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허의 1/4 - 2004 제28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한수영 지음 / 민음사 / 2004년 6월
평점 :
품절


확실히 나는 뭔가 불안정한 구석이 있는 사람들에게 관심이 가는 편인가.
관리사무소 앞 차량에서 영광굴비인지 꽃게인지를 딱 30분 동안 정가의 절반에 싸게 판다는
방송으로 처음 내 귀에 잡힌 우리 아파트 단지 관리사무소 청년의 목소리.
벌써 몇 달이 지났는데도 그 청년의 목소리는 여전히 듣는 사람의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심하게 상기되어 떨리어 나온다.
며칠 전 아파트 주민 무료진료를 알리는 방송에 귀기울이던 나는
순전히 그 청년의 얼굴을 보기 위해 하자보수 신청서를 가지고 관리사무소에 가볼까, 하는
생각을 슬며시 했다.

간결하고 매력적인 제목에 끌려 이 책을 골랐다.
2004년 오늘의 작가상 공동 수상작인 한수영의 장편소설 <공허의 1/4>은 
작은 아파트 단지 관리사무소에 근무하는 여성이 주인공이다.
오래 전부터 앓고 있는 류머티스 관절염 치료약의 부작용으로 그녀는 엄청 비대해져
걷는 것도 힘겨울 정도다.
늙어도 사나움이 조금도 가시지 않은 어머니는 휴지뭉텅이를 얻어오는 재미에
약장수 패거리 주위를 얼씬거리다가  어마어마한 액수의 옥매트를 몰래 사들고 온 날,
난생 처음으로 상냥하고 비굴한 모습을 딸에게 보여준다.
언제까지라는 기약도 없이 월급의 3분의 1을 축내는 먼 도시의 요양소에 있는  언니 등
그를 둘러싸고 있는 생활이란 건 한마디로 갑갑함 그 자체이다.

주변 인물은 어떤가!
클래식 음악을 듣는 것으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려는 초로의 관리소장과,
청소와 쓰레기 정리서껀 하루종일 아파트를 돌며 온갖 궂은 일을 도맡아 하는 잡역부 김씨,
좀 머리가 모자란 그에게 술을 먹이고 지분거리는 청소부 아줌마들의 골방,
죽은 어머니를 잊지 못하고 엄마가 있다는 먼 행성 안드로메다로 떠날 것을 꿈꾸느라
수업을 밥먹듯 빠지는 어린 소년.

어찌 보면 좀 작위적인 설정 같기도 한데 내가 몰라서 그렇지 바로 내 주변에
한 명씩은 꼭 있을 법한 인물들이다.  어쩌면 내가 그들 중의 한 명일 수도.......
유사시 음독을 하기 위한 독약을 몸에 지닌 기분으로 항시 사무실 책상서랍 속에
소주 한 병을 숨겨두는 그녀.

--몇 년 동안 신춘문예에 응모한 적도 있었다.
(...) 해마다 1월 1일이면 나는 가판대에서 사온 신문을 옆에 놓고
목삼겹살을 안주삼아 소주를 마셨다. 불판 위의 목삼겹살을 보며 나는 울었다.
정말이지 삼겹살 같은 소설을 써보고 싶었다.
비계와 살코기가 기가 막히게 어울려 있는 조직.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꼭 목삼겹만큼만 쓰고 싶었다.
불판 앞에서 나는 하염없이 울었다.
관절염까지 찾아들었다. 볼펜을 오래 쥐고 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새천년을 몇 달 앞에 두고 나 혼자 절필을 선언했다.(53쪽)

나는 류머티스 관절염을 앓아본 적도 없고 신춘문예에 응모해 본 적도 없지만
락스 냄새가 희미하게 떠도는 어느 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 더러는 마이크를 들고 방송도 하고
온갖 잡무를 처리하고 다니느라 절룩대는 그의 뒤를 따라다니며, 내가 꼭 그녀인 듯한
쓸쓸하고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공허의 4분의 1'은 류머티즘 관절염에 최고라는 사우디 아라비아의 쨍쨍한  햇볕, 거기서도
룹알할리라는 사막  이름이다.
그곳에 가서 차도르로 얼굴을 가린 채 평생을 살면서 몸속의 습기를 모두 말리고
어긋난 뼈들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것이 그녀의 꿈이다.
나도 빨래처럼 바위에 널어  바싹 말려보고 싶은 것이 많은데......

'세상이 너무 완벽해 보여서 내가 끼어들 틈이 없어' 보이는 것이 젊은 날의 고민이었다면,
끼어들고 싶은 곳이 더이상 없는 중년의 날들도 공허의 4분의 1은 차지하지 않을까.
함께 실린 '개와 늑대의 시간'과 ' '십일월' 두 단편도  빨려들어가서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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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icare 2006-03-27 1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궁륭같다고 최승자시인이 썼었지요. 나이먹을수록 공허도 점점 뚱뚱해지는 것 같습니다.

로드무비 2006-03-27 1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이 먹을수록 안 뚱뚱해지는 게 있어야 말이지요.
하니케어님.^^;;

Mephistopheles 2006-03-27 1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상황이 너무 처참한 것 아닌가요....!!

blowup 2006-03-27 1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희미한 락스 냄새는 힘겹게 관리되는 일상의 체취 같아요. 조금씩 부패해가는 일상을 은폐하려는 노력 같은 것일까요.

mong 2006-03-27 14: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관리 사무소 청년이 뚱뚱하고 볼이 몽실몽실하면
재미있을것 같아요 ㅋㅋ

로드무비 2006-03-27 17: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mong님, 불현듯 제 머리에 떠오르는 얼굴이 있는데
님이 말하는 분이 혹시?ㅋㅋ

namu님, 딱 그거예요.
힘겹게 관리되는 일상의 체취라는 표현이 멋집니다.
왠지 리뷰 제목에 락스 냄새를 꼭 넣어주고 싶더라니......^^

메피스토님, 얼핏 보면 그런 것 같지만 또 곰곰 생각해 보면
처참,이라는 단어를 쓸 것까진 없을 것 같은데요?
저보다 애달픈 사정이 워낙 주변에 널렸지 않습니까.;;

kleinsusun 2006-03-28 0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확실히 나는 뭔가 불안정한 구석이 있는 사람들에게 관심이 가는 편인가."
- 제게 관심이 엄청 많으시겠군요. ㅎㅎ

삼겹살 비유는 진짜 딱이네요. 아...저도 삼겹살 같은 인생을 살고 싶어요.

로드무비 2006-03-28 07: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선님, 님은 그런 관심이 아니고 다른 종류의 관심의 대상이죠.
아심시롱.^^
(삼겹살 먹고 싶네요. 새벽 댓바람부터.ㅎㅎ)

2006-03-29 10: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6-03-29 16: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아침 시장을 보고 오는데 그이로 추정되는 청년을 봤어요.
관리사무소 바로 앞에서.
속삭이신 님, 님은 님대로 관리사무소 이야기 써보세요.
변두리 동네 비디오대여점만큼이나 흥미로운 소재여요.
흥미롭다고 표현해서 미안하지만.
흥=3 이 리뷰는 왜 그리 늦게 보신 거예요?
괜히 좋아서 앙탈 한 번 부려봤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