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흔히 17세기(지도)의 회화, 조각, 건축을 일컬어 '바로크' 시대의 미술이라고 합니다. '바로크'라는 용어의 어원에 관해서는 여러 다른 설명이 있겠지만, 스페인의 금세공사들이 형태가 비틀어진 큰 진주를 부르던 데서 연유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 말의 속뜻은, 무엇인가 귀한 것이 과장되고 왜곡되어 그 원래의 가치가 떨어졌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여기 두 개의 작품이 있습니다. 하나는 16세기 라파엘로의 <성가족>(도1)이고, 나란히 있는 것은 17세기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1640)의 작품입니다(도2). 더 없이 고요한 르네상스기의 그림과 비교해 볼 때 루벤스의 작품은 대단히 격렬하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균형과 조화를 이상적인 아름다움의 조건으로 평가하였던 고전주의 미학의 관점에서 볼 때 루벤스의 그림은 지나치게 과장되고 소란스럽게 여겨졌을 것입니다. 이러한 평가는 17세기 회화 뿐 아니라 조각이나, 건축에도 적용되었으며, 그래서 후대의 감식가들은 17세기의 미술을 경멸하는 의미로 바로크라 불렀습니다.

 

도1 라파엘로 <성모자>
1507년, 캔바스에 유채, 122*80cm
 
 
도2 루벤스 <뤼시퍼스 딸들의 납치>
1618년 경, 캔바스에 유채, 224*211cm
 
 

이러한 17세기의 미술을 르네상스의 고전문화의 쇠퇴가 아닌 독자적인 미술로 인정하고 이시기의 다양성이 새롭게 발견된 것은 근래에 와서입니다. 20세기초 뵐플린과 같은 미술사가의 연구는 바로크 미술을 다시 보는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진정한 미술의 대가로 의심치 않는 벨라스케스 램브란트의 명성도 사실 현대에 와서 새롭게 조명된 결과인 것입니다

유럽의 17세기 미술은 지역과 종교, 장르에 따라 매우 다채롭게 진행되었습니다. 당시 유럽은 로마를 중심으로 한 카톨릭 세계와 종교개혁이후 교황으로부터 독립한 독일, 네덜란드의 신교세계로 크게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카톨릭 교회는 손상되었던 교황의 권위를 다시 세우고 하늘의 무한한 영광을 재현하기 위해서 그 어떤 시대보다도 미술의 힘을 적극적으로 이용합니다. 이러한 반종교개혁 시기의 미술은 단순히 문맹자들에게 하느님의 뜻을 대신 설명하고자 하였던 중세 종교미술 이상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아래 왼쪽그림은 반종교개혁에 앞장섰던 예수회의 본부 교회인 로마, 일제수 교회의 천장화입니다(도3). 속세의 죄로 추락하는 인간군상들 사이로 영광을 한몸에 받으며 천상의 세계를 지배하는 그리스도의 모습이 황금빛으로 눈부시게 꾸며져 있습니다. 어디까지가 천장의 건축물인지, 그리고 어떤 것이 조각이고 그림인지 구분할 수 없는 아찔한 천장화를 보면서 사람들은 천국을 미리 맛보았으며, 신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을 요구받았을 것입니다. 로마교회의 이처럼 호사스럽고 연극적인 미술은 독일 로르지방 교회의 제단 장식에서 더욱 놀라운 장면을 연출하기에 이릅니다. 제단에서 벌어지는 성모의 날렵하고 화려한 승천의 모습은 물질감이 느껴지지 않아 마치 눈앞에서 환영을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도4). 카톨릭 교회는 이러한 효과를 위해서 모든 시각적인 표현 기법들을 총동원하였던 것입니다.

 

도3 조반니 바티스타 가울리 <그리스도의 승천 >
1672-1672년,프레스코, 로마 일제수 교회의 천정화
 
 
 
도4 퀴린 아잠 <성모승천>, 1717-25년
바르바리아 로르 순례자교회, 대리석과 치장벽토
 
 
 
 
 
 

그러나 새롭게 등장한 신교 국가들, 즉 북부독일이나 네덜란드인들은 교회의 제도나 교리보다는 성서의 말씀에 더 의지하였으며, 신의 소명을 받들어 청빈하고 성실하게 사는 것이 구원의 열쇠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또한 교회에 하느님의 모습을 본뜬 그림이나 조각을 안치하는 것을 우상숭배라 여겼습니다. 17세기 신교지역에는 로마의 교황이나 프랑스의 군주처럼 절대적인 권력과 부를 지닌 미술의 후원자도 없었으며, 우상숭배 논쟁이 있은 뒤로는 더 이상 제단화나 교회의 장식 주문도 없었습니다. 피터 산레담(Peter Janse Sanredam)이 그린 유트레히트의 교회모습과(도5) 하를렘 <성 바보교회의 실내>(도6)는 검소하고 아무 장식도 없이 밋밋한 네덜란드 교회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탈리아의 바로크 교회와는 매우 대조된 모습이죠. 대신 이 지역의 미술가들은 새롭게 부상한 소상인들의 취향에 알맞은 작은 풍경화나 정물화, 그리고 초상화를 그렸으며, 이것들을 미술시장에서 경쟁을 통해 판매해야 했습니다(도7,8). 우리는 신교세계에서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미술체제가 탄생하게 됨을 목격하게 됩니다.

 

도5 산레담 <유트레히트 성 마리아교회>
1662년, 캔바스에 유채, 109.5*1395,cm
 
 
 
도6 산레담 <하를렘의 성 바보 교회의 실내>
1660년, 나무패널에 유채
 
 
도7 호베마 < 미들하니스의 오솔길 >
1689년, 캔바스에 유채, 103.5*141cm
 
 
도8 아버캄프 < 겨울 >
1610년 경, 캔바스에 유채
 
 
 
 

북유럽과는 달리 프랑스에서는 교황에 버금가는 막강한 힘을 지닌 세속 군주가 등장합니다. '짐이 곧 태양'이라 했던 루이 14세의 프랑스가 가장 먼저 절대왕정을 확립하였으며,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군주들은 그러한 프랑스를 뒤쫓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공고하게 하기 위해 엄청난 규모의 왕궁들을 건설하는데, 프랑스의 베르사이유 궁전은 그 가장 대표적인 예입니다. 또한 권력자들은 자신들의 과시적인 초상화나 기마상을 제작하기를 즐겼습니다(도9,10).

 

도9 프이 르 보, 망사르 < 베르사이유 전경 >, 1669-1685년
 
 
 
도10 리고 <루이 14세의 초상 >
1701년, 캔바스에 유채, 279×190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당시 최고의 솜씨를 자랑하던 루벤스는 프랑스 왕실의 사건들을 신들의 이미지에 뒤섞어 그림으로써 권력자들을 미화하는 궁정장식의 그림을 수없이 남기기도 하였습니다. 이탈리아 메디치 가문출신의 프랑스 왕비가 마르세이유 항구에 도착하는 장면을 그린 루벤스의 아래 기록화는 바로크 시대 미술이 권력자들을 미화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던 것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 하겠습니다(도11). 19세기까지 이어지는 이러한 왕과 귀족들의 무제한의 사치와 영광의 뒤에서 점차 계몽의식이 싹트고 근대적 개인들의 자각이 준비되었을 것입니다.

 

도11 피터 파울 루벤스 < 마르세이유 항의 도착>
1621-25년, 캔바스에 유채, 394×295cm
 
 
 
 

우리는 로마 교회의 장중하며 사치스러운 장식과 프랑스의 궁정미술 그리고 네덜란드의 소박하지만 그들의 생활과 자연에 대한 애정이 담긴 회화들을 17세기 미술에서 동시에 만나게 됩니다. 바로크 미술이 펼쳐 보이는 이러한 다양성이야말로 미술이 당대의 사회, 정치와 어떻게 맞물려 이루어지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 좋은 예일 것입니다.

바로크 미술의 새로운 분위기는 16세기 말 로마에서 시작됩니다. 1520년대 이후 유럽을 풍미하였던 매너리즘은 점차 기발한 효과와 세련된 솜씨를 뽐내며 자연과 고전적인 미의 이상으로부터 멀어졌습니다. 16세기가 끝나갈 무렵 일부 미술가들은 이러한 미술에 싫증을 느끼고 이전 르네상스 시대의 고전적 이상으로 돌아가고자 하였습니다.

이탈리아 북부, 볼로냐 출신의 아니발레 카라치(Annibale Carracci: )는 당시 이러한 경향을 대변합니다. 그는 한세기 전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티치아노, 그리고 코레지오의 미술을 완벽한 고전미술의 정수로 여겼습니다. 그리하여 옛 대가들의 장점들을 잘 섭취하여 재구성한다면 가장 이상적인 아름다움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그러한 목적을 위해 그는 일찍이 동생, 아고스티노 카라치, 조카, 루도비코 카라치와 함께 볼로냐에 아카데미를 세우고 제자들을 키웠습니다. 카라치의 명성이 높아지자 로마의 파르네제 추기경은 자신의 아름다운 저택을 장식하기 위해 그를 로마로 불러들입니다. 아래 보시는 왼쪽 파르네제 궁전의 천장화가 바로 그것입니다(도12).

 

도12 아니발레 카라치, 로마 팔라초 파르네제 궁 천장화
1557-1601년
 
 
도13 미켈란젤로, 로마 바티칸 시스틴 예배당 천장화
1508-1512년, 프레스코
 
 
 
 

카라치는 20미터에 이르는 회랑의 반원형 천장(배럴 볼트)을 신들의 사랑의 이야기로 가득 채웠습니다. 그는 길게 천장을 삼등분하고, 거인족(아틀란티드)은 건축물처럼 회색으로 그리고 그 앞에 미덕을 의인화한 알레고리들을 실제 살아 있는 사람처럼 그렸습니다. 아마도 여러분들은 미켈란젤로의 시스틴 벽화를 연상하였을 것입니다. 실제로 당시 사람들은 카라치가 제작한 파르네제 가문의 천장화를 90년전 미켈란젤로의 작품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고 여겼습니다(도12,13,14,15).

도14 카라치 < 비너스와 안티시스 >
1577-1601년, 로마, 팔라초 파르네제 천장화
 
 
도15 미켈란젤로 <낙원추방>, 바티칸, 시스틴 예배당 천장부분
 
 
 
 
 

카라치는 미켈란젤로를 모범으로 삼았는가 하면, 티치아노와 같은 16세기 베네치아 화가들도 염두에 두었습니다. 천장의 가장 중심을 차지하는 그림인 <바커스와 아리아드네의 승리>가 보여주는 밝은 색채와 활기찬 움직임의 흥분된 분위기는 베네치아 대가들의 솜씨와 흡사합니다(도16,17).

 

도16 아니발레 카라치, <바커스와 아리아드네의 승리>
1600년경, 로마 파르네제 궁 천장화
 
 
도17 티치아노 <바커스와 아리아드네 >
1528-24년, 캔버스에 유채, 175*190cm
 
 

당시 카라치의 미술은 로마에서 매우 인기가 있었으며 그를 따르는 게르치노, 귀도 레니 같은 화가들이 속속 등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미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작가의 독창성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대적인 관점에서 볼 때 고전기의 미술을 모범으로 삼아 그것을 끊임없이 모방하며, 다른 대가들의 양식을 절충하는 카라치의 방식을 이해하기 쉬운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상적인 아름다움과 도덕적인 교훈을 중시하는 고전미술은 17세기 이탈리아 미술에 새로움을 불어 넣으며 막다른 골목에 이른 것처럼 보였던 매너리즘 미술을 다시 한 걸음 진행할 수 있게 하였던 큰 힘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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