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나라에서는 아주 쉽게 잘하는 일을 다른 나라 사람들은 제대로 할 줄 모르는 경우도 세상에 많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가끔은 어떤 나라에서 처음 유래한 사물이 매우 독창적이고 기발해서 그 물건하면 반드시 그 나라를 연상되는 것들이 있다. 영국의 2층 버스나 네델란드의 풍차(평평한 땅에 얼마나 훌륭한 착상인가. 네델란드 인들을 네브라스카에 데려다 놓으면 이 황량한 주를 어떻게 바꿔놓을지 자못 궁금하다) 파리의 노천 카페가 그렇다. 반면에 다른 국가들이 대부분 아주 쉽게 하는 일인데도 어떤 나라 사람들은 아예 개념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일도 있다.
가령 프랑스 사람들은 줄서기의 의의를 도무지 이해하지 못한다. 아무리 노력해도 잘 안 되나 보다. 파리에 가면 버스 정류장마다 사람들이 질서정연하게 서 있지만, 버스가 도착하기만 하면 이 질서는 순식간에 무너진다. 정류장은 비인도적인 수용소에 화재 경보라도 울린 듯이 아수라장이 된다. 모두들 버스를 먼저 타려고 쟁탈전을 벌인다. 그럴 거면 애초에 줄은 왜 서느냔 말이다. 오슬로 중 -52-53쪽
영국인들은 음식을 먹을 때 기본적인 점 몇 가지를 도통 이해하지 못한다. 햄버거를 굳이 나이프와 포크를 사용해서 먹으려하는 점만 봐도 그렇다. 어떤 이들은 포크를 뒤집어서 포크 뒷면으로 음식을 가지런히 정돈하기도 하는데, 왜 그러는지는 여전히 미스터리다. 영국에 산 지 벌써 15년이 되었건만, 햄버거를 먹을 때 포크와 나이프를 가지고 씨름하는 사람들을 보면 나는 낯선 그들에게 다가가 조언해 주고 싶은 충동을 억눌러야 한다. "저기요, 두 손으로 쥐고 먹으면 지금처럼 완두콩이 사방에 줄줄 떨어지지 않거든요?" 독일인들은 유머라면 아주 당혹스러워하며, 스위스 인들은 즐길 줄을 모르고, 스페인 사람들은 자정에 저녁을 먹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조심성이라곤 전혀 없는 이탈리아인들은 자동차 발명에 절대로 참여하지 말았어야 한다. 오슬로 중-52-53쪽
첫 유럽 여행에서 특히 경이로웠던 사실은, 세상이 이토록 다양하며, 먹고 마시거나 영화표를 사는 일처럼 간단한 일을 하는 데도 수많은 방법이 있다는 점이었다. 유럽 인들을 하나 같이 너무나 비슷하다. 모두 책을 좋아하고 지적이며, 소형차를 몰고, 오래된 마을의 작은 집에서 살며, 축구를 좋아하고, 상대적으로 덜 물질적이며, 법을 준수하고 호텔 방은 춥게 하면서 음식점이나 술집은 따뜻하고 편안하게 만들지 않는가. 그러면서도 동시에 예상치 못한 측면에서 서로 나무나 다르기도 하다. 유럽에서는 아무 것도 확신할 수 없다는 점이 나는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오슬로 중 -52-53쪽
런던에 있을 때 유럽 여행을 한 다음 책을 쓸 거라고 하자 사람들은 말했다. "여러 외국어를 구사하지나 보군요." "아니, 영어밖에 모르는데요." 내가 모종의 자부심을 가지고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제정신이 아니라는 눈으로 날 바라봤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내게는 그것이 외국 여행의 묘미다. 나는 여행지의 사람들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싶지 않다. 낯선 나라를 여행하는 것보다 어린아이 같은 호기심을 자아내는 일이 어디 있을까. 여행자는 갑자기 다섯 살짜리 어린이가 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아무것도 읽을 수 없고,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간신히 눈치로 알 수 있을 뿐이며, 안전하게 길을 건널 수 있을지조차 장담할 수가 없다. 존재 자체가 연이은 추측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 오슬로 중 -52-54쪽
프랑스 인들은 심지어 내연 기관이 발명되기 훨씬 전부터 험한 운전으로 유명했다. 일찍이 18세기에도 파리로 여행하는 영국인들은 프랑스 사람들이 마차를 얼마나 험하게 모는지에 대해 언급하곤 했다. ‘사람을 실은 마차는 무시무시한 속도로 거리를 지나가며.....아이들은 마차에 치이거나, 치어 죽는 광경도 흔히 목격된다.’ 크리스토퍼 히버트가 쓴 『여행기(The Grand Tour)』의 한 구절이다. 유럽 각국의 국민들이 적어도 300년 동안 고정관념에 충실하게 살아왔다는 내용이 이 책의 주요 내용이다. 16세기에만 해도 여행자들은 벌써 이탈리아 사람은 수다스럽고 신뢰하기 어려우며 지독히 부패하고, 독일인은 식탐이 많으며, 스위스 사람은 짜증이 날만큼 거말하고 정리정돈을 좋아하고, 프랑스 사람은 견딜 수 없을 만큼 ‘프랑스인답다’고 묘사했다. 파리 중-69쪽
도시란 사람을 위해 존재한다. 너무 뻔한 말 같지만 지난 반세기 동안 건물은 자동차나 상점, 건설 회사를 위해 지어졌다. 그리고 도시를 사람이 사는 곳으로, 기능과 이동을 위한 곳으로 생각하기를 거부하고, 남들과 같은 눈높이에서 바라보려 하지 않는, 돈과 야망으로 가득 찬 소수만을 위해 지어졌다. 왜 음습한 터널이나 높은 육교를 통해야만 복잡한 거리를 다닐 수 있어야 하는가? 왜 사람보다 자동차를 우선 고려하는가? 인간은 그토록 돈이 많으면서도 왜 그리 바보인가? 이 모두는 우리 시대의 저주다. 우리는 돈은 너무 많고, 생각은 너무 없다. 그런 의미에서 퐁피두센터는 합성수지로 만든 ‘부유하고 우매한 인간상’의 상징이다. 파리 중-76쪽
‘나는 흐르는 물을 보면서 변기에 앉아 여행이라 얼마나 이상한 일인가 생각했다. 집의 안락함을 기꺼이 버리고 낯선 땅으로 날아와 집을 떠나지 않았다면 애초에 잃지 않았을 안락함을 되찾기 위해 시간과 돈을 쓰면서 덧없는 노력을 하는 게 여행이 아닌가.’ 이스탄불 中-383쪽
나도 돌아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가족이 보고 싶었고, 내 집의 친숙함이 그리웠다.매일 먹고 자는 일을 걱정하는 것도 지겨웠고, 기차와 버스도, 낯선 사람들의 세계에 존재하는 것도, 끊임없이 당황하고 길을 잃는 것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 자신이라는 사람과의 재미없는 동행이 지겨웠다. 요즘 버스나 기차에 갇혀서 나 자신이라는 사람과의 재미없는 동행이 지겨웠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 자신이라는 사람과의 재미없는 동행이 지겨웠다. 요즘 버스나 기차에 갇혀서 속으로 혼잣말을 중얼대는 내 모습을 보고 벌떡 일어나 자신을 내팽개치고 도망가고픈 충동을 얼마나 많이 느꼈던가? 동시에,나는 계속 여행을 하고 싶다는 비이성적인 충동을 강하게 느끼기도 했다. 여행에는 계속 나아가고 싶게 만드는, 멈추고 싶지 않게 하는 타성이 있다. 해협 바로 저편에 아시아가 있다.지금 내 눈 앞에 보이는 저기가 아시아 대륙이라고 생각하자 경이로웠다.몇 분이면 아시아 땅을 밟을 수 있다.돈도 아직 남아 있다.그리고 내가 가보지 못한 대륙이 내 눈 앞에 펼쳐져 있었다. 그러나 나는 가지 않았다.~어쨌든 아무래도 상관없다. 여행이란 어차피 집으로 향하는 길이니까- 385-386쪽
'시원하도록 도발적'이라는 둥 '옷에 난 보푸라기에 대해 글을 쓰더라고 폭소를 자아낼' 거라는 둥, 그의 글은 언론에서 흔히 극찬을 받지만 빌 브라이슨은 사실 번역하는 사람에게는 최악의 작가이다. 우리말로 옮길 수 없는 무수한 말장난도 그렇고, 유럽과 미국에서 나고 자란 사람만이 별다른 설명 없이 알 수 있는 문화 코드는 왜 그리고 책 전체에 속소들이 버무려져 있는지. 심하게 유식한 이 작가의 백과사전적 지식은 왜 그리 곳곳에서 발목을 잡았는지.... 역자 후기에서-38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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