 가까이 느껴지는걸 왜일까?

아마 우리가 주위에서 금방이라도 찾아낼만한 사람이라서 그렇게 느껴지는것일

것이다.

그는 냉소적이면서도 부드러운 면도 있고 좀 반항적이면서도 순종하는 면도 있고

해서 실제한다면 여자들이 매력적으로 여길만하다고 느꼈다.

뉴욕 타임즈 북리뷰에 실렸다는 말이 딱 들어맞는거 같다.

"모든것을 알고, 희망을 잃지 않으며 사려깊고, 모험들 두려워하지 않고,

감상적인 동시에 시니컬하고 반항적인 영웅"

머리가 번쩍 띄이게되는 반전이나 추리는 여기에 없지만 상황묘사나 배경묘사들이

참 탁월하다.

굳이 하드보일드하다는 용어를 쓰지않아도 이런류의 글쓰기에 좋은 느낌을 받은

사람이라면 한번 읽어봄직하다.

복잡한 추리가 안 들어가기에 책도 술술 잘 넘어간다.

번역은 이 책의 매니어였던 분이 해서 세밀한 것까지 잡아낸거 같다.

그전에 나온 책들보다 확실히 좀 나아보인다. 깔끔하고 군더더기가 없다.

뒤에 해설을 읽어보면 이 장르를 이해하는데도 도움이 될듯하다.

455쪽이라는 두꺼운 내용에 비해 역시 책값도 저렴한 편이니 성큼 다가온 가을에

챈들러의 추리소설들과 함께하는것도 괜찮을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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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 서태후
펄 벅 지음, 이종길 옮김 / 길산 / 2003년 6월
평점 :
품절


처음에 책의 제목을 봤을때 서태후앞에 연인이라는 수식어가 붙어있는거 보고 좀 의아스럽게 여겼었다.무소불위의 철권을 휘두룬 서태후에가 애틋한 시절이 있었단 말인가하고 말이다.그리고 '펄벅'이라는 지은이가 주는 호기심도 작용하면서 읽고싶은 마음이 생기게 만들었다.

이 책은 어찌보면 일종의 '애정소설'이라고도 볼수있겠다. 펄벅의 대지같은 책만 봐온 나로선 펄벅이 이런 책도 썼나 싶을정도로 그 분위기가 다른 책이었다.우리가 흔히 아는 서태후는 청나라말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르고 실질적인 황제로 군림하면서 청나라의 멸망을 재촉한 사람정도로 알고 있을것이다. 그러나 이책에서는 그런 면보다는 서태후도 한명의 여인이었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으며 주위의 상황이 그녀를 그렇게 몰고갔다는걸 그리고있는 책이다. 펄벅은 이 책을 통해서 역사적인 판단이나 잘잘못을 내리고 있지는 않다.그저 서태후라는 여인에 대한 인간적인 면을 들추어 내며 독자에게 판단을 내리게 하는거 같다.

이야기는 청나라 말 황제의 후궁으로 간택되어 입궁하는 장면부터 시작된다.여기서 보이는 그녀는 그저 보통의 감정을 가진 평범한 여인일뿐인거같다.그러나 입궁이후에 황제의 총애를 받기위한 행동이나 생각등은 지혜롭고도 현명한 처녀라고 여겨지고 아마 이것이 훗날 대국을 지배할것을 알게되는 단초가 아닐까 생각된다.이야기는 그녀가 황제의 사람을 받아 후궁이 되고 아들을 낳고 그 아들이 황제가 되고 그러면서 그녀가 권력을 쥐면서 여러가지 사건들이 일어나는 과정들을 담담하게 그리고있다.

사실 그녀가 행한 행동들은 그 자신이 살기위해서 어쩔수 없는것이었을지도 모른다.그녀가 사랑했던 영록과의 혼인이 이루어졌어도 그런 성격이 나왔을까? 그 환경이 그녀로 하여금 변신하지 않을수없게 만든것은 아닐까? 때로는 피도 눈물도 없는 악녀로,때로는 작은 일에도 슬퍼하는 감성적인 여인의 두 얼굴을 보였던 그녀는 그 내면을 살펴보기 전에는 단지 변덕스런 인물로 비춰졌을것이다.펄벅은 그녀가 그런 모습을 나타내는 과정을 급하지도 않고 느리지도 않게 적당한 호흡으로 보여주고있다.

서양세력이 물밀듯 밀려오는 그 격랑의 시대에 최고통치권자로서 그녀는 분명히 한계였던 인물이었다.세상을 보는 안목이나 서양세력의 본질에 대한 인식을 그녀한테 기대할수는 없는 노력이었다.그래서 그녀로 인해 청나라가 멸망했다는 논리도 나올수 있을것이다.그러나 만일 그녀가 없었다면 청은 그전에 멸망했다고도 볼수있지 않을까? 그 당시로선 그녀가 유일무이한 대안이었고 그녀가 나라를 부강시키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유지는 시켰다는 점에서 나라의 운명을 연장시켰다고도 볼수있을것이다.혹자는 어차피 망할 나라 몇년 더 끈다고 해서 나아질것이 무엇이겠느냐고 하겠지만 그 연장된 시간속에서 나은 미래를 설계할수도 있는것이다.비록 그런 것은 실패하고 말았지만 그 책임을 그녀혼자에게 물을수는 없을것이다.나라가 망하는데 하나의 군주만이 잘못하는것은 아니니 말이다.

이책에서는 청조말의 혼란스럽고 급박한 사정에 대해 자세히 말하고 있지는 않다.그저 서태후에 대한 초점을 이동하는 과정에 부수적으로 조금씩 그 환경을 살피고 있을뿐이다.그리고 서태후의 인간적이고 사랑을 갈망하는 평범한 모습을 주로 부각시키고 있다.역사는 승자에 의해 쓰여지게 마련이라서 그런입장에서 패자라면 패자인 서태후의 진면목이 많이 가려진것이 사실이다.서태후가 날카롭고 잔인한 면을 보인것도 사실일것이다.그러나 그런면만 가진것이 아닌 그녀도 남자의 사랑을 받고싶었던 한 여인으로서 그려지고 있는것이다.

사실 펄벅의 대지에서 보여줬던 그런 깊이가 이책에선 그리 보이지 않는다.서태후의 모습만 쫓아가다보니 좀 단조로와진거 같기도 하고 역사적인 사실에 대한해석이나 평가가 빠지다보니 인물역사로서 보기도 좀 어려웠다.아마 펄벅은 서태후를 통해서 인간의 감정을 묘사하고 나타내려고 한거같다.역사소설이 아니라 그냥 파란만장한 삶을 산 한 여인에 대한 소설이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깊은 울림은 솔직히 잘 엿보이지 않았지만 두꺼운 분량이 잘 읽힐만큼 섬세하고 재미있게 쓰여진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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