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흐는 그 사람과 교외선 열차를 타고 배낭을 무릎 위에 놓고 앉았지만, 점심시간이라 찻간이 거의 비어 있어서 아직도 모든 것이 농담 같았다. 텅 빈 찻간과 자신의 장난스러운 행동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는지는 자신도 설명할 수가 없었다. 지인이 배낭을 가지고 교외선을 탔다는 것, 블로흐도 같이 탔다는 것, 그들이 함께 교외의 음식점에서 점심을 먹고, 블로흐가 말했듯이 "실제로 축구장에" 함께 갔다는 것, 경기가 그의 마음에 들지 않아서 혼자 도시로 돌아왔다는 것 - 그것이 블로흐에게는 경기와 심판, 양편의 속임수처럼 생각되었다. - 이 모든 것이 가치 없는 일이라고 블로흐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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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하필 ‘있음에도’ 일까? ‘창문은 활짝 열려 있는데 사무실에 아무도 없는 일이 가능할까?’ 처럼 ‘있는데’란 단어를 쓸 수도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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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수의 복잡한 삶이 무의식적으로 전개되는 것이라면, 그냥 아예 없던 삶이나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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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웃음의 이면에는 임박한 재난이 느껴진다. 재난은 한 주 두 주 지나면서 점점 가까워지지만 진짜 오지는 않는다. 어쩌면, 이미 와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늘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더 어려운 시간도 버텼기 때문에, 재난이 지금 발생하고 있음을 알아채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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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말했듯, 이론은 "그것이 생산된 기존 질서에 대한 광고"로 축소되고 드러날 뿐이다. 이러한 비판에 의하면, 하나의 이론이 문화산업에 대한 비판으로 제시되었다 하더라도, 그 이론은 결국 바로 그 산업을 홍보하는 형태가 되고 만다. 스스로의 목적에 따라 그 어떤 것이라도 도용하고 재구축하는 자본주의야말로 궁극의 전용의 거장인 게다. 브로타르스는 그의 총체적인 비관주의를 확고하게 재확인하기까지 살지는 못했지만, 결국에는 이론과 문화 산업은 공모하게 된다는 것, 그리고 ‘제도 비판’은 그것이 성공의 지지 기반으로서 의존하게 되는 바로 그 국제적인 마케팅 제도에 결국 흡수되고 만다는 것을 예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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