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늘에 대하여 - 다니자키 준이치로 산문선
다니자키 준이치로 지음, 고운기 옮김 / 눌와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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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라는 물건은 중국인이 발명했다고 들었는데, 서양 종이를 대하면 단순한 실용품이라는 것 이외에 아무런 느낌도 일어나지 않지만, 당지나 일본지의 결을 보면 거기서 일종의 따스함을 느끼고 마음이 안정된다. 같은 흰 종이라도 서양 종이의 흰색과 봉서지나 백당지의 흰색은 다르다.
서양 종이의 겉은 광선을 되튕기는 듯한 맛이 나는데, 봉서지나 당지의 겉은 포근한 첫눈의 표면처럼, 몽실몽실하게 광선을 안으로 빨아들인다. 그리고 손에 와 닿는 감촉이 보들보들하고 접어도 소리가 나지 않는다. 그것은 나뭇잎을 만지고 있는 것과 같이 차분하고 촉촉하다. -20쪽

중국인은 또한 옥이라는 돌을 사랑하는데, 저 묘하게 살짝 흐린 느낌이 드는, 몇 백 년의 오래된 공기가 하나로 뭉친 듯한, 속까지 거슴츠레하게 둔탁한 빛을 머금은 돌의 딱딱함에 매력을 느끼는 것은 우리 동양인만이 아닐까. 루비나 에메랄드와 같은 색채가 있는 것도 아니고, 금강석과 같은 광채가 있는 것도 아닌 저런 돌의 어디에 애착을 보이는 것인지, 우리들도 잘 알지 못하겠지만, 그러나 그 흐린 표면을 보면 중국의 돌다운 느낌이 들고, 오랜 과거를 가진 중국 문명의 앙금이 저 두툼한 어떤 흐릿함 속에 퇴적되어 있는 것처럼 생각되어, 중국인이 저러한 색채나 물질을 선호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고 하는 것만은 끄덕여진다.

수정 같은 것도, 요즈음은 칠레에서 많이 수입되는데, 우리의 수정과 견주면, 칠레산은 너무 깨끗하고 지나치게 투명하다. 옛날부터 있는 고슈수정은, 투명하면서도 전체가 희미하게 흐릿하여서 좀더 무게가 나가는 느낌이 들고, 풀 들인 수정이라고 하여, 속에 불투명한 고형물이 한데 섞인 것을 오히려 우리는 좋아하는 것이다. 유리조차도 중국인의 손으로 만든 건륭유리라는 것은 유리라기보다는 옥이나 마노에 가깝지 않았을까. 유리를 제조하는 기술은 일찍부터 동양에 알려져 있었으면서도, 그것이 서양처럼 발달하지 못한 채, 끝내 도자기 쪽이 진보한 것은 우리의 국민성과 상당히 관계있음에 틀림없다. 우리들이 한결같이 빛나는 것을 싫어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옅게 선명한 것보다도, 가라앉아 그늘진 것을 더 좋아한다. 그것은 천연의 돌이든 인공의 도구이든, 반드시 세월의 손때를 연상시키는 듯한 흐릿함을 띤 빛인 것이다. -21 - 22쪽

화려한 마키에 따위를 그려 넣고 번쩍번쩍 빛나는 왁스를 바른 작은 상자나 책상이나 선반을 보면, 너무 현란하여 차분하지 않고 속악하게조차 생각되는 경우가 있는데, 만약 그런 도구들을 둘러싼 공백을 새까만 어둠으로 빈틈없이 칠하고, 태양이나 전등의 광선 대신에 등불 하나나 촛불로 밝게 해 주면, 문득 그 현란하던 것이 바닥 깊숙이 가라앉아, 차분하게 무게 나가는 물건이 될 것이다.
옛날의 공예가가 그릇에 칠을 바르고, 마키에를 그릴 때는, 반드시 그런 어두운 방을 염두에 두고, 빛이 적은 속에서의 효과를 겨냥했음에 틀림없고, 금색을 호화롭게 사용한 것도, 그것이 어둠에 떠오르는 상태나, 등불을 반사하는 정도를 고려한 것이라 여겨진다. 결국 금 마키에는 밝은 곳에서 한번에 퍼뜩 전체를 보는 것이 아니라, 어두운 곳에서 여러 부분이 그때그때 조금씩 드러내는 것을 보도록 만들어진 것이어서, 호화 현란한 모양의 대부분을 어둠에 숨겨 버리는 것이, 말로 할 수 없는 여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그리고 저 반짝반짝 빛나는 표면의 광채도, 어두운 곳에 놓고 보면 그것이 등불 끝의 어른거림을 비추고, 조용한 방에도 때때로 바람이 찾아온다고 알려 주어, 어느덧 사람을 명상에 빠지게 한다.
만약 저 음울한 방 안에 칠기라는 것이 없다고 한다면, 촛불이나 등불이 자아내는 괴이한 빛의 꿈의 세계가, 그 등불의 펄럭임이 때리고 있는 밤의 맥박이 얼마나 매력을 감쇄당할 것인가. 정말 그것은 다다미 위로 몇 줄기의 작은 시내가 흐르고, 연못 물이 가득 차 있는 것처럼, 하나의 등불 그림자를 여기저기에 비춰서, 가늘게 희미하게 가물가물 전하면서, 밤 그 자체에 마키에를 한 듯한 비단을 짜낸다. -26 - 27쪽

일본 요리는 먹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이라고 하지만, 이런 경우, 보는 것 이상으로 명상하는 것이라 말하련다. 그리고 그것은 어둠에 깜박이는 촛불과 칠기가 합주하는 무언의 음악인 것이다. 일찍이 소세키 선생은 [풀베개]에서 양갱의 빛을 찬미한 적이 있는데, 말하자면 양갱의 빛깔 역시 명상적이 아닐까. 옥처럼 반투명의 흐린 표면이 속까지 햇빛을 빨아들여서 꿈꾸듯 발그스레함을 머금고 있는 느낌, 그 색조의 깊음, 복잡함은 서양의 과자에서 절대로 볼 수 없다. 크림 따위는 그것에 비하면 천박하고 단순한 것이다.
그러나 양갱의 색조도 그것을 칠기 과자그릇에 담아서, 표면의 색을 겨우 알아볼 어둠에 잠기게 하면 한층 더 명상적이 된다. 사람은 그 차갑고 미끄러운 것을 입속에 머금을 때, 마치 방 안의 암흑이 하나의 달콤한 덩어리가 되어 혀끝에서 녹는 것을 느끼고, 사실은 그다지 맛있지 않은 양갱이라도, 맛에 색다른 깊이가 덧보태어지는 듯이 생각한다. -28 쪽

그러나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언제나 생활의 실제로부터 발달하는 것으로, 어두운 방에 사는 것을 부득이하게 여긴 우리 선조는, 어느덧 그늘 속에서 미를 발견하고, 마침내는 미의 목적에 맞도록 그늘을 이용하기에 이르렀다. 사실 다다미방의 미는 전적으로 그늘의 농담에 따라 생겨난 것이고, 그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서양인이 다다미방을 보고 그 간소함에 놀라고, 다만 회색의 벽이 있을 뿐 아무런 장식도 없다고 느끼는 것은 그들로서는 아무래도 당연하지만, 그것은 그늘의 수수께끼를 풀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이 아니라도, 태양 광선이 들어오기 어려운 다다미방의 바깥쪽으로 차양을 낸다든지 툇마루를 붙인다든지 하여 한층 햇빛을 멀리한다. 그리고 실내는 정원으로부터 반사된 빛이 장지를 통해 약간 밝게 들어오도록 한다. 우리 다다미방의 미적 요소는 이 간접적인 둔한 광선밖에 없다. 우리들은 이 힘없고 초라하고 무상한 광선이 차분하게 가라앉은 다다미방의 벽으로 스며들도록, 일부러 정도가 약한 색의 모래벽을 바른다. 흙벽으로 만든 광이나 부엌이나 복도와 같은 곳을 바를 경우에는 광택을 넣지만, 다다미방의 벽은 대부분 모래벽으로, 절대로 반짝이게 하지 않는다. 만약 반짝이게 한다면 그 부족한 광선의 부드럽고 약한 맛이 없어진다. 우리들은 어디까지나 빈약한 외광이, 황혼색의 벽면에 매달려서 겨우 여생을 지키고 있는, 저 섬세한 밝음을 즐긴다. 우리들로서는 이 벽 위의 밝음 혹은 옅은 어두움이 어떤 장식보다 나은 것이고, 정말로 싫증이 나지 않는 것이다. -32 - 33쪽

여러분은 또한 그런 큰 건물의 안쪽에 있는 방에 가면, 이제는 전혀 외광이 닿지 않게 된 어둠 속에 있는 금두루마기나 금병풍이, 멀리 떨어진 정원의 밝은 빛의 끝을 붙잡고, 꿈처럼 멍하게 반사되고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그 반사는 해질녘의 지평선처럼, 주위의 어둠에 참으로 약한 금색의 밝은 빛을 던지고 있는데, 나는 황금이라는 것이 그 정도로 침통한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때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앞을 지나가면서 몇 번이나 뒤돌아 다시 보는 일이 있는데, 정면에서 측면 쪽으로 발길을 옮김에 따라, 금 바탕의 종이 표면이 서서히 크게 깔려서 빛난다. 결코 반짝반짝 잽싸게 반짝이지 않고, 거인이 안색을 바꾸듯이, 천천히 긴 사이를 두고 반짝인다. 때로는 지금까지 오직 잔 것처럼 둔한 반사를 하고 있는 나시지의 금이, 측면으로 돌면, 타오르듯이 빛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이렇게 어두운 곳에서 어떻게 이만큼의 광선을 모을 수가 있는지에 대하여 불가사의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옛날 사람이 불상에 황금을 칠한다든지, 귀인이 기거하는 방의 네 벽에 황금을 붙인다든지 하는 의미가 비로소 이해되는 것이다.-38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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