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는 떠났고 더위가 남았다. 입추와 말복이 지났지만 우리가 기다리는 가을은 아직 멀리 있다. 온라인 장 보기를 통해 먹거리 주문을 했다. 문자로 알림이 왔고 상자가 도착했다. 필요한 것을 한꺼번에 주문할 수 있고 빠른 배송을 받을 수 있다는 장점으로 나도 이용자가 되었다. 상품을 클릭해서 자세하게 볼 수 있고 가격도 저렴해서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배송을 받기 전까지는 말이다.

물건을 받고 현명한 소비에 대해, 착한 소비에 대해 생각했다. 나는 착한 소비자가 아니었고 지혜로운 소비자도 아니었다. 상자 하나에 모두 배송될 거라 여겼는데 아니었다. 주문한 제품마다 다른 상자에 포장되어 도착했다. 그러니까 상자가 쌓였고 나는 좀 속상했다. 나라는 소비자에 대해서 말이다.

원하는 물건을 받은 기쁨은 사라지고 불편함이 남았다. 편리하다는 장점을 부각시켜도 그렇다. 처음이니까 그렇다고 스스로 위로할 수밖에 없다. 아파트 근처에 있는 마트에서 주문을 했더라면 어땠을까. 가격이 조금 비쌀지 모르지만 이렇게 많은 상자와 쓰레기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일상이 미세하게 흔들리는 기분이다. 어떤 변화도 없고 특별한 일이 일어난 것도 아닌데 마음이 가라앉는다. 조금 지루하고 우울한 것 같다. 늘어나는 코로나 확진자와 쉬지 않고 울리는 안전 재난 문자. 미세한 게 아닌가 보다. 미세한 흔들림이라면 감지하지 못했을 수도 있으니까. 그럼 제법 흔들리고 있다는 게 맞을까. 8월 17일, 어제는 큰언니의 추도예배일이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올해는 예배를 드리지 않았다. 휴대폰에 저장한 스케줄로 알림을 내년으로 설정한다. 그해 여름을 잠시 생각한다. 몹시 더웠던 여름, 슬픔으로 차오르던 여름. 내 곁의 귀여운 선풍기도 언니의 흔적이다. 우리가 함께 바람을 맞은 적은 없다. 그런 소소한 일상을 나누지 못했다.





유쾌하고 명랑한 영화를 찾다가 라미란이 주연한 <정직한 후보>를 봤다. 거짓말을 할 수 없는 국회의원이라니. 라미란의 생활연기는 최고였다. 원작은 브라질 영화라고 하는데 현실과 동떨어진 픽션의 이야기라고 단언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여하튼 많이 웃었고 조금 나아진 것 같다.

이번 주는 조금 빠르게 흐를 것 같다. 흔들리고 느슨해졌던 일상을 조이고 단단하게 채울 수 있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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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친 배려는 상대를 힘들게 한다. 내 경우에 그렇다. 내가 먼저 도움을 요청하지 않아도 뭔가 나를 도우려는 손길이 있다. 때로는 고맙지만 때로는 불편한다. 어떤 행동이나 지원 같은 것에만 국한된 게 아니다. 글이나 사진을 통해 무례하게 질문을 하거나 무작정 자신의 생각을 전이시키려 하는 이들 때문이다. 사람들은 쉽게 짐작하고 판단한다. 자신의 입장에서만 생각하고 행동하는 어리석음을 버리지 못한다. 나도 과거엔 그랬다. 물론 지금도 그런 실수를 하지만 과거보다는 좀 줄어들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류승연의 『배려의 말들』 을 읽으면서 여전히 나는 배려가 부족한 사람이라는걸, 배려를 실천해야 한다는 걸 배운다.


배려가 무엇인지 알아야 잘 할 수 있다. 상황을 이해하고 타인을 생각하고 나 자신까지 살피고 나서야 적재적소에 맞는 배려를 주고받을 수 있다. 이뿐이 아니다. 존중, 태도, 차별, 혐오, 평등, 배제와 같은 우리 삶은 단단하게 하는 가치를 민감하게 살필 줄 알아야 배려를 주고받고 나서도 서로 낯 뜨거워지는 상황을 피할 수 있다. (10쪽)


내 편의대로 내 맘이 편하자고 상대에게 친절을 베푸는 경우, 상대 역시 그것을 알아차리기 마련이다. 사람의 관계에 있어 호감을 느끼고 조금씩 서로에 대해 알아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 과정을 건너뛰고 무작정 다가갈 때 상대는 주춤하기 마련이다. 배려도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상대를 배려한다는 건 그에 대해 더 많은 걸 알고 그가 원하는 게 정확하게 무엇인지 알았을 때 가능하다. 가령 물 한 잔을 마시는 경우에도 누군가는 반드시 빨대가 필요하고 누군가는 무거운 컵이 아닌 가벼운 컵이 필요한 법이니까.


배려는 상대에게 관심을 갖는 마음이다. 관심을 갖고 역지사지易地思之하는 마음이기도 하고, 위로를 건네는 마음이기도 하며, 일상성을 회복하도록 돕는 마음이기도 하다. (21쪽)


저자의 경우 배려에 대해 더욱 민감하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신문기자였던 그녀가 결혼 후 쌍둥이를 낳았다. 발달장애 아들을 키우면서 차별과 혐오를 경험했다. 장애를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 그 안에 배려는 없었다. 불쌍하게 여기거나 대놓고 나쁜 말들을 하는 사람들. 함께 살아가는 세상이라고 말하면서도 정작 우리 사회는 약자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다는 걸 일상에서 느낀 것이다. 성소수자들, 장애인, 노약자에 대해서 우리는 그들을 배려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입장에서 그들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고민하고 적극적으로 개입하려고 한 적은 없을 것이다. 순간 부끄러우면서도 울컥 뭔가가 치밀어 올랐다. 수술 후 재활을 하는 동안 나를 바라보는 이들의 시선이 떠올랐고 어쩌다 그랬냐며 아무렇지도 않게 묻던 이들이 생각나서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 역시 몇 차례 수술을 하지 않았더라면 나와 같은 상황의 이들에 대해 내 맘대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쉽게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쉽게 추측하지도 말아야 한다. 때로는 기다려야 한다. 상대가 먼저 자신의 사정을 이야기할 때까지. 아픔과 상처는 시간이 지나도 꺼내기 힘든 것이므로 조심해야 한다. 배려는 그런 마음이 담겨 있는 말과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상대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것도 배려다. 사랑하는 아빠, 엄마, 할아버지,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는 게 뭐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 우리는 이토록 인색해졌을까. 어쩌다 젊은이의 오만함을 나이 든 부모 앞에서 내세우게 되었을까. 지금 내 부모의 모습이 미래의 내 모습일 텐데 말이다. (91쪽)


장애인의 이동권이나 화장실 사용만 봐도 그렇다.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권리인데 우리 사회는 그것을 말로만 보장하고 있지 않은가. 기성세대와 노인들에 대한 시선도 다르지 않다. 그들의 형편이나 마음을 헤아리지 않고 고집스러운 이들이라 생각하지 않는가. 100세 시대를 사는 시대에 우리는 늙지 않을 거라 자신하지도 못하면서 말이다. 책을 통해 마주하니 사회 곳곳에 배려가 필요한 삶이 가득했다. 엉뚱한 곳을 긁어주는 게 아니라 가려운 곳을 직접 긁어주는 시원한 배려, 그 배려를 정작 모르고 사는 삶이었다.


괴로움과 나는 동의어가 아니고 슬픔과 나도 동의어가 아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나를 더 배려 하게 된다. 놓아버리지 않는 것으로 내 삶을 배려한다. (47쪽)


장애 아들과 자신을 동일시하며 슬픔에 잠긴 저자가 아들과 자신을 분리하면서 비로소 배운 삶의 태도는 아름답다. 부모라는 입장에서 보면 그건 쉬운 일이 아니다. 1년에 한 번 자신을 위해 맛있는 식사를 하는 모습도 보기 좋았다. 진정한 배려는 나를 챙기는 것부터 시작된다는 솔직하면서도 당당한 모습. 가장 가까운 관계인 가족 간에도 정말 필요한 배려가 아닐까 싶다. 


쉽게 내뱉는 말 중 하나가 배려다. 살아가면서 배려를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있었나 싶다. 책을 읽으면서 김원영의 책이 자꾸만 떠올랐다. 대한민국에서 장애인의 현실을 낱낱이 보여준 그의 글에서 인권에 대해 무지한 우리의 모습이 보여 때때로 숨어들고 싶었다. 책을 읽을 때에만 반성하는 나의 모습 때문에도 그랬다. 읽으면서 분개하며 어느 순간 사그라드는 나의 마음 말이다. 그래도 더 많이 읽어야 한다. 이 책에 대해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하면서 다른 대화의 장을 확장시킬 수 있으니까. 그동안 몰랐던 걸 책을 통해 조금 더 느끼고 배울 수 있으니까. 배려에 대해서라면 더더욱 그렇다.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세상, 진정한 가치를 발견하고 그것을 향해 나가는 사회는 정말 어려운 것일까. 거창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나를 배려하는 마음으로 상대를 배려하면 된다. 때로는 그저 다정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일, 때로는 조심스럽게 상대의 의향을 물어보는 일, 도움을 요청할 때 진심으로 도와주고 응원하는 일이 배려의 시작이다. 김원영의 말처럼 우리는 소중하고 가치 있는 존재이므로.


우리는 존엄하고, 아름다우며, 사랑하고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 존재인 것이다. 누구도 우리를 실격시키지 못한다.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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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10 14: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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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11 16:0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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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하는 삶은 언제나 멀리 있다. 가까스로 그곳에 닿으려 해도 손 닿을 듯 닿지 않는다. 삶이란 참 그런 것이다. 홍이의 부모가 부단히 벗어나려 하고 떠나려 해도 결국 머무는 곳이 남일동 언저리인 것처럼. 그렇다면 왜 떠나려 하는 것일까. 남일동이면 안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김혜진의 『불과 나의 자서전』은 그곳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그러니까 당신이 벗어나고 싶은 동네, 혹은 재개발이라는 이유로 떠날 때를 기다리는 그곳 말이다.

소설 속 홍이는 남일동에 살았다. 홍이에게 남일동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달산 아래의 허름한 동네, 골목에서 가겟집 아이들과 늦은 저녁까지 놀고 싶었다. ​사람들이 남일동이라는 이름이 아닌 ‘남일도’라 부르는 이유도 궁금하지 않았다. 중3에 근처 중앙동의 학교로 전학을 가고서야 알았다. 행정구역 상 남일동에서 중앙동에 편입되었을 뿐 남일동이라 다름없었다. 그러나 그것을 떠난 부모는 남일동의 시절을 기억에서 지우려 했다. 단 한 번도 남일동에 산 적이 없는 것처럼. 남일동은 그런 동네였다. 누군가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동네. 화자인 홍이도 자연스레 남일동을 잊었다. 심각한 알레르기 치료 때문에 제일약국에 드나들면서 남일동과 마주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주해 모녀를 만난다.

 

다니던 직장에서 왕따 문제로 결국 퇴사를 하고 현재까지 일을 찾지 못하는 홍이의 이야기를 주해는 들어주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아무에게도 할 수 없는 말을 처음 본 주해에게 꺼낼 수 있다니. 그 후로 홍이는 주해 모녀와 자주 만나고 친하게 된다. 딸 수아를 혼자 키우는 주해와 만나면서 홍이는 그들이 사는 남일동에 드나든다. 주해 모녀와 어울리면서 홍이는 남일동에서 보낸 시절을 떠올린다. 어린 시절의 기억, 경매로 이웃의 집을 샀던 아버지는 손수 집을 수리했다. 자신의 집을 가졌지만 선뜻 들어가지 못하고 바라만 보던 어머니. 남일동에서 중앙동으로 이사 온 후 아이들에게 따돌림을 당했던 학창 시절.

소설은 홍이의 시선으로 현재의 남일동과 과거의 그곳을 보여준다. 여전히 골목은 어둡고 마을버스 노선은 없고 쓰레기로 가득 채워진 빈 집들. 왜 그토록 사람들이 남일동을 꺼려 했는지, 떠나려 했는지 알 것 같다. 그런 남일동이 변하고 있었다. 주해 때문이었다. 어두운 밤을 비추는 가로등 설치와 달산 방면의 마을버스 코스가 운행할 수 있도록 민원을 넣고 일일이 주민을 찾아 동의를 구하는 일 모두가 주해가 시작하고 행동한 결과였다. 제일약국 앞에서 마녀 시장을 열고 사람들이 남일동을 찾았다. 남일동은 변하고 있었다. 홍이는 그런 주해가 놀라웠고 둘 사이의 관계는 더욱 끈끈해졌다. 주해가 일을 구하고 퇴근이 늦어지면 홍이는 수아를 돌봤다. 수아가 집과 가까운 학교가 아닌 다른 학교의 취학통지서를 받자 주해는 학교로 찾아간다. 남일동에 산다는 이유로 다른 학교로 입학을 해야 한다니. 주해의 집요한 노력으로 수아는 가까운 학교로 입학을 한다.

 

주해에게는 남일동이 마지막이었다. 그러니 떠날 수 없었고 재개발 바람에 더욱 매달렸다. 재개발 추진 위원회에서 일하며 아파트 당첨권을 얻어야만 했다. 악착같은 주해의 모습에서 홍이는 과거 부모님의 모습을 발견한다. 그리고 변하지 않은 남일동의 모습도. 홍이가 중3 시절 따돌림을 당한 것처럼 수아는 ‘난민’으로 불린다는 사실. 수아를 잘 키우고 싶은 주해의 간절함에는 행운이 필요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고 주해는 수아를 데리고 남일동을 떠난다. 남일동에서 태어났고 남일동에서 자랐지만 홍이에게 남일동은 상처였다. 남일동이 사라져버린다면 좋을 것 같았다. 그래서 쓰레기를 태운 드럼통에 불을 지른다.

 

그 밤 나는 정말 없애고 싶었습니다. 한 사람 안에 한번 똬리를 틀면 이쪽과 저쪽, 안과 밖의 경계를 세우고, 악착같이 그 경계를 넘어서게 만들던 불안을. 못 본 척하고, 물러서게 하고, 어쩔 수 없다고 여기게 하는 두려움을. 오래전 내 부모의 가슴속에 드리우고 나에게까지 이어져왔던 그 깊고 어두운 그들을 정말이지 지워버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168쪽)

이런 홍이의 마음은 여전히 존재하는 곳곳의 다른 이름의 남일동에 사는 누군가의 그것과 같을 것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벗어날 수 없는 고달픈 현실과 대를 이어 내려오는 가난과 혐오의 시선. 그러니 소설의 첫 시작에서 남일동인 철거되는 현장을 끝까지 지켜보는 홍이의 행동은 당연한 일이다. 원하는 삶을 꿈꿀 수 있는 시대는 가능한 것일까. 이곳과 그곳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편견 없이 살아가는 세상 말이다. 그리하여 그 삶의 자서전에는 따뜻하고 포근한 불빛이 가득할 그런 날들이. 그런 소망을 버리지 못하고 하루하루 살아간다.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다른 삶을 사는 이야기, 지금 우리의 이야기다. 내가 사는 이곳도 그렇다. 이곳과 그곳을 구분하는 건 아파트의 이름일지도 모른다. 넓고 쾌적한 공간 누구나 꿈꾸는 곳이다. 하지만 그건 것들로 삶의 가치를 단정 지을 수 있을까.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그런 쪽으로 기운다. 작은 소읍에 들어선 아파트가 너무 많다. 빈 땅은 두고 볼 수 없는 걸까. 물론 소설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런 공간은 금세 쓰레기로 가득 차고 공사가 중단된 건물은 위험한 곳으로 인식된다. 김혜진의 소설을 읽으면서 지금 내가 사는 이곳은 개발과 무관한가 생각한다.

 

김혜진의 단편 「3구역, 1구역」에서도 재개발로 인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길 고양이에게 밥을 챙겨주는 인연으로 시작된 두 사람의 관계. 그 관계는 개발로 인해 서로 다른 의견으로 달라진다. 아니, 달라진다고 느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개발로 인해 금전적 이익을 취하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없는 묘한 입장의 차이. 더 좋은 곳으로 향하는 사람들의 욕망, 그것은 당연한 것일까. 잘 모르겠다. 하나의 지역이 개발 대상으로 지목되면 그곳은 이전과 다른 곳이 된다. 이전의 것들은 잊히고 버려진다. 그곳의 삶이 그러한 것처럼. 정녕 그렇지 않다는 걸 우리는 왜 모른 척하는 것일까. 무언가 빠져간 듯 허전하고 씁쓸한 마음이다.

 

​고개를 들면 내가 사는 3구역이 그대로 내려다보였고 그 너머로 상대적으로 높고 반듯한 1구역의 모습이 보였다가 말다가 했다. 3구역이 이렇게 생겼구나. 잠깐씩 고개를 돌릴 때마다 3구역은 넓어졌다가 어두워졌다가 깊어졌다. 높이감을 느낄 수 없는 건물들이 오밀조밀 모인 풍경은 웅덩이처럼 보였고, 재개발을 몇 번이고 반복한다고 해도 이곳을 바꿔놓을 수 없을 것 같았다. (「3구역, 1구역」중에서)

​어느 시절 내가 머물렀던 그 동네의 풍경이 떠오른다. 높은 지대, 좁은 골목, 버스 정거장까지의 너무 멀었던 나의 집. 하나의 대문 안에 또 다른 작은방들. 그곳을 떠나고 싶었지만 그곳의 삶을 부정하거나 지우고 싶지는 않다. 퇴근 후 친구들과 늦은 밤까지 맥주를 마시고 서로의 안부를 걱정하며 택시 번호를 적으며 집으로 돌아가던 길. 하나의 소설이 내 일상을 쓰다듬고 주위를 살피게 만든다. 약자, 소외된 삶, 연대, 공존에 대한 시선을 거두지 않는 김혜진. 그녀의 소설을 좋아하고 계속 읽고 싶은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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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운 곳에서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을 마주할 수 있다는 건 행운이다. 날씨가 너무 좋아서 그곳이 떠올랐고 길을 나섰다. 어떤 차비를 할 필요는 없었다. 그냥 그곳에 가서 가만히 꽃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아무 일 없다는 듯 그저 그 자리에서 나를 기다리는 친구처럼 반가웠다. 올봄 “나에게 더 집중할 수 있다”는 선배 언니의 말이 새삼 와닿았다. 봄이라서 제 할 일을 하는 자연의 위대함을 마주하는 일상이 감사하다.

 


 

 

 

 

 

멋진 구도의 사진을 찍으면 더 좋겠지만 아무렇게나 담아도 황홀한 봄이다. 그럼에도 우리에게는 차분하고도 혹독한 봄으로 기억될 것이다. 많은 이들의 수고와 많은 이들의 한숨과 많은 이들의 기도가 쌓이는 봄으로 말이다. 꽃잎이 지는 자리에 연두 잎사귀가 대기 중이다. 4월이 지나고 5월에는 연두의 물결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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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은 언제나 고통스럽다. 짧은 이별이든 긴 이별이든, 영원한 이별이든 말이다. 그러니 이별에 대한 이야기는 아픔을 동반한다. 사랑하는 이를 다시는 볼 수 없다는 건, 만질 수 없다는 건, 감당할 수 없는 일이다. 경험했다 하더라도 이별은 그 자체만으로도 슬픔이다. 그것이 나의 것이든 타인의 그것이든 섣불리 위로해서는 안 된다. 각자의 슬픔은 각자의 방식대로 끌어안아야 하기에. 맥스 포터의 『슬픔은 날개 달린 것』도 그만의 방식으로 슬픔을 말한다. 아니, 부재를 인정한다. 이 소설은 독특하다. 아내를 잃은 남자와 엄마를 잃은 두 아이, 그리고 까마귀가 등장한다. 까마귀의 등장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물론 까마귀는 그 무엇으로든 대체가 가능하다. 그러나 이 소설의 저자는 까마귀를 테드 휴스의 시에서 가져왔다. 실비아 플라스의 전 남편 말이다. 아, 우리는 그 시인과 시를 몰라도 괜찮다. 물론 알면 이 소설의 중심으로 더 가까이 들어갈 수 있겠지만.

 

갑자기 세상을 떠난 아내를 애도할 시간은 나중으로 미뤄진다. 장례식을 치러야 하고 손님을 맞아야 하고 아이들을 챙겨야 한다. 친구와 지인의 진심을 이해하지만 그들의 방문이 귀찮다. 그냥 슬픔에 허우적거리고 싶은 마음이다. 그리고 찾아드는 상실의 아픔. 그것은 삶을 지배하고 때로 부수고 망가트린다.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아내와 엄마를 그리워하고 어찌할 바를 모른다. 그때 한 마리의 까마귀가 나타난다.

 

고개를 아래로, 병뚜껑, 휘적취적.

고개를 아래로, 대걸레, 깡충깡충.

그는 내게서 많은 걸 배울 수 있어.

그게 내가 여기 온 이유지. (39쪽)

소설은 남자, 아이들, 까마귀, 세 화자가 돌아가면서 이야기를 들려준다. 마치 우화나 동화처럼 들린다. 아직 엄마를 잃었다는 게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천방지축의 아이들과 아내가 그리워서 일상을 유지하는 게 너무 버거운 남자, 그리고 그 둘을 지켜보며 제멋대로, 그러나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꾸짖고 어루만진다. 이런 형태의 소설은 없었기에 이건 대체 뭐지 하는 마음으로 읽다가도 남겨진 가족의 슬픔에 빠져든다. 그러다가 까마귀가 등장할 때마다 그렇지 이제는 일상을 살아내야지 하는 다짐을 하게 된다. 그러면서도 한 편으로는 왜 우리는 슬픔과 함께 살아가면 안 되는가, 왜 우리는 지속적인 애도를 표현하면 안 되는가, 누군가에게 따지고 싶게 만든다. 애타는 마음을, 고통스러운 순간을 그냥 내버려 둬도 괜찮은 게 아닐까.

​나의 이 그리움이란 어쩌면 이리도 물리적인 것인지. 아내가 너무 그리워서, 그 그리움은 금으로 만든 거대한 왕자, 콘서트홀, 천 그루의 나무, 호수, 구천 대의 버스, 백만 대의 차, 이천만 마리의 새들 그 이상이다. 도시 전체가 아내에 대한 나의 그리움이다. (77쪽)

하나의 관념으로서 ‘다음 단계’로 나아간다는 건 멍청한 사람들이나 하는 생각이다. 지각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슬픔이 장기 프로젝트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나는 서두르길 거부한다. 우리가 떠안은 이 고통은 그 속도를 올리거나 바로잡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144쪽)

슬픔은 단단하고 견고한 성처럼 우리의 일상을 가로막는다. 하지만 삶은 멈췄다가도 다시 이어지는 것, 남자와 두 아이들도 아내와 엄마의 유골과 이별해야 할 때가 왔음을 직시한다. 그것과 이별해야 할 시간을 정해놓은 이는 없지만. 소설의 제목처럼 슬픔은 날개 달린 것이라 언제든 날아갈 수 있을 테니까. 한 편의 산문처럼, 한 편의 시처럼, 한 편의 희곡처럼 읽힌다. 사랑하는 아내를 향한 남자의 독백, 엄마를 그리워하는 아이들의 울부짖음, 그 모든 것은 텅 빈 무대에 홀로 앉은 까마귀에게 흡수된다. 까마귀는 은유적인 존재다. 알고 있다. 허상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부재로 존재하는 사랑이 있다는걸. 슬픔의 일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다만, 까마귀의 말처럼 절망하지 않게 된 것뿐.

누군가 이 책을 읽는다면, 혹시 그가 슬픔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나는 이 책과 함께 『쥘과의 하루』를 읽었으면 좋겠다. 하루하루 같은 일상을 살아온 남편의 죽음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하루 동안 혼자만 느끼는 이야기. 죽음을 느낀다는 게 조금 이상할 수도 있겠지만 죽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까지의 시간이 필요하다. 한 공간에 머무르는 마지막 하루, 그 하루가 남겨진 아내에게 특별한 의미가 된다. 언젠가 마주할 이별을 미리 연습하는 일은 유쾌하지 않고 연습할 수도 없는 일이다. 하지만 상실과 애도에 대해 소설 속 문장처럼 나만의 배경을 떠올리듯 노란빛의 책들이 전하는 부드러운 포근함이 위안으로 다가올 수도 있으니까.

천천히 떨어지는 눈송이들이 바깥세상을 두껍고 하얗게 덮고 있었다. 풍경이 그녀의 눈앞에서 회오리치고 있었다. 인적 없는 거리에는 자동차 헤드라이트 불빛 하나 보이지 않았다. 그 누구도, 어떤 움직임도 세상을 그 겨울잠에서 깨우지 못했다. 이것이 이별을 위한 완벽한 배경임을 그녀는 깨달았다. (『쥘과의 하루』중에서)

“이상한 온기와 아름다움을 지닌 책”이라는 한강의 추천사는 책을 읽기 전에는 닿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슬픔이 반드시 아름답고 따듯해야만 하는 건 아니다. 각자의 슬픔을 충분히 영위할 수 있는 어떤 시간과 공간이 필요하다는 걸 말해주는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하나 더, 읽고 난 후 더 깊은 여운이 전해지는 소설이다. 조금은 퉁명스럽고 조금은 얄미운 까마귀 한 마리가 언제나 내 곁에도 찾아와 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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