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언제까지나 회계사무원으로 살아갈 운명을 타고났을지도 모른다. 시나 문학은 내 머리에 앉은 나비와 같아서, 그것이 아름다울수록 나를 더 우스꽝스럽게 만들 것이다.

바스케스 사무실의 회계관리장이 되는 날이 내 인생에서 가장 위대한 날일 테지, 나도 안다. 씁쓸하고 냉소적인 예감이지만 나의 지성을 걸고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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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비참한 상황은 아무렇게나 이어지는 사색을 기록하느라 조금씩 모아놓은 이 단어들로부터 어떤 영향도 받지 않는다. 물을 다 마셨는데도 잔의 밑바닥에 녹지 않고 남아 있는 찌꺼기처럼 나는 모든 표현의 밑바닥에서 무가치한 존재로 살아간다. 장부에 숫자를 기입할 때처럼 세심하되 무심하게 나의 문학을 기록한다. 별들이 반짝이는 광대한 하늘과 무수히 많은 영혼들의 수수께끼, 알 수 없는 심연의 밤과 결코 이해할 수 없는 혼돈, 이 모든 것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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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그래왔듯이, 앞으로도 그렇겠지만, 적막한 내 방에서 홀로 서글픈 심정으로 글을 쓴다. 그리고 정말 보잘것없어 보이는 나의 목소리가 혹시라도 수많은 목소리들의 본질, 수많은 삶들이 열망하는 자기표현, 그리고 일상에 매인 운명, 부질없는 꿈과 가능성 없는 희망을 감수하며 살아가는 나를 비롯한 수많은 영혼들의 인내심을 담아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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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내 앞에는 비슴듬히 기울어진 오래된 책상 위에 커다랗고 두꺼운 장부가 펼쳐져 있다. 장부를 보던 나의 피곤한 눈과 그보다 더 피곤한 영혼을 들어올린다. 이 모든 것이 의미하는 무無의 저 너머로는 똑같이 생긴 가게 선반들과 종업원들, 그리고 평범한 장소의 질서와 평온함이 있는 창고가 도라도레스 거리를 마주보고 있다. 유리창을 통해 또다른 현실의 소리가, 선반 언저리에 있는 고요만큼이나 평범한 소리가 들려온다.
다시 눈을 내리고 회사의 실적을 세심하게 숫자로 적어넣은 회계장부를 바라본다. 남몰래 미소 지으며 생각한다. 농장 이름과 가격이 적혀 있고 흰 여백과 줄과 글자와 눈금이 새겨진 종이들과 씨름하는 인생에는, 위대한 항해자들과 위대한 성인들, 모든 시대의 시인들, 그러니까 어디에도 기록으로 남지 않은 채 세상의 평가를 받지 못하고 사라진 수많은 이들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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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심하고 이름 없는 사무원인 나는 보잘것없는 내 방 책상 앞에 앉아 영혼을 구원하기라도 하듯 단어들을 쓴다. 저멀리 높고 넓은 언덕 위 이 세상 것이 아닌 듯한 일몰과, 인생의 즐거움을 포기하고 얻은 조각상과, 환멸에 빠져 종교를 단념했음에도 내 손가락에 그대로 남아 있는 신앙의 반지로 나를 그럴듯하게 꾸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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