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소년이 온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평점 :
이 책에 대해 많은 말을 하고 싶기도 하고, 포기한 채 입을 다물고 싶은 마음도 든다. 쓰다 보면 감정이 과잉될 것 같아 주저하지만,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고 있는 내가 과연, 넘칠 만큼이 아니더라도 감정을 느낄 자격이 있는 것인지 마음 한쪽이 싸해지기도 한다. 부끄럽다. 이
책을 왜 끝까지 외면해왔을까.
꾹꾹 눌러 넣은 문장 속에 많은 감정이 뒤섞인다. "동호야"라는 가냘프고 애처로운 목소리와 그것과는 반대로 너무나 강한 이야기들이
마음 한쪽을 콕콕 쑤신다. 우리가 흘러가는 이야기로 듣고, 여러 곳에서 읽고 보아왔던 '기억'들이 우리 마음을 강하게 죄어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하지만 문득 그 감정이 간접적으로나마 그것을 경험한 사람 만큼에 비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겪어보지 못한 이들에게 숨 쉴 수
없을 만큼의 아프고 슬픈 감정들은 어느새 일상 속에서 다른 일들 사이로 스르르 사라져버리는 것은 쉬운 일이다. 어쩔 수 없이 금방 잊히는
것이다.
그런데 '한강'작가의 글은 이상하다. 도무지 빠르게 잊어버릴 수가 없다. '너'라는 이인칭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곳에 있던 사람들,
동호, 정대, 은숙 누나, 어머니, 수많은 사람의 눈을 통해 목격한 영상들 때문일지도 모른다. 작가는 텍스트 너머에 있는 독자들을 아주 조용히,
그곳으로 옮겨 놓는다.
그리고,
인간이 인간성을 버리는 그 순간들,
인간이 순결함과 양심을 지키기 위해 겪어야 했던 모든 고통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늘에서 양지로, 빠져나가야만 하는 애수 어린 과정을, 우리는 똑똑히 보고야 만다.
지켜보고 있는 우리의 눈은 시리다. 하지만
눈을 뗄 수가 없다.
작가에게도 분명 어려운 시간이었을 것이다. 잔혹하고, 슬픔으로 흠뻑 젖은 시간과 공간을 마주하면서 고통스러운 것은 물론이고,
전달자의 역할로서는 더 많은 고통을 받았을 것이다. 그것을 어떻게 전해야 하나 고민했을 것이다. "제대로 써야 합니다. 아무도 내 동생을 더이상
모독할 수 없도록" 부담과 좌절감이 상당했을 것이다. 그는 얼마만큼의 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펜 끝에 모아둔 모든 이야기를 잠시나마 놓을 수
있었을까?
하지만 지금, 눈을 뜨고 있는 한, 응시하고 있는 한 끝끝내 우리는......
현재의 한국문학에서 그려내고 있는 쓰디쓴 이야기 중에서도, 너무나도 견딜 수 없게 쓰디쓴 이 이야기는, 상처를 온전히 내보이면서도 희망적인
밝은 불빛을 내고 있다. 사실 밝은 빛이란, 어쩌면 어두운 곳에서의 작은 촛불 하나일지도 모르겠지만, 그 촛불 하나의 잔상은 어쩌면 더 먼
곳까지 닿을 수 있기에. 희망을 품어도 되지 않을까. (확신보단 바람이지만 말이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가 알고 있을 것이다. "동호야" 라는 가냘픈 목소리를. 소리없는 울음을. 본능적으로 달아날 수밖에 없었던
미련스런 마음을. 그리고, 해야 할 일과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할 일을. 무엇을 응시해야 하는지를.
- 담아둔 문장
45쪽,
체머리 떠는 노인의 얼굴을 너는 돌아본다. 손녀따님인가요, 묻지 않고 참을성 있게
그의 말을 기다린다. 용서하지 않을 거다. 이승에서 가장 끔찍한 것을 본 사람처럼 꿈적거리는 노인의 두 눈을 너는 마주 본다. 아무것도 용서하지
않을 거다. 나 자신까지도.
79쪽,
거칠게 꿰매어진 문장들, 문단째로 검게 지워진 자리들, 우연히 형상을 드러낸
단어들을 그녀는 생각한다. 당신을. 나는. 그것은. 아마도. 바로. 우리들의. 모든 것이. 당신은. 어째서. 바라봅니다. 당신의 눈은.
가까이에서 멀리에서. 그것은. 또렷이. 지금. 좀더. 희미하게. 왜 당신은. 기억했습니까. 숯이 된 문장과 문장들 사이에서 그녀는 숨을
몰아쉰다. 어떻게 분수대에서 물이 나옵니까. 무슨 축제라고 물이 나옵니까.
115쪽,
모든 사람이 기적처럼 자신의 껍데기 밖으로 걸어나와 연한 맨살을 맞댄 것 같던
그 순간들 사이로, 세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숭고한 심장이. 부서져 피 흘렸던 그 심장이 다시 온전해져 맥박 치는 걸 느꼈습니다. 나를 사로잡은
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선생은 압니까, 자신이 완전하게 깨끗하고 선한 존재가 되었다는 느낌이 얼마나 강렬한 것인지. 양심이라는 눈부시게 깨끗한
보석이 내 이마에 들어와 박힌 것 같은 순간의 광휘를.
134쪽,
그러니까 인간은 근본적으로 잔인한 존재인 것입니까? 우리들은 단지 보편적인
경험을 한 것뿐입니까? 우리는 존엄하다는 착각 속에 살고 있을 뿐, 언제든 아무것도 아닌 것, 벌레, 짐승, 고름과 진물의 덩어리로 변할 수
있는 겁니까? 굴욕당하고 훼손되고 살해되는 것, 그것이 역사 속에서 증명된 인간의 본질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