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지도)에 궁정과 귀족의 살롱을 중심으로 화려하고 장식적인 미술이 그 세련미를 더해가던 가운데, 한편으로는 겸손과 미덕을 강조하는 교훈적인 미술이 등장합니다. 영국의 윌리암 호가스(William Hogarth, 1697-1764)(도2), 프랑스의 샤르댕(Jean-Baptiste-Simeon, 1699-1779)(도1)과 그뢰즈(Jean Baptist Greuse, 1725-1805) 같은 화가들이 대표적인 예라 하겠습니다. 이러한 반 로코코적인 미술은 자연과 이성을 중시하는 계몽주의 지식인들과 교양을 갖춘 중산층이 등장하였기 때문에 가능하였습니다.

도1 샤르댕 <챙이 있는 모자를 쓴 자화상>
1775년. 종이에 파스텔
파리, 루브르 박물관
 
도2 호가스 <화가와 개>
1745년, 캔바스에 유채, 90×70 cm
런던, 테이트 미술관
 
 
 

프랑스의 샤르댕은 앞 주제에서 살펴본 로코코의 경쾌함과 피상적인 터치와는 다른 소박하면서도 경건한 세계를 지향하였습니다. 샤르댕은 1728년에 정물과 동물화 부분의 왕립아카데미 회원이 되었는데, 도3의 <홍어>는 이때 아카데미에 출품한 작품입니다. 털을 세운 고양이와 미끈한 홍어, 그리고 도자기와 흰 식탁보와 같은 다양한 물건들을 한데 모아놓은 것은 물론 정물화가로서의 자신의 기량을 충분히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겠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린 것은 세브르산 도자기(도8)나, 은식기가 아니라 검소한 중산층 가정의 부엌 한켠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물건들이었습니다. 이러한 부엌의 가재도구와 식기들은 동시에 청교도적인 검소함과 노동을 상징합니다(도4). 도6의 작품 <부엌에서 물긷는 여자>에 그려진 청동물통을 보면 자연스럽게 집안에서 가사노동에 몰두하고 있는 여인들의 모습이 연상되는 것처럼 말입니다(도5,6,7). 샤르댕이 즐겨 다루었던 소박한 물건들과 가정의 풍경은 마치 로코코 시대 궁정과 귀족들의 지나친 향유에 대한 해독제처럼 느껴집니다(도7,8).

 

도3 샤르댕 <홍어>
1728년, 캔바스에 유채, 114×146 cm
파리, 루르브 박물관
 
 
도4 샤르댕 <시장에서 돌아옴>
1739년, 캔바스에 유채, 47×37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도5 샤르댕 <가정의 물통>
1734년경, 나무에 유채, 28,5×23 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도6 샤르댕 <부엌에서 물 긷는 여자>
1733년, 나무패널에 유채
스톡홀름 미술관
 
 
 
도7 샤르댕 <파이프와 물병>
1737년경, 캔바스에 유채, 32,5×40 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도8 프랑스, 세브르 도자기
1778-79년, 세브르 공방
 
 
 

샤르댕의 정물화에서 우리는, 물건이 지닌 원래의 촉각적인 실재감과 화면에서의 물감의 느낌이 참으로 잘 어우러져 있음을 보게 됩니다(도7). 이러한 사실성을 보고, 당시 미술 비평가로 명성이 높았던 디드로는 “샤르댕의 정물화는 자연 그 자체이다”라고 극찬했습니다. 그가 여러 가지 기물들을 섬세하고 관찰하고, 그것들을 온화한 조명아래 단순하면서도 균형 있게 배치하는 점은 17세기 네덜란드 정물화가들과 비슷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종교적 상징성이 강한 17세기 정물화와는 달리 샤르댕의 정물화는 계몽시대의 낙관적인 이상주의가 배여 있습니다.

 
 

18세기 계몽주의 지식인들은 온화한 가르침과 격려를 통해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성을 이끌어 낼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에밀』과 같은 교육서를 썼던 루소가 대표적인 예가 되겠지요. 그는 가정에서 생활을 통해 이루어지는 자녀의 양육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샤르댕은 장르화를 통해, 중산층의 노동과 함께 교육에 관한 주제를 많이 다루었습니다. 아래 도9의 <가정교사>를 봅시다. 아이의 가정교사는 학교에 가는 것도 잊고 놀이에 몰두하고 있는 아이를 꾸짖어 타이르고 있습니다. 흐트러진 아이의 놀잇감은 자신의 본분을 잊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데, 보모의 잘 정리된 바느질 바구니와 대비됩니다. 그렇지만 아이의 뒤편으로 열려진 문은, 보모가 손질해준 모자를 쓰고 곧 학교에 갈 것이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나태함에 대한 계몽적인 경계의 메시지가 분명합니다.

 

도9 샤르댕 <가정교사>, 1738년, 캔바스에 유채
오타와, 국립미술관
 
 
 
 
 

영국은 이미 18세기 이전부터 정치혁명이 시작되었을 뿐 아니라, 기독교적인 정서로 인하여 과장된 바로크 미술이 그다지 번성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팔라디오풍의 별장을 짓고, 고전주의 미술이야 말로 고상함과 아름다움의 표본이라 믿고 있던 당시 영국의 상류계층들은 자기네 미술을 지방적인 것으로 폄하하여서 대부분의 미술품이나 장식품을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수입하거나, 아니면 외국의 미술가들을 직접 불러들여서 제작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호가스(William Hogarth, 1697-1764)는 자신이 이탈리아나 프랑스의 화가들에게 결코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했으며, 청교도적인 전통에서 성장한 사람들에게 도덕적인 교훈을 주는 작품을 제작하고자 하였습니다. 이러한 풍토에서 호가스는 도시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무절제한 악행들, 당시의 잡지나 통속소설에 자주 오르내리는 일화에서 주제를 찾아 이야기형식의 판화로 제작하여 판매하였습니다. 그는 주점이 있어 흥청거리고, 간판들이 즐비한 도시의 뒷골목을 즐겨 작품의 배경으로 삼았습니다. 산업이 발전하면서 사람들은 농촌을 버리고 도시로 몰려듭니다. 이러한 도시중심의 대중문화는 19세기 근대주의를 거쳐 더욱 가속화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하겠습니다. 호가스가 그려낸 도시는 악덕의 온상처럼 보입니다. 도10의 <진 골목>은 술에 취해 이성을 잃은 인간들의 방종을 경고합니다. 매춘부 일대기의 첫 번째 장면은, 시골에서 갓 올라온 순진한 처녀가 포주의 꾀임에 빠지는 장면입니다(도11). 이 때에도 도시는 순진한 여자를 타락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사악한 곳으로 그려집니다.

도10 호가스 <진 골목>, 1750-51년
에칭과 엔그레이빙, 359×341 mm
 
 
도11 호가스 <매춘부의 일대기> 첫 번째 이야기
1731년경, 동판화, 런던, 영국박물관
 
 
 
 

호가스의 가장 잘 알려진 연작, <유행에 따른 결혼>(도12-16)은 귀족들과 부유한 계층의 탐욕과 무절제가 마지하게될 비극을 주제로 하였습니다. 첫 번째 이야기는 사치로 재산을 소진한 귀족이 자신의 아들을 부유한 상인의 딸과 정략 결혼시키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오른쪽에 앉은 귀족은 짐짓 위엄을 가장하고 있으며, 돈은 많지만 교양 없는 상인의 모습은 희화되어 있습니다. 철없는 젊은 부부는 결혼 한 직후부터 무절제한 생활을 계속합니다(도13,14). 향락가에서 밤을 지새우고 아침에야 돌아온 남편의 옷매무새는 흐트러져 있고, 안주인 역시 밤사이의 카드놀이로 지쳐있습니다. 각종 청구서에 집사만 발을 동동 구릅니다. 특히 벽난로 위가 중국풍의 장식물들로 번잡하게 장식되어 있는 것은 그들이 사치스러웠을 뿐 아니라 교양이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국 두 부부는 파산하고, 남편의 때 이른 죽음과 여주인의 자살로 비극적인 삶을 마무리하게 됩니다(도15,16). 이 이야기의 주제는 명료합니다. 사치와 방종, 무절제한 생활이 결국 어떠한 결말에 이르는지 알려주고,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겠지요.

 

도12 호가스 <유행에 따른 결혼> 첫번째 이야기, 1743년경
캔바스에 유채, 70×91 cm, 런던, 국립미술관
 
 
 
도13 호가스 <유행에 따른 결혼> 두번째 이야기, 1743년경
캔바스에 유채, 70×91 cm, 런던, 국립미술관
 
 
 
도14 호가스 <유행에 따른 결혼> 두번째 이야기 부분
 
 
 
도15 호가스 <유행에 따른 결혼> 다섯번째 이야기
1743년경, 캔바스에 유채, 70×91 cm
런던, 국립미술관
 
도16 호가스 <유행에 따른 결혼> 여섯번째 이야기
1743년경, 캔바스에 유채, 70×91 cm
런던, 국립미술관
 
<유행에 따른 결혼>과 같은 유화 연작은 귀족과 부유층의 이야기를 주제로 삼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유화 작품은 쉽게 구매자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보다는 판화를 통한 판매가 휠씬 쉬었으며, 판화의 독점판매권은 호가스에게 명성과 경제적인 여유를 보장하였습니다. 그런점에서 호가스는 대중화가라 할 수 있겠습니다
 
 

18세기 후반이 되면서 프랑스에서는 계몽주의가 더욱 무르익어 갑니다. 더불어 부셰나 프라고나르 같은 여성스럽고 가벼운 미술보다는 장엄하고 교훈을 주는 서사적인 미술이 다시 확산됩니다. 프랑스의 화가 그뢰즈(Jean-Baptiste Greuze, 1725-1805)역시 미술은 모름지기 도덕적이고, 교훈적이어야 한다는 당시의 조류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였습니다. 특히 그뢰즈는 小양식인 장르화를 고상한 역사화로 만들고자 하였습니다. 도17은 아버지의 죽음의 순간에 임박하여 돌아온 아들이 얼굴을 파묻고 후회하는 장면을 그리고 있습니다. 미술사에서 즐겨 다루어지는 오래된 탕자의 이야기를 다룬 것이겠지요. 그뢰즈는 인물들을 장엄한 서사극에서 격렬하게 연기하고 있는 배우처럼 그렸습니다. 마치 곧 대단원의 막이 내려지면, 관객들의 열렬한 커튼콜이 이어질 것 같습니다. 디드로는 이러한 그뢰즈의 작품에 대해서, 고귀하고 진지한 인간의 행동을 묘사했다는 점에서 푸생의 역사화에 걸맞는 작품이라고 칭찬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미술이 문학적인 상상력과 에피소드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일까요? 현대에 와서는 미술을 문학이나 윤리와는 다른 미적 조형물로 보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소설같은 스토리에 너무 의존하고, 사람들을 가르치려한 계몽미술은 현대에 와서는 그렇게 높게 평가받고 있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도17 그뢰즈 <벌받은 아들>, 1778년, 캔바스에 유채, 130×163 cm
파리, 루부르 박물관
 
 
 
 
 

당시 아카데미는 정물화, 장르화, 역사화와 같은 범주로 나뉘어 있었는데, 이들 장르사이에는 분명한 위계가 있었습니다. 당연히 화가들의 최고의 목표는 역사화가가 되고자 했겠지요. 그뢰즈의 장르화에서는 분명히 그러한 야심이 엿보입니다. 그런 점은 앞서 보았던 호가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교훈과 도덕을 부르짖었던 호가스나 그뢰즈와 같은 계몽주의 미술가들에게 자신의 작품과 삶은 과연 얼마나 연관이 있는 것일까요? 미술가들이 그림을 통해 도덕적인 주장을 한다 할지라도, 그들은 철학자이거나 계몽주의자이기 이전에 성공을 쫓는 세속적인 인간이라는 점을 간과할 수 는 없을 것입니다.

그뢰즈가 말년까지 즐겨 그렸던 아래 그림들은 미술가의 이중성을 잘 보여줍니다. 샤르댕 보다는 호가스와 유사합니다. 도18,19에서 깨어진 항아리, 흐트러진 옷매무새는 이 여자아이들이 더 이상 순진하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작품의 표면적인 주제는 여성의 정숙함에 대한 경고겠지만, 소녀들은 매우 감각적으로 그려져 있어서 그뢰즈의 본심을 의심케 합니다.

도18 그뢰즈 <깨어진 항아리>
1785년, 캔바스에 유채, 110×85 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도19 그뢰즈 <기다림>
1770년대, 캔바스에 유채, 79,3×61 cm
뮌헨, 알테 피나코텍
 
 
 

샤르댕, 호가스, 그뢰즈는 계몽주의 시대에 등장하였던 반 로코코적인 미술을 대표합니다. 그러나 교훈을 실천하는 방식은 서로 조금씩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샤르댕의 미술에서는 무엇보다도 조형적인 구조가 두드러지며, 호가스에게는 위트와 유머가, 그리고 그뢰즈는 과장된 수사법이 그 특징입니다. 특히 샤르댕은 그뢰즈처럼 설교하듯이 목소리를 높이고 있지는 않지만, 화면의 절제된 구성의 아름다움은 누구보다도 설득력있게 구시대의 방종이나 사치를 경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18세기 말이 되면 이러한 성향들은 고전취향으로 수렴되며, 곧이어 혁명의 정신에 따라 근대 미술로 나아가게 됩니다.

도20 샤르댕 <비누방울>, 1739년경
캔바스에 유채, 61×63 cm,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도21 호가스 <방탕아의 편력> 세번째 이야기, 1733-34년
캔바스에 유채, 62.2×75 cm, 런던, 존 소앤 경 박물관
 
 
도22 그뢰즈 <마을의 신부>1761년 , 91.4×118.1 cm
파리, 루브르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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