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플랑드르(지도) 미술은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1640)와 브란트라는 거장을 배출합니다. 루벤스는 스페인 왕실이 지배하였던 벨기에에서 태어났으며, 렘브란트는 네덜란드 출신입니다. 두 사람 모두 미술가로서 경제적인 부와 사회적인 명예를 얻었다는 점에서는 비슷하지만 왕족과 교류하며 귀족의 명예를 끝까지 누린 루벤스와 파산과 가족의 죽음으로 쓸쓸하게 생을 마감하였던 렘브란트의 노정은 크게 대비됩니다. 두 미술가의 인생의 희로애락이 두 작가의 그림에도 배여 있는 것 같습니다.

아래의 두 초상화는 두 화가가 모두 30대 초반에 그린 자화상들입니다. 왼쪽의 부부초상화는, 이탈리아에서 막 돌아와 재능을 인정받은 루벤스와 좋은 집안 출신의 규수인 이자벨라 브란트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한 것입니다(도1). 신부의 보석같이 화려한 의상의 장식, 한손에 검을 만지작거리는 루벤스의 모습은 이 화가가 젊은 나이에 이미 세속적으로 크게 성공하였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렘브란트의 부드러운 모피가 달린 벨벳상의와 멋진 모자 역시 화가의 지위와 야심을 말하는 것이겠지만, 루벤스와 비교해 볼 때 세부적인 장식보다는 화면의 전체적인 빛의 조화가 우선합니다(도2).

 

도1 루벤스 <아내 이자벨라 브란트와 함께 한 자화상>
1609-10년, 178X136.5cm
뮌헨 알테피나코텍
 
도2 렘브란트 <벨벳 모자를 쓴 초상화 >
1640년, 캔바스에 유채, 102×80cm
런던 국립미술관
 
 
 

평생 네덜란드를 떠나지 않고 암스테르담에서 작업하였던 렘브란트와 달리 전 루벤스는 유럽을 무대로 활동하였던 국제적인 화가였습니다. 벨기에 안트워프에서 자란 그는 1600년부터 8년간 이탈리아에서 수련하며, 고대의 유물을 모사하고, 전성기 르네상스의 대가들 뿐 아니라 당시 로마에서 활동하던 카라바지오카라치의 미술까지도 섭취할 수 있었습니다.

1610-12년 안트워프의 대성당을 위해 그린 제단화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 그리스도>(도3)는 그의 미술이 이탈리아와 플랑드르 전통을 융합하여 일찍이 높은 경지에 도달하였음을 보여줍니다. 당시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고자 하였던 네덜란드 지역과는 달리 안트워프는 여전히 카톨릭 지역으로 남아 있었으며 안정된 경제를 바탕으로 교회 제단화 주문이 끊이질 않았습니다. 안트워프의 민병대가 발원한 이 제단화는 성화이자 동시에 이 길드의 집단 초상화이기도 하였습니다.

 

도3 루벤스 <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 그리스도 >, 1612-14년
421×153cm(날개),안트워프 대성당
 
 
 
 
 

예수를 십자가에서 조심스레 내리는 인물들의 다양한 포즈와 동세가 맞물려 화면의 전체적인 역동성을 만들어 내는 이 그림에는 루벤스의 이탈리아에서의 경험이 드러납니다. 예수의 강한 신체는 라오콘이나 미켈란젤로의 인체를 연상시키며, 흰 천에서 뿜어나오는 강렬한 조명의 효과는 그가 카라바지오의 유산을 소화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100여 년전 뒤러가 그랬던 것처럼 그의 그림에서는 북유럽의 전통과 이탈리아 미술을 융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이처럼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바로크 미술을 전 유럽으로 확산시키는데 누구보다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화려하고, 대규모의 역동적인 역사화와 신화화를 거침없이 그려낼 수 있는 이 화가에게는 왕실과 교회의 주문이 쏟아졌고, 왕실과의 친분을 바탕으로 외교적인 임무도 능숙하게 수행하였습니다. 당시 유럽의 왕실들은 30년 전쟁으로 서로 반목하였으며 늘 전운이 감돌았습니다. 아래의 <평화의 알레고리>(도4)는 바로 왕실간의 갈등과 반목을 해소하기 위한 정치적인 교섭을 위해 그려졌습니다. 화면은 비너스와 팬의 풍요로운 축제가 벌어지는 밝은 전경과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울부짖는 후경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투구와 갑옷으로 무장했지만 사리가 분명한 지혜의 여신 아테네가 전쟁의 신 마르스를 물러나게 하는 것으로 보아 이 그림의 평화의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루벤스는 스페인 이사벨라 여왕의 명으로 이 그림을 가지고 영국에 화해의 메시지를 전하러 갔던 것입니다.

 

도4 루벤스 < 평화의 알레고리 >, 1629-30년, 203.5×298cm
런던 국립박물관
 
 
 
 
 

그의 그림은 늘 따뜻하고 화사한 빛과 색채로 가득할 뿐만 아니라 그가 그린 여인들은 풍만하기 그지없습니다. 수없이 밀려드는 유럽 왕실의 주문의 대부분은 그의 조수들의 몫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능숙한 마무리 붓놀림만으로도 충분히 화면에 생기를 불어 넣을 수 있었습니다.

 

 

루벤스는 53세 되던 해에 16살의 소녀 엘렌 푸르망과 결혼을 하게 됩니다. 젊은 아내의 건강한 누드의 육감적인 느낌은 검은 모피의 촉각적인 느낌 때문에 더욱 강조되고 있습니다(도5). 이 이때를 즈음하여 그려진 초상화와 풍경화에는 더욱 더 그러한 삶의 환희와 밝음이 두드러집니다. 비슷한 시기에 그려진 <사랑의 정원>(도6)은 티치아노와 같은 16세기 베네치아 화가들이 즐겨 그렸던 바커스 축제를 17세기 플랑드르의 그림으로 바꾸어 놓은 것인데, 그가 즐겨 그렸던 '사랑의 축제'는 18세기 와토와 19세기 르노와르의 파리 교외에서의 사교모임에서 다시 묘사되었습니다. 부드러워진 형태들과 흐르는 듯한 구성은 인간의 지성보다는 감성을 찬미하는 디오니소스적인 주제의 그림에 매우 잘 어울립니다.

 

도5 루벤스 < 모피를 두른 비너스 >
1630년대, 176×83cm
빈 국립미술관
 
도6 루벤스 < 사랑의 정원 >, 1633년
198×283cm, 마드리드 프라도미술관
 
 

안트워프의 이탈리아식 궁전을 짓고 그 곳에서 여러 명사들을 만나며, 귀족으로서 품위와 풍족함을 누렸던 루벤스는 16세기 베네치아의 티치아노를 능가하는 화가로서의 성공과 명예를 거두었습니다. 선보다는 색채의 가능성을 더 높이 산 미술가로 이성보다는 감성을 대변하는 작가의 계보를 이어, 이후의 아카데미 논쟁에 빌미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루벤스의 이러한 낙천적인 기질은 렘브란트의 기복 많고 비극적인 색채와 큰 대조를 이룹니다. 네덜란드 레이덴 출신인 렘브란트는 루벤스나 다른 야심찬 화가들이 이탈리아에서 미술 수업을 받았던 것과는 달리 평생 레이덴과 암스테르담을 떠나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역사화를 주로 그렸던 스승 라스트만이나, 주위의 화가들로부터 빛의 효과적인 사용법과 대규모의 작품을 구성하는 법은 배울 수 있었습니다.

 

 

1631년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한 렘브란트는 뛰어난 초상화 솜씨로 일찍이 성공을 거둘 수 있었으며, 부유한 상속녀 사스키아와의 결혼은 그의 성공에 날개를 달아주었습니다. 그의 그림에서 꽃의 여신 플로라로 분장하고 등장하는 어린 사스키아는 비너스로 분한 루벤스의 헬렌에 해당하는 것 같습니다(도7).

 

도7 렘브란트 < 플로라로 분장한 사스키아 >, 1634년
125×101cm, 성 페테스부르크 에르미타주 미술관
 
 
 
 
 

야경으로 더 잘 알려진 <바닝 코크 대장의 민병대>(도8)은 1640년대 렘브란트의 전성기 시대에 그려졌습니다. 현대 전하는 이 그림은 화면의 양옆이 조금씩 절단되어 원작보다 다소 복잡한 느낌을 주지만, 이전의 그룹초상화를 넘어서는 대담한 구성으로 마치 대규모의 역사화처럼 보입니다. 그동안 이 그림은 표면이 많이 더러워져 밤의 장면을 묘사한 것으로 잘못 알려져왔을 뿐 아니라, 렘브란트가 이 그림으로 인해 주문이 끊겨 몰락하게 되었다는 오해가 늘 따라다녔습니다.

 

도8 렘브란트 < 반닝코크 민병대-야경으로 알려져 있음 >
1642년, 363×437cm,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우리는 이미 할스가 떠들썩한 모임의 장면으로 그룹초상화의 어색한 느낌을 극복하였던 것을 보았습니다. 렘브란트는 그 이상을 그리고자 하였습니다. 설득하듯이 손을 내밀고 있는 주인공을 중심으로 그 대원들은 야외에서 무기를 손질하거나 북잡이의 소리에 맞추어 정렬하기 이전의 자연스러운 모습입니다. 그러나 이 그림이 할스의 소란스러운 장면과 달라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배경에 육중한 개선문을 세워 무대에 관객의 시선을 집중시키고, 깃대와 행렬의 방향을 맞추어 다양한 화면의 움직임을 정리하는 섬세한 배려가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더불어 그는 환한 빛을 내는 소녀와 같은 비현실적인 모티프들을 이용하여 신화화나 역사화처럼 다양한 이야기를 만들어냅니다.

대중들로부터 외면 받는 고독한 미술가라는 렘브란트의 이미지는 19세기 낭만주의 시대에 만들어졌지만 이 작품을 주문하였던 반닝 코크의 가족들은 그림에 만족하였습니다. 렘브란트는 암스테르담 고급 주택가에 저택과 작업실을 마련하고 많은 조수와 제자를 거느렸으며 동방의 골동품이나, 판화, 미술작품을 수집하는데 열성적이었습니다. 사실 그가 파산하였던 것은 모아들인 돈을 잘 관리하지 못하였던 데 더 큰 원인이 있었던 것입니다.

 
 

네덜란드에서는 남부 플랑드르와 달리 종교화의 주문이 거의 없었던 점을 생각해 볼 때 렘브란트의 종교화는 17세기 네덜란드 회화에서 매우 독보적인 것입니다. 그의 종교화는 자신의 경험과 이웃이었던 유태인들과의 교류, 그리고 성경에 대한 지식에 바탕을 둔 것이었습니다. 그런점에서도 렘브란트는 종교화가 많이 그려지지 않던 네덜란드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앞서 보았던 루벤스의 안트워프 성당 제단화,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도3, 10)은 너무나 유명하였으며 렘브란트도 이 그림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방식으로 이 주제를 다시 그리고 싶었습니다(도9).

 

도9 렘브란트, < 십자가에서 내림 >, 1634년
89.5×65cm, 뮌헨 알테피나코텍
 
 
 
 
도.10 루벤스 < 십자가에서 내림 > 가운데 패널
1612-14년, 421×311cm, 안트워프 대성당
 
 
 
 

사실 이 두 그림은 그 규모에 있어서 나란히 놓을 수 있는 작품은 아니지만, 루벤스와 렘브란트의 차이를 잘 보여주는 예가 될 것입니다. 화면의 장대한 스펙타클로 보는 이를 압도하는 루벤스의 구성과는 달리 렘브란트의 뒤로 물러난 공간은 관객들의 정면의 시선으로부터 비켜나 있습니다. 루벤스의 영웅적인 인체에 비해 렘브란트의 신의 아들은 너무나 연약합니다. 렘브란트 그림에 배인 이러한 인간적인 슬픔이 보는 이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렘브란트는 회화 뿐 아니라 판화에서도 뛰어난 작품들을 많이 남겼습니다. <환자를 치료하는 그리스도>는 예수가 병자와 어린아이를 치료하는 마태목음 19장의 장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예수는 아이가 가까이 오는 것을 막는 베드로를 탓하며 '천국은 그들과 같은 자들의 것'이라고 했습니다. 가난한자와 병든자에 대한 관심이 따뜻하게 드러난 이 장면이 더욱 설득력 있는 이유는 아마도 흑백의 풍부한 질감과 부드럽게 스며드는 빛을 표현해내는 그의 에칭기법 때문일 것입니다. 동판에 왁스를 바르고 그것을 새겨 부식하는 에칭을 통해 얻어지는 화면은 판화이지만 선의 맛보다는 훨씬 회화적입니다(도11).

 

도11 렘브란트, < 예수앞에 데려온 어린소년("100길더의 판화") >
1647-49년, 에칭과 드라이포인트, 278×388 mm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윤곽선을 강조하기보다는 물감을 퇴적시켜 마치 빛이 그 안에서 스며 나오는 것과 같은 회화적인 기법은 '렘브란트의 빛'이라고 불리우는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습니다. 렘브란트는 빛과 물감의 물질감이 어우러진 회화기법을 사용하여 그림에 신성을 담아내었습니다. 이삭과 레베카로 분장한 한 유대인 부부의 초상화는 렘브란트의 회화적인 특징을 잘 보여줍니다(도12,13).

 

도12 램브란트 < 유대인 신부 >, 1665년경, 캔바스에 유채
121.5×166.5cm,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도13 램브란트 <유대인신부> 의 부분
 
 
 
 
 

렘브란트에 대한 기록이나, 전기가 충분하지는 않지만 다른 어떠한 천재들보다도 그에 대해서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그가 남겨 놓은 수많은 자화상 때문일 것입니다(도14,15,16,17). 20대의 호기심 많은 청년의 모습에서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던 황금기의 모습, 그리고 가난한 노화가의 모습에 이르기까지, 그가 그린 초상화는 그의 삶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때로는 오만하게, 자신의 모습에 도취되어 있는가 하면, 말년에는 관찰자의 시선으로 자신의 심리를 꿰뚫습니다. 저명한 미술사학자 곰브리치는 "할스의 초상화가 스냅사진처럼 한 순간을 포착했다면, 그의 초상화는 인물의 전 인생을 말해준다."라고 했는데, 이말은 렘브란트의 초상화를 보았을 때의 느낌을 잘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도14 렘브란트 < 자화상 >
1629년, 나무패널에 유채, 15.5×12.5cm
윈헨 알테피나코텍
 
 
 
도15 렘브란트 < 초상화 >
1658년, 캔바스에 유채, 133.5×104cm
뉴욕 프릭소장품
 
 
도16 렘브란트 < 자화상 >
1661년, 114×94cm
런던 켄우드하우스
 
 
도17 렘브란트 < 자화상 >
1668-69년, 82.5×65cm
쾰른 발라프 리카르츠 미술관
 
 

루벤스와 렘브란트는 현실적인 주제의 작은 그림들이 주로 그려지던 플랑드르 지역에서 역사화와 종교화를 자유자재로 그렸으며, 명예와 부를 바탕으로 규모가 큰 스튜디오에서 제자들과 조수들을 거느렸던 미술경영가이기도 하였습니다. 17세기 플랑드르의 다양한 장르의 다채로운 미술이 우리를 놀라게 하지만 루벤스나 렘브란트와 같은 대가가 없었다면, 이 지역의 미술은 훨씬 왜소해 보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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