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책은 도끼다
박웅현 지음 / 북하우스 / 2011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박웅현의 도끼와 카프카의 도끼]
꼭 인문학 열풍 때문이 아니라도 종종 이런 류의 책에 손이 간다. 이런 류의 책이란 지식 소매상 같은 책이다. 쉽게 말하면 책에 관한 책. 물론 저자가 누구냐에 따라 그 퀄리티는 크게 달라지므로, 유혹에 빠지는 것이 꼭 나쁜 결과를 부르지 않을 때도 있다. (가령 이현우의 <아주 사적인 독서>나 정희진의 <정희진처럼 읽기>와 같은 책이 그랬다.)
책에 관한 책의 유혹에 빠지는 이유는 게으름이다. 하나하나 가시를 발라가며 책을 읽지 않고도 통통한 속살만 쏙 빼먹을 수 있을 거란 유혹은 강렬하다. 우등생의 노트를 빌리기 하면 그날은 일단 뿌듯한 것처럼 이런 책을 읽으면 일단 뿌듯하다. 하지만 양념통닭도 제 손에 들고 온갖 양념을 묻히며 먹어야 제 맛이듯, 누군가가 살을 발라 입에 쏙쏙 넣어주는 것은 편할 진 몰라도 제대로 된 맛을 느끼긴 어렵다.
게으름을 제외하고 이런 책을 골랐다면 인문학 열풍 때문일까? 이제는 인문학 열풍이 지나 ‘인문학 열풍 까기’의 유행까지도 지난 것 같다만, 이 책을 읽고 나선 꼭 해야 하는 이야기다.
두 글이 있다.
1. 우리가 읽는 책이 우리 머리를 주먹으로 한 대 쳐서 우리를 잠에서 깨우지 않는다면 도대체 왜 우리가 그 책을 읽어야 하는 것이냐. 책이란 무릇 우리 안에 있는 꽁꽁 얼어버린 바다를 깨뜨리는 도끼가 되어야 한다. 1904년, 1월 카프카.
-<책은 도끼다>, 박웅현, 129p
2. 우리는 다만 우리를 깨물고 찌르는 책들을 읽어야 해. 만일 우리가 읽는 책이 주먹질로 두개골을 깨우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책을 읽는단 말인가? 자네가 쓰는 식으로, 책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라고? 맙소사, 만약 책이라고는 전혀 없다면, 그 또한 우리는 정히 행복할 것. 그렇지만 우리한테 필요한 것은 우리에게 매우 고통을 주는 재앙 같은, 우리 자신보다 더 사랑했던 누군가의 죽음 같은, 모든 사람들로부터 멀리 숲 속으로 추방된 것 같은, 자살 같은 느낌을 주는 그런 책들이지. 책이란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해. 나는 그렇게 생각해. 오스카 폴라크에게, 1904년 1월 27일 수요일.
-<카프카의 편지 100선> 18p
두 글 모두 도끼가 등장하나 두 도끼는 다른 도끼다. 첫 번째 글에서 박웅현이 말하는 도끼는 위협적이지 않다. 오히려 꽁꽁 언 얼음을 단 한 번에 쩍하고 깨버리는 상쾌함, 거기에 따라오는 행복까지 연상된다. 카프카가 쓴 편지에서 ‘도끼’는 위협이다. 재앙 같은, 사랑하는 이의 죽음 같은, 자살 같은 도끼. 널따란 바다에 표류해 작은 얼음조각에 의지해 버티고 있는 데, 그걸 깨버리는 도끼다. 행복감은커녕 불쾌와 불편함을 넘어 공포를 느낀다.
‘인문학 열풍’이라 불리는 것의 인문학은 카프카의 도끼가 갖는 속성보다 시장의 속성과 가깝다. 인문학을 가지고 광고를 만들었다는 박웅현에게서 그 속성이 잘 드러난다. (스티브 잡스를 이길 사람은 없겠지만.) 시장에서 승리하고 1등을 할 수 있게 알려주는 학문을 우리는 경영학이라 불렀다. 이제는 이를 인문학이라고 부르는 것은 경영학의 ‘자기계발’이 촌스럽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경영학의 수단으로 전락한 인문학에게 연민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은, 대학에서 자신이 다니던 과가 없어질 위기에 놓인 학생들과 그 선생들 외에 몇이나 있을까.
2003년 이후 대학의 전체 학과 수는 16% 늘었으나 인문학과는 43개 이상 통폐합됐다. 인문학 주전공에 또 다른 인문학을 복수전공한 나로서는 진짜 인문학은 대학에서 죽었다고 생각한다. 경영학의 탈을 쓴 인문학만이 열풍을 불러일으켰다. 어떤 영화의 스토리처럼 진짜 인문학은 가짜에 의해 어딘가에 갇혀 있었지만 가짜는 거리로 나가 활개를 쳤다. 하지만 모두가 말랑말랑하고 위협적이지 않은 그를 사랑한다니, 걘 가짜라고 외치기도 뻘쭘한 상황이다.
한창 인문학 열풍이 불 때 이런 책을 읽는 것이 아무것도 읽지 않는 것보단 낫지 않느냐고, 가이드 역할도 필요한 것이 아니냐는 반론이 생각난다. 물론 가이드는 필요하다. 하지만 가이드의 말이 전부라면 곤란하다. 강의를 들은 이들 중 몇 명이나 실제로 그 책을 읽었을까는 의문이다. 책을 읽고 스스로의 거친 생각을 말하기보다 저명인사의 평가를 듣고 나서야 입을 뗄 줄 알며, 강의실에 앉아 ‘Entertain us’의 자세로 웃고 떠들다 인문학을 읽었다는 이들에게 드는 반감은 어쩔 수가 없다.
사실 누군들 도끼에 찍히고 싶을까. 스스로가 찍히기보다, 박웅현의 도끼처럼 수단으로서 도끼를 갈망할 것이다. 도끼에 찍힐 대상이 ‘나 자신’이냐, 내가 깨뜨리고 싶은 ‘대상’이냐에 따라 진짜와 가짜가 구별된다고 말하고 싶다. 삶을 송두리째 바꿔버리는 것, 그것은 쉽게 만나기도 어렵고 말랑말랑하지도 않다. 이런 의미에서 임마누엘 칸트는 철학이 전쟁이라고 말했다. 전쟁에서 지든 이기든 그 이전의 삶과 같을 수 없고, 모두가 끔찍해지기 때문이다.
안다. 카프카의 도끼 같은, 칸트의 전쟁 같은 인문학은 설 자리가 없다는 걸. 전쟁을 치르자는 과격분자들이 언제나 소외당하듯 말이다.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가짜의 시대. 이제 가짜를 가짜라고 말하는 사람은 ‘싸가지 없는 놈’ 취급당하기 일쑤다. 진짜와 함께 곳간에 처박혀 울 것이냐, 가짜와 함께 거리를 쏘다닐 것이냐. 우리는 모든 보기가 암담한 선택지에 놓여있다.
---------------------------------------
-올해 몇 권을 읽었느냐, 자랑하는 책 읽기에서 벗어났으면 합니다. 일년에 다섯 권을 읽어도 거기 줄 친 부분이 몇 페이지냐가 중요한 것 같습니다. (34p)
-앤디 워홀의 캠벨 통조림: 시릴 코널 리가 저널리즘은 한 번만 고민하는 것이요 문학은 다시 보는 것으로 정의한 데 따르면, 통조림은 저널리즘적(액체를 담은, 한번 쓰고 버릴 용기)이었다가, 워홀이 액자에 넣음으로써 문학 반열(벽에 진열하고 반복해서 관람하는 것)으로 격상된 셈이었다. (알랭 드 보통) 115p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을 빌리면, 타인들이 우리를 이해하는 폭이 우리 세계의 폭이 된다. 우리는 상대가 인삭하는 범위 안에서 존재할 수 밖에 없다. 그들이 우리의 농담을 이해하면 우린 재미난 사람이 되고 그들의 지성에 의해 우리는 지성있는 사람이 된다. (알랭 드 보통) (118p)
-거지가 질투하는 대상은 백만장자가 아니라 좀더 형편이 나은 다른 거지다(버트런트 러셀) (120p)
-프루스트는 신문기사를 싫어했다. 모든 문맥을 빼버리고 말하기 때문. 신문 읽기라고 불리는 가증스럽고 음란한 행위는 지난 24시간동안 우주에서 일어난 모든 불행과 재앙들, 5만명의 생명을 앗아간 전투, 살인, 파업, 파산, 화재, 독살, 자살, 이혼, 정치인들과 배우들의 잔인한 감정을 그런것들에 신경도 쓰지 않는 우리를 위해 특별히 흥분되고 긴장되는 아침의 오락거리로 변형시키며, 이것은 카페오레 몇 모금과 대단히 잘 어울리게 된다.
그 반대의 이야기도 있다. <리진>이라는 소설은 신경숙 김탁환 두 작가가 썼다. 신문 어딘가에 짧은 기사 한 줄이 나왔다. 조선주재 초대 프랑스영사를 지낸 사람이 궁중무희와 함께 귀국해 살다가, 그 궁중무희가 자살을 했다는 기사였는데 이 짧은 한 줄이 소설이 된 것. (장주네의 하녀들) / 신문과 소설의 차이(131p)
-마르셀 프루스트: "언어를 보호하는 유일한 방법은 언어를 공격하는 것뿐입니다" (135p)
-저녁을 바라볼 때는 마치 하루가 거기서 죽어가듯이 바라보라. 그리고 아침을 바라볼 때는 마치 만물이 거기서 태어나듯이 바라보라. 그대의 눈에 비치느 것이 순간마다 새롭기를. 현자란 모든 것에 경탄하는 자이다. (앙드레 지드, 지상의 양식) (192p)
-연민으로 사랑을 시작해 한없이 작아진 남자. 밀란 쿤데라는 이 사랑이야말로 진자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연민, 즉 동정심은 타인의 불행을 함께 겪을 뿐 아니라 환희, 고통, 행복, 고민과 같은 다른 모든 감정도 함께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감정이입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가장 최상의 감정이라는 겁니다. (249p)
-바람기는 다른 말로 ‘다른 생에 대한 동경’이에요. 다른 곳에 더 나은 인생이 있을 것 같은 막연한 동경이죠. (280p)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