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내 앞에는 비슴듬히 기울어진 오래된 책상 위에 커다랗고 두꺼운 장부가 펼쳐져 있다. 장부를 보던 나의 피곤한 눈과 그보다 더 피곤한 영혼을 들어올린다. 이 모든 것이 의미하는 무無의 저 너머로는 똑같이 생긴 가게 선반들과 종업원들, 그리고 평범한 장소의 질서와 평온함이 있는 창고가 도라도레스 거리를 마주보고 있다. 유리창을 통해 또다른 현실의 소리가, 선반 언저리에 있는 고요만큼이나 평범한 소리가 들려온다.
다시 눈을 내리고 회사의 실적을 세심하게 숫자로 적어넣은 회계장부를 바라본다. 남몰래 미소 지으며 생각한다. 농장 이름과 가격이 적혀 있고 흰 여백과 줄과 글자와 눈금이 새겨진 종이들과 씨름하는 인생에는, 위대한 항해자들과 위대한 성인들, 모든 시대의 시인들, 그러니까 어디에도 기록으로 남지 않은 채 세상의 평가를 받지 못하고 사라진 수많은 이들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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