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라 - 시칠리아에서 온 편지
김영하 글 사진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1월
구판절판


이십대의 나는, 자연이 만든 것보다 인간이 만든 것에 더 끌린다고 자신만만하게 떠들고 다녔다. 나는 미술관들을 돌아다녔고 인간이 그런 그림과 인간이 지은 책과 음악, 건축물에 매료되고 했다. 자연? 보고 있으면 머릿속이 텅 비어버리는 것 같아요. 아무 생각도 안 난다고요. 나보다 연배가 대여섯은 위인 한 시인이 나를 향해 이렇게 일갈했던 것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 "이봐, 그런 말, 너무 부도덕하잖아." 무슨 소린지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술에 취해 떠드는 헛소리인가? 그런데도 그 말은 이상하게 뇌리에 남았다. 인간이 만든 것을 더 사랑하는 것이 어째서 더 부도덕하단 말인가? 그것은 태도가 아니라 취향의 문제가 아닌가?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그 시인은 아마도 내가 오만하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리고 자연에 대해 품어야 할 마땅한 경외를 결여한 것, 그것에 대해 취해야 할 마땅한 예의를 생략한 것, 인간이 만든 것에 대해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에 대해 분노한 것이었다.
# 리파리 스쿠터 일주 -109쪽

저격수는 멈춰 있는 대상을 노린다.
껌을 질겅질겅 씹으며
표적을 지켜보다 조용히 한 방.

향수 역시 머물러 있는 여행자를 노린다.

이 부드러운 목소리의
위험한 저격수를 피하기 위해
신중한 여행자는
어지럽고 분주히 움직이며
향수가 공격할 틈을 주지 않는다.

방심한 여행자가 일단 향수의 표적이 되면
움직이기 어려워진다.
그럴수록 그는 더더욱 한곳에 머물러 있고자 하며
마냥 깊은 우물만 들여다보고자 한다.
그 속에 자기가 찾는 모든 것이 있다는 것이.

그러나 세상의 모든 우물이 그렇듯
그곳은 비어 있다.

# 향수 -120-129쪽

시칠리아는 삼각형의 섬이다. 삼각형의 세 변은 각각 유럽과 그리스와 아프리카를 바라보고 있다. 등을 돌린 세 사람이 각각 다른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 섬, 그것이 시칠리아다. 유럽을 바라보고 있는 쪽에 팔레르모가 있다. 그리스를 바라보고 있는 쪽은 메시나에서 시라쿠사까지이고 아그리젠토나 젤라는 아프리카를 향하고 있다. 시칠리아를 여행하다 보면 각 도시들이 자기들이 바라보고 있는 쪽을 닮았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알 수 있다. 노토는 반쯤은 시라쿠사, 그러니까 그리스 쪽을 바라보고 있고 또 반쯤은 아프리카 쪽으로 엉거주춤 돌아앉아 있다.

# 메멘토 모리, 카르페 디엠 -222쪽

카부프 거리의 골목 속에 숨어 있는 멋진 식당들에서 먹은 요리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못 견디게 그리워진다.싱싱한 문어와 오징어,새우와 조개로 요리한 리조토와 파스타,상큼한 전채와 따뜻한 홍합 수프,친절하고 소박한 주인들이 접시를 비운 우리를 보고 기뻐하며 "음식이 마음에 들었느냐."며 조심스레 묻던 장면들도 차례로 떠오른다.
식도락이야말로 순간의 즐거움이다.그것은 사진으로 찍어 남길 수도 없고 잘 보존하여 간직할 수도 없는 성질의 것이며 그 자체로느 아무 것도 생산하지 않는다.어느 한 순간 최고의 행복감을 주지만 그 순간이 지나면 천천히 사그라진다.몇 줄의 문장으로 겨우 남을 뿐이다.
노토를 떠난 지 한참이 지난 지금에서야 나는 묻는다. 왜 노토 사람들은 그토록 먹는 문제에 진지해진 것일까.혹시 그것은 그들이 300년 전의 대지진에서 살아남은 이들의 후손이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사하라의 열풍이 불어오는 뜨거운 광장에서 달콤한 피스타치오 아이스크림을 먹는 즐거움을 왜 훗날로 미뤄야 한단 말인가?죽음이 내일 방문을 노크할지도 모르는 일이 아닌가.죽음을 기억하라는 Mementi Mori와 현재를 즐기라는 Carpe Diem은 어쩌면 같은-239-240쪽

신전이라는 말에는 태생적으로 아이러니가 있다.

신전을 신이 사는 집이지만 실은 인간이 지은 것이다. 신전은 인간 스스로가 상상해낸, 크고 위대한 어떤 존재를 위해 지은 집이다. 그러나 인간이 지어 올렸기에 이 집들은 끝내 돌무더기로 변해버린다. 세월이 지나면 무너진다는 것, 폐허가 된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신전이라는 건축물의 운명이다.

그렇게 무너진 신전을 바라본다는 것은 이중으로 쓸쓸한 일이다.
제우스나 헤라, 포세이돈 같은 신들이 상상 속의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 인간이 세운 높고 위태로운 것은 마침내 쓰러진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하나의 문명이 사라지면
그 문명이 상상했던 것들까지도 함께 소멸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곳에 살았던 일군의 인간들이
자신을 닮은 어떤 존재들을 한때 진지하게 믿었다는 것이다.
현대의 우리가 하늘을 날아다니는
슈퍼 히어로에 열광하듯.......

..........그들은 강하고 지혜롭고 유쾌한 신들을 만들었고 거대한 신전을 지어 그들에게 바쳤다.

# 신전 -251-260쪽

대부분의 관광객들은 오직 단 한 가지의 이유 때문에 아그리젠토에 온다.이른바 '신전의 계곡'을 보러 오는 것이다.신전의 계곡에는 이 도시가 그리스 문명의 일원이던 시절에 건설된 거대한 신전들이 남아 있다. 시칠리아의 여행안내서 대부분은 이 신전의 계곡 사진을 표지로 하고 있다.특히 거의 온전하게 보존돼 있는 콩코르디아 신전을 이렇게, 또는 저렇게 찍어 시칠리아를 대표하는 이미지로 보여주고 있다.아그리젠토에 도착할 무렵이면 그 이미지가 식상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막상 신전의 계곡에 와 보면 왜 수많은 편집자들이 그럴 수 밖에 없는지를 알게 된다.그만큼 압도적이고 인상적이다.아그리젠토가 시칠리아를 대표하지는 않지만 책상 위에 사진들을 늘어놓고 단 한 잔의 사진을 뽑으라면 콩코르디아 신전의 사진을 집어 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연기력 뛰어난 조연들이 많아도 감독이나 제작자는 언제나 스타를 주연으로 쓰게 된다.인간은 뛰어나게 독특한 것으로 시선을 돌리도록 진화해 왔다.그리고 영화든 책이든,사람들의 주의를 단숨에 끌지 못하면 실패하고 만다.결국 시칠리아 도시들 간의 치열한 관광객 유치 경쟁은 압도적인 한 장의 이미지-260-262쪽

"시칠리아에 다시 오게 될까?"
뱃전에서 아내가 물었다.
"다시 오게 될 거야."
"어떻게 알아?"
"그냥 알 수 있어."
나는 힘주어 말했다. 아내가 뱃머리에 부서지는 흰 물살을 굽어보다 말했다.
"난 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아."
"어떤 사람?"
" 난 모든 일이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으면 안절부절못하는 사람이었어."
"그런 면이 있지."
아내는 정말 걱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특히 여행 같은 거 떠날 때는 더더욱 그랬지. 예약하고 확인하고 또 확인하고. 그런데 시칠리아 사람들 보니까, 이렇게 사는 것도 좋은 것 같아."
"이렇게 사는 게 뭔데?"
"그냥. 그냥 사는 거지. 맛있는 것 먹고 하루 종일 떠들다가 또 맛있는 거 먹고."
"그러다 자고."
"맞아. 아무것도 계획하지 않고 그냥 닥치는 대로 살아가는 거야."
"가이드북 보니까 이탈리아에 이런 속담이 있대. 사랑은 무엇이나 가능하게 한다. 돈은 모든 것을 이긴다. 시간은 모든 것을 먹어치운다. 그리고 죽음이 모든 것을 끝장낸다."
"갑자기 뜬금없이 웬 속담?"
아내가 짐짓 딴지를 걸어왔다.
"그러니까 여행을 해야 된다는 거야."
# 죽은 신들의 사회 -281-282쪽

"네가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라"
돌아보면 지난 시칠리아 여행에서 나는 아무것도 잃지 않았다. 그 긴 여행에서 그 어떤 것도 흘리거나 도둑맞지 않았다. 이번 여행에서는 운이 좋았던 것이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나는 다시 짐을 점검해보았다. 있을 것들은 모두 있었다. 오히려 내가 잃어버린 것들은 모두 서울에 있었다. 전광판을 보며 나는 지난 세월 잃어버린 것들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편안한 집과 익숙한 일상에서 나는 삶과 정면으로 맞장 뜨는 야성을 잊어버렸다. 의외성을 즐기고 예기치 않은 상황에 처한 자신을 내려다보며 내가 어떤 인간이었는지를 즉각적으로 감지하는 감각도 잃어버렸다.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 나날들에게 평화를 느끼며 자신과 세계에 집중하는 법도 망각했다. 나는 모든 것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 어느 것에 대해서도 골똘히 생각할 필요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 Memory Lost -291쪽

어린 날의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위의 날,건달의 세월을 견딜 줄 알았고 그 어떤 것도 함부로 계획하지 않았고 낯선 곳에서 묻득 내가 어떤 종류의 인간인지를 새삼 깨닫고 놀랄 줄 아는 사람이었다.그러나 언젠가부터인가 나는 전혀 다른 종류의 인간이 되어 있었다.그런데도 나는 내가 변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다.비슷한 옷을 입고 듣던 음악을 들으며 살았기 때문에 나는 내가 어느새 내가 그토록 한심해하던 중년의 사내가 되어버렸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했던 것이다.아니,애써 외면해왔을지도 모른다.정말 젊은 사람들은 젊은이의 옷을 입는 사람이 아니라 젊게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다.젊게 생각한다는 것은 늙은이들과 다르게 생각한다는 것이다.늙은이들은 걱정이 많고 신중하여 어디로든 잘 움직이지 않는다.그리고 자신의 육신과 정신을 이제는 아주 잘 알고 있다고 믿는다.반면 젊은이들은 자신의 취향도 내세우지 않으며 낯선 곳에서 받는 새로운 감흥을 거리낌 없이,아무 거부감 없이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사람들이다. 늙는다는 것은 무엇일까?그것은 세상과 인생에 대해 더 이상 호기심을 느끼지 않게 되는 과정이다.호기심은 한편 피곤한 감정이다-291-29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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