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
노희경 지음 / 김영사on / 2008년 12월
구판절판


나는 한 때 나 자신에 대한 지독한 보호 본능에 시달렸다.
사랑을 할 땐 더더욱이 그랬다.
사랑을 하면서도 나 자신이 빠져나갈 틈을
여지없이 만들었던 것이다.
가령, 죽도록 사랑한다거나, 영원히 사랑한다거나,
미치도록 그립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내게 사랑은 쉽게 변질되는 방부제를 넣지 않은 빵과 같고,
계절처럼 반드시 퇴색하며, 늙은 노인의 하루처럼 지루했다.

책임질 수 없는 말은 하지 말자.
내가 한 말에 대한 책임 때문에 올가미를 쓸 수도 있다.
가볍게 하자, 가볍게.
보고는 싶지 라고 말하고, 지금은 사랑해라고 말하고,
변할 수도 있다고 끊임없이 상대와 내게 주입시키자.

그래서 헤어질 땐 울고불고 말고 말끔하게, 안녕.
나는 그게 옳은 줄 알았다.
그것이 상처받지 않고 상처주지 않는 일이라고 진정 믿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든 드는 생각.
너, 그리 살어 정말 행복하느냐?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죽도록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살 만큼만 사랑했고,
영원히 믿지 않았기 때문에 언제나 당장 끝이 났따.
내가 미치도록 그리워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도 나를 미치게 보고 싶어하지 않았고,
그래서,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13-14쪽

사랑은 내가 먼저 다 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
버리지 않으면 채워지지 않는 물잔과 같았다.

내가 아는 한 여자,
그 여잔 매번 사랑할 때마다 목숨을 걸었다.
처음엔 자신의 시간을 온통 그에게 내어주고,
그 다음엔 웃음을 미래를 몸을 정신을 주었다.
나는 무모하다 생각했다.
그녀가 그렇게 모든 걸 내어주고 어찌 버틸까, 염려스러웠다.
그런데, 그렇게 저를 다 주고도 그녀는 쓰러지지 않고,
오늘도 해맑게 웃으며 연애를 한다.
나보다 충만하게.

그리고 내게 하는 말.
나를 버리니, 그가 오더라.
그녀는 자신을 버리고 사랑을 얻었는데,
나는 나를 지키느라 나이만 먹었다.

사랑하지 않는 자는 모두 유죄다.

자신에게 사랑받을 대상 하나를 유기했으니
변명의 여지가 없다.
속죄하는 기분으로 이번 겨울도 난 감옥 같은 방에 갇혀,
반성문 같은 글이나 쓰련다.-14-15쪽

살아 있는 동안 너는 나만 사랑한다고
나는 너만 사랑한다고 맹세할 때,
난 신이 가장 무서운 존재인 줄 알았어.
그런데 아니야.
세상에서 가장 위험하고 무서운 건
사람 마음이야.
신 앞에서 한 맹세도
마음 한번 바꿔 먹으니까 아무것도 아니잖아
<거짓말>중에서-57쪽

사랑은 또 온다.
사랑은 계절 같은 거야.
지나가면 단신 안 올 것처럼 보여도
겨울 가면 봄이 오고, 이 계절이 지나면
넌 좀 더 성숙해지겠지.

그래도, 가여운, 내 딸.
<거짓말>중에서 -109쪽

산다는 것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산다는 건,
늘 뒤통수를 맞는 거라고.
인생이란 놈은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어서
절대로 우리가 알게 앞통수를 치며 오는 법은 없다고.

나만이 아니라, 누구나 뒤통수를 맞는 거라고.
그러니 억울해 말라고
어머니는 또 말씀하셨다.
그러니 다 별일 아니라고.
하지만, 그건 육십 인생을 산 어머니 말씀이고,
아직 너무도 젊은 우리는 모든 게 다 별일이다, 젠장.
- 그들의 사는 세상 중 그의 이야기 -103쪽

절대로 길들여지지 않는 몇 가지
나는 한때 처음엔 도저치 할 수 없을 것 같은 세상의 어떤 두려운 일도 한 번 두 번 계속 반복하다보면, 그 어떤 것이든, 반드시 길들여지고, 익숙해지고, 만만해진다고 믿었다. 그렇게 생각할 때만 해도 인생 무서울 것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절대로 시간이 가도 길들여지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안다.

오래된 애인의 배신이 그렇고,
백번 천번 봐도 초라한 부모님의 뒷모습이 그렇고,
나 아닌 다른 남자와 웃는 그녀의 모습이 그렇다.
절대로 길들여지지 않는,
그래서 너무나도 낯선 이 순간들을,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 걸까?
- 그들의 사는 세상 중 그의 이야기-194쪽

해피 엔딩의 역설
나는 결코 인생이 만만하지 않은 것인 줄 진작에 알고 있었다. 행복과 불행, 화해와 갈등, 원망과 그리움, 상처와 치유, 이상과 현실, 시작과 끝, 그런 모든 반어적인 것들이 결코 정리되지 않고, 결국엔 한 몸으로 뒤엉켜 어지럽게 돌아가는 게 인생이라는 것쯤은, 나는 정말이지 진작에 알고 있었다. 아니, 안다고 착각했다. 어떻게 그 순간들을 견뎠는데, 이제 이 정도쯤이면, 이제 인생이란 놈도 한 번쯤은 잠잠해져 주겠지, 또다시 무슨 일은 없겠지, 나는 그렇게 섣부른 기대를 했나 보다. 이런 순간에, 또다시 한없이 막막해지는 걸 보면.
- 그들의 사는 세상 중 그의 이야기 -2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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