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노그래프 Monograph No.3 손열음
스리체어스 편집부 엮음 / 스리체어스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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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스리체어스 출판사에서 출간되는 인물 평전의 두 가지 버전 중, 비교적 젊은 멘토를 선정하는 『모노그래프』는 『바이오그래피 매거진』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면이 있다. 표지에 적힌 '해시태그'부터 선정되는 인물까지 핫트렌드와 젊은 감각을 내세운 것이 보이지만, 그렇다고 막 가볍지만은 않다. 누군가의 삶을 다뤄내는 손짓은 조심스럽고, 다양한 분야의 멘토들을 선정하기에 독자들에게 기본 지식 또한 전해주려 애쓴 흔적이 보인다.

 

『모노그래프』 3호의 인물 특성상, 기본 지식은 그 인물을 이해하는 데 아주 효과적인 장치가 된다. 피아니스트를 알기 위하여 그들이 연주하는 곡의 작곡자들을 아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러기에 이 책에서는 초반부터 모차르트, 베토벤, 리스트 등 작곡자들의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클래식을 좋아하고 즐겨 듣는 사람이 아니라면, 평소에 이런 내용을 접할 기회는 많지 않을 것이지만 한 페이지에 (그들의 인생에 비하면) 짤막하게 요약된 글들 속에 흥미로운 에피소드들이 많아 흥미롭게 읽을 수 있다.

 

그리고 뒤이어 등장한 재미있는 코너는 '클래식 에티켓'이다. 클래식 콘서트에서의 아주 기본적인 매너들과 사소하지만 누구에게 물어보기 민망한 궁금증까지 다룬다. 책 속의 당연한 절차일지도 모를 클래식 에티켓을 모두 읽고 나면, 이제 피아니스트 손열음의 음악 속으로 깊이 들어갈 차례다.

 

클래식에 관심이 없다 보니 '손열음'이라는 이름도 어깨너머로 들어봤을 뿐이었지만, 이 책을 읽고 나니 그동안 나의 무심함이 살짝 미워졌다. 검색 한번, 유투브의 동영상 한번 클릭하면 수두룩하게 쏟아지는 그의 영상들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영상 하나를 눌러보았다. 지휘자가 손열음의 힘 있는 연주에 맞춰 따라가는 듯한 모습이 신기했다. 덧글 창에는 칭찬 일색이었다. 감동에 감동이라고.

 

『모노그래프』가 끌어내고 있는 그의 이야기 속에는 음악 천재로 주목받았던 그의 어린 시절부터, 준우승을 차지한 차이콥스키 콩쿠르까지의 오랜 과정이 담겨 있다. 절대음감, 초등학교 때 나갔던 국제 콩쿠르, 그리고 수상, 결코 잊을 수 없는 스승들의 이름까지. 전혀 다른 세상이라 여겼던 클래식 연주자의 삶에 신기한 감동을 할 무렵, 어떤 구절이 마음을 끈다.

 

"손열음은 공항 입국 심사대에서 직업을 물으면 '콘서트 피아니스트'라고 답한다.
'음악가'라고 하면 추가 질문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클래식 연주자를 딴 세상 사람처럼 생각하지만 똑같이 땀 흘리며 살아가는 직업인이다. (61p)"

 

 

인터뷰에서는 그 사람의 성격과 인성이 짧은 한마디에도 전해져오는데, 손열음의 인터뷰 또한 그렇다. 의외의 성격이 눈길을 잡는다. "야심도 없고, 고집도 없고, 경쟁심도 없는데 어떻게 최고가 될 수 있었을까." 에디터님의 말처럼 의아했지만, 솔직하면서도 무던한 말투가 읽기에도 받아들이기에도 편안하다. 한국의 클래식, 음악가들, 연주할 때의 감각 등 음악에 관한 진지한 이야기도 함께하지만, 좋아하는 술이나 요리, 휴가에 대한 소소한 이야기들도 있다. 클래식 연주자를 향한 원인 모를 경외심도 느껴지고 친근함도 느껴진다. 하지만 사람 자체가 재미있고 좋다, 라는 생각이 든 건 이 부분. "제2의 손열음을 꿈꾸는 후배들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은?"이라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한다. "더 큰 사람을 보고 꿈을 꾸세요. 하하" 왠지 호탕한 (또 다른 천재) 김연아 선수가 생각난다.



'음악'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책에서 만나기에 낯설고 당혹스러울 수 있다. 하지만 책에서 음악을 들을 수 없을 바에야, 읽고 난 뒤 '음악'으로 인도할 수 있다면 역할은 다 한 것 같기도 하다. 손열음의 음반, 손열음이 좋아하는 클래식 음악, 유투브 스타의 영상 등 다양한 '들을 거리'들도 가득 채우고 나면, 그것들을 직접 듣고 싶어질 것이다. 책을 덮고 난 후, 나도 음악을 틀었다. 손열음의 연주 중 건반과 혼연일체가 된 장면이 아른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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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 온다
한강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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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대해 많은 말을 하고 싶기도 하고, 포기한 채 입을 다물고 싶은 마음도 든다. 쓰다 보면 감정이 과잉될 것 같아 주저하지만,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고 있는 내가 과연, 넘칠 만큼이 아니더라도 감정을 느낄 자격이 있는 것인지 마음 한쪽이 싸해지기도 한다. 부끄럽다. 이 책을 왜 끝까지 외면해왔을까.


 꾹꾹 눌러 넣은 문장 속에 많은 감정이 뒤섞인다. "동호야"라는 가냘프고 애처로운 목소리와 그것과는 반대로 너무나 강한 이야기들이 마음 한쪽을 콕콕 쑤신다. 우리가 흘러가는 이야기로 듣고, 여러 곳에서 읽고 보아왔던 '기억'들이 우리 마음을 강하게 죄어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하지만 문득 그 감정이 간접적으로나마 그것을 경험한 사람 만큼에 비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겪어보지 못한 이들에게 숨 쉴 수 없을 만큼의 아프고 슬픈 감정들은 어느새 일상 속에서 다른 일들 사이로 스르르 사라져버리는 것은 쉬운 일이다. 어쩔 수 없이 금방 잊히는 것이다.


그런데 '한강'작가의 글은 이상하다. 도무지 빠르게 잊어버릴 수가 없다. '너'라는 이인칭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곳에 있던 사람들, 동호, 정대, 은숙 누나, 어머니, 수많은 사람의 눈을 통해 목격한 영상들 때문일지도 모른다. 작가는 텍스트 너머에 있는 독자들을 아주 조용히, 그곳으로 옮겨 놓는다.


그리고,
인간이 인간성을 버리는 그 순간들,
인간이 순결함과 양심을 지키기 위해 겪어야 했던 모든 고통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늘에서 양지로, 빠져나가야만 하는 애수 어린 과정을, 우리는 똑똑히 보고야 만다.
지켜보고 있는 우리의 눈은 시리다. 하지만 눈을 뗄 수가 없다.


 작가에게도 분명 어려운 시간이었을 것이다. 잔혹하고, 슬픔으로 흠뻑 젖은 시간과 공간을 마주하면서 고통스러운 것은 물론이고, 전달자의 역할로서는 더 많은 고통을 받았을 것이다. 그것을 어떻게 전해야 하나 고민했을 것이다. "제대로 써야 합니다. 아무도 내 동생을 더이상 모독할 수 없도록" 부담과 좌절감이 상당했을 것이다. 그는 얼마만큼의 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펜 끝에 모아둔 모든 이야기를 잠시나마 놓을 수 있었을까?

 

하지만 지금, 눈을 뜨고 있는 한, 응시하고 있는 한 끝끝내 우리는......

 

현재의 한국문학에서 그려내고 있는 쓰디쓴 이야기 중에서도, 너무나도 견딜 수 없게 쓰디쓴 이 이야기는, 상처를 온전히 내보이면서도 희망적인 밝은 불빛을 내고 있다. 사실 밝은 빛이란, 어쩌면 어두운 곳에서의 작은 촛불 하나일지도 모르겠지만, 그 촛불 하나의 잔상은 어쩌면 더 먼 곳까지 닿을 수 있기에. 희망을 품어도 되지 않을까. (확신보단 바람이지만 말이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가 알고 있을 것이다. "동호야" 라는 가냘픈 목소리를. 소리없는 울음을. 본능적으로 달아날 수밖에 없었던 미련스런 마음을. 그리고, 해야 할 일과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할 일을. 무엇을 응시해야 하는지를.

 

- 담아둔 문장


45쪽,
체머리 떠는 노인의 얼굴을 너는 돌아본다. 손녀따님인가요, 묻지 않고 참을성 있게 그의 말을 기다린다. 용서하지 않을 거다. 이승에서 가장 끔찍한 것을 본 사람처럼 꿈적거리는 노인의 두 눈을 너는 마주 본다. 아무것도 용서하지 않을 거다. 나 자신까지도.


79쪽,
거칠게 꿰매어진 문장들, 문단째로 검게 지워진 자리들, 우연히 형상을 드러낸 단어들을 그녀는 생각한다. 당신을. 나는. 그것은. 아마도. 바로. 우리들의. 모든 것이. 당신은. 어째서. 바라봅니다. 당신의 눈은. 가까이에서 멀리에서. 그것은. 또렷이. 지금. 좀더. 희미하게. 왜 당신은. 기억했습니까. 숯이 된 문장과 문장들 사이에서 그녀는 숨을 몰아쉰다. 어떻게 분수대에서 물이 나옵니까. 무슨 축제라고 물이 나옵니까.


115쪽,
모든 사람이 기적처럼 자신의 껍데기 밖으로 걸어나와 연한 맨살을 맞댄 것 같던 그 순간들 사이로, 세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숭고한 심장이. 부서져 피 흘렸던 그 심장이 다시 온전해져 맥박 치는 걸 느꼈습니다. 나를 사로잡은 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선생은 압니까, 자신이 완전하게 깨끗하고 선한 존재가 되었다는 느낌이 얼마나 강렬한 것인지. 양심이라는 눈부시게 깨끗한 보석이 내 이마에 들어와 박힌 것 같은 순간의 광휘를.


134쪽,
그러니까 인간은 근본적으로 잔인한 존재인 것입니까? 우리들은 단지 보편적인 경험을 한 것뿐입니까? 우리는 존엄하다는 착각 속에 살고 있을 뿐, 언제든 아무것도 아닌 것, 벌레, 짐승, 고름과 진물의 덩어리로 변할 수 있는 겁니까? 굴욕당하고 훼손되고 살해되는 것, 그것이 역사 속에서 증명된 인간의 본질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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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백한 잠 밀리언셀러 클럽 145
가노 료이치 지음, 엄정윤 옮김 / 황금가지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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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추리 혹은 스릴러 소설이라면, 비밀을 찾아가는 과정의 쫄깃한 기분과 두근거림이 일품입니다. 그것을 좋아하는 독자들은 일부러라도 이런 책들을 찾아 나서서 그 기분을 오래도록 느끼고 싶어 하는 것 같아요. 저는 그 정도는 아니지만, 아주 가끔 숨막히는 속도감을 즐겨보려 하는 편인데요. 간혹, "이 작품 또 쫄깃하겠구나"하는 와중에, 독특한 기분을 느낄 때가 있어요. 바로, 스릴러 속의 '감성'이죠. 이런 작품들은 작가의 관점에서 특히나 더 풀어내기 어렵다고, 개인적으로는 생각합니다. 스릴러나 추리 쪽에서는 자칫하면 좀 지루해질 수도 있거든요.

 

통곡하던 남자의 모습이 머릿속 어딘가에서 떠나지 않았다. 탐정 일을 하던 시절에 가장 싫었던 일이 피해자의 가족과 만나 그들의 슬픔을 직접 봐야 하는 것이었다. (24쪽)

 

이 작품이 작가와의 첫 인연은 아니고, 전에 『환상의 여자』라는 작품을 만나본 적이 있습니다. 『창백한 잠』만큼 분량이 많았고, 그때도 묵직한 이야기 속에 세세한 감정선이 드러나 있어 미묘한 기분으로 읽었었죠. 이번 작품 또한 감성적인 부분이 크게 도드라진 느낌입니다. 끔찍한 살인사건에 너무 자세히 집중하지 않고, 그것과 관계된 사람들의 심리적 관계와 사회적 분위기에 집중하는 편이지요. 흡인력은 좋지만, 속도감은 '추리소설'치고는 약간 잔잔하게 느껴집니다. (이 느낌이 나쁘진 않고 좋았어요. 독자에 따라 다를 것 같습니다) 주인공의 독백과 상황 묘사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소설은 폐허가 된 작은 어촌 마을을 묘사하면서, 그곳을 둘러싼 공항 건설계획에 대한 두 입장을 초반부터 드러냅니다. 공공개발과 자연파괴. 각각의 입장에 선 마을 사람들의 논쟁을 살인사건 이면에 다루고 있지요. 하지만 그것의 옳고 그름을 가리진 않으면서, 관련된 다른 사건으로 중심을 옮겨갑니다. 일종의 함정이자 반전인데, 저는 사회 비판 쪽으로 더 흘러갔으면 해서 살짝 아쉬운 마음은 있었습니다. 이야기 구성 면에서 뭔가 뚝뚝 끊기는 느낌이 들기도 했고요.

 

우리는 부두 끝에 나란히 섰다. 항구의 콘크리트 슬로프에 양륙되어 늘어선 어선 중 몇 척은 선체가 녹슬고 낡아서 마치 난파선 같았다. 그 뒤편에는 키가 작은 집들이 납죽 엎드린 것처럼 띄엄띄엄 서 있었다. "뭘까요, 다쓰미 씨. 소중한 것들이 매일 조금씩 사라지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어요." (267쪽)

 

하지만 폐허가 된 마을의 을씨년스러운 잿빛 풍경과, 그것에 몰입한 주인공의 모습이 색다른 느낌으로 다가왔습니다. 전직 탐정답게 살인사건을 만나자 (마음은 밀어내지만 머리로는) 홀린 듯 빠져들어 가는 모습이 흥미롭기도 했고요. 왠지 작가가 이 작품에서는 살인사건보다 전체적인 분위기와 주인공의 심리에 많은 공을 들인 느낌이었습니다.

 

여러 추리소설이 그러하듯이, 결말은 '인간'의 욕망과 이기심으로 귀결됩니다. 그러기에 마지막까지 씁쓸함과 여운이 길게 남습니다. "군청색의 세계 속에 오도카니 홀로 실루엣을 드러내고 있는 폐허"를 다룬 남다른 분위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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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리처드 포드 지음, 곽영미 옮김 / 학고재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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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포드 (지은이) | 곽영미 (옮긴이) | 학고재 | 2016-01-20

 

 

남겨진 생각들

 

 "나는 우선 우리 부모가 저지른 강도 사건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다음에는 나중에 일어난 살인 사건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라는, 이 책의 첫 문장을 보고 놀랐고, 『이방인』의 "오늘 엄마가 죽었다." 라는 문장 만큼이나 강렬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곤, 다음에 오는 문장에 난감해하고 말았다. "이 세상에 절대로 은행을 털지 않을 사람이 딱 둘 있다면 우리 부모님이었을 것이다."

그러던 부모님이 왜 은행을 털었을까. 금전적인 어려움 때문이었다고는 하지만, 거기에는 어떤 필연과 우연이 뒤섞여있었던 것일까?

 '만약에'와 '나였다면'이라는 가정을 해보지 않고는 지나칠 수가 없다. 만약에, 나였다면 어떤 행동을 할 수 있었을까? 내가 주인공이었다면 한순간에 엎질러진 모든 상황에 어떻게 대응할 수 있었을까? 소설 『캐나다』는 한 가족을 뒤엎은 '나쁜' 상황에 관한 이야기를 그린다. 공군 대위였던 아버지와 교사였던 어머니가 은행강도가 되고, 가족은 뿔뿔이 흩어진다. 그리고 '델'이라는 한 소년은 그 모든 상황을 바라본다. 여느 때와 다른 부모님의 아주 작은 변화의 행동들, 불안한 예감들, 미스터리하기까지한 상황들, 묘한 긴장 속에 있는 것 같은 순간들을 소설 속에서 아주 차분하게 살펴낸다.

 모든 것을 곧게 바로잡아주고 있던 '가족'이라는 기둥이 무너진 그에게 인생은 막다른 길에 불과하다. 하지만 낙담하지 않고 나름대로, 거침없는 항해를 시작한다. 엄마가 들려주었던 시인 예이츠의 명언 "찢겨 보지 않은 것은 완전해질 수 없다"라는 말이 '델'의 인생 속에서 절대로 잊히지 않고 남아있는 것처럼 '델'은 계속해서 걸어간다. 그리고 마침내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땅을 발견한다. 부모님을 잃은 소년 혹은 미국인, 그 어떤 것으로도 대변될 수 없는 '진정한 나'의 모습을 찾아낼 수 있는 곳, '캐나다 (Canada)'.

 소년의 길고 긴 항해는 최근에 감명 깊게 읽었던 책, 『황금 물고기』속 소녀의 모습과 비슷해서, 코끝 찡한 감동이 일었다. "그런 상황에 부닥쳐 보기 전에는 어떻게 행동할지 아무도 모른다(213쪽)"는 말처럼, 우리 누구도 인생을 확신할 수 없지만, 그저 나아가고 노력하는 것이 답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 미스터리 인생에서, '내 삶의 증거'와 '내가 누구라고 믿는 것(411쪽)'이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조용히 전해주고 있었다.

 인생의 교훈을 차분하고 유려한 문장으로 전해주었던 소설 『캐나다』. 이야기적인 부분에서는 지루함 없이 읽었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각각 맞닿은 사건들과 문장에서 삶에 관한 차분한 시선이 느껴져서 여운이 깊게 남았다. 소설의 긴 호흡을 따라가다 보면 삶의 잔잔한 물결을 만나볼 수 있으리라.

Written By. 리니

 

내게는 이것이 매혹적이지만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절벽 끝처럼 느껴진다. 표면적으로는 삶이 변한 게 없었던 만큼 두 사람은 여행하는 내내 이야기하고 비밀을 나누고 애정 섞인 말을 주고받았다. 그들은 그때 흉악범이 아니었다. 정상(正常)이라는 것이 얼마나 멀리까지 연장될 수 있는지 놀랍지 않은가. 뗏목을 타고 바다로 나가면 육지가 점점 작아지듯, 아니면 기구를 타고 대초원의 바람기둥에 휩쓸려 올라갈 때 땅이 넓어지고 평평해지면서 아래 세상이 점점 흐릿해지듯, 정상으로부터 멀어지면서도 어찌 하여 여전히 그것이 시야 안에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인가. (127쪽)

"학교는 걱정하지 마."

"계획을 얼마나 많이 세워 놨는데." 내가 말했다.

"나도 알아. 누구에게나 계획은 있어." 어머니는 이런 어리석은 대화를 그만하고 싶은지 고개를 저었다. 어머니가 나를 보고 안경 너머로 눈을 깜박였다. 지쳐 보였다. "유연해져야 한다." 어머니가 말했다. "유연하지 않으면 큰 사람이 될 수 없어. 엄마도 유연해지려고 노력해."

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안다고 생각했지만 다른 의미가 있는 것도 같았다. "이치에 닿다"라는 말처럼. 나는 어떤 유연함을 뜻하든 내가 그렇지 않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188쪽)

나는 지금 동화되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동화되거나 그들을 위해 동화되는 것이 아니라 혼자 동화되었다. 동화되는 건 그렇게 어렵지도 위험하지도 영구적일 필요도 없을지 모른다. 이런 생각이 들자 또다른 해방감을 들면서 인생이 다시 시작되는 것 같고, 앞서 말했듯이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가는 듯했다. 정체되어 있지 않고 계속 움직이는 사람 말이다. 움직임은 세상 만물의 섭리였다. 좋든 싫든 나를 둘러싼 세상은 내가 어떻게 느끼든 계속 변할 것이다. (330쪽)

플로렌스는 뻣뻣하게 일어섰다. 그녀는 키가 크지 않았고 어머니처럼 날씬하지도 않았다. 갈색 코르덴바지를 솔로 털어 낸 뒤 몸이 추워졌는지 온몸을 흔들고 양어깨와 펄럭이는 모자를 툭툭 쳤다. 나는 격자무늬 재킷을 입고 있었다. 확실히 추웠다. "여기가 캐나다여서 그럴 걸." 그녀는 히죽 웃었다. "우리가 늘 정해 놓고 다니는 건 아니잖니." 그녀가 말했다. "때로는 그냥 그곳에 닿는 거지. 아서가 그랬어. 그렇게 된 거야. `난 미국에 가는 게 아냐, 파리를 떠나는 거지.` 이건 위대한 예술가 뒤샹이 한 말이야. 그가 내 그림을 보았다면 정말 웃기다고 생각했을걸." 그녀는 우체국과 텅 빈 거리 - 우리 앞 광경 - 를 그린 그림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난 맘에 들어. 전부는 아니지만." 그녀가 말했다. (3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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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에서 하늘 보기 - 황현산의 시 이야기
황현산 지음 / 삼인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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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현산 (지은이) | 삼인 | 2015-11-16

 

 

 

 남겨진 생각들

 

  시집에 있는 공백이 두려울 때가 있었다. 동화책, 예쁜 에세이 같은 것들에도 더 큰 공백이 존재하지만, 시집은 달랐다. 비어있는 공간을 생각과 사색으로 채우고 문장은 어떤 것인지 해석해내야만 하는 부담이 막막함을 불러왔다. 그럴 땐 시인이 쓴 에세이, 시에 관한 이야기들을 읽고서 마음을 채우곤 했는데, 『우물에서 하늘 보기』도 그런 의도에서 고른 것이다. 이런 책을 읽으면 마음속에 있는 어떤 부담이 조금 덜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어찌 됐든 소설도, 에세이도, 시집도, 독서에 대한 즐거움을 얻기 위함이니 부담을 벗어던지고 좋은 것들을 걸러내 읽으면 그만인데, 언제나 이런 반복이다.

 

 이 책은 황현산 평론가가 2014년 한 해 동안, <한국일보>에 연재한 '시화(詩話)'들을 담은 것이다. '시론(時論)'이라 하면 분명 따분한 뭔가를 생각할 것을, '시화'라고 하니 가깝게 다가갈 수 있는 편안한 마음이 생긴다. 하지만 가볍게 읽을 수만은 없다. '시'라는 것의 어떤 꼭짓점에서 이어진 선들은 우리가 잊고 산 (시간이 흐르면서 지워질 수밖에 없는) 어떤 현실에 가 닿기 때문이다. "시에는 한 편 한 편마다 무언지 모를 극단적인 것이 있다"라는 프랑스의 시인 '레몽 크노'의 말을 인용하며 시작하는 이 책은, 독자들이 시를 통해 느낄 수 있는 '극단'을 보다 풍성하게 느끼게 하기 위함이다. 그가 말하기를, '극단'은 이런 것이다. 시적인 무엇, 시적 상태로 이르기까지의 모든 것들, 각성, 자유……. 그 모든 것들을 느끼게 하기 위하여, 작가는 나름대로 풍성한 이야기를 덧대어 시를 '해석해내고' 있다.

 

 그리고 그 해석은 명쾌하다. 정답이 없는 문학에 적절한 표현인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명쾌하다'고 말하는 것은 작가가 하나의 시에 꺼내놓은 풍성한 지식과 이야기, 문장들이 내게 온전히 받아들여졌다는 의미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그저 스쳐 보냈던 이육사의 「광야」를 몇 번을 돌려가며 읽어보고, 김종삼의 「민간인」에 어린 처절한 슬픔을 느꼈다. 진이정의 시 「지금 이 시간의 이름은 무엇입니까」를 보고 이 시를 절대 잊지 못할 거로 생각했고, 훑어내린 최승자의 시집을 다시 읽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렇게, 기억해두어야 할 수많은 시가 내게로 흘러들어왔다.

 그뿐만 아니라, 현실에 부딪힌 시 이야기는 우물에서 하늘을 바라보는 것만큼 막막하고 아득한 세상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데, 연재될 당시 크나큰 슬픔이었던 세월호 사건을 비롯하여 누군가의 치열한 삶과 죽음을 전한다. 애달프고 먹먹한 감정이 읽는 내내 사라지질 않았다. 우리는 언젠가 그 우물에서 건져질 수 있을까.

 

​ 이 책이 좋았던 것은 설득하려 애쓰지 않는데도, 누군가를 설득시키고야 마는 글의 매력 때문이었다. 그는 그가 바라본 시인의 마음을, 사랑해마지않는 시의 세계를, 규정하고 있는 시에 대한 것들을 온전히 독자에게 전해주면서도, 하나하나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는 것 같았다. 현실을 품고 꾹꾹 눌러, 아주 작은 구멍만 남겨둔 시들을 어서 읽어주고 느껴주기를 바라면서.

 

 

Written By. 리니

 

 

그는 눈앞에 다가온 자신의 죽음을 내다보며, 저 눈먼 무사만큼 절박한 처지에서 "지금 이 시간의 이름은 무엇입니까"라고 묻는 시를 썼다. 시간이 흘러가며 잠시 만들어 놓았던 것에 그는 끊임없이 이름을 붙인다. 그게 무슨 소용이겠는가. 이름 붙일 수 없는 시간이 이 모든 이름을 휩쓸어갈 것이다. 그러나 어찌 이름을 붙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름은 벌써 시인 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시간 속에 명멸하는 모든 것들을 그 이름으로 한 순간이라도 붙잡아 두려는 모든 열정을 위한 것이다. (69쪽)


시인들은 속절없이 시를 썼다. 아들딸을 잃고 시를 썼고, 때로는 불행한 부모들을 대신해서도 시를 썼다. 그 절망감에서 벗어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비애의 극한이 잊힐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정지용은 「유리창」을 썼고, 김광균은 「은수저」를 썼고, 김현승은 「눈물」을 썼다. 김종삼은 더 많은 시를 썼다. 「음악」과 「배음」이, 「무슨 요일일까」가 모두 죽은 아이를 위한 시이며, 두 편의 「아우스뷔츠」에도 그 중심에는 어린 생명의 죽음이 있다. 가장 처절한 시 「민간인」은 그의 사후 광릉 근처에 세운 그의 시비에 새겨졌다. (93쪽)

나태와 무책임에 형식이 없듯 악의 심연에도 형식이 없다. 미뤄둔 숙제가 우리를 무력하게 만들었고, 쌓아준 죄악이 우리를 마비시켜, 우리는 제가 할 일을 내내 누군가 해주기만 기다리며 살았다. 누군가 해줄 일은 아무도 하지 않는 일이다. 아니 기다리지도 않았다. 책 한 줄 읽지 않고도 모든 것을 다 아는 우리들은 "산다는 게 이런 것이지"같은 말을 가장 지혜로운 말로 여기며 살았다. 죄악을 다른 죄악으로 덮으며 산 셈이다. 숨쉴 때마다 들여다보는 핸드폰이 우리를 연결해주지 않으며 힐링이 우리의 골병까지 치료해줄 수 없으며, 품팔이 인문학도 막장드라마도 우리의 죄를 씻어주지 않는다. 실천은 지금 이 자리의 실천일 때만 실천이다. 진정한 삶이 이곳에 없다는 말은 이 삶을 포기하자는 말이 아니라, 이 삶을 지금 이 모양으로 놓아둘 수 없다는 말이다. (98쪽)

시 쓰기는 끊임없이 희망하는 방식의 글쓰기다. 다른 말로 하자면 시가 말하려는 희망은 달성되기 위한 희망이 아니라 희망 그 자체로 남기 위한 희망이다. 희망이 거기 있으니 희망하는 대상이 또한 어딘가에 있다고 믿는 희망이다.

꽃을 희망한다는 것은 꽃을 거기 피게 한 어떤 아름다운 명령에 대한 희망이며, 맑은 물을 희망한다는 것은 물을 그렇게 맑게 한 어떤 순결한 명령에 대한 희망이다. 시를 읽고 쓰는 일은 희망을 단단히 간직하는 일이다. (26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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