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에게 힘이 되는 장소나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살면서 난처하거나 힘겨운 상황에 직면하기 마련. 그 순간에 위로받을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은, 또 그만큼 삶의 에너지를 얻고 올 수 있는 것이겠지. 사람은 원래 나약해서 스스로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한다는 것은 참 쉽지 않은 일인 것 같다.(나만 그런가?) 그래서 나의 경우는 다른 것에 기대서 삶을 위로받거나 공감받는 경우가 많다. 그게 책일 때도 있었고(2003, 2004년이 내겐 참 극렬했던 때였던 것 같다. 학교 샘들도 `샘, 학교 오면 대체 몇 마디나 하고 살아요?`이랬지. , 귀에 헤드셑 끼고 책만 읽었다.), 무작정 걷는 여행을 떠나는 일도 있었다.(금강, 영산강, 한강, 낙동강, 제주도. 내가 지금껏 살아오면서 영혼의 자유로움을 느낀 카이로스의 순간은, 그 순!간!이었다.) 혹은 사람들을 모아 남도 일대를 여러번(정말로 한 해에 4번씩이나 순천을 지나간 일도 있었지.) 다녔던 적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미지의 카드 같은 것은 남겨두었다. 정말 힘든 순간, 나 혼자 찾아가리라. 첫번째는 태안반도. 태안반도를 떠올리면 만리포, 학암포, 안면도 등을 떠올리지만, 나는 어은돌과 파도리를 먼저 생각한다. 그 적막함이란!! (난, 적막한 공간을 사랑한다.) 자연의 소리와 내 호흡 소리만이 존재하는 듯한 곳. 그곳에서의 나는 늘 아무 것도 아니었다. 나란 있을 수 없는 곳. 나가 없으니 문제는 애초에 없는 곳. 그곳에서의 일몰을 보며 눈물을 흘린 저녁이 있었고, 후배에게 전화를 걸어 삶을 이야기했던 밤이 있었다. 그날 밤, 나는 무척 울었던 것 같다. 삶이 위태로웠고 외로웠다. 내가 그곳을 좋아하는 것은 이렇게 살아 있음을 깨닫게 하는 공간이 될 수 있다는 것, 오롯한 나, 혹은 그것을 넘어 그것을 해체할 수 있는 정신적 지평 저 너머를 경험할 수 있는 영험한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두번째는 나의 고향. 바다를 끼고 앉은, 지금은 쇠락한 곳이다.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구산면 구복리. 내가 태어나고서도 행정구역명이 몇 차례 바뀌었던 것 같다. 의창군이었다가 창원군이었다가 그러다가 마산시였다가... 이렇게 바뀐다는 것은 그만큼 사람의 영향력에서 멀어진다는 것. 그저 주어지는 대로, 숙명처럼 살 수밖에 없는. 그러니 나약한 사람들이 착하게 모여사는 동네.
바다를 끼고 있는 내 고향은, 내 기억에는 무척 쓸쓸했다. 사람은 많은데, 사람은 깊은 바닷빛처럼 말이 없었고, 늘 고요했다. 일상은 똑같은 패턴으로 반복됐고, 그러다가 가끔 큰 일이 생겨나곤 했는데, 소가 사라졌다거나, 사람이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 아직 나에게 외상같은 것으로 남아 있는 것은, 한 동생의 죽음이다. 그날 오후, 동네 쪼무래기 몇이 꽃게를 잡겠다고 진섬을 마주본 해안으로 나갔고, 우리는 전에 그랬던 것처럼 수경을 끼고 돌 밑을 살폈다. 해는 지고 물은 차고, ``00야 집에 가자.`` 나는 이렇게 외쳤던 것 같다. 그랬는데, 00는 좀 더 잡고 가겠다고 했겠지. 그날 늦은 밤, 동네의 많은 배들이 바다에 불을 밝혀야 했다. 그날 밤, 나는 얼마나 가슴을 졸였던지. 엄마가 없는 어두운 집에서, 나는 이불을 뒤집어 쓰고, 내 잘못을 얼마나 많이 빌어야 했던지. 그랬는데, 그 동생은 아주 조용히, 동네에 아무런 일이 없었다는 듯이, 조용히 저 세상으로 떠났다.(그 바닷가가, 지금은 영삼이 부모님이 운영하시는 횟집이 있는 바닷가다. 나는 가끔 그곳에 들르면, 제를 올리듯, 그 해변가를 응시한다.)
그 마을에서의 일몰은 내가 어른이 되게 만들었다. 큰집 할머니는 내게 자주 `어른스럽다`거나, `암되다` 등의 말을 했고, 나는 그 말이 칭찬인 줄로만 알았다. 내 나이가 그 때 10살이 채 되지 않았을 무렵이니, 실은 불행하게도 조숙했던 면이 있었던 거다. 그때, 나는 무척 어렸음에도 일몰 무렵이 되면, 혼자서 고요해졌다. 친구들과 놀다가도 혼자 있고 싶어졌고, 부둣가에서 일몰을 보며 저녁을 보낸 때도 있었다. 잘은 모르겠는데, 돌아가신 아버지를 떠올렸을 수도 있겠다. 여튼 나는 그 시절에도 삶은 좀 고단했던 것 같기도 하다.(어머니는 논일, 밭일, 갯일로 10살도 채 되지 못한 나나 그보다 더 어린 여동생 둘을 보살피지 못하셨으니, 나는 삶이 좀 고달팠다.) 어머니가 갯일을 마치고 돌아오신 뒤, 좀 편안함을 느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내 키만한 싸리비를 들고 흙마당을 곱게 쓸던 일이며, 마당 우물물을 떠서 걸레를 빨고 마루청을 빛깔나게 닦았던 일이며. 그래도, 그래도. 나에게는 그 순간이 가장 빛나는 순간이며 감사한 순간이다. 그 시절의 내가 없었다면, 그 쓸쓸함에 대한 감각의 문을 열지 않았다면, 나는 어떤 사람이 되었을까.
하여, 나는 내가 힘든 순간의 위로를, 고향 마을 한적한 부둣가에 혼자 앉아서 일몰을 보는 것으로 받고 싶다.(그런데 나는 아직 한번도 그래본 적이 없다. 다행인거겠지. 그런데, 가끔은 혼자서 그러고도 싶은데, 삶이 복잡해서 그게 쉽지 않다.)
이런 동네에 내가 함께 근무한 선생님들을 데불고 다닌 지가 좀 됐다. 첫 발령지 모동중에서는 하지 못했고, 자동차고, 금곡고 샘들과는 함께 좀 다녔다. 이곳에 함께 가는 샘들은, 내가 그래도 가까이 지내는 샘들이다.
오늘도 학교 샘 몇 분과 함께 길을 나섰다. 최근엔 저도 비치로드도 생겨서 주말에는 발 디딜 틈이 없는 곳으로 변모했는데, 주중이라 좀 여유가 있을 것 같았다.(저도 비치로드가 생겨서 좋은 면도 있지만, 사라진 것도 많다. 부두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던 호젓함은 이제 없다. 걷는 게 우선이니까.) 고향 고추친구 영삼이 부모님이 운영하시는 부부 횟집에서 자연산 회로 배를 든든히 한 뒤 저도 비치로드 걷기에 나섰다.
저도는 내 고향 마을에서 연륙교로 건너갈 수 있는 섬이다. 이 섬을 빙 둘러서 둘레길을 만들었다. 아마도 20년 전에는 동네 사람들이 다니던 길을 이렇게 사람들이 찾기 쉽게 넓히거나 한 모양이다. (어렸을 때, 이 섬에 닭서리 하러 왔던 기억은 난다. 실패했지만. 그리고 분교다닐 때, 이 섬 아이들은 나룻배를 타고 육지로 건너왔다) 긴 코스로 걸으면 4시간 정도 걸릴 것 같았다. 우리는 시간상 2시간 정도 걸었는데, 바닷가로 내려갔다가 산으로 도로 올라오는 길을 걷는, `걸으면 길이다.`는 코스를 걸었다~ㅋ
걷는 내내 이런 바다를 볼 수 있다는 게 이 길의 좋은 점 같았다. 물론 오르는 길과 내리는 길이 적당히 섞여 있다는 것도 큰 매력. 섬 남단부에서는 거제도와 고성이 동시에 보인다. 그리고 고래머리라는 섬이 보이는데, 어릴 적에는 그곳을 배타고 지날 때, 산쾡이라는 돌고래과가 무척 많이 보였다. 나는 그게 상어인 줄 알았는데, 커서 고래라는 걸 알았다.
바다는 호수인 것처럼 고요했고, 저 멀리 보이는 섬들은 육지의 산능선마냥 늘어지듯 이어지고 있었다. 꼭 한 폭의 그림 같은데, 느낌이 묘하다. 난, 혼자였으면, 크게 울 것만 같았다.(이유는 묻지 마시라. 이유는 지극히 개인적인 법이니까!! 박지원의 `한 바탕 울 만한 자리`라는 글을 나는 떠올렸다. 근데, 찻집에서 나는 왜 이 이야기를 못했을까?)
학교 생활은 지극히 평범하거나 심심하다. 사는 일이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만, 나는 아직, 이야기를 함께 만들고 싶고, 느낌을 공유하고 싶으며, 이런 것으로 사는 일을 확충하고 싶다. 느낌의 결이 무척 섬세하게, 주름이 많이 지는 삶. 그래서 매 순간이 좋든 나쁘든 내 감각으로 느끼며 나를 구성해가는 일. 내가 살아가는 이 삶의 지평을 뛰어넘는 일. 저 너머의 무변광대. 그 길 위에 나는 서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