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백한 잠 밀리언셀러 클럽 145
가노 료이치 지음, 엄정윤 옮김 / 황금가지 / 2016년 2월
평점 :
절판


 

추리 혹은 스릴러 소설이라면, 비밀을 찾아가는 과정의 쫄깃한 기분과 두근거림이 일품입니다. 그것을 좋아하는 독자들은 일부러라도 이런 책들을 찾아 나서서 그 기분을 오래도록 느끼고 싶어 하는 것 같아요. 저는 그 정도는 아니지만, 아주 가끔 숨막히는 속도감을 즐겨보려 하는 편인데요. 간혹, "이 작품 또 쫄깃하겠구나"하는 와중에, 독특한 기분을 느낄 때가 있어요. 바로, 스릴러 속의 '감성'이죠. 이런 작품들은 작가의 관점에서 특히나 더 풀어내기 어렵다고, 개인적으로는 생각합니다. 스릴러나 추리 쪽에서는 자칫하면 좀 지루해질 수도 있거든요.

 

통곡하던 남자의 모습이 머릿속 어딘가에서 떠나지 않았다. 탐정 일을 하던 시절에 가장 싫었던 일이 피해자의 가족과 만나 그들의 슬픔을 직접 봐야 하는 것이었다. (24쪽)

 

이 작품이 작가와의 첫 인연은 아니고, 전에 『환상의 여자』라는 작품을 만나본 적이 있습니다. 『창백한 잠』만큼 분량이 많았고, 그때도 묵직한 이야기 속에 세세한 감정선이 드러나 있어 미묘한 기분으로 읽었었죠. 이번 작품 또한 감성적인 부분이 크게 도드라진 느낌입니다. 끔찍한 살인사건에 너무 자세히 집중하지 않고, 그것과 관계된 사람들의 심리적 관계와 사회적 분위기에 집중하는 편이지요. 흡인력은 좋지만, 속도감은 '추리소설'치고는 약간 잔잔하게 느껴집니다. (이 느낌이 나쁘진 않고 좋았어요. 독자에 따라 다를 것 같습니다) 주인공의 독백과 상황 묘사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소설은 폐허가 된 작은 어촌 마을을 묘사하면서, 그곳을 둘러싼 공항 건설계획에 대한 두 입장을 초반부터 드러냅니다. 공공개발과 자연파괴. 각각의 입장에 선 마을 사람들의 논쟁을 살인사건 이면에 다루고 있지요. 하지만 그것의 옳고 그름을 가리진 않으면서, 관련된 다른 사건으로 중심을 옮겨갑니다. 일종의 함정이자 반전인데, 저는 사회 비판 쪽으로 더 흘러갔으면 해서 살짝 아쉬운 마음은 있었습니다. 이야기 구성 면에서 뭔가 뚝뚝 끊기는 느낌이 들기도 했고요.

 

우리는 부두 끝에 나란히 섰다. 항구의 콘크리트 슬로프에 양륙되어 늘어선 어선 중 몇 척은 선체가 녹슬고 낡아서 마치 난파선 같았다. 그 뒤편에는 키가 작은 집들이 납죽 엎드린 것처럼 띄엄띄엄 서 있었다. "뭘까요, 다쓰미 씨. 소중한 것들이 매일 조금씩 사라지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어요." (267쪽)

 

하지만 폐허가 된 마을의 을씨년스러운 잿빛 풍경과, 그것에 몰입한 주인공의 모습이 색다른 느낌으로 다가왔습니다. 전직 탐정답게 살인사건을 만나자 (마음은 밀어내지만 머리로는) 홀린 듯 빠져들어 가는 모습이 흥미롭기도 했고요. 왠지 작가가 이 작품에서는 살인사건보다 전체적인 분위기와 주인공의 심리에 많은 공을 들인 느낌이었습니다.

 

여러 추리소설이 그러하듯이, 결말은 '인간'의 욕망과 이기심으로 귀결됩니다. 그러기에 마지막까지 씁쓸함과 여운이 길게 남습니다. "군청색의 세계 속에 오도카니 홀로 실루엣을 드러내고 있는 폐허"를 다룬 남다른 분위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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