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화는 다른 어떠한 그림보다도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장르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로마시대의 벽화나 중세의 필사본에서 보면 고대인들은 벽에 장식 삼아 생명감 있는 정원풍경을 묘사하여 즐기기도 하고 성서적인 이야기 중에 배경으로 자연을 세밀하게 묘사하는 등 자연에 대해 끊임없는 관심을 지니고 있었습니다(도1,2). 그러나 화가들이 화구를 메고 야외로 나가 아름다운 자연을 그리는 것이 가치 있는 일이 된 것은 19세기(지도) 이후의 일입니다. 오랫동안 미술의 소재로 비중 있게 다루어진 것은 자연보다는 인간이었습니다. 특히 교훈적 가치를 중요시 여겼던 역사화를 그리기 위해서는 인체묘사가 필수적이었는데, 17세기 푸생의 작품(도3)에서 보면 자연은 화면의 중심을 차지한 인물에 비해 배경으로 다루어지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연'을 모든 것의 기본으로 중시한 계몽주의 사상은 19세기 풍경화가 등장하는데 중요한 자양분이 되었습니다. 더군다나 인간의 감정이 도덕적인 이상이나 교훈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되면서 풍경화는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됩니다.

도1 <리비아의 별장 정원그림>, 높이 2m, 기원전 20년경
로마, 테르메 국립박물관
 
 
 
도2 랭부르 형제 <10월>, 1409-15년
『베리 공의 호화로운 기도서』
상티에, 콩데 박물관
 
도3 푸생 <아르카디아 에고>, 1638-40년
파리, 루브르 박물관
 
 
 
 

19세기 풍경화의 만개에 앞서 처음으로 독자적인 풍경화가 등장하였던 곳은 17세기 네덜란드였습니다(13주 주제2 참조). 청빈함을 중시하던 이 지역의 신교도들은 도4의 고이엔의 그림에서 보듯이 자신들의 삶의 터전인 바다와 낮은 구릉들을 소박하고 정감 있게 그린 풍경화를 애호하였습니다. 또한 18세기의 로마와 베네치아의 화가들은 여행취미에 맞춰 유서 깊은 도시의 풍광을 많이 그렸는데(14주 주제3참조)(도5), 이러한 풍경화의 등장은 신흥 상인층이나 여행객들과 같은 수요계층의 형성과 관련이 있었습니다.

도4 얀 반 고이엔 <도르트레이트 풍경 >, 1644년
나무패널에 유채
 
 
도5 카날레토 <석조장>, 1726-30년
캔바스에 유채, 124×163 cm, 런던, 국립미술관
 
 
 

19세기 낭만주의자들은 자연의 외적인 모습 이면에 신의 질서나 우주의 화합과 같은 진실이 숨어 있다고 믿었습니다. 자연에 초월적인 정신성을 투영하는 범신론적인 풍경화는 독일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제작됩니다. 18세기 이후 독일은 고전주의 미학을 선도하였고 괴테나 쉴러와 같은 걸출한 낭만주의 문학가들을 배출하였지만 미술에서는 이렇다할 국제적인 조류를 만들어내지 못하였습니다. 대신 당시 새롭게 인식되기 시작한 독일의 민족주의 정서와 결합한 종교성이 짙은 미술이 주를 이루었습니다(도6,7,8). 오토 룽게(Philipp Otto Runge, 1777-1810)의 <아침>(도6)은 당시 독일의 분위기를 반영하는 다소 수수께끼 같은 종교화입니다. 종교적 순수함을 강조한 상징성이 강한 작품이라 하겠습니다.

도6 오토 룽게 <아침>, 1808년
캔바스에 유채, 10985.4 cm
함부르크, 쿤스트할레
 
 
도7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 <자작나무 숲의 성당>
1809-10년, 캔바스에 유채, 베를린, 슐로스 칼로트부르그
 
 
 
도8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 <바닷가의 수도승>, 1809-10년
캔바스에 유채, 110×171 cm, 베를린, 국립미술관
 
 

풍경화에 있어서 독일의 음울한 풍토를 인상깊게 반영한 화가는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Caspar David Friedrich: 1774-1840)입니다. 폐허가 된 고딕성당을 찾는 순례자들을 그린 <자작나무 숲의 성당>(도7)은 인간 존재의 무상함을 넘어서 우주적인 고독까지 느끼게 하는 신비스런 그림입니다. 이처럼 그의 그림에는 자연과의 영적인 교감이 드러나는데 <바닷가의 수도승>(도8)은 그러한 독일 낭만주의 미학을 매우 잘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탁트인 검은 바닷가의 수도승은 마치 점처럼 표현되어 있어 자연의 불가사의 한 힘과 인간의 유한함을 대비시키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무한한 자연에 대한 경이감, 비극적인 슬픔, 고립감은 낭만주의 시대의 미학인 '숭고미'의 가장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신대륙인 미국에서도 광활한 자연을 바탕으로 한 낭만주의 풍경화가 활발하게 그려졌습니다. 이들 풍경화가들은 주로 허드슨 계곡의 개척지에서 작품활동을 하였기 때문에 '허드슨강 화파'라 부르지만 그들을 지역적으로 한정할 수는 없습니다. 토마스 콜(Thomas Cole, 1801-1848)의 작품(도9)을 보면 미국의 자연은 경이의 대상으로, 그리고 세속을 넘어서는 진실을 담고 있는 신의 그릇처럼 묘사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거대한 자연 앞에서 압도당할 때 느껴지는 종교적인 신심과도 흡사합니다. 비어스타트 (Albert Bierstadt, 1830-1902)는 로키산이나 요세미티와 같은 서부를 직접 여행하고 그곳에서 받은 감동을 화폭에 담아낸 화가로 유명합니다(도10). 미국의 유명한 국립공원들이지요. 이러한 사실을 볼 때 미국 낭만주의 풍경화는 서부 개척기의 미국역사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도9 토마스 콜 <폭풍이 지나간 후 홀리요크 산에서 바라본 광경>
1836년, 캔바스에 유채,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도10 알버트 비어스타트 <로키산의 정경> 1863년
캔바스에 유채,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19세기 풍경화는 터너와 컨스터블 같은 걸출한 풍경화가들을 배출한 영국에서 가장 활발하게 제작되었습니다.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장 자크 루소의 철학과 영국의 호반시인들의 활동은 이전의 버려 두었던 영국자연에 대해 다시금 눈을 돌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영국의 부유한 농가출신이었던 콘스터블 (John Constable, 1776-1837)은 주로 자신의 영지주변을 성실한 눈으로 그려냅니다. 그는 직접 야외로 나가 끊임없이 변화하는 자연의 갖가지 표정을 담아내고자 하였습니다. 특히 변화가 심한 영국의 구름의 변화를 관찰한 그의 스케치를 대하자면 마치 기상관이 날씨를 관찰하는 듯합니다(도11). 스톤헨지의 인상을 수채화로 그려낸 습작(도12)에서는 자연에서 받은 첫 느낌과 인상을 중시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도11 컨스터블 <구름습작>, 1822년
종이에 유채, 30.5×49 cm, 런던, 코톨드 미술관
 
 
도12 컨스터블 <스톤헨지>
1820-31년사이, 수채, 윌트셔
 
 
 
 

그러나 컨스터블은 그림의 마지막 작업은 화가의 작업실에서 하였습니다. 그렇게 완성된 대작의 풍경화에는 거친 나무둥치들의 질감과 바람에 따라 살랑거리는 작은 잎들의 반짝임이 그대로 생생하게 재현되어 있습니다. 그의 <건초마차>(도13)가 파리의 살롱에 출품되었을 때 갈색톤의 고전주의 풍경화에 익숙해 있던 프랑스 화가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들르크르와가 컨스터블의 그림을 보고 이미 완성된 <키오스섬에서의 학살>에 붉은색의 덧칠을 하였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일화입니다.

컨스터블은 자연은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며 그 안에는 진리가 담겨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컨스터블의 풍경화를 보면 화가의 관심이 눈에 포착되는 시각적인 표면 그 자체에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컨스터블 이전의 어떤 화가도 실제 자연에서 풍기는 싱싱한 초록색의 느낌을 그렇게 풍부하게 그려내지는 못했습니다. 아카데미 화가들은 눈으로 보기보다는 관례적으로 가까운 곳에는 갈색톤을 사용하고 뒤로 멀어지는 배경에는 푸른색을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나 도14의 그림을 자세히 보면 컨스터블은 그러한 공식을 따르기보다는 눈에 보이는 대로의 원색들을 사용하였을 뿐 아니라, 빛이 반사되는 것을 묘사하기 위해 서로 초록색과 병치되는 붉은색과 흰색의 반점들을 과감하게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의 이러한 방식은 프랑스의 바르비종 화가와 훗날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게 됩니다.

도13 컨스터블 <건초마차>, 1821년
캔바스에 유채, 130×185 cm, 런던, 국립미술관
 
 
도14 컨스터블 <수문>, 1823-24년경
캔바스에 유채, 141.7×122 cm
필라델피아 미술관
 
 
 

영국의 또 다른 걸출한 풍경화가 윌리암 터너(Joseph William Turner, 1775-1851)는 보다 서사적이고 영웅적인 자연의 한 순간을 포착하고자 하였습니다. 클로드 로렌을 연상시키는 초기의 작품 <카르타고 제국의 건설>(도15)을 보면 그가 전통적인 역사화를 중시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터너는 주로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의 장엄함이나 숭고함에 깊이 매료되어 있었습니다. 물론 바다는 인간을 한 순간에 파멸시키는 엄청난 힘을 지녔기 때문에 많은 낭만주의 화가들의 사랑을 받았던 주제였습니다. 도16의 <바다에 던져진 노예>는 몇 십년전 제리코의 <메두사의 뗏목>을 연상시키는 바다의 재난을 다룬 작품입니다. 이 그림은 보험을 노리고 노예들을 바다에 던져버린 노예상들의 비인간적인 처사를 주제로 다룬 것이지만, 이 같은 주제는 크게 원형을 이루며 소용돌이치는 색의 소용돌이 속에 파묻혀 버린 것 같습니다. 즉 터너는 무엇보다도 비극적인 사건을 담아낼 전체적인 색채의 효과에 중점을 두었던 것입니다.

도15 터너 <카르타고 제국의 건설>, 1815년
캔바스에 유채, 155.5×232 cm, 런던, 영국미술관
 
 
도16 터너 <바다에 던져진 노예. 태풍의 전조>
1840년, 캔바스에 유채, 보스턴 미술관
 
 
 
 

유럽에서는 17세기 과학의 혁명이후 어느 때보다도 광학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였는데 터너는 특히, 색채는 빛과 어둠이 서로 경합하는 가운데 발현된다고 주장한 괴테의 이론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고 합니다. 어두움과 밝음, 서로 다른 색조들이 서로 부딪히며 녹아드는 형태를 통해 터너는 자연의 광폭함을 유감없이 표현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이러한 터너의 풍경화는 <비, 증기, 속도>(도17)에서 보듯이 점차 형태를 무시하고 보이는 것의 인상 그 자체만을 중시하는 경향으로 나아갑니다. 그 효과는 모네의 인상주의(도18)와 흡사합니다. 이는 현대적인 의미에서의 색채추상과 다를 바가 없다고 하겠습니다.

도17 터너 <비, 증기, 속도>, 1844년
캔바스에 유채, 90.8×121.9 cm, 런던, 국립미술관
 
 
도18 모네 <인상. 해돋이>, 1872년
캔바스에 유채, 48×63 cm
파리 마즈몽탕 미술관
 
 

풍경화의 영역이 확장되어가던 영국에 비해, 프랑스에서는 자연은 영웅적인 이야기를 위한 무대여야 한다는 고전주의 전통이 오래 지속되었습니다. 그러나 신고전주의식의 도덕적 윤리나 정치적인 관심이 점차 후퇴하면서 자연주의적인 경향의 독립된 풍경화가 점차 독자적인 장르로 부상하게 됩니다.

파리 교회의 퐁텐블로 숲 근처에서는 루소나 코로와 같은 화가들이 모여 자연을 벗삼아 사실적인 풍경화를 그리게 되었는데, 이들을 바르비종 화가들이라고 합니다. 현장에서 직접 관찰하고 경험한 자연의 모습은 그들 작품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카미유 코로(Camille Corot, 1796-1875)는 전통적인 아카데미 교육을 받았지만 자연의 풍경 그 자체를 더 중시하였습니다. 이탈리아를 여행하는 도중에 그린 도19와 같은 풍경화를 보면 그가 고대의 유적이나 거장을 묘사하기보다는 솔직한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더 즐겼음을 알 수 있습니다. 파리로 돌아온 후에는 <님프들의 춤>(도21)처럼 고대 전원시를 소재로 한 신화적인 풍경을 주로 그렸지만 도20에서 보듯, 말년에 그린 소박한 풍경화의 풍부한 대기의 느낌과 분방하고 가벼운 터치는 훗날 시슬리나 피사로의 풍경화를 보는 것 같습니다.

도19 코로 <로마 파르네제 정원풍경>, 1826년
캔바스에 유채, 25.1×40.6 cm, 워싱턴 D.C, 필립콜렉션
 
 
 
도20 코로 <망트 대성당>
1865-69, 캔바스에 유채
렝스, 생 드니 미술관
 
 
도21. 코로 <아침. 님프들의 춤>, 1850년
캔바스에 유채, 97.1×130 cm, 파리, 오르세이 미술관
 
 
 
 

바르비종 화가들이 보여준 이러한 자연에 대한 감수성의 발견은 19세기 중반의 사실주의와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습니다. 자신의 현실이나 주변을 돌아보게 한다는 점에서 말입니다. 끝없이 펼쳐진 풍경 속에서 일하는 농부들의 세계가 당당하게 펼쳐진 밀레의 농촌풍경화는 현실적인 시각이 반영된 새로운 풍경화였습니다. 사실 밀레(Jean-Fransois Millet, 1814-1875)의 풍경화는 너무나 많은 복제품을 통해 잘 알려져 있어서 그림의 진면목을 느끼기가 쉽지 않습니다. 밀레의 농민그림은 보는 사람들의 시각에 따라서 목가적인 전원풍경으로 보이는가 하면, 혁명적인 노동자상을 표현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해석은 작가 자신의 표현이라기 보다는 보는 사람들의 입장에 기인한 결과였겠습니다. 어찌되었든 컨스터블의 농촌풍경이나 밀레의 풍경화가 19세기 산업혁명으로 번창한 도회생활에 염증을 느낀 도시인들의 향수를 반영한 것임에 틀림이 없겠습니다.

도22 밀레 <만종>, 1857-59년
캔바스에 유채, 55.5×66 cm, 파리, 오르세이 미술관
 
 
도23 밀레 <이삭줍기>, 1855-57년, 캔바스에 유채
83.5×110 cm, 파리, 오르세이 미술관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19세기 낭만주의 풍경화는 처음에는 인간의 상상력에 가치를 부여하는 서사적이고 범신론적인 풍경이 주를 이루었으나 점차 눈에 보이는 것 경험할 수 있는 것 자체에 더 큰 의미를 두는 경향으로 변화하였습니다. 컨스터블이나 바르비종화가들의 풍경화는 이처럼 신화의 시대가 끝나고 사실주의가 도래하는 것을 예고합니다. 이제 다른 어떤 교훈적인 주제보다도 자연의 순간적인 느낌과 빛이 사물에 닿는 순간을 포착하는 것이 다음 세대의 화가들에게는 중요한 과제가 되었습니다. 인상주의 미술은 바로 이러한 시각적인 실증성에 기반을 둔 풍경화였습니다. 부댕 (Eugene Boudin, 1824-98)이나 도비니 (Charles-Fransois Daubigny, 1817-1878)는 전환기의 시각을 잘 보여줍니다. 물론 이러한 사실적인 풍경화의 부상 이면에는 현실적이고 비정치적인 주제를 선호하는 중간계급들의 문화층이 두터워지고 있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을 것입니다.

도24 도비니 <옵트보의 수문>, 1859년
캔바스에 유채, 49×73 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도25 부댕 <투르빌 해변>, 1865년경
캔바스에 유채, 67.3×104.1 cm, 미네아폴리스 인스티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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