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는 올바른 정치의 출발이 '정명'(正名), 즉 이름을 바로 하는 일이라고 했다는데, 현대 정치 세계처럼 이름들이 혼란스러운 경우도 없다.

'민주주의'니, '자유주의'니, '사회주의'니 하는 말들이 쓰는 사람에 따라 다 다른 뜻으로 쓰인다. 반공주의자들은 공산주의에 맞서 '민주주의'를 지키자고 하고 공산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인민민주주의 체제만이 참된 '민주주의'라고 선전하는 식이다. '민주주의'라는 하나의 기표 안에 정반대 의미들이 경합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마치 수학의 세계처럼 학자들이 표준적인 정의(定義)를 제시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정치 용어의 생산자는 학자들이 아니라 어떤 식으로든 현실 정치에 참여하는 생활인들 자신이기 때문이다. 가령 <조선일보>가 아무데나 다 '좌파' 딱지를 붙인다고 해서 그것을 "무식하다"고만 이야기할 수는 없다. 차라리 세계 정치 용어 사전의 '좌파' 항목에 한국 보수 언론의 독특한 용법을 용례 중 하나로 추가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어쨌든 교통정리는 필요하다. 같은 기표의 이면에 자리한 동상이몽들을 일목요연한 지도(地圖)로 정리해주는 작업이 있어야만 한다. 그래야만 생활인들이 이 지도를 참고삼아 좀 더 정돈된 사고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쓸데없는 말다툼은 줄이고 토론의 격을 높이며 합의의 지대를 제대로 다질 수 있을 것이다.

이 작업이야말로 민주 사회에서 정치학자들의 중요한 사회적 임무 중 하나다. 한국 자유주의의 역사적 계보를 그리는 작업을 벌여온 정치학자 이나미는 최근작 <한국의 보수와 수구>(지성사 펴냄)를 통해 이러한 정치학자의 과제를 충실히 수행했다. 이 책은 정치 용어 중에서도 특히 뜨거운 논쟁의 한 가운데에 있는 '보수'와 '수구'에 대해 친절한 지도를 제시하려 시도한다.

"현실을 지키자"는 보수와 "과거로 돌아가자"는 수구


▲ <한국의 보수와 수구>(이나미 지음, 지성사 펴냄). ⓒ지성사
저자는 결코 불편부당한 채 하며 이 과제에 임하지는 않는다. 이 책의 첫 몇 쪽만 훑어봐도 저자가 기본적으로 진보파의 입장에 서 있다는 것을 대번 알 수 있다. 가령 자칭 보수파 치고 "진보는 인간의 특징이요, 보수는 동물의 특징이다"(13쪽) 같은 문장을 읽고 평정심을 유지하기란 쉽지 않으리라. 저자는 아주 솔직하게 당파적이다.

이런 점에서 <한국의 보수와 수구>가 가장 설득력 있게 다가갈 독자층은 저자와 마찬가지로 진보파의 시각을 가진 이들이다. 이런 독자들에게 이 책은 이들이 극복해야 할 상대들에 대한 아주 훌륭한 안내서 역할을 한다. 이 책은 300여 쪽에 걸쳐 한국의 보수 집단이 어떠한 이들인지, '보수'라고 불리는 게 적당한 이들과 '수구'라고 불리는 게 적당한 이들 사이의 차이는 무엇인지, 이들의 강점은 무엇이고 약점은 무엇인지, 소상히 짚어나간다. 이 땅의 진보파에게는 <삼성공화국> 같은 책만큼이나 훌륭한 '지피지기(知彼知己)'의 수단인 셈이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저자는 흔히 '우파'로 통칭되는 정치적 흐름들 중에서 '보수'와 '수구'를 엄밀히 구별한다. 사실 이러한 구분은 한국의 정치 세계에서는 아주 중요한 관심사다.

많은 이들이 <조선일보>나 <중앙일보> 같은 극우 성향 신문들을 '보수' 언론이라 하기보다는 '수구' 언론이라 불러야 한다고 믿는다. 이들에게 '보수'는 뭔가 합리적이고 상식이 통하는 사회에 있음직한 한 흐름이라면, '수구'는 그런 사회 자체에 역행하는 암적인 존재를 뜻한다. 그래서 한나라당, 조·중·동, 재벌 등으로 대표되는 한국의 우파 세력은 '보수'가 아니라 '수구'일 뿐이며, 한국 사회에서는 반(反) 수구 투쟁이 현안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그런데 저자의 '보수'/'수구' 구분은 이러한 통상적인 용법과 차이가 있다. 어쩌면 이 차이, 통상적인 '보수'/'수구' 구분에 대한 이러한 개입이야말로 <한국의 보수와 수구>의 핵심 테마라 하겠다.

이나미는 서구 근대 형성 과정에서 등장한 '보수'와 '수구'의 분기(分岐)에 주목하며 그 보편적인 맥락에서 한국 사회 지배 이데올로기의 '보수'적 요소와 '수구'적 요소를 식별한다. 그에 따르면, '보수'는 "현실을 지키자"는 보수주의(conservatism)이며, '수구'는 "과거로 되돌아가자"는 반동주의(reactionism)다. 자유주의/자유민주주의, 실리주의/실용주의, 반공주의 등의 저류에 흐르는 것이 보수의 계보이고, 반면 수구의 계보는 반자유주의, 국가주의, 유교/기독교 근본주의에서 확인할 수 있다.

위험을 무릅쓰고 단순화해보자면, 보수는 근대 자본주의의 지배 계급(자산 소유자들)이 현상 유지를 위해 선택하는 정치적 입장들을 뜻하며, 수구는 이미 역사의 유물이 된 이데올로기 자원들(군주제, 종교 근본주의 등)을 바탕으로 근대의 모순들에 대결하려는 나름대로 저항적이고 유토피아적인 경향들이다. 보수파는 실용인들이고, 수구파는 이념인들이다.

내가 보기에 이 책은, 수구는 몰라도, 적어도 보수에 대해서는 우리의 시야를 밝히는 힘을 갖고 있다. 보수의 관심사는 오직 현상 유지이기에 보수파는 그것에 이롭다면 어떠한 변신도, 궤도 수정도 감행할 수 있다. 그래서 노동자와 여성의 참정권에 반대하던 '자유주의'는 사회주의의 위협 앞에서 보통선거권을 인정하는 '자유민주주의'로 변신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저자의 날카로운 지적처럼, 그 사회주의의 위협이 역사 속 기억으로 사라진 우리 시대에는 다시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고전 자유주의가 회귀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 재벌 언론, 족벌 언론이 취하는 입장은 보수인가, 수구인가? 저자 자신은 직접 말하지 않지만, <한국의 보수와 수구>의 논리대로라면 이들은 수구라기보다는 보수라고 하는 게 더 적절할 것이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을 '좌파'라고 질타하다가도 때로 복지 제도 확대를 주장하는 이들의 갈지(之)자 행보에서 일관된 것은 결국 이 사회의 기득권층의 이해를 대변하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좋다는 단 한 가지 준칙이기 때문이다.

즉, 조·중·동을 지배하는 것은 신앙이라기보다는 실리다. 이 점을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 그래야 이들에 맞선 싸움이 신앙 대 신앙의 그것일 수 없으며 이제는 기생적이 된 어떤 사회 세력을 극복하는 일임을 깨닫게 된다. <조선일보>의 '좌파' 딱지 붙이기에 맞서 '수구' 딱지 붙이기에 열중할 일이 아니라 기득권 연합의 전략 구사를 분석하고 이해해야만 하는 것이다.

좀 더 파고들었으면 좋았을 물음들

그런데 <한국의 보수와 수구>는 보수론에 비해 수구론이 좀 미완의 느낌을 준다. 그렇다고 흥미 있는 분석이나 시사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가령 한국 수구 이념의 중요한 한 구성 요소인 국가주의를 다룬 부분이 그렇다. 이나미는 이 점에서 이승만의 일민주의, 박정희의 민족적 민주주의, 더 나아가 김일성의 주체사상 사이에 유사성이 있다고 지적한다. 일민주의라는, 지금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진 독재 이념이 주체사상과 놀랍도록 닮았었음을 확인하는 것은 분명 한반도 현대사에 대한 새로운 개안(開眼)의 기회다.

하지만 수구론이 보수론에 비해 파편적이라는 인상은 지울 수 없다. 저자는 한국 수구 이념의 주요 요소들로 반자유주의, 국가주의 그리고 유교/기독교 근본주의 등을 지적하는데, 그 담지자가 누구인지, 그리고 각 요소들 사이의 연관은 어떠한지에 대해서는 시원한 설명이 없다.

오히려 의문이 든다. 왜냐하면 보수 이념의 담지자로 지목한 이승만, 박정희 정권이 고스란히 수구 이념의 담지자로도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보수와 수구를 엄격히 구분하려는 저자의 의도와 어긋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왜 보수 이념과 수구 이념이 엄연히 다른데, 한국에서는 보수파가 수구 이념의 담지자이기도 했던 것인가? 이 책에서 아쉬운 것은 한국 사회에서 이렇게 보수파가 수구 이념을 일정하게 활용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명쾌하게 밝히지 않았다는 점이다.

내가 보기에 이 문제는 한국 사회 지배 계급의 특성과 연관되어 있는 것 같다. 국가를 중심으로 위로부터 육성된 탓에 일본 천황제 이데올로기와 일제말의 군국주의(더 나아가 만주국의 '파시즘+스탈린주의' 복합체까지)로부터 이어받은 국가주의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보수-수구 융합의 중요한 한 배경일 것이다. 그리고 현 지배 계급의 위신을 높여줄 이데올로기 자원이 그만큼 부족하다는 점이 유교 자본주의론이나 기독교 근본주의 같은 억지를 동원해야만 하는 이유일 것이다.

아무래도 좀 더 연구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러한 연구 방향을 잡도록 자극하는 점만으로도 <한국의 보수와 수구>는 나름대로 제 몫을 다했다고 할 수 있다. 적어도 "'보수'는 괜찮고 '수구'는 안 된다" 유의 시각에서 한 발 앞서 나아가도록 만들어준다는 점은 중대한 기여이고 뚜렷한 성취다. 이 책을 계기로 한국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사회 세력 간 관계라는 관점에서 분석하는 작업들이 더 활발히 이뤄지길 기대해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 책을 처음 보는 순간 내게 딱 맞는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목차와 본문을 훑으면서 띄엄띄엄 건너뛰다 보니 그 첫 느낌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우선은 그 제목처럼 내가 큰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음식'과 '요리'에 관한 책이었으며, 그에 대한 상세한 과학적 해석을 담아 놓은 것이 그 첫 인상의 원인이었다.

아무리 흥미로운 책일지라도 1300쪽이 넘는 크라운판의 베개 같은 책을 단숨에 읽어치울 방법은 없다. 해롤드 맥기의 <음식과 요리>(백년후 펴냄)는 일종의 전문 사전으로 참고용 책이기에 그렇게 단숨에 읽으라는 책도 아니다. 요리나 음식을 하며 필요할 때에, 또 궁금한 사항이 있을 때 해당 부분을 찾아서 보라는 일종의 공구서이다.

우선은 가장 궁금한 '고기'를 다룬 장부터 읽기 시작했다. 이 책 고기의 장은 색깔이 흰 고기와 붉은 고기의 차이부터 시작한다. 단기간에 많은 힘을 낼 수 있는 근육은 흰 고기이고, 꾸준히 힘을 낼 수 있는 근육은 붉은 고기라는 설명부터 나온다. 근육을 구성하는 섬유의 그림까지 그려져 있다.


▲ <음식과 요리>(해롤드 맥기 지음, 이희건 옮김, 백년후 펴냄). ⓒ백년후
거기에 우리가 먹는 동물들, 인간의 식육 역사, 사람들이 고기를 좋아하는 이유, 육식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 고기 섭취를 통한 감염, 광우병, 사육 동물을 통한 호르몬과 항생제의 섭취, 인도적인 고기의 생산, 근육 조직과 고기의 질감, 지방이 골고루 분포된 것이 고기의 맛과 관련이 있는지, 가축으로 기르는 동물들, 야생동물의 고기, 도축과 숙성, 포장과 보관, 방사선 조사, 고기를 적절한 질감을 지니도록 조리하는 방법, 고기를 조리하는 여러 가지 불에 관한 문제, 고기의 내장, 뼈, 가공한 고기 제품, 훈제나 건조 또는 소금에 절인 고기, 발효와 같은 끝도 없는 고기 이야기가 이어진다. 고기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은 다 이 책이 있다는 듯이.

물론 이것들이 고기에 대한 지식들의 전부일 수는 없다. 지역별로 다른 고기 요리들을 죄다 다룬 것도 아니며, 개별적인 지역 사람들의 고기 선호에 대한 지식도 이 책에는 없다. 고기에 관한 지식 가운데 가장 밑바탕에 깔린 이야기는 고기에 관한 과학적 지식이다. 이 과학적인 지식은 실제에도 아주 용하게 적용될 수 있는 지식이다.

고기는 어린 동물의 고기가 부드럽다고 선호하지만, 실제로는 풀을 뜯은 나이 든 동물의 고기가 풍부하고 깊은 맛을 낸다는 점, 또 우리가 흔히 '마블링'이라 부르는 근육 사이에 지방이 골고루 분포된 고기가 반드시 맛있는 고기가 아니라는 점과 같은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편견을 깨뜨릴 수 있는 지식들을 이 책은 공급한다. 또한 숙성이란 근육 효소의 작용에 의해 일어나며 일정한 정도 숙성이 되어야 맛이 좋아진다.

여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고기를 어떻게 하면 즙이 풍부하고 너무 익혀 푸석푸석해진 고기를 먹지 않을 수 있는지 구체적인 열과 요리법에 대한 지식들도 친절하게 전해준다. 고기에 익혀진 색깔을 예시하면서 고기에 일어난 화학적 변화를 이야기하는 데에는 주방에서 고기를 굽는 사람들에게는 '너무 나아간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읽는 독자가 거기까지 나아가기를 원치 않는다면 그냥 건너뛰고 맛있는 고기의 빛깔이 어느 정도여야 하는가만 읽어도 무방하다.

실제로 주방에서 사용하는 여러 요리의 기술들은 요리사들이나 음식을 하는 사람들이 오랜 경험을 통해서 터득한 지식이다. 선대에서 내려온 지식들도 있을 것이고 스스로 경험을 통해 터득한 기술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지식들이 전부 옳으냐에 대한 의문들은 여전히 남아 있다. 왜냐하면 여러 요리사들의 기술이 다르고 경우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 책은 그런 조리의 기술들에 과학적인 잣대를 들이대기 때문에 숙련된 요리사라면 거부감을 느낄 만도 하다. 그렇지만 다르게 생각한다면 이렇게 과학적 지식을 조목조목 요리의 과정에 대입한다는 것은 새로운 창의성을 위한 큰 발판을 마련하는 일이다. 과학은 때에 따라 변하지 않는 지식을 전해주기에, 새로운 시도가 논리적 합당성이 있어 성공할 것인가 실패할 것인가를 미리 예견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원리를 알고 그 응용을 넓힌다면 요리사의 요리는 한층 더 발전할 소지가 충분해지는 것이다.

이 책의 목차를 보면 서양 사람의 관점이 뚜렷하게 보인다. 박학다문의 저자는 서양의 것만이 아닌 우리의 김치나 젓갈들도 다루고 있고 꼭 서양의 것만이 아닌 지구촌 곳곳의 음식들에게도 일부 지면을 할애하고 있지만, 젖과 유제품에서 시작해서 와인, 맥주와 증류주로 끝나는 순서는 서양의 음식들을 대표한다. 자신의 관점에서 음식과 요리를 다루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서문에서 밝혔듯이 1984년에 발간된 초판에서 생선은 고기의 한 부분으로 다뤘다는 점도 서양 중심의 관점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생선 애호가의 권유에 의해 고기에서 생선을 따로 분리해서 서술했듯이, 서양 중심의 <음식과 요리>는 차츰 전 세계를 아우르는 것으로 나아가고 있는 듯하다. 이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이 세상 모든 음식의 방향과 일치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서양의 음식들이 동쪽으로 밀려들었지만 이제는 동쪽의 음식도 서쪽으로 번져가며, 음식의 재료뿐이 아닌 조리의 방식이나 형태들도 서로 활발하게 교환하고 있는 중이다. 여전히 지역의 음식들은 존재하지만 퓨전의 거센 물결은 차츰 그 위력을 더해가고 있다. 교통과 통신의 발달은 서양 음식이니 동양 음식이니 하는 구분을 희미하게 만들고 있는 중이다.

이 책의 또 다른 장점으로는 재미를 꼽을 수 있겠다. 오랜 동안 출판에 종사하며 수많은 책들을 펴낸 이 책의 번역자 이희건을 만났을 때 이 방대한 책의 번역에 얼마나 시간이 걸렸는지를 물었다. 돌아온 대답은 꼭 1년 전에 번역에 착수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감수와 편집에 걸린 시간을 빼면 거의 7~8개월에 번역을 마쳤다는 뜻이다.

그렇게 빨리 번역을 마칠 수 있으려면 무엇보다도 원저의 재미에 번역자가 빠져들어야 한다. 그래야만 피곤한줄 모르고 미친 듯이 번역에 몰두할 수 있다. 이 책을 읽으며 여느 공구서와는 다르게 책 읽는 재미에 빠져들 수 있다. 원저자의 문장은 마치 솜씨 좋은 문필가의 글처럼 유려하고 지식 전달에만 급급한 기색이 전혀 없다. 아마도 이 책의 원저가 장기간 잘 팔린 책인 것을 보면 지식의 내용도 좋지만 저자의 글 솜씨에 힘입은 바도 크다고 짐작할 수 있다.

옮긴이도 오랜 편집자 경험에서 우러난 매끄러운 번역에 상을 주고 싶다. 이 책의 더 큰 강점은 공구서인 책의 특성에 맞게 꼼꼼하게 공을 들인 색인에 있다. 색인 작업은 책을 만드는 입장에서 품은 들지만 빛은 나지 않는 작업이다. 애써 만든 색인이 몇몇 오자 때문에 독자들의 항의를 받기 일쑤인 그런 작업이다. 하지만 이 책은 보통 색인의 몇 배나 더 힘든 입체 색인까지 곁들였다. 한 항목만이 아닌 곁가지 항목들을 배열하여 독자가 원하는 항목을 쉽게 찾을 수 있도록 배려했다.

그렇다면 이 두껍고 비싼(?) 책에 맞는 독자들은 과연 누구일 것인가? 직업이 전문 요리사라면 이 책은 자신의 요리를 발전시키고 설명할 수 있는 든든한 무기가 되어줄 것이다. 남들의 입맛에 자신의 생계와 명예를 거는 요리사라면 음식과 요리에 대한 과학적인 지식에 대한 투자를 게을리 할 수 없을 것이며, 고객들에게 자신의 요리를 설명하기 위해서도 항상 곁에 두고 탐닉해야 할 책이다.

그리고 요리에 관심이 많고 요리에 대한 즐거움을 아는 분들이라면 떠돌아다니는 레시피를 섭렵하기보다는 이 책 한 권이 요리에 대한 기초를 확실하게 다져줄 것이다. 이도저도 아닌 호기심만 가득한 나와 같은 독자라면 이 책이 주는 즐거움이 결코 작지는 않을 것이나, 음식의 유래나 역사에 관한 보다 깊은 지식이 아쉽다. 하지만 한 권의 책에서 어찌 이 모든 것을 기대할 수 있으랴.

지금 구제역이 창궐하여 축산 농가가 피해를 입고, 옆의 일본 열도가 지진과 해일로 온통 비탄에 빠진 이때에 <음식과 요리>에 관한 이 글을 쓰는 일에 죄스러움을 느낀다. 하지만 살아남은 자는 그래도 먹어야 산다는 것이 우리네 슬픈 운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 주오>(최준석 옮김, 한겨레출판 펴냄). 책의 명성은 오래 전에 접했다. 그런데 몇 년 전 서점에 가보니까 절판 상태였다. 도서관에서 빌릴까? 하다가 다른 급한 일에 정신이 팔려버렸고, 책과의 만남은 한 차례 실패하고 말았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잖은가. 이 책과의 인연이 만만찮은 것 같다. 최근에 출판사를 달리하여 책은 재출간되었고, 일부 종이 신문이 소식을 전했고, 그러나 종이 신문을 거의 보지 않는 나는 재발간 소식조차 몰랐다. '프레시안 books' 팀장의 전화를 받은 것은 지난주 월요일 오후였다. 여러 일상의 독서가 있지만, 거의 최상급의 집중력 있는 독서가 서평 쓰기를 전제로 할 때가 아닌가.

수요일 오후, 택배로 책이 왔다. 포장을 열어보니 600여 쪽에 가까운 두툼한 책이다. 살펴본다. 왜 '운디드니'라고 제목에 썼을까. 원제를 보니 'Wounded Knee'라고 띄어쓰기가 똑똑히 돼 있다. 제목 아래에는 부제가 있었다. '미국 인디언 멸망사'라고.


▲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 주오>(디 브라운 지음, 최준석 옮김, 한겨레출판 펴냄). ⓒ한겨레출판
저자 디 브라운은 소설가이다. 소설로 글쓰기를 처음 시작했다. 1908년생인데, '새 천년'의 공기를 마셔보고 사망했다(2002년 12월). 일생 동안 25권 이상의 책을 썼는데, 대부분 미국 서부의 역사를 다룬 논픽션이었다고 한다. 아칸소 주립 대학, 조지워싱턴 대학에서 각각 역사학, 도서관학 학사 학위를 받았고, 일리노이 대학으로 옮겨 도서관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1972년 정년퇴직할 때까지 일리노이 대학 농대 도서관 사서로 일했다. 책 앞쪽 날개의 설명이 그렇다.

이제 책의 속지로 간다. '개정판 서문'이 나타난다. 2000년 어느 날에 쓴 글이다. 1971년 초에 처음 세상에 나온 자신의 책이 '대략 30년'이라는 한 세대를 지나 '두 번째 세대'를 맞고 있다고 그는 말하고 있다. 30년이라는 결코 만만찮은 시간의 검증을 통과했으므로 저자의 기쁨어린 감회의 표명은 당연하다. 책은 고전의 반열에 들어서고 있는 것이다.

다음 속지를 본다. '초판 서문'이 나타났다. 읽었다. 개정판 서문보다는 원고 분량이 두 배 정도다. 두 서문을 연속해 읽고 판단할 수 있었던 것은(겨우 책의 6쪽에 불과했지만), 번역에 대한 호감이다. 뭐라 콕 집어 설명할 수 없지만, 한 문장 한 문장 번역자의 정성이 느껴졌다. 책에 대한 기대감이 서서히 고조되는 것을 느꼈다.

총 18장으로 되어 있는 책이다. 1장의 제목은 '그들의 태도는 예절 바르고 훌륭하다'. 그런데 나는 막상 1장의 첫 두 쪽을 읽고 바로 책을 덮어야 했다. 더는 읽을 수 없었다. 가슴이 벌렁거려서다. '아, 아…' 하고 나는 연신 감탄음을 내며 대낮의 방에 펴져있는 게으른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가고 말았다. 마음이 아파서였고 또 말할 수 없이 슬퍼서였다. 아메리카 대륙 인근의 수많은 인디언 부족 중 하필 타이노 족의 이야기가 1장의 서두를 장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두 쪽 분량으로 요약되어 있는 타이노 족의 멸족 이야기에 상심하여 바로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일본에 거주하는 미국인 반전 평화 운동가 더글러스 러미스라는 이가 있다. 그의 책 <경제 성장이 안 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녹색평론사 펴냄)를 10여 년 전에 읽었다. 그리고 5년 뒤, 그의 책을 다시 한 번 읽었다. 재독한 까닭이야 물론 책이 좋아서였다. 그런데 그 후 다시 5년이 흐른 지금, 두 번 읽은 러미스의 책을 돌이켜보면, 타이노 족의 운명을 다룬 빛나는 에피소드만이 기억에 남아 있다.

콜럼버스가 신세계 대륙 근처 어느 섬에 맨 처음 도착했을 때, 섬에 '타이노'라는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고, 콜럼버스와 그 일행들은 '여기는 에덴동산이 아닌가' 할 정도로 섬의 아름다움과 원주민들의 생활 모습에 놀랐다고 한다. 타이노 족은 거의 벌거벗은 상태로 생활하고 있었고, 여러 가지 작물을 함께 심어 풍족한 열매를 쉽게 거두는 뛰어난 농경법을 알고 있었고, 때문에 일주일에 몇 시간밖에 그들은 일하지 않았고, 물고기가 먹고 싶으면 바다로 들어가서 곧장 필요한 만큼 힘들이지 않고 양껏 얻어내는 것이었다.

생존에 들이는 시간이 최소한이었고 나머지 최대한의 시간에 타이노 족은 무엇보다 음악을 하였다고 한다. 춤추고 노래하고 악기 연주를 하고…. 그리고 또 이야기꾼은 이야기를 하고 손재주 있는 사람들은 머리장식, 목걸이, 귀걸이를 만들고, 즉 예술 활동을 다양하게 하며 그야말로 생을 즐기더라는 것이다. 콜럼버스 일행이 노동자로 부려먹고 싶어도 타이노 족은 돈을 벌겠다고 하루 8시간, 10시간의 노동을 한다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고 상상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콜럼버스는 금과 은을 가지고 스페인으로 돌아가야만 했기에 타이노 족을 상대로 노예제를 만들고 플랜테이션 농업을 실행하고야 만다. 러미스의 간결한 필치로 된 타이노 족 에피소드의 마지막 문단을 옮기지 않을 수 없다.

타이노 족은 거의 무기가 없었기 때문에 칼이 어떤 것인지도 잘 몰랐습니다. 칼과 갑옷으로 무장한 스페인 사람들이 몹시 두려웠기 때문에 콜럼버스는 곧바로 노예제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타이노 족은 노예가 되려고 하지 않고, 자꾸 죽어갑니다. 당시의 기록에 의하면, 병으로 죽거나 또는 버티고 앉아서 죽을 때까지 움직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여튼 죽어갑니다. 울화병으로 죽기도 하고, 또는 아이들을 낳지 않습니다. 자신의 아이가 노예로 사는 것을 생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타이노 족은 100년 사이에 전멸하였습니다. 지금은 단 한 사람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경제 성장이 안 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 138~139쪽)

타이노 족의 멸족을 다룬 이 문단이 그 어떤 대량 학살 장면의 묘사에도 뒤지지 않을 만큼 충격과 슬픔이 있다고 나는 늘 생각해왔다. 그런데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 주오>를 펼치자마자(단 두 쪽으로) 타이노 족의 멸족이 주는 충격과 슬픔을 또 다른 필치로 그려 보이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이런 문단….

콜럼버스는 백인의 생활방식을 가르치겠다며, 친절히 대해주었던 타이노 족 인디언 열 명을 스페인으로 데려갔다. 인디언들은 스페인에 도착해서 기독교 세례를 받았는데 그 직후 한 명이 죽었다. 스페인 사람들은 인디언을 처음으로 천당에 들어가게 했다고 즐거워했으며, 서둘러 그 기쁜 소식을 서인도제도로 퍼뜨렸다.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 주오>, 18쪽)

30분을 쉬고 방바닥에서 일어났지만, 도무지 나는 책을 다시 펼칠 엄두가 안 났다. 그래서 그날 하루는 다시 책을 열지 못했다. 이튿날, 이어서 네댓 쪽을 더 읽기는 했다. 어제와 비슷한 느낌이 왔다. 수십 년에 걸쳐 자료를 모으고 엄청난 공력으로 쓴 디 브라운의 미국 인디언 멸망사, 이 책은 거의 1년에 걸쳐 내 마음이 어떤 이유로든 대단히 행복해서 강해졌을 때, 그렇게 조금씩 읽어야지, 아무리 서평을 써야 하는 상황이라 하더라도, 아, 어떻게 마감 전에 후딱 다 읽고 십 몇 매라도 서평을 쓸 수 있을까? 나는 걱정이 되었다. 어떻게 해서든 주말에는 완독하고 주초에 서평을 써야지, 목요일 하루 내내 안절부절했다. 그런데 주말을 하루 앞둔 그 이튿날, 즉 금요일이다.

아시다시피 내 평생 처음 보는 최악의 사건이 일본 후쿠시마에서 발생하였다. 세계사를 뒤흔들, 즉 세계 정치를 뒤바꿀 끔찍하고도 의미심장하기 이를 데 없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2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 주오>는 본문 시작 단 두 쪽 만에 나를 녹다운시켰고 하루 쉰 이튿날에도 네댓 쪽밖에 읽지 못하도록 한 무서운 책이지만, 그러나 생각해본다. 그래봤자 책은 책일 뿐이다. 날고 기고 해봤자 책일 뿐이다! 이 책은 한순간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버렸다.

정말 그렇다. 제 아무리 가공할 정도의 성실한 필치로 인디안 멸망사를 그려냈다고 한들, 한 세대를 넘어 살아남은 객관적 가치를 가진 책이라고 한들, 그래봤자다! 책 뒤표지를 보면, <워싱턴포스트>, <월스트리트저널>, <뉴욕타임스>, <뉴스위크> 등 세계 유수 언론의 편집자들이 쓴 찬사들을 읽을 수 있다. "이 애타고 가슴 저미는 책을 읽다 보면 정말로 누가 야만인인지!" "매혹적이면서도 고통스러운 기록" "심금을 울린다. 손에서 내려놓기 힘들다" "이 책만큼 나를 슬프고 수치스럽게 한 책은 없다" 등등.

과장된 찬사가 아니라 상당한 진심을 담은 말이라고 짐작된다. 그러나 나는 순간 냉소해버릴 수 있다. 당신들 나라 대통령들이 취임 인사를 할 때, 단 한 번이라도 당신들 땅의 진정한 주인들에게 사죄의 말을, 의례적으로라도, 한 적이 있는가. 당신들 자녀들에게 인디언을 멸망시킨 미국의 참혹한 건국사를 제도 교육을 통해 얼마만큼 가르치고 있는가. 1970년이라는 비교적 최근의 시기에 출간되었고 제 아무리 실감나는 필치로 인디언 멸망사를 그려냈다고 한들, 몇 백 년 전의 비극을 그린, 결국에 안전한 책일 뿐이지 않느냐. 안전하니까 당신들이 이제라도 자기 양심을 위무하는 것에 불과한 그런 찬사를 늘어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니냐. 이런 의심이 드는 것이다.

설사 정말 위험천만한 책이라고 해도 그렇다. 그래봤자 책일 뿐이다. 지난주 금요일 오후부터 시작되었고 지금 이 시각까지 이어지고 있는 일본 원자력 발전소 사태에 비하면, 그 영향력이 천분의 일, 만분의 일도 안 된다. 세계를 이끌어간다는 유력 국가들의 에너지 정책은 세계 정치의 거의 모든 것이다. 현대사의 수많은 전쟁이 에너지를 둘러싼 약육강식의 벌거벗은 욕망 때문이었다. 세계 정치를 뒤바꾸는 계기가 될 엄청난 사건이, 통신 수단이 인류 역사상 가장 발달한 이때에 벌어졌는데, 몇 백 년 전 인디안 멸망사를 다룬 책이 다 뭐람!

정말 그렇다. 지금 내가 책을 읽을 정신이 어디 있는가. 나는 금요일 오후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일본 후쿠시마 사고에 내 정신을 완전히 다 바치고 있다. 나만 그럴까. 이번 사건 이전부터 원자력 발전에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다 그렇지 않을까. 일주일을 넘기고 있는 후쿠시마 사고는 정말 앞으로 어떻게 될까.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 주오>, 이런 책을 읽으며 마음 아파하는 일상의 시간이 다시 내게 오기나 할까? 반핵운동은 남은 내 평생을 바쳐도 아깝지 않을 정말 중대한 사회운동이구나, 나는 새삼 깨닫는 중이다. "더 이상의 원자력 발전소 증설은 절대 반대"가 온 인류의 구호가 되어야 함을 내 평생 어느 때보다 온몸으로 온마음으로 깨닫는 절실한 시간 속에 나는 있다.

600쪽에 육박하는 책,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 주오>, 나는 서평이랍시고 지금 이렇게 쓰고 있지만, 고백하자, 책의 총 18장 중 1장과 18장만 읽은 상태다. 말도 안 되는 부실한 독서를 겨우겨우 하고 글을 쓰고 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뭐라 평할 자격이 없다.

그럼에도 이 책을 둘러싼 배경 지식이랄까, 하나만 더 하자. 인디언 원주민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흉포한 유럽인들이 어떤 짓을 하였나. 수천 만 마리의 버펄로가 인디언들의 안정된 생존 근거인 것을 알고 그야말로 광기어린 살육에 나서지 않았던가. 하여 아메리카 대륙의 5000 만 마리가 넘던 버펄로가 수십 년 만에 8000마리로 줄어들지 않았나. 이 책은 아우슈비츠의 광기에 가까웠던 그 참혹한 역사를 알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책일 것이다. 자, 이 정도면 됐다. 저자의 개정판 머리말 두 쪽만 읽어도 한국어 번역에 대한 신뢰가 생기고, 또 저자의 문장의 밀도에도 신뢰할 수 있다. 이 정도만 말하는 것으로 그치자.

이 책을 나는 언젠가는 완독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날이 올까, 그런 날이 올 수 있을까? 싶기도 하다. 세계 역사와 세계 경제는 일본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참사 이전과 이후로 나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인류가 지금보다 몇 백 배 더 심각한 환경과 에너지 참사를 피하기 위해 지금 후쿠시마 사고가 조금 더 악화되기를 하는 악마 같은 유혹까지 들 정도다. 그만큼 에너지 문제에 대한 세계적인 의식 전환을 강제할 절체절명의 기회인 것이다.

이 사태가 잘 마무리되어 미국과 유럽의 정치 지도자가 "원자력 발전소 증설 반대"를 공식 선포하게 된다면, 그리고 그 대안으로 서남아시아 석유를 향하여 미친 개처럼 다시 달려드는 것이 아니라, 체르노빌 사태를 보고 충격을 받고 지금은 반핵 환경 사상가가 된 고르바초프가 최근 어떤 기고문에서 "미국 정부는 1947년부터 1999년까지 원자력 분야에 2600억 달러의 보조금을 지급한 반면, 풍력과 태양광 발전에는 불과 55억 달러밖에 지급하지 않았다"고 밝혔듯이, 인류의 죽음만 앞당길 뿐인 원자력 발전이 아닌 오직 유일한 대안인 재생 에너지 개발과 연구에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하고 적극적으로 달려들 수 있다면(정말 지구상의 인간이 살 길은 오직 그뿐이므로!) 그때에서야 희망찬 새 마음으로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 주오>를 힘차게 읽어낼 수 있을 것 같다. 인간의 욕망 반성이 에너지 문제뿐이겠는가. 몇 백 년 전 미국 대륙에서 벌어진 살육의 역사도 똑똑히 알아둬야 할 용기가 생길 것 같다. 그런 날이 오기를 바란다.

서평 아닌 이 정체불명의 글을 마치도록 하겠다. 눈물이 난다.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에서 정년퇴직한 기술자들이 피폭 방사선량이 생명에 위태로울 정도인데도 더한 참사를 막기 위해 자진하여 현장으로 달려가고 있다고 한다. "내 인생에 후회를 남기지 않기 위해"라고 남편은 말하고 "어서 가시라"고 그의 아내가 말했다고 한다. 운행 중에도 늘 위험천만한 사고가 언제 닥칠지 모르고 또 제 아무리 안전 운행을 하였다 하여도 처치 곤란한 악마 같은 핵폐기물을 남길 뿐인 원자력 발전이지만, 선량한 수많은 사람들의 평생 직장이기도 했다. 자식 키우고 교육시킬 수 있었던 것도 그 직장이 있어서였다.

지금까지의 후쿠시마 사태만 해도 끔찍하기 이를 데 없기에 더 이상의 참사는 피했으면 싶다. '차라리 원자폭탄이 떨어진 그때 죽었으면' 하고 바랄 정도로 무서운 것이 방사능 피폭 후유증을 앓는 이들의 평생에 걸친 고통이다. 지상에 원자력 발전소가 즐비하게 된 것이 우리 모두의 공업(共業)이라고 하여도 그 누구보다 퇴직 원자력 발전소 기술자들이 먼저 책임을 져야 할 것 같다. '원전 결사대'라고 찬사하려고 함이 아니다. 더한 참사 피해를 막아라, 당신들은 거기서 죽어라, 나를 핵발전소에 묻어 주오, 하고 죄 없는 인디언처럼 외쳐라! 그리고 조금도 억울해 하지 말아라. 인간이 인간을 죽이는 기막힌 인류의 역사에서 우리가 너무도 많은 것을 놓치고 살아왔기 때문일 뿐이다. 말했듯 우리의 공업 탓이다.

당신들부터 거기서 죽겠다고 각오하라! 내가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퇴직자라면, 나라도 당신처럼 현장으로 달려간다! 때문에 이렇게 지독하게 말할 수 있다. 사태를 마무리해다오. 그 후 우리가 배우겠다. 당신들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정말 열심히 싸우겠다.

부디 인디언 멸망사를 읽으며 눈물을 흘릴 아름다운 시간이 오기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쟁교본>(배수아 옮김, 워크품프레스 펴냄)은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만든 제2차 세계 대전 사진첩이다. 그는 당시 신문과 잡지에서 나름의 안목으로 보도 사진들을 뽑아내고, 사진의 주석으로 자신이 '사진시((Fotoepigramm)'라고 부른 4행시를 달았다. 이는 진실을 재구성 하는 작업이었다.

"속임수를 강요하고 사람들을 혼돈에 휩싸이게 하는 시대라면, 사색하는 자는 자신이 읽고 들은 정보를 정확하게 해석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읽거나 들은 사실을 낮은 목소리로 함께 따라서 얘기해 본다. 그러는 사이 그는 그것의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게 된다. 한 문장 한 문장에 나타난 진실하지 못한 진술을 진실한 것으로 옮기는 작업을 한다. 이런 연습을 계속하다 보면 그는 어느새 올바르게 읽고 듣는 방법을 터득하게 될 것이다." (브레히트, '진실의 재구성')

브레히트는 우리에게 '사진을 읽는 방법'을 가르치려 한다. '진실'을 말하는 4행시는 그 사진이 원래 실렸던 매체의, 우리를 '혼돈에 휩싸이게 하는' 맥락과는 반대이다. 이를테면 연합국 측에는, 우리에게도, 전쟁의 영웅인 영국 처칠 수상의 사진에 달린 시.

"나는 갱들의 법칙을 알지 식인종들과도 / 별 탈 없이 무난하게 잘 지내왔다네. / 그들은 얌전하게 내 손에서 고기를 받아먹었으니, 나보다 / 더 나은 문화의 보호자는 아마 찾기 힘들 걸."

또 '평범한 일상의 복원'이라는 제목의, 미국 군정청 장교들이 시칠리아 민간인들에게 미국산 밀을 팔고 있는 사진에 대한 시.

"우리는 밀과, 그리고 왕도 한 명 데려왔으니, 받아라! / 누구든지 밀가루를 받는 자는 왕도 함께 받아야 할 테니 / 장화를 핥는 일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 계속해서 굶주리는 일이 마음에 들어야 하리라."


▲<전쟁교본>(베르톨트 브레히트 지음, 배수아 옮김, 워크품프레스 펴냄). ⓒ워크룸프레스
브레히트가 그 사진에서 본 것은 제목과는 다른, 미국 거대 식품 기업의 대박 장사였다. 책 뒤에 실린 해설에 따르자면 그 기업들이 잉여 농산물을 국제 원조 단체에 팔아치웠으며, 그 대금은 미국 국민들이 세금으로 치렀다. 원조품은 '경제 전문가', '정치 고문단'과 함께 유럽에 건너와서 유럽 국가들의 정책을 미국 대기업의 이익 맞춤형으로 만들어 놓았다.

우리에게도 눈에 익은, 노르망디 상륙 작전의 긴박감으로 떨리는 사진에서 손에 총을 들고 바닷물을 헤치고 나오던 미군 병사는 자기가 유럽의 자유를 위해 싸우는 줄만 알았다. 제가 들고 있는 총이 '사실상 스탈린그라드에서 출발하는 자(같은 연합군인 소련군)를 겨눈' 줄은 몰랐다. 유럽에서 빈약한 배를 타고 탈출하여 피난처의 해안에서 난파한 유대인들은 해안에 있는 이들이 알기만 한다면 도울 거라고 생각했다. 그들이 이미 알고 있음을, 익사해가는 유대인들은 몰랐다.

반세기도 지나 이 사진첩을 보게 된 우리는 모르던 사실을 알게 된 충격을 느끼지는 않지만, 곧바로 우리가 빠져있는 현재의 혼란이 있을 것이다. '영국 공군의 블루'천으로 섹시한 드레스를 지어 입고 전쟁 훈장으로 치장했던 그때의 할리우드 여배우는, 오늘날 우리가 환호하는 연예인 혹은 존경하는 석학일 수도 있다. 자동차에 소형 제단을 장착하여 나치 군부대를 돌아다니며 예배를 드려주던 그 기동식 교회의 신이 지금 우리가 기도하는 신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2차 세계 대전 당시에도 진실을 간파한 이가 브레히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때 침략에 동원되었던 젊은이들이 '살기 위해서' 전선까지 가게 되었다는 것. 군수품 공장에서 장갑차와 장갑차를 꿰뚫을 총탄을 한꺼번에 만들던 남성 노동자들, 흰 두건을 쓰고 집중하여 폭탄을 용접하던 여성 노동자들도 같은 이유로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것. 독일 폭격기의 승무원들마저 '공포 때문에' 인구가 밀집된 도시에 폭탄을 떨어뜨렸다는 것. 본인들이 제일 잘 알고 있었다.

오늘날 우리도 알고 있다. 우리가 그렇다는 것. 제 나라의 군사 무기 수출 물량이 많다고 문제 삼는 국민이 어느 나라건 얼마나 될까? 수출해서 경제에, 먹고 살기에 허덕이는 서민들의 경제에 도움만 되면 단가? 그것은 쓰인다.

"여기 우리가 있다, 너희가 무찌른 대상들이. 승리 만세!"

브레히트가 이런 시구를 단 사진의 주인공들은 다치고 굶주린 어린이들이다.

"오, 정글용 탱크에서 발견된 가엾은 요릭! / 네 머리가 탱크 손잡이에 꽂혀 있구나 / 너는 도메인 은행을 위해 불 속에서 죽어갔는데 / 네 부모는 아직도 그 은행에 빚이 많구나."

불타버린 일본군 탱크에 미군들이 얹어 놓은 한 일본군의 해골 사진에 달린 이 시는, 오늘날 세계 각지에서 점령군으로 죽음마저 무릅쓰는 여러 국적의 병사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

재래식 무기 중 '집속탄'은 민간인에게 피해를 가장 많이 끼쳐서 피해자의 98%가 민간인이라고 한다. 때문에 국제적으로 금지 운동이 벌어지고 있는데, 우리나라는 그 금지 협약에 가입하지 않았으며 주요 생산국이자 수출국이다. 최근에는 국산 자주포의 수출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기도 하다. 이라크에 한국군을 파병할 때 우리도 살기 위해서(국익) 그랬고, 공포(대미 관계, 북한 핵)에 질려 있었다.

반세기 전의 사진첩을 보면서 우리는 세월 이상의 것에 부딪친다. '정확한 의미를 파악한다는 것'의 의미, '올바르게 읽고 듣는다는 것'의 결과 말이다. 매체의 속임수에 속지 않고 정보를 제대로 걸러내는 기술은 관건이 아니다. 이 책은 진실을 대면하는 용기, 우리가 우리 자신을 구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다루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 브레히트가 신문과 잡지에서 보도 사진을 오리고, 사실의 기록인 보도 사진에 시로 주석을 달았던 것이다. 풍부하고 다양한 정보와 간편하고 효율적인 컴퓨터를 갖추고 있음에도, 우린 그보다 위축되고 부자유스럽다고 느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K 선생님께

아이티에서 보낸 메일은 잘 받았습니다. 대지진이 일어난 아이티에 잠깐 머물겠다고 가신 지 벌써 1년이 넘었군요. 지구 반대편에서 고국 바로 곁에서 일어난 끔찍한 소식을 들었으니 많이 놀라셨지요? 사실 한국의 사정도 마찬가지랍니다. 지난 3월 11일부터 일본에서 일어난 지진, 지진 해일, 원자력 발전소 사고 때문에 온 국민이 정신을 반쯤 놓고 있습니다.

정신없는 와중에도 계속 아이티에서 던진 선생님의 질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이렇게 물으셨죠?

"강 기자, 아이티도 아닌 일본에서 어찌 저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말입니까? 대지진과 잇따른 지진 해일이야 천재지변이라고 치더라도, 원자력 발전소 사고는 내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원래 원자력 발전소는 심각한 사고가 10만 년에 한 번꼴로 일어나도록 안전 설계를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일본이 저렇게 엉성하게 안전 대책을 세웠을 줄은…."

일본 원자력 발전소 사고를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선생님과 똑같은 의문을 떠올린 모양입니다. 이번 사고가 어느 정도 수습되면, 일본 원자력 발전소의 안전장치에 대한 포괄적인 점검이 진행되겠지요. 그 과정에서 이번에 지적된 많은 허점이 보완될 것입니다. 그 와중에 관계자 몇몇은 사고의 책임을 지고 타박도 받겠지요.

그러고 보면, 그 동안 원자력 발전소와 같은 대형 사고가 날 때마다 항상 비슷한 모습이 재연되곤 했던 것 같아요. 늘 사고만 나면 언론에서 '인재(人災)' 타령을 하다가, 희생양을 찾는 게 대표적인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이번 사고도 일본의 원자력 전문가의 '안전 불감증'이 부른 인재일까요? 안전장치만 좀 더 보강하면 더 이상 이런 사고는 일어나지 않을까요?

사소한 문제가 낳은 참사


▲ <그 개는 무엇을 보았나>(말콤 글래드웰 지음, 김태훈 옮김, 김영사 펴냄). ⓒ김영사
벌써 30년이 넘었군요. 1979년 3월 28일 미국 스리마일 섬 원자력 발전소에서도 큰 사고가 났습니다. 이 스리마일 섬 사고는 공식적으로 원자력 발전소 노동자의 잘못으로 발생한 인재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나 정말 이 사고는 인재였을까요? 진실은 훨씬 복잡했던 것 같습니다.

먼저 스리마일 섬에서 그날 진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찰스 페로의 <Normal Accidents : Living with High Risk Technology)>를 살펴보겠습니다. 이 책은 아직 번역이 안 되어 있습니다만, 핵심 내용은 <아웃라이어>(노정태 옮김, 김영사 펴냄)로 유명한 미국 기자 말콤 글래드웰의 <그 개는 무엇을 보았나>에 요약되어 있습니다.

①스리마일 섬 사고는 냉각수를 거르는 거대한 필터가 막히면서 시작됐다. 사실 이 문제는 드물게 발생하는 것도, 심각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②필터가 막히면서 습기가 공조 시스템으로 새어 들어가 2개의 밸브를 작동시키는 바람에 냉각수가 차단되면서 문제가 커지고 말았다.

당시 스리마일 섬 발전소에는 이러한 상황에 대비한 비상 냉각 시스템이 있었지만 ③그날은 웬일인지 비상 냉각 시스템을 작동시키는 밸브가 열리지 않았다. 더구나 ④밸브가 닫혔음을 알리는 표시등이 그 위에 있던 스위치에 달린 수리 기록표에 가려져 있었다. 그래도 세 번째 안전장치인 압력 조절 밸브가 작동했다면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⑤공교롭게도 압력 조절 밸브는 고장이 나 있었다. 닫혔어야 할 압력 조절 밸브는 계속 열려 있었고 그 사실을 알리는 계기마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엔지니어들이 상황을 파악했을 때는 이미 원자로의 (노심이) 용융되기 일보직전이었다. 이처럼 스리마일 섬 사고는 다섯 가지 이상의 문제가 겹치면서 일어났다. (<그 개는 무엇을 보았나>, 301쪽)

자, 어떻습니까? 그렇습니다. 그 날 스리마일 섬 원자력 발전소는 지독히 운이 없었습니다. 하나씩 일어났으면 대수롭지 않게 대응했을 일들이 '우연히' 여러 개가 겹치면서 예상치 못한 상호작용을 통해 거대한 문제를 일으킨 것입니다. 사실 이런 일은 일상생활에서도 아주 많습니다.

저만 해도 그렇습니다. 어느 날, 정오까지 보내야할 중요한 글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①문서를 집 컴퓨터에 저장만 해두고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②오전에는 대개 집에 있던 동생도 그날은 일찍 학교로 나갔습니다. ③급한 마음에 택시를 탔는데 길이 막혀서 도로에서 시간을 허비해야 했습니다.

④얼른 집에 달려갔더니 주머니에 열쇠가 없습니다. 아침에 열쇠를 챙기지 않고 나온 것입니다. ⑤집을 잠그고 나간 동생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수업 중인지 휴대전화를 꺼놓은 상태입니다. 결국 저는 강제로 문을 따고 집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시간은 이미 오후 1시였습니다.

사실 이런 비슷한 경험은 누구나 한 번쯤 있을 것입니다. 자, 어떻습니까? 일상생활에서도 서너 개의 불운이 겹쳐서 때로는 심각한 결과를 낳는 일이 많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면, 인간이 만든 가장 복잡한 인공물 중 하나인 원자력 발전소에서 스리마일 섬 사고와 같은 일이 일어난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닙니다.

페로는 앞에서 언급한 책에서 스리마일 섬 사고와 같은 재난을 '정상 사고(Normal Accident)'라고 부릅니다. 페로가 보기에, 원자력 발전소와 같은 복잡한 인공물이 작동하는 과정 속에서는 항상 사소한 문제들이 발생할 수 있고 그런 문제들이 겹쳐서 발생하는 사고는 피할 수 없습니다.

일본의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는 어떻습니까?

귀찮은 문제가 낳은 참사


▲ <불확실한 세상>(김명진 외 지음, 사이언스북스 펴냄). ⓒ사이언스북스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의 정체를 파악하는데 참고가 될 만한 책이 한 권 더 있습니다.

다이앤 본의 <챌린저 호 발사 결정(The Challenger Launch Decision : Risky Technology, Culture and Deviance at NASA)>. 이 책 역시 번역은 되지 않았습니다만, 글래드웰의 같은 책과 <불확실한 세상>에 실린 김명진의 글에서 그 핵심 내용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챌린저 호 폭발 사고를 기억하시죠? 1986년 1월 28일 발사 후 73초 만에 산산조각나면서 승무원 7명이 전원 사망한 그 비극적인 사건 말입니다. 우주 비행사가 아닌 서른일곱 살의 여교사 크리스타 맥컬리프도 이 사고로 사망해 큰 충격을 주었지요. 저도 텔레비전에서 활짝 웃고 있는 맥컬리프의 사진을 보면서 가슴이 아팠던 기억이 납니다.

이 챌린저 호 사고의 원인은 명확히 밝혀져 있습니다. 우주 왕복선을 발사할 때 추진력을 더해주는 로켓 부스터의 틈새를 막는 고무 부품인 오링(O-ring)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한 것입니다. 당일 아침의 추운 날씨 때문에 고무로 만들어진 오링이 탄성을 잃었고, 이 때문에 연결 부위로 뜨거운 분사 가스가 새어 나오면서 대형 사고로 이어진 것이지요.

여기까지만 보면, 챌린저 호 사고는 전형적인 '인재' 같습니다. 그러나 다이앤 본은 <챌린저 호 발사 결정>에서 또 다른 진실을 보여줍니다.

NASA의 엔지니어들은 우주 왕복선이 처음 발사되기 훨씬 전인 1977년부터 오링의 틈새 문제를 알고 있었다. 그들은 우주 왕복선 발사시 생기는 오링 틈새의 크기를 알아내기 위해 지속적인 실험을 진행했고, 실험 결과의 불확실성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를 놓고 힘든 협상을 거쳤다.

그 결과 그들은 오링의 틈새와 그로부터 빚어질 수 있는 손상이 '수용 가능한 위험(Acceptable Risk)'이라고 보고 우주 왕복선의 발사를 추진했다. 그리고 1981년부터 10여 차례에 걸쳐 우주 왕복선을 성공적으로 발사하는 과정에서 오링이 손상된 사례가 때때로 발견되기는 했지만, 그러한 오링의 손상은 우주 왕복선의 실패로 이어지지 않았다." (<불확실한 세상>, 302쪽)

심지어 발사 당일 아침에는 엔지니어들 사이에 토론도 있었습니다. 몇몇 엔지니어들이 오링 손상의 문제를 강하게 제기했지만, 그 전에 훨씬 더 손상이 심했을 때도 우주 왕복선을 성공적으로 발사시켰던 다수의 관리자, 엔지니어들은 그런 의견을 묵살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은 지극히 정상적이었습니다. 다이앤 본은 이렇게 말합니다.

"챌린저 호 발사에 이르는 결정은 규칙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그런데 과거에 단 한 번도 잘못된 적 없던 문화, 규칙, 절차, 규범이 이번에 문제를 일으키고 말았다. 챌린저 호 폭발 사고는 간부들이 비도덕적인 계산을 하기 위해 규칙을 어겨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규칙을 따른 끝에 일어난 것이었다." (<그 개는 무엇을 보았나>, 305쪽)

선생님, 생각해 보십시오. 1987년에 챌린저 호는 이미 세 차례나 성공적으로 발사에 성공했었습니다.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대한의 효과를 낳아야 하는 엔지니어들 입장에서는 이렇게 성공이 반복될수록 '수용 가능한 위험'의 대상을 더욱더 늘렸을 것입니다. '직접 해봤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잖아!'

어디 오링뿐이겠습니까? 우주 왕복선을 구성하는 크고 작은 부품 중에는 오링처럼 '수용 가능한 위험'을 안고 있는 것들이 수없이 많았겠지요. 설사 오링의 틈새 문제를 많은 비용(!)을 들여서 해결했다고 하더라도, 제2, 제3의 문제가 곳곳에 똬리를 틀고 있다가 운이 안 좋았을 때 사고의 원인으로 작용하지 않았을까요?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번에 사고가 난 발전소는 1971년부터 무려 40년간 가동 중이었습니다. 물론 그 동안에 크고 작은 사고가 많았습니다만, 결정적인 사고는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당연히 지난 40년간 원자력 전문가, 노동자는 알게 모르게 '수용 가능한 위험'의 숫자를 늘렸겠지요.

이런 상황에서 이번 후쿠시마 사고를 미리 막을 수 있었을까요?

잠재적 문제가 낳은 참사


▲ <인간과 공학 이야기>(헨리 페트로스키 지음, 최용준 옮김, 지호 펴냄). ⓒ지호
선생님,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가 지진 해일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는 모습을 보면서 저는 뜬금없이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를 떠올렸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 중 하나로 꼽히는 이 금문교는 1937년에 세상에 등장했습니다. 거센 조류, 짙은 안개, 험한 지형 등 온갖 난관을 뚫고 건설한 이 다리를 미국 토목학계에서는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꼽지요.

1937년 5월 27일, 20만 명의 시민이 모여서 진행한 개통식을 보면서 엔지니어들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뿌듯함을 느꼈다데요. 20만 명이 다리 위에서 자유롭게 거니는데도 전혀 문제가 없었으니까요. 그 엔지니어들은 50년이 지나고 나서야 자기들이 미처 포착하지 못했던 위험을 알게 됩니다.

1987년 금문교 개통 50주년을 맞아서 샌프란시스코 시는 다리를 오가는 차량을 통제하고 50년 전과 마찬가지로 시민에게 다리를 완전 개방합니다. 새벽부터 100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구름처럼 다리로 몰려들었습니다. 다리의 양쪽에서 출발한 시민들이 다리 가운데서 만났을 때는 다리 위에 사람이 너무 많아서 모두 꼼짝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약 25만 명의 시민이 다리 위에 서 있었고, 금문교는 지난 50년 동안 버텨 왔던 어떤 무게보다 훨씬 많은 무게를 버텨야만 했습니다. 네, 정말로 아찔한 순간이었습니다. 다리 중간 부분이 3m나 아래로 축 쳐졌고, 다리를 매단 케이블 몇 가닥이 이미 느슨해진 상태였으니까요.

만약 그 때 누군가가 "다리가 무너진다!" 하고 외마디 외침이라도 질렀다면, 수십만 명이 그대로 수장되는 대참사가 일어났을 것입니다. 다행히 그런 공포 분위기를 조장하는 사람은 없었고(다리 위에 있는 사람은 사실 위험을 몰랐습니다!), 사람들이 우왕좌왕 움직일 수 있는 공간도 없어서 사고는 피할 수 있었습니다.

미국의 엔지니어들은 금문교가 개통된 지 50년이 지나서야, 설계를 할 때는 전혀 생각지 못했던 문제가 이 다리에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수십 만 명의 시민이 수장 직전까지 가는 상황을 감수하고서야, 대형 사고를 일으킬 수 있었던 금문교의 숨은 결함을 밝혀낸 것입니다.

사실 현대의 인공물을 둘러싼 온갖 사연을 살펴보면, 이런 일은 부지기수입니다. 헨리 페트로스키가 <인간과 공학 이야기>에서 강조했듯이, 안타깝게도 대다수 엔지니어들은 성공보다 실패에서 배웁니다. 그래서 마이크 마틴과 롤랜드 신진저는 아예 이런 과정을 '사회적 실험'이라고 부릅니다. (<불확실한 세상>, 299~300쪽)

원자력 발전소, 우주 왕복선, 다리가 안전하게 제 역할을 하는지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실제로 그것을 사용하는 것뿐입니다(사회적 실험). 아무리 사전에 검사를 많이 하더라도 최종 검사는 그것이 사회 속에 던졌을 때야 비로소 가능합니다. 그리고 그 최종 검사는 금문교의 예처럼 긴 시간이 걸리기도 하고, 때로는 대참사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지금 일본의 원자력 전문가들은 땅을 치며 후회하고 있을 것입니다. '지진 해일이 원자력 발전소를 덮쳐서 발전소의 모든 전기가 끊어지는 상황에 대비했어야 했는데…' 하고요.

글쎄요. 어떤 방법이 있었을까요? 바닷가의 원자력 발전소를 다 폐쇄해야 했을까요? 만약의(?) 위험을 대비해 엄청난(!) 비용을 들여서 해일이 덮쳐 정전이 생겨도 냉각 기능에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원자력 발전소를 개조라도 했어야 했나요? (물론 불가능합니다!) 이런 식으로 따지기 시작하면, 지금 원자력 발전소 중에서 걱정없이 가동할 수 있는 게 남아 있을까요?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가 일어나자마자 청와대까지 나서서 "국내의 원자력 발전소는 안전하다"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국내의 원자력 발전소는 일본보다 안전장치를 훨씬 더 많이 해놓았기 때문이랍니다. 예를 들자면, 이런 식입니다. "원자력 발전소 바로 밑에서 진도 6.5의 지진이 나도 끄떡없다." 진도 7.0 이상의 지진이 나면 어쩌려고요?

스리마일 섬 사고, 챌린저호 사고 또 후쿠시마 사고를 살펴보면, 이런 호언장담이 얼마나 의미 없는 것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대형 사고는 평소에는 통제가 가능했던 사소한 문제들(스리마일 섬 사고), 평소에는 위협이 아니었던 귀찮은 문제들(챌린저 호 사고), 평소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잠재적 문제들(후쿠시마 사고)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후쿠시마 사고, 문명사적 전환의 기회다!

K 선생님이 이렇게 푸념하는 모습이 떠오릅니다.

"강 기자, 그럼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위험을 안고 사는 방법뿐이잖소?"

글쎄요. 스리마일 섬 사고, 챌린저 호 사고 또 후쿠시마 사고는 분명히 우리가 만든 세상은 첨단 기술의 실패가 낳은 재난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그것을 분명히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우리 곁에 똬리를 틀고 앉아 있는 위험을 인정한다고 해서, 우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찰스 페로는 <정상 사고>에서 위험을 세 가지로 나누었습니다. 첫째 대단치 않은 조치만으로도 감소시킬 수 있는 위험, 둘째 대응하는 데 중대한 노력을 요구하는 위험, 셋째 어떤 편익도 훨씬 능가하는 위험이 그것입니다. 일단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마주치는 여러 가지 인공물을 놓고서 이것이 어떤 위험을 초래할지 따져보는 일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래서 첫 번째, 두 번째의 경우에는 헨리 페트로스키가 지적했듯이 실패로부터 배우는 과정을 통해서 위험을 줄여나가도록 노력해야겠지요. 그리고 세 번째 위험의 경우에는 그것을 폐기하고, 대신할 대안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서로 다른 가치와 이해를 가진 시민들 사이의 논쟁도 불가피할 테고요.

이런 사정을 염두에 두면 현대 과학기술이 낳은 인공물의 위험은 우리에게 또 다른 민주주의를 요구합니다. 이제 전 세계에서 또 한국에서 원자력 에너지를 둘러싼 대논쟁이 벌어질 가능성이 큽니다. (원자력 에너지는 페로가 말은 세 가지 위험 중 어디에 속할까요?) 이런 논쟁은 그 자체만으로도 소중합니다. 소수의 에너지 전문가와 정책 관료가 독점해왔던 에너지 권력에 균열을 낼 테니까요.

더 나아가서 우리는 조만간 선택을 해야할 것입니다. '원자력 발전소와 핵무기로 상징되는 원자력 에너지와 그 위험을 계속 안고 갈 것인가?' 후쿠시마 사고는 어쩌면 문명사적 전환점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 전환을 만드는 것 역시 바로 우리의 역량에 달렸을 테고요.

다음 편지에서는 문명사적 전환을 둘러싼 갑론을박을 유쾌하게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부디 후쿠시마 사고가 지금보다 더 최악의 상태로 번지지 않기를 기대합니다. 특히 지금 후쿠시마에서 핵 재앙을 막고자 마지막까지 사투를 벌이는 수십 명의 원자력 발전소 노동자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선생님께서도 아이티에서 기도를 부탁합니다.

2011년 3월 18일

강양구 드림.


이 글에 등장하는 'K 선생님'은 가공의 인물입니다. 일본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를 가슴 조리며 지켜보는 독자 여러분이 바로 'K 선생님'입니다. 이 글에 나오는 여러 가지 내용은 다음 책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후쿠시마 사고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위험의 총량 : 챌린저 호 폭발 사고의 또 다른 진실', <그 개는 무엇을 보았나>(말콤 글래드웰 지음, 김태훈 옮김, 김영사 펴냄).

'실험실을 벗어난 과학 기술, 확대된 불확실성', <불확실한 세상>(김명진 외 지음, 사이언스북스 펴냄).

<인간과 공학 이야기>(헨리 페트로스키 지음, 최용준 옮김, 지호 펴냄).

안타깝게도 이 책에서 중요하게 언급되는 찰스 페로의 <정상 사고(Normal Accidents : Living with High Risk Technology)>와 다이앤 본의 <챌린저 호 발사 결정(The Challenger Launch Decision : Risky Technology, Culture and Deviance at NASA)>은 국내에 소개되지 않았습니다. 눈 밝은 편집자들의 관심을 기대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