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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운디드니에 묻어 주오>(최준석 옮김, 한겨레출판 펴냄). 책의 명성은 오래 전에 접했다. 그런데 몇 년 전 서점에 가보니까 절판 상태였다. 도서관에서 빌릴까? 하다가 다른 급한 일에 정신이 팔려버렸고, 책과의 만남은 한 차례 실패하고 말았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잖은가. 이 책과의 인연이 만만찮은 것 같다. 최근에 출판사를 달리하여 책은 재출간되었고, 일부 종이 신문이 소식을 전했고, 그러나 종이 신문을 거의 보지 않는 나는 재발간 소식조차 몰랐다. '프레시안 books' 팀장의 전화를 받은 것은 지난주 월요일 오후였다. 여러 일상의 독서가 있지만, 거의 최상급의 집중력 있는 독서가 서평 쓰기를 전제로 할 때가 아닌가.

수요일 오후, 택배로 책이 왔다. 포장을 열어보니 600여 쪽에 가까운 두툼한 책이다. 살펴본다. 왜 '운디드니'라고 제목에 썼을까. 원제를 보니 'Wounded Knee'라고 띄어쓰기가 똑똑히 돼 있다. 제목 아래에는 부제가 있었다. '미국 인디언 멸망사'라고.


▲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 주오>(디 브라운 지음, 최준석 옮김, 한겨레출판 펴냄). ⓒ한겨레출판
저자 디 브라운은 소설가이다. 소설로 글쓰기를 처음 시작했다. 1908년생인데, '새 천년'의 공기를 마셔보고 사망했다(2002년 12월). 일생 동안 25권 이상의 책을 썼는데, 대부분 미국 서부의 역사를 다룬 논픽션이었다고 한다. 아칸소 주립 대학, 조지워싱턴 대학에서 각각 역사학, 도서관학 학사 학위를 받았고, 일리노이 대학으로 옮겨 도서관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1972년 정년퇴직할 때까지 일리노이 대학 농대 도서관 사서로 일했다. 책 앞쪽 날개의 설명이 그렇다.

이제 책의 속지로 간다. '개정판 서문'이 나타난다. 2000년 어느 날에 쓴 글이다. 1971년 초에 처음 세상에 나온 자신의 책이 '대략 30년'이라는 한 세대를 지나 '두 번째 세대'를 맞고 있다고 그는 말하고 있다. 30년이라는 결코 만만찮은 시간의 검증을 통과했으므로 저자의 기쁨어린 감회의 표명은 당연하다. 책은 고전의 반열에 들어서고 있는 것이다.

다음 속지를 본다. '초판 서문'이 나타났다. 읽었다. 개정판 서문보다는 원고 분량이 두 배 정도다. 두 서문을 연속해 읽고 판단할 수 있었던 것은(겨우 책의 6쪽에 불과했지만), 번역에 대한 호감이다. 뭐라 콕 집어 설명할 수 없지만, 한 문장 한 문장 번역자의 정성이 느껴졌다. 책에 대한 기대감이 서서히 고조되는 것을 느꼈다.

총 18장으로 되어 있는 책이다. 1장의 제목은 '그들의 태도는 예절 바르고 훌륭하다'. 그런데 나는 막상 1장의 첫 두 쪽을 읽고 바로 책을 덮어야 했다. 더는 읽을 수 없었다. 가슴이 벌렁거려서다. '아, 아…' 하고 나는 연신 감탄음을 내며 대낮의 방에 펴져있는 게으른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가고 말았다. 마음이 아파서였고 또 말할 수 없이 슬퍼서였다. 아메리카 대륙 인근의 수많은 인디언 부족 중 하필 타이노 족의 이야기가 1장의 서두를 장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두 쪽 분량으로 요약되어 있는 타이노 족의 멸족 이야기에 상심하여 바로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일본에 거주하는 미국인 반전 평화 운동가 더글러스 러미스라는 이가 있다. 그의 책 <경제 성장이 안 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녹색평론사 펴냄)를 10여 년 전에 읽었다. 그리고 5년 뒤, 그의 책을 다시 한 번 읽었다. 재독한 까닭이야 물론 책이 좋아서였다. 그런데 그 후 다시 5년이 흐른 지금, 두 번 읽은 러미스의 책을 돌이켜보면, 타이노 족의 운명을 다룬 빛나는 에피소드만이 기억에 남아 있다.

콜럼버스가 신세계 대륙 근처 어느 섬에 맨 처음 도착했을 때, 섬에 '타이노'라는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고, 콜럼버스와 그 일행들은 '여기는 에덴동산이 아닌가' 할 정도로 섬의 아름다움과 원주민들의 생활 모습에 놀랐다고 한다. 타이노 족은 거의 벌거벗은 상태로 생활하고 있었고, 여러 가지 작물을 함께 심어 풍족한 열매를 쉽게 거두는 뛰어난 농경법을 알고 있었고, 때문에 일주일에 몇 시간밖에 그들은 일하지 않았고, 물고기가 먹고 싶으면 바다로 들어가서 곧장 필요한 만큼 힘들이지 않고 양껏 얻어내는 것이었다.

생존에 들이는 시간이 최소한이었고 나머지 최대한의 시간에 타이노 족은 무엇보다 음악을 하였다고 한다. 춤추고 노래하고 악기 연주를 하고…. 그리고 또 이야기꾼은 이야기를 하고 손재주 있는 사람들은 머리장식, 목걸이, 귀걸이를 만들고, 즉 예술 활동을 다양하게 하며 그야말로 생을 즐기더라는 것이다. 콜럼버스 일행이 노동자로 부려먹고 싶어도 타이노 족은 돈을 벌겠다고 하루 8시간, 10시간의 노동을 한다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고 상상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콜럼버스는 금과 은을 가지고 스페인으로 돌아가야만 했기에 타이노 족을 상대로 노예제를 만들고 플랜테이션 농업을 실행하고야 만다. 러미스의 간결한 필치로 된 타이노 족 에피소드의 마지막 문단을 옮기지 않을 수 없다.

타이노 족은 거의 무기가 없었기 때문에 칼이 어떤 것인지도 잘 몰랐습니다. 칼과 갑옷으로 무장한 스페인 사람들이 몹시 두려웠기 때문에 콜럼버스는 곧바로 노예제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타이노 족은 노예가 되려고 하지 않고, 자꾸 죽어갑니다. 당시의 기록에 의하면, 병으로 죽거나 또는 버티고 앉아서 죽을 때까지 움직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여튼 죽어갑니다. 울화병으로 죽기도 하고, 또는 아이들을 낳지 않습니다. 자신의 아이가 노예로 사는 것을 생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타이노 족은 100년 사이에 전멸하였습니다. 지금은 단 한 사람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경제 성장이 안 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 138~139쪽)

타이노 족의 멸족을 다룬 이 문단이 그 어떤 대량 학살 장면의 묘사에도 뒤지지 않을 만큼 충격과 슬픔이 있다고 나는 늘 생각해왔다. 그런데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 주오>를 펼치자마자(단 두 쪽으로) 타이노 족의 멸족이 주는 충격과 슬픔을 또 다른 필치로 그려 보이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이런 문단….

콜럼버스는 백인의 생활방식을 가르치겠다며, 친절히 대해주었던 타이노 족 인디언 열 명을 스페인으로 데려갔다. 인디언들은 스페인에 도착해서 기독교 세례를 받았는데 그 직후 한 명이 죽었다. 스페인 사람들은 인디언을 처음으로 천당에 들어가게 했다고 즐거워했으며, 서둘러 그 기쁜 소식을 서인도제도로 퍼뜨렸다.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 주오>, 18쪽)

30분을 쉬고 방바닥에서 일어났지만, 도무지 나는 책을 다시 펼칠 엄두가 안 났다. 그래서 그날 하루는 다시 책을 열지 못했다. 이튿날, 이어서 네댓 쪽을 더 읽기는 했다. 어제와 비슷한 느낌이 왔다. 수십 년에 걸쳐 자료를 모으고 엄청난 공력으로 쓴 디 브라운의 미국 인디언 멸망사, 이 책은 거의 1년에 걸쳐 내 마음이 어떤 이유로든 대단히 행복해서 강해졌을 때, 그렇게 조금씩 읽어야지, 아무리 서평을 써야 하는 상황이라 하더라도, 아, 어떻게 마감 전에 후딱 다 읽고 십 몇 매라도 서평을 쓸 수 있을까? 나는 걱정이 되었다. 어떻게 해서든 주말에는 완독하고 주초에 서평을 써야지, 목요일 하루 내내 안절부절했다. 그런데 주말을 하루 앞둔 그 이튿날, 즉 금요일이다.

아시다시피 내 평생 처음 보는 최악의 사건이 일본 후쿠시마에서 발생하였다. 세계사를 뒤흔들, 즉 세계 정치를 뒤바꿀 끔찍하고도 의미심장하기 이를 데 없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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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운디드니에 묻어 주오>는 본문 시작 단 두 쪽 만에 나를 녹다운시켰고 하루 쉰 이튿날에도 네댓 쪽밖에 읽지 못하도록 한 무서운 책이지만, 그러나 생각해본다. 그래봤자 책은 책일 뿐이다. 날고 기고 해봤자 책일 뿐이다! 이 책은 한순간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버렸다.

정말 그렇다. 제 아무리 가공할 정도의 성실한 필치로 인디안 멸망사를 그려냈다고 한들, 한 세대를 넘어 살아남은 객관적 가치를 가진 책이라고 한들, 그래봤자다! 책 뒤표지를 보면, <워싱턴포스트>, <월스트리트저널>, <뉴욕타임스>, <뉴스위크> 등 세계 유수 언론의 편집자들이 쓴 찬사들을 읽을 수 있다. "이 애타고 가슴 저미는 책을 읽다 보면 정말로 누가 야만인인지!" "매혹적이면서도 고통스러운 기록" "심금을 울린다. 손에서 내려놓기 힘들다" "이 책만큼 나를 슬프고 수치스럽게 한 책은 없다" 등등.

과장된 찬사가 아니라 상당한 진심을 담은 말이라고 짐작된다. 그러나 나는 순간 냉소해버릴 수 있다. 당신들 나라 대통령들이 취임 인사를 할 때, 단 한 번이라도 당신들 땅의 진정한 주인들에게 사죄의 말을, 의례적으로라도, 한 적이 있는가. 당신들 자녀들에게 인디언을 멸망시킨 미국의 참혹한 건국사를 제도 교육을 통해 얼마만큼 가르치고 있는가. 1970년이라는 비교적 최근의 시기에 출간되었고 제 아무리 실감나는 필치로 인디언 멸망사를 그려냈다고 한들, 몇 백 년 전의 비극을 그린, 결국에 안전한 책일 뿐이지 않느냐. 안전하니까 당신들이 이제라도 자기 양심을 위무하는 것에 불과한 그런 찬사를 늘어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니냐. 이런 의심이 드는 것이다.

설사 정말 위험천만한 책이라고 해도 그렇다. 그래봤자 책일 뿐이다. 지난주 금요일 오후부터 시작되었고 지금 이 시각까지 이어지고 있는 일본 원자력 발전소 사태에 비하면, 그 영향력이 천분의 일, 만분의 일도 안 된다. 세계를 이끌어간다는 유력 국가들의 에너지 정책은 세계 정치의 거의 모든 것이다. 현대사의 수많은 전쟁이 에너지를 둘러싼 약육강식의 벌거벗은 욕망 때문이었다. 세계 정치를 뒤바꾸는 계기가 될 엄청난 사건이, 통신 수단이 인류 역사상 가장 발달한 이때에 벌어졌는데, 몇 백 년 전 인디안 멸망사를 다룬 책이 다 뭐람!

정말 그렇다. 지금 내가 책을 읽을 정신이 어디 있는가. 나는 금요일 오후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일본 후쿠시마 사고에 내 정신을 완전히 다 바치고 있다. 나만 그럴까. 이번 사건 이전부터 원자력 발전에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다 그렇지 않을까. 일주일을 넘기고 있는 후쿠시마 사고는 정말 앞으로 어떻게 될까.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 주오>, 이런 책을 읽으며 마음 아파하는 일상의 시간이 다시 내게 오기나 할까? 반핵운동은 남은 내 평생을 바쳐도 아깝지 않을 정말 중대한 사회운동이구나, 나는 새삼 깨닫는 중이다. "더 이상의 원자력 발전소 증설은 절대 반대"가 온 인류의 구호가 되어야 함을 내 평생 어느 때보다 온몸으로 온마음으로 깨닫는 절실한 시간 속에 나는 있다.

600쪽에 육박하는 책,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 주오>, 나는 서평이랍시고 지금 이렇게 쓰고 있지만, 고백하자, 책의 총 18장 중 1장과 18장만 읽은 상태다. 말도 안 되는 부실한 독서를 겨우겨우 하고 글을 쓰고 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뭐라 평할 자격이 없다.

그럼에도 이 책을 둘러싼 배경 지식이랄까, 하나만 더 하자. 인디언 원주민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흉포한 유럽인들이 어떤 짓을 하였나. 수천 만 마리의 버펄로가 인디언들의 안정된 생존 근거인 것을 알고 그야말로 광기어린 살육에 나서지 않았던가. 하여 아메리카 대륙의 5000 만 마리가 넘던 버펄로가 수십 년 만에 8000마리로 줄어들지 않았나. 이 책은 아우슈비츠의 광기에 가까웠던 그 참혹한 역사를 알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책일 것이다. 자, 이 정도면 됐다. 저자의 개정판 머리말 두 쪽만 읽어도 한국어 번역에 대한 신뢰가 생기고, 또 저자의 문장의 밀도에도 신뢰할 수 있다. 이 정도만 말하는 것으로 그치자.

이 책을 나는 언젠가는 완독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날이 올까, 그런 날이 올 수 있을까? 싶기도 하다. 세계 역사와 세계 경제는 일본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참사 이전과 이후로 나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인류가 지금보다 몇 백 배 더 심각한 환경과 에너지 참사를 피하기 위해 지금 후쿠시마 사고가 조금 더 악화되기를 하는 악마 같은 유혹까지 들 정도다. 그만큼 에너지 문제에 대한 세계적인 의식 전환을 강제할 절체절명의 기회인 것이다.

이 사태가 잘 마무리되어 미국과 유럽의 정치 지도자가 "원자력 발전소 증설 반대"를 공식 선포하게 된다면, 그리고 그 대안으로 서남아시아 석유를 향하여 미친 개처럼 다시 달려드는 것이 아니라, 체르노빌 사태를 보고 충격을 받고 지금은 반핵 환경 사상가가 된 고르바초프가 최근 어떤 기고문에서 "미국 정부는 1947년부터 1999년까지 원자력 분야에 2600억 달러의 보조금을 지급한 반면, 풍력과 태양광 발전에는 불과 55억 달러밖에 지급하지 않았다"고 밝혔듯이, 인류의 죽음만 앞당길 뿐인 원자력 발전이 아닌 오직 유일한 대안인 재생 에너지 개발과 연구에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하고 적극적으로 달려들 수 있다면(정말 지구상의 인간이 살 길은 오직 그뿐이므로!) 그때에서야 희망찬 새 마음으로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 주오>를 힘차게 읽어낼 수 있을 것 같다. 인간의 욕망 반성이 에너지 문제뿐이겠는가. 몇 백 년 전 미국 대륙에서 벌어진 살육의 역사도 똑똑히 알아둬야 할 용기가 생길 것 같다. 그런 날이 오기를 바란다.

서평 아닌 이 정체불명의 글을 마치도록 하겠다. 눈물이 난다.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에서 정년퇴직한 기술자들이 피폭 방사선량이 생명에 위태로울 정도인데도 더한 참사를 막기 위해 자진하여 현장으로 달려가고 있다고 한다. "내 인생에 후회를 남기지 않기 위해"라고 남편은 말하고 "어서 가시라"고 그의 아내가 말했다고 한다. 운행 중에도 늘 위험천만한 사고가 언제 닥칠지 모르고 또 제 아무리 안전 운행을 하였다 하여도 처치 곤란한 악마 같은 핵폐기물을 남길 뿐인 원자력 발전이지만, 선량한 수많은 사람들의 평생 직장이기도 했다. 자식 키우고 교육시킬 수 있었던 것도 그 직장이 있어서였다.

지금까지의 후쿠시마 사태만 해도 끔찍하기 이를 데 없기에 더 이상의 참사는 피했으면 싶다. '차라리 원자폭탄이 떨어진 그때 죽었으면' 하고 바랄 정도로 무서운 것이 방사능 피폭 후유증을 앓는 이들의 평생에 걸친 고통이다. 지상에 원자력 발전소가 즐비하게 된 것이 우리 모두의 공업(共業)이라고 하여도 그 누구보다 퇴직 원자력 발전소 기술자들이 먼저 책임을 져야 할 것 같다. '원전 결사대'라고 찬사하려고 함이 아니다. 더한 참사 피해를 막아라, 당신들은 거기서 죽어라, 나를 핵발전소에 묻어 주오, 하고 죄 없는 인디언처럼 외쳐라! 그리고 조금도 억울해 하지 말아라. 인간이 인간을 죽이는 기막힌 인류의 역사에서 우리가 너무도 많은 것을 놓치고 살아왔기 때문일 뿐이다. 말했듯 우리의 공업 탓이다.

당신들부터 거기서 죽겠다고 각오하라! 내가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퇴직자라면, 나라도 당신처럼 현장으로 달려간다! 때문에 이렇게 지독하게 말할 수 있다. 사태를 마무리해다오. 그 후 우리가 배우겠다. 당신들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정말 열심히 싸우겠다.

부디 인디언 멸망사를 읽으며 눈물을 흘릴 아름다운 시간이 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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