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나의 생활은 무척 평탄했다. 학교에서나 가정적으로 별 어려움없이 흘러왔다. 학교에서는 비담임에 3학년 전담이었으니, 수업만 하면 그만이었다. 학교에서는 담임의 업무가 훨씬 큰데, 그게 없으니 여유가 많았다. 가정적으로는 슬뫼가 큰 탈없이 자라주니 보는 눈이 흐뭇하기만 했다. 이렇게 생겨난 여유 덕에 가족들과 좋은 곳으로 가서 며칠을 쉬고 오는 호사도 여러번 누렸다. 누가 봐도 `음, 즐겁게 잘 지내시네요.`라고 할 만했다.(실제로, 인문부장샘은 `샘은 시간을 참 꽉 채워 잘 사는 것 같아요.` 말씀하셨다.)

 그럼에도 나는 가끔 외로움을 느꼈다. 학교에서 유독 그랬다. 교직 10년 쯤 되니까, 학교 안에서의 권력 관계나 그것의 움직임이 보였다. 그 전까지 나는 공식화된 기구나 공식적 절차를 믿었다. 물론 그것들을 통해서 학교 운영이 이뤄지긴 하지만, 자주는 그 이전에 이미 틀이 잡혀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결정된 틀이나 내용들이 `정말 교육을 위해서인가?`하는 의문이 자꾸만 생겨났다. 이계삼 선생님의 눈으로 학교를 보니, 학교는 정말 절망적이었다. 내가 지금껏 경험해온 순간들이 교육의 불가능성을 입증할 수 있는 것들이라, 더욱 절망했고 외로웠다.(그 외로움은 동료 교사들과의 관계에서 해소되긴 했지만, 교육의 문제는 여전히 남았다.) 물론 때때로 학생들과의 행복한 순간, 뭔가 배움이 일어난다는 순간도 없지 않았지만, 교육 제도의 큰 틀은 무겁기만 했다. 이런 괴리의 순간은 교사에게 고통스럽다. 나는, 올 한 해 이런 괴리와 모순을 자주 느꼈고, 그럴 때마다 좀 벗어나고 싶어했다.

 

 조금 더 깊이 파고들면, 나의 교직 생활에서 2011년은 그냥 지우고 싶은 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지금껏 교직에서 경험해보지 못한 상처와 자괴감으로 시작한 학년이었다. 교사로서의 자질, 인간으로서의 성품, 동료로서의 관계 등을 되묻고 물러서며 다시 반발했다가 잠잠해지는, 결국엔 또 자괴감으로 빠져드는, 잊고만 싶은 해였다. 나는 교사로서의 실존에 심각한 타격을 받았던 거였다.

 

 이젠 다 정리하고 싶어졌다. 잊혀지든 지나가든, 2011년은 나의 해가 아닌 것. 다시 말끔하게 출발하고픈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지리산이 생각났다. 올 해가 가기 전에 다 툴툴 털겠다, 위로받겠다, 한 바탕 울겠다. 그리하여 지라산으로 떠난 거였다.

 

 

 12월 23일, 처남과 나는 지리산으로 출발했다. 사상터미널에서 7시에 출발하는 버스를 탔더니 10시 무렵 구례 터미널에 내릴 수 있었다. 전화로 예약해둔 택시를 타고 성삼재로 올랐다. 구례군은 군수 주민소환으로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공공의 영역을 중시하는 지자체장은 정말 많지 않은 모양이다.(그 점에서 박원순 서울 시장의 도전은 기대가 되는 지점이다.)

 성삼재에서 노고단 대피소까지 40분 정도 걸렸다. 여기서 라면 두 개 끓여 먹고 연하천까지 가야 한다.

 

노고단 고갯마루에 올라 마고할미에게 무사 산행을 빌고, 출발했다.

 

 

 제일 앞에 뭉툭한 봉우리가 노을이 아름다운 반야봉, 저 뒤에 멀리 뾰족 솟은 봉우리가 천왕봉이다. 노고단에서 천왕봉까지는 25.5km. 2박 3일 동안 걸어가야 할 길이다.

 

  삼도봉에 섰다. 삼도봉은 전라북도, 전라남도, 경상남도의 세 도의 경계가 만나는 지점이다.

 

 

뒤에 펼쳐 보이는 능선. 나는 겨울 산의 능선을 볼 때마다 건강한 남자의 몸이 떠오른다.

 

 

 삼도봉에서 화개쪽으로 바라본 능선

 

산 능선에 올라선 순간, 처남과 나는 감탄사를 연발했다.

그래, 이 맛으로 산에 오는 거야.

잊어야 할 것도 없고, 기억할 것도 없는 것.

훌훌 헤쳐져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

이것이 산이 가져다 주는 위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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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원 2011-12-29 18: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매형 어서 짐꾸리세요! 이번에는 태백산 6박7일 종주를 떠납시다요^^ 매형덕에 아주 즐겁고 멋진 경험을했습니다 ㅎㅎ 수고하세요
 
나의 서양음악 순례
서경식 지음, 한승동 옮김 / 창비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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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이 책을 읽은 지 제법 흘렀지만, 마음의 울림을 정리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름다움은 아름다운 것으로 표현될 때 온전할텐데, 아무래도 나의 언어로는 불가하다. 괜히 내 말을 보탰다가는 이 아름다움에 불경스런 일이 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마음이 자꾸만 울컥거려 좀체 글로 표현하기가 쉽지 않았다. 좀 가라앉을 필요가 있었다. 책을 읽고 리뷰 몇 줄 남기는 게 훌륭한 책을 세상에 내보인 저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는 생각으로 마음을 잡았다.

 

 서경식은 재일조선인 2세, 자이니치이다. 그의 두 형은 서승, 서준식으로 한국의 민주화 운동 관련으로 옥고를 치러야 했고, 서경식은 그런 어두운 역사적 배경을 안고 우울한 시절을 버텨낸다.(나의 서양 미술 순례를 읽는 내내, 나는 그 우울감이 무거웠다.) 어쩌면 그의 우울은 태생적이라고 하는 게 맞을 것 같다. 일본에서는 일본인이 아니어서, 한국에서는 재일조선인이어서 경험할 수밖에 없는 생래적(生來的) 우울감!

 

 서경식의 이 책은 음악의 계급성, 잘츠부르크 음악제, 윤이상, 말러의 키워드로 읽혔다.


 음악의 계급성 - 음악은 불가사의한 존재다


 서경식은 어렸을 때, 클래식 음악에 반감을 가졌다고 한다.


 어릴 적 나는 클래식 음악을 즐기는 사람들에게 반감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중산계급이라는 표지(標識)고 교양있는 가정의 표지였다. 바꿔 말하면 그것은 `일본인`이란 표지고 재일조선인인 내게 클래식음악이란 손에 넣을 수 없는 사치스런 장난감 같은 것이었다. 바이올린 케이스를 들고 걸어가는 유복해 보이는 여자아이를 보면 돌이라도 던져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 43쪽


 음악(예술)은 다분히 계급적 속성을 내포하고 있다. 오페라의 시작이 르네상스 말기(1597년) 피렌체로 모여든 귀족들에게서 시작되었다지 않는가. 우리의 경우도, 궁중음악에서부터 민요까지만 해도 향유 계급은 천차만별이었다. 서양의 경우 지금도 그런가는 잘 모르지만, 지금 우리 나라에 수용되어 향유되는 클래식 음악만 봐도 그 사정을 확인할 수 있다. 브람스에서부터 트로트까지. 국립극장에서부터 라디오 감상까지.


  그런데 서경식은 클래식과 자본주의 중산계급의 세계를 등식으로 묶던 공식을 해제한다. 계기는 아마추어 합주단의 단골 구경꾼이 되면서다. 노동자, 교사, 두부가게 주인 등이 연주하는 음악이 전문가가 담지 못하는 진심을 담고 있었기 때문이란다. 그러면서 `음악은 불가사의한 존재다.`라고 말한다.


 모차르트는 궁정과 귀족의 비호를 받았기에 수많은 명작을 작곡할 수 있었지만 그 곡들은 귀족사회의 가치관을 훨씬 뛰어넘는 세계를 창조하지 않았는가.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 것일까. 음악은 어쩐지 불가사의하지 않은가. - 69쪽


잘츠부르크 음악제 - 보수의 반격


 서경식은 이 책에서 잘츠부르크 음악제에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그 덕에 음악제의 분위기를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어서 새로웠다. 여기서 알게 된 잘츠부르크 음악제에 대한 내용을 대강 정리하면 이렇다.


 잘츠부르크음악제는 1차 세계대전 뒤 전쟁으로 황폐해진 예술의 재건과 진흥, 평화와 우애의 메시지 발신, 그리고 생활이 곤궁한 음악가와 예술가의 구제 등을 목적으로 (중략) 나찌는 1938년 오스트리아 합병 이전부터 음악제에 간섭을 하기 시작했고, 병합이 결정적인 단계에 접어들자 또스까니니와 발터 등이 음악제를 떠났다. (중략) 전쟁이 끝난 직후 잘츠부르크는 미군이 점령했으나 음악제는 열렸다. 전쟁 전의 음악제에서 중심적인 존재였던 푸르트벵글러와 그의 숙적 카라얀은 모두 비(非)나찌화 심사를 받게 되고 음악제에 금방 복귀할 순 없었다. (중략) 푸르트벵글러는 1947년에야 복귀했으나 (중략) 카라얀은 푸르트벵글러 사후 1956년이 되어서야 마침내 음악제 예술감독으로 취임했고 1960년에 그 자리를 떠난 뒤에도 잘츠부르크음악제의 `제왕`으로 군림하게 된다. (중략) 이 시절에 유럽 각지의 부유층들이 모여든 호화로운 사교장이 됐고, 입장료도 비싸 음악제의 재정은 아주 윤택했다. (중략) 1989년 카라얀의 급사로 잘츠부르크음악제의 카라얀시대엔 종지부가 찍혔다. (중략) 1992년에 벨기에인 제라르 모르띠에가 예술감독에 취임해 개혁을 시작했다. 모르띠에는 음악제를 호화로운 사교장에서 진지한 예술적 투쟁의 장으로 바꾸었던 것이다. (중략) 예술제는 실로 정치와 예술이 상극(相剋)하는 장이고, 예술에서 정치적 투쟁이 벌어지는 장이다.(101쪽-103쪽)


 이런 흐름으로 변모했던 음악제에서, 저자는 `보수파의 반격`을 현장에서 목격한다. 2010년 리까르도 무띠가 지휘하는 빈 필의 공연을 마치고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관객들 앞에 섰다. 그는 실험적이고 도발적인 신세대 연출가와 연주자들의 경향에 맞서 전통적인 오페라를 수호하겠다고 공언한 적도 있다. 이것을 목격한 저자는 `관객 동원력을 다소 희생하고라도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기획을 실현하면서 현대음악에도 활동의 장을 제공해온 모르띠에의 이념에, 관객 동원력을 중시하는 상업주의가 승리했음을 의미한다.`고 평했다. 이 무렵부터 음악제의 관객의 연령대가 높아지고 공연은 고급화되었던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보수파의 반격에 불길함을 느꼈다. 소련이 망한 것은 민족주의를 넘어서지 못한 국수주의, 그러니까 보수화의 물결과 무관하지 않다. 이념으로서의 사회주의는 사망선고를 받았고, 현실은 권위주의적 권력자가 통치하는 초국가일 뿐이었다. 저자가 무띠가 앞장선 음악제의 보수화에 불길함을 느끼는 것은 소련의 패망에서 느낀 어떤 회한과 관련있을 것 같다.


분열된 존재 - 윤이상, 말러, 그리고 서경식


 윤이상은 1967년 동백림 사건으로 납치, 수인이 되는 정치적 수난의 삶을 살게 된다. 그의 예술적 투쟁이 정치적 투쟁과 무관하지 않음은 그런 수난과 무관하지가 않다. 그는 독재 정권과의 격투를 그의 예술적 영감과 원천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저자는 형들의 구원 활동을 벌이면서 윤이상 선생과 연을 맺는다.

 우리 정부는 1980년대 이후 그의 귀국을 권유했으나, 윤이상은 `동베를린 사건`에 대한 사죄와, 국가보안법 폐지, 정치범 석방 등을 선결 조건으로 내걸었다. 그리고 1994년 9월 그의 고향 통영에서 `윤이상 음악제`가 기획되었다. 하지만 정부와 윤이상의 정치적 격투가 끝나지 않아 그의 고향 방문은 끝내 성사되지 못했고, 먼 타국에서 생을 마감해야만 했다. 그는 한국인이면서 한국 정부로부터 끝내 포용되지 못한 존재, 가까운 일본에서는 직접 음악제에 참여할 수 있었지만, 정신적으로 보다 가까운 한국에서는 입국조차 허가되지 않았던 존재였다. 그 속에서 느꼈을 소외와 외로움은 예술적인 바탕이 되었을지는 몰라도, 인간 윤이상에게는 큰 상처가 아니었을까.


 짙은 죽음의 이미지로 가득찬 음악가 말러 역시 분열된 존재다. 나찌시절, `유대인 3M`으로 불린 마이어베어, 멘델스존, 말러는 연주를 금지당했다. 대신, 바그너와 브루크너가 게르만 정신을 보여주는 음악으로 권장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말러는 유대교도로서의 종교적 의식은 희박했고, 범게르만주의에 동화되어갔다. 학창시절 범게르만주의적인 학생운동에 참여한 적도 있다. 그렇지만 말러는 평생 자신의 출신 때문에 반유대주의로부터 위협받고 배척당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래서 그의 다음 말은 의미심장하다.


 내게는 삼중의 의미에서 고향이 없다. 오스트리아인 사이에서는 보헤미아인이어서, 독일인 사이에서는 오스트리아인이어서, 지상의 모든 사람들 사이에서는 유대인이어서. - 257쪽


 앞에서 언급했듯이 서경식 역시, 끊임없이 자기 존재에 대한 물음을 붙잡고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하는 존재다. 일본에서도, 한국에서도 크게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 어디에서도 존재하지 않는 존재. 그런 그가 서양 음악 순례를 하면서 그와 비슷한 정체성의 문제를 안고 있는 윤이상, 말러에 집중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러니 이 책은 음악에 관한 이야기이면서 결코 거기에 머물지 않는다. 그는 음악을 순례했지만, 어쩌면 자기 존재에 대한 순례를 이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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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25 21: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무거워진 발걸음이 힘에 겨워
회색빛 하늘만 바라보았어
키작은 하늘엔 잿빛구름
비라도 내릴듯해
고개숙인 가로등에 비를 보듯
보이는 사랑만 했는지 몰라
어깨에 떨어진 빗물처럼
느낄수도 있잖아
그대만은 나를 영원히 지켜주리라
믿었는데
이렇게 날 떠나갈 수 있는건
함께한 사랑은 없었던거야
하지만 남겨진 가슴가득 고인
그대의 눈빛은 그대로인데
못다한 사랑이 너무 많이 남아
그대를 잊을 수 없을것 같아

 

--

 

어제 하산길에 늘 푸른곰한테서 실연 경험담을 들었을 때,

나는 이 노래가 떠올랐다.

 

세상 많은 것들이 상황에 따라 달리 이해된다.

특히 노랫말은 더더욱.

 

20대때 내가 저 노래를 알았다면(93년도에 발표되었다는데, 나는 최근에서야 알았다.

20대 때 몰랐던 게 다행이겠지~ㅋ)

어땠을까?

 

지금 들어도 가슴 한 구석이 시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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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3회차 파르티잔 정기 산행.

파르티잔은 20여년의 역사를 지녔다.

1기부터 18기까지 정식 기수를 두고 있고, 나는 4년째 예비기수 상태.

한 달에 두번의 정기 산행과 시산제, 여름 캠프, 연말 집시(執時)여행이 이 산악회의 특징.

 

이번 정기 산행은 지리산. 그것도 거림에서 세석평전까지다.

누리집에 올라온 산행 공지를 보고, 속으로 `꺅~~`소리를 질렀다.

지리산이라니, 지리산이라니...

이름만 떠올려도 가슴이 부풀어오르는 산. 아슴한 鄕愁가 느껴지는 산.

지리산은 女神이 산다지 않는가. 어머니같은. 그러니 언제나 푹 안기고 싶은 곳이다.

무슨 일로든 찾아가도 위로받고 올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산이다.

만사 제쳐놓고 가겠다고 결심했다.

 

 6시 30분, 범일동에서 출발했다.

 거림골 입구까지는 두 시간 조금 넘게 걸렸다.(사진에 표시된 시간은 틀렸다. 아마 9시 20분쯤 된다.) 이번 산행은 2011년 마지막 산행. 전날이 대장님 아버님 장례가 있어 대원의 참여가 저조했다. 그래도 일당백하는 재한이(초등학생)이 있어 꽉 찬다~ㅋ 출발 직전 단체 사진 찰칵!!

 

 

 거림에서 세석까지는 6km. 길 왼편으로 거림골이 흐르고, 오르는 길은 그리 어렵지 않다.

 몸에서는 땀이 조금 나고, 얼굴은 찹찹하니 상쾌하다. 이 맛에 산에 오른다~ 흠...

 

  이번 산행은 선두에서 걷게 됐다. 일일 대장 역을 맡으신 외생이 아저씨(형님이라 부르라시지만...) 그리고 늘푸른 곰 승진이. 산행 중 잠깐 짐 부려놓고 쉬는 시간이 좋다. 먹을 것도 있고~ㅋ

 

 

  얼마간 오르자 이렇게 눈이 제법 쌓였다. 하늘은 하얗게 흐리고, 눈발도 간간히 날리는 게, 세석에서의 풍광은 어떨까?

 

 

 

 세석평원에 거의 다 올랐다. 겨울 나무는 이렇게 눈꽃을 피웠다.

 

  그림같다.

 

 

 12월 23일부터 2박 3일간 지리산 종주 계획을 세웠는데, 이런 세석의 모습을 보고서 그날이 빨리 왔음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세석산장 취사장에서 후미 대원들을 기다렸는데, 하00 선배의 실종 사건이 생겼다.

 다른길로 접어드는 것 까지는 봤는데, 그 이후에 선배님을 봤다는 사람이 없었다.

 걱정스러웠고, 3명의 대원이 찾으러 나섰다.(심00, 김00 선배는 산행기점까지 거의 하산을 했다.)

 모든 대원이 세석산장에서 기다리고 있기에는 하산길이 걱정돼서 점심을 급히 먹고,

 여성대원과 몇몇은 하산길에 나섰다. 한 시간쯤 내려왔나, 지칠대로 지친 하00선배님을 만났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사정을 들었는데, 속으로 유서까지 쓰셨단다.

 아내에게 남긴 유서의 내용은, 나는 그리 못한다~ㅋㅋㅋ

 여튼 우리는 무사히 돌아왔고, 초읍에서 간단한 송년회를 했다.

 

 내년에는 정기 산행에 좀 자주 다닐 수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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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20 22: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누구나에게 힘이 되는 장소나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살면서 난처하거나 힘겨운 상황에 직면하기 마련. 그 순간에 위로받을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은, 또 그만큼 삶의 에너지를 얻고 올 수 있는 것이겠지. 사람은 원래 나약해서 스스로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한다는 것은 참 쉽지 않은 일인 것 같다.(나만 그런가?) 그래서 나의 경우는 다른 것에 기대서 삶을 위로받거나 공감받는 경우가 많다. 그게 책일 때도 있었고(2003, 2004년이 내겐 참 극렬했던 때였던 것 같다. 학교 샘들도 `샘, 학교 오면 대체 몇 마디나 하고 살아요?`이랬지. , 귀에 헤드셑 끼고 책만 읽었다.), 무작정 걷는 여행을 떠나는 일도 있었다.(금강, 영산강, 한강, 낙동강, 제주도. 내가 지금껏 살아오면서 영혼의 자유로움을 느낀 카이로스의 순간은, 그 순!간!이었다.) 혹은 사람들을 모아 남도 일대를 여러번(정말로 한 해에 4번씩이나 순천을 지나간 일도 있었지.) 다녔던 적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미지의 카드 같은 것은 남겨두었다. 정말 힘든 순간, 나 혼자 찾아가리라. 첫번째는 태안반도. 태안반도를 떠올리면 만리포, 학암포, 안면도 등을 떠올리지만, 나는 어은돌과 파도리를 먼저 생각한다. 그 적막함이란!! (난, 적막한 공간을 사랑한다.) 자연의 소리와 내 호흡 소리만이 존재하는 듯한 곳. 그곳에서의 나는 늘 아무 것도 아니었다. 나란 있을 수 없는 곳. 나가 없으니 문제는 애초에 없는 곳. 그곳에서의 일몰을 보며 눈물을 흘린 저녁이 있었고, 후배에게 전화를 걸어 삶을 이야기했던 밤이 있었다. 그날 밤, 나는 무척 울었던 것 같다. 삶이 위태로웠고 외로웠다. 내가 그곳을 좋아하는 것은 이렇게 살아 있음을 깨닫게 하는 공간이 될 수 있다는 것, 오롯한 나, 혹은 그것을 넘어 그것을 해체할 수 있는 정신적 지평 저 너머를 경험할 수 있는 영험한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두번째는 나의 고향. 바다를 끼고 앉은, 지금은 쇠락한 곳이다.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구산면 구복리. 내가 태어나고서도 행정구역명이 몇 차례 바뀌었던 것 같다. 의창군이었다가 창원군이었다가 그러다가 마산시였다가... 이렇게 바뀐다는 것은 그만큼 사람의 영향력에서 멀어진다는 것. 그저 주어지는 대로, 숙명처럼 살 수밖에 없는. 그러니 나약한 사람들이 착하게 모여사는 동네.

 바다를 끼고 있는 내 고향은, 내 기억에는 무척 쓸쓸했다. 사람은 많은데, 사람은 깊은 바닷빛처럼 말이 없었고, 늘 고요했다. 일상은 똑같은 패턴으로 반복됐고, 그러다가 가끔 큰 일이 생겨나곤 했는데, 소가 사라졌다거나, 사람이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 아직 나에게 외상같은 것으로 남아 있는 것은, 한 동생의 죽음이다. 그날 오후, 동네 쪼무래기 몇이 꽃게를 잡겠다고 진섬을 마주본 해안으로 나갔고, 우리는 전에 그랬던 것처럼 수경을 끼고 돌 밑을 살폈다. 해는 지고 물은 차고, ``00야 집에 가자.`` 나는 이렇게 외쳤던 것 같다. 그랬는데, 00는 좀 더 잡고 가겠다고 했겠지. 그날 늦은 밤, 동네의 많은 배들이 바다에 불을 밝혀야 했다. 그날 밤, 나는 얼마나 가슴을 졸였던지. 엄마가 없는 어두운 집에서, 나는 이불을 뒤집어 쓰고, 내 잘못을 얼마나 많이 빌어야 했던지. 그랬는데, 그 동생은 아주 조용히, 동네에 아무런 일이 없었다는 듯이, 조용히 저 세상으로 떠났다.(그 바닷가가, 지금은 영삼이 부모님이 운영하시는 횟집이 있는 바닷가다. 나는 가끔 그곳에 들르면, 제를 올리듯, 그 해변가를 응시한다.)

 그 마을에서의 일몰은 내가 어른이 되게 만들었다. 큰집 할머니는 내게 자주 `어른스럽다`거나, `암되다` 등의 말을 했고, 나는 그 말이 칭찬인 줄로만 알았다. 내 나이가 그 때 10살이 채 되지 않았을 무렵이니, 실은 불행하게도 조숙했던 면이 있었던 거다. 그때, 나는 무척 어렸음에도 일몰 무렵이 되면, 혼자서 고요해졌다. 친구들과 놀다가도 혼자 있고 싶어졌고, 부둣가에서 일몰을 보며 저녁을 보낸 때도 있었다. 잘은 모르겠는데, 돌아가신 아버지를 떠올렸을 수도 있겠다. 여튼 나는 그 시절에도 삶은 좀 고단했던 것 같기도 하다.(어머니는 논일, 밭일, 갯일로 10살도 채 되지 못한 나나 그보다 더 어린 여동생 둘을 보살피지 못하셨으니, 나는 삶이 좀 고달팠다.) 어머니가 갯일을 마치고 돌아오신 뒤, 좀 편안함을 느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내 키만한 싸리비를 들고 흙마당을 곱게 쓸던 일이며, 마당 우물물을 떠서 걸레를 빨고 마루청을 빛깔나게 닦았던 일이며. 그래도, 그래도. 나에게는 그 순간이 가장 빛나는 순간이며 감사한 순간이다. 그 시절의 내가 없었다면, 그 쓸쓸함에 대한 감각의 문을 열지 않았다면, 나는 어떤 사람이 되었을까.

 

 하여, 나는 내가 힘든 순간의 위로를, 고향 마을 한적한 부둣가에 혼자 앉아서 일몰을 보는 것으로 받고 싶다.(그런데 나는 아직 한번도 그래본 적이 없다. 다행인거겠지. 그런데, 가끔은 혼자서 그러고도 싶은데, 삶이 복잡해서 그게 쉽지 않다.)

 

 이런 동네에 내가 함께 근무한 선생님들을 데불고 다닌 지가 좀 됐다. 첫 발령지 모동중에서는 하지 못했고, 자동차고, 금곡고 샘들과는 함께 좀 다녔다. 이곳에 함께 가는 샘들은, 내가 그래도 가까이 지내는 샘들이다.

 

 오늘도 학교 샘 몇 분과 함께 길을 나섰다. 최근엔 저도 비치로드도 생겨서 주말에는 발 디딜 틈이 없는 곳으로 변모했는데, 주중이라 좀 여유가 있을 것 같았다.(저도 비치로드가 생겨서 좋은 면도 있지만, 사라진 것도 많다. 부두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던 호젓함은 이제 없다. 걷는 게 우선이니까.) 고향 고추친구 영삼이 부모님이 운영하시는 부부 횟집에서 자연산 회로 배를 든든히 한 뒤 저도 비치로드 걷기에 나섰다.

 

 

 저도는 내 고향 마을에서 연륙교로 건너갈 수 있는 섬이다. 이 섬을 빙 둘러서 둘레길을 만들었다. 아마도 20년 전에는 동네 사람들이 다니던 길을 이렇게 사람들이 찾기 쉽게 넓히거나 한 모양이다. (어렸을 때, 이 섬에 닭서리 하러 왔던 기억은 난다. 실패했지만. 그리고 분교다닐 때, 이 섬 아이들은 나룻배를 타고 육지로 건너왔다) 긴 코스로 걸으면 4시간 정도 걸릴 것 같았다. 우리는 시간상 2시간 정도 걸었는데, 바닷가로 내려갔다가 산으로 도로 올라오는 길을 걷는, `걸으면 길이다.`는 코스를 걸었다~ㅋ

 

 

 

 걷는 내내 이런 바다를 볼 수 있다는 게 이 길의 좋은 점 같았다. 물론 오르는 길과 내리는 길이 적당히 섞여 있다는 것도 큰 매력. 섬 남단부에서는 거제도와 고성이 동시에 보인다. 그리고 고래머리라는 섬이 보이는데, 어릴 적에는 그곳을 배타고 지날 때, 산쾡이라는 돌고래과가 무척 많이 보였다. 나는 그게 상어인 줄 알았는데, 커서 고래라는 걸 알았다.

 바다는 호수인 것처럼 고요했고, 저 멀리 보이는 섬들은 육지의 산능선마냥 늘어지듯 이어지고 있었다. 꼭 한 폭의 그림 같은데, 느낌이 묘하다. 난, 혼자였으면, 크게 울 것만 같았다.(이유는 묻지 마시라. 이유는 지극히 개인적인 법이니까!! 박지원의 `한 바탕 울 만한 자리`라는 글을 나는 떠올렸다. 근데, 찻집에서 나는 왜 이 이야기를 못했을까?)

 

 학교 생활은 지극히 평범하거나 심심하다. 사는 일이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만, 나는 아직, 이야기를 함께 만들고 싶고, 느낌을 공유하고 싶으며, 이런 것으로 사는 일을 확충하고 싶다. 느낌의 결이 무척 섬세하게, 주름이 많이 지는 삶. 그래서 매 순간이 좋든 나쁘든 내 감각으로 느끼며 나를 구성해가는 일. 내가 살아가는 이 삶의 지평을 뛰어넘는 일. 저 너머의 무변광대. 그 길 위에 나는 서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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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두콩 2011-12-13 1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거 `나`다...
여기에 없는 내가 저기에 있어.

2011-12-13 22: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2-23 23:06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