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히 지속될 것 같았던 로마 카톨릭 교회의 권위와 루이 14세의 절대권력도 18세기(지도)에 들어서면서 점차 퇴조하고, 궁정중심의 장엄했던 바로크 미술은 보다 장식적이며 감각적인 귀족문화로 변모해 갑니다. 권력에 대한 알레고리보다는 가볍고 위트는 현실적인 미술이 풍미하였으며, 푸생의 엄격함보다는 루벤스의 흐트러진 색채감각이 더 선호되었습니다. 이러한 귀족중심의 경쾌한 18세기의 미술경향을 일반적으로 로코코 미술이라 하는데, 부셰(Fransois Boucher, 1703-70) 나 프라고나르(Jean-Honore Frangonard, 1732-1806)의 감미로운 그림은 이러한 취향을 대변합니다(도2). 그러나 이러한 표피적인 감각성이 18세기 유럽사회의 이념적인 충돌과 사회의 변화를 모두 담아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18세기는 전제왕권 사회가 시민 중심의 근대사회로 이행되어 가는 변환기였습니다. 또한 미신과 종교의 권위대신, ‘자연’과 ‘이성’을 중시여기는 합리주의가 싹트는 계몽의 시기이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모순과 새로운 시대로의 이행은 18세기 시각미술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납니다(도1,2).

도1의 조셉 라이트(Joseph Wright, 1734-1797)의 <공기펌프>는 진공상태 실험관에서 비둘기가 죽어가는 모습을 명암의 극적을 대비를 통해 그려낸 작품입니다. 이러한 그림은 실험과 관찰을 통해서 자연에 대한 이치를 터득할 수 있다는 낙관적인 신념을 잘 보여줍니다. 이성의 빛을 통해 구질서의 어둠을 몰아내는 것이 바로 계몽주의자들의 목표였습니다.

도1 조셉 라이트 <공기 펌프실험>
1768년, 캔바스에 유채, 180×240 cm
런던, 국립미술관
 
도2 프라고나르 <그네>
1766년, 런던, 왈라스 컬렉션
 
 
 
 

루이 14세가 사망한 후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벗어나 파리로 돌아온 귀족들은 개인저택을 중심으로 우아한 살롱문화를 꽃피웁니다. 둥글거나 타원형의 거실은 규모가 큰 벽화보다는 아기자기한 금박 장식문양과 반짝이는 거울이 더 잘 어울렸습니다(도3,19). 벽의 빈 공간에는 로카이유 장식의 액자에 넣은 초상화나, 가벼운 사랑이야기를 담은 그림이 걸려 있었을 것입니다. 바야흐로 로코코 시대는 가구, 식기, 장신구, 의상디자인과 같은 장식미술과 공예분야의 전성기였습니다(도4).

도3 제르멩 보프랑, 오텔 드 수비스, 왕비의 방,
파리, 1737-1738년
 
 
도4 니콜라 폴리오, 18세기 중반,
프랑스, 에르미타쥐 박물관
 
 
 
 

로코코 미술이 바로크 미술과는 다른 감수성을 쫓고 있지만, 두 시기의 경계를 분명하게 가를 수는 없습니다. 한편으로 로코코 미술은 넓은 의미에서 바로크 미술의 연장이기도 합니다. 특히 남부 독일과 같은 곳에서는 절대 군주들의 미술에 대한 관심과 사치가 오랫동안 번성하였으며, 호사스런 교회건축도 잇달았습니다. 그러나 장엄한 효과를 강조하였던 17세기 건축과는 달리, 율동감있는 문양과 밝은 회벽토와 섬세한 금박장식이 더욱 선호되었습니다. 독일의 18세기 대표적인 건축가인 발타사르 노이만 (Balthar Neumann)이 설계한 뷔르츠부르크 레지덴츠 궁전은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도5,6). 베네치아의 화가 티에폴로(Giambattista Tiepolo, 1696-1770)의 프레스코 벽화는 이 궁전을 가벼운 빛과 숨쉴 듯한 대기로 가득한 환상적인 장소로 만들었습니다.

 

도5 폰 힐데브란트, 발타자르 노이만 등
뷔르츠부르크 레지덴츠, 1720-1744년
 
 
도6 티에폴로 <프랑코니아 백작수여식>
,1751년, 프레스코, 400×500 cm,
뷔르츠브르크 레지덴츠, 황제의 방
 
 

 

 

티에폴로는 소규모의 회화로 변화되어 가는 18세기 이탈리아의 미술풍토에서 예외적으로 거장의 면모를 보여주는 미술가입니다. 18세기에 들어서면서 이탈리아의 도시들은 확실히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쇠퇴하고 있었습니다. 교황청의 엄청난 규모의 장식프로젝트도 옛 말이 되었으며, 놀라운 상업도시인 베네치아도 점차 그 영향력이 약해졌습니다. 더불어 프레스코 벽화나 천장화와 같은 ‘대규모 회화: grand genre’도 함께 쇠락합니다. 그는 주로 스페인이나 독일의 궁정 장식주문을 받았는데, 그의 명성도 신고전주의의 등장과 함께 점차 낮아졌습니다. 아래 보이는 스페인 마드리드 궁정의 천장화(도7)나 베네치아 라비아 궁에 그려진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오의 역사적 일화는 그의 이러한 능력을 유감없이 보여줍니다(도7,8,9).

도7 티에폴로 <스페인 왕실의 영광>
1762-66년, 프레스코화, 1500×900 cm
마드리드 왕궁, 여왕의 방
 
도8 티에폴로 <클레오파트라의 향연>
1746-47년, 프레스코, 650×300 cm,
베네치아, 팔라초 라비아
 
도9 티에폴로 <클레오파트라의 향연> 부분
 
 
 
 
 

와토(Jean-Antoine Watteau, 1684-1721)는 18세기 프랑스 회화의 가장 대표적인 미술가입니다. 그가 펼쳐 보인 애상적인 세계는 18세기 귀족사회의 정서를 누구보다도 잘 보여줍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는 사랑에 빠진 인물들의 심리와, 고독한 자아를 예민하게 들추어냅니다. 달콤쌉사름한 화면의 바니타스(vanitas), 즉 공허함과 결핵으로 요절한 와토의 생애는 서로 얼마나 관련이 있는 것일까요? 와토는 오페라나 대중적인 희극이었던 이탈리아의 코메디아 델 아르테의 연극과 배우들에게 큰 관심을 가지고 즐겨 그렸습니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이탈리아의 오페라나 무용극이 유행하여 파리인들에게 큰 볼거리를 제공하였습니다(도10). 대중문화의 등장이라 할 수 있겠지요. 배우와 광대는 가면극이나 서커스를 벌여 사람들을 즐겁게 하고, 길거리나 숲에서 멜로드라마에 가까운 사랑의 이야기를 연기하였습니다. 오른쪽 <페트 베네치엔느>(도11)에서 백파이프를 연주하는 이는 바로 와토의 자화상입니다. 등 돌린 여배우와 그녀를 바라보며 악기를 연주하는 와토, 어쩐지 이 그림에는 화가의 사랑에 대한 암시가 들어가 있는 것 같습니다.

도10 와토 <이탈리아 코메디>, 1720년경, 캔바스에 유채
워싱턴, 국립미술관
 
 
도11 와토 <페트 베네치엔느>, 1718-19년,
캔바스에 유채, 56×46 cm
에딘버러 국립미술관
 
 
 

와토는 이처럼 무도회나 오페라의 감미로운 사랑의 사교모임를 주로 그렸는데, 이러한 장르를 일컫어 ‘페트 갈랑트 Fete Galante' 즉 '사랑의 연회'라고 합니다. 페트 갈랑트는 18세기에 와토가 창안한 것이지만, 목가적인 전원에서 벌어지는 로맨틱한 연애담은 지오네나 티치아노의 작품에서 앞선 예를 찾을 수 있습니다(도13). 특히 이전세기 루벤스의 풍부한 색채와 낙천적인 사랑이야기는 발렌시아 출신의 와토에게 큰 영감이 되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도14). 아래 <키테라 섬에서의 출항>(도12)은 와토의 가장 대표적인 작품입니다.

도12 와토 <키테라섬에서의 출항>, 1717년, 캔바스에 유채, 129×194 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도13 조르지오네, <전원의 합주>
1508-09, 캔바스에 유채, 110×138 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도14 루벤스 <사랑의 정원>
1633년경, 캔바스에 유채, 98×283 cm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키테라 섬은 사랑의 여신 비너스가 태어났다고 전해지는 곳입니다. 와토는, 여신의 도움으로 어떠한 사랑도 이루어진다는 신비의 섬에서 아쉬운 하루를 보내고 떠나려 채비하는 연인들을 그리고 있습니다. 아른거리는 대기와 부드러운 색조는 젊은 날의 짧은 사랑과 연극과도 같은 인생의 무상함을 더욱 고조시킵니다. 이 그림에는 세쌍의 연인들이 보여주는 망설임과 갈망이 서려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점에서 와토의 그림은 로코코시대의 가벼움과 그 이면의 애상적인 심리를 함께 반영합니다.
 

와토의 <질과 네명의 배우들>(도15)과 같은 작품에서는 특히 이러한 심리묘사가 두드러집니다. 극단의 연극이 끝난 뒤, 한 걸음 무대 앞으로 나와 우뚝 서 있는 광대 질의 모습은 낮게 배치한 배경의 인물들과 대비를 이루어서 외롭고 어색해 보이지만 또한 거대해 보입니다. 한편 오른쪽 그림 <메제틴>(도16)에서, 돌처럼 굳게 돌아선 조각상은 메제틴의 세레나데가 혼자만의 사랑의 노래임을 시사합니다. 이러한 질과 메제틴에게 와토의 자화상이, 더 넓게는 관객의 사적인 자아가 투영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요? 18세기 계몽사상은 인간의 사적인 감정 역시 ‘자연’의 일부분이라고 받아들였습니다. 사랑의 감정에 대한 미술가들의 몰두는 이러한 관심을 반영한 것이겠지요. 와토는 주변의 희극배우들에 대한 관찰을 통해 이러한 개인의 자아를 들여다보았으며, 와토 미술의 깊이는 바로 이러한 부분에서 발견됩니다.

도15 와토 <질과 네명의 배우들>
1718-20년, 캔바스에 유채, 184.5×149.5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도16 와토 <메제틴>
1717-19년, 캔바스에 유채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당시의 귀족취향에 부응한 미술의 예는 누구보다도 프랑스와 부셰(Francois Boucher: 1732-1806)와 프라고나르(Jean-Honore Fragonard, 1732-1806)에게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의 미술은 귀족들의 세속적인 취향에 걸맞는 선정적이고 장식적인 그림으로 더욱 유명합니다. <비너스의 탄생>(도17)이나 프라고나르의 <목욕녀>(도18)와 같은 그림들은 신화를 빙자하여 여인들의 탐스러운 육체를 눈으로 즐기기 위한 방편이었습니다. 귀족들의 침실 등에 걸려 있었을 이러한 그림들은 감각적인 것을 넘어서 지금의 포르노에 가까운 선정적인 이미지였을 것이 분명합니다.

도17 부셰 <비너스의 탄생> 1740년,
캔바스에 유채, 130×162 cm
스톡홀름 국립미술관
 
 
도18 프라고나르 <목욕녀들>, 1765년,
캔버스에 유채, 64,1×80.0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로코코 시대는 다른 어떤 시기보다도 여성적인 감수성이 주도하였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살롱문화를 주도하였던 이는 바로 여성이었으며, 이들은 초상화를 비롯하여 의상과 보석, 식기와 같은 제품들을 실제로 구입하였던 당사자이기도 하였습니다(도20, 21). 특히 루이 15세의 연인이기도 하였던 마담 퐁파두르는 당시 프랑스 궁정미술을 후원하고 귀족들의 취향을 선도하고 있었습니다(도20). 마담 퐁파두르는 유행에 따른 세련된 치장을 하고 있지만, 손에 쥔 책과 자연을 향수하는 여유로운 태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녀가 ‘교양’을 중시하는 계몽적인 후견인이라는 것을 알리고 싶었을 것입니다. 여성 초상화가들의 활동이 어느 때 보다도 두드러졌는데 비제 르 브렁의 자화상은 여성으로서의 섬세함과 미술가로서의 당당함이 동시에 드러납니다(도21). 유화보다도 훨씬 섬세하고 부드러운 느낌의 재료인 파스텔화가 많이 그려진 것도 그러한 시대 분위기 때문이었는데, 특히 베네치아 출신의 여성화가인 카리에라(Rosalba Carriera, 1675-1757)의 파스텔 초상화는 상류층 여성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도22).

도19 니콜라 피노, 오텔 드 바렝쥐빌르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라이츠만 콜렉션
 
 
 
도20 부셰 <마담 퐁파두르>
1758년, 캔바스에 유채, 72,5×57 cm
런던, 빅토리아 앨버트미술관
 
도21 비제 르 브렁 <밀집모자를 쓴 자화상>
1782년 이후, 캔바스에 유채
 
 
도22 카리에라 <자화상>
1731년, 종이에 파스텔
드레스덴 국립미술관
 
 
 

단지 여성화가들이 그린 초상화가 아니더라도 권력과 자원과 문화를 독점하고 누렸던 봉건 귀족들의 생활 모습은 판화나 풍자화 등을 통해서 지금까지 생생하게 전해지고 있습니다(도24). 영국의 초상화가 게인즈보로(Thomas Gainsborough, 1727-88)의 <아침 산책>(도23)은, 이제 막 결혼한 젊은 부부가 자신들의 영지를 가볍게 산책하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하는 장면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흠잡을 데 없이 멋진 차림새를 갖추었으며, 표정은 냉담하고 무관심합니다. 게인즈보로는 환영과도 같은 그들의 자태를 묘사하기 위해 일부러 멀찌감치 서서 긴 붓으로 캔바스를 스치듯 그렸다고 합니다. 그러나 다비드의 <단두대 앞에 선 마리 앙트와네트>(도25) 스케치는 18세기 귀족 사회의 세련됨과 냉담함, 그들의 독점과 특권의식이 맞게 될 파국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도23 게인즈보로
<윌리암 할레트부부의 초상 (아침산책)>
1785년, 캔바스에 유채, 236×179 cm
런던, 국립미술관
 
 
도24 작가미상 <미장원에서의 화재>
1780년 경
 
 
 
도25 다비드 <단두대앞의 마리 앙트와네트>
1793년 드로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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