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 도입부에서 말한 바와 같이 15-16세기의 이탈리아(지도)는 작은 도시들이 독립된 하나의 국가였습니다. 지난 두 주에 걸쳐 살펴 본 피렌체와 로마는 그 중 중심이 되었지만 주변의 국가들 또한 그들과의 영향 속에서 독창성을 지니면서 중요한 작품들을 남겼습니다. 이탈리아 반도의 북부 중앙에 위치한 만토바는 곤자가가문이 이끄는 작은 도시였습니다. 루도비코 곤자가(Ludivico Gonzaga)는 건축가 알베르티(Leon Battista Alberti:1404-72)에게 그들의 교회 설계를 의뢰하고 화가 안드레아 만테냐(Andrea Mantegna: 1431-1506)를 궁정화가로 기용함으로써 고대에 대한 관심을 현실의 시각이미지로 구현시켰습니다.

 

 

인문주의 학문에도 조예가 깊었던 알베르티는 만토바의 산 안드레아(St.Andrea) 교회를 짓는데 고대건축의 방식을 응용하였습니다(도1,2). 정면의 지붕엔 그리스식 삼각형 팀파늄을 얹고 아래엔 로마의 개선문을 연상시키는 커다란 아치를 적용한 것입니다. 내부는 많은 사람을 수용하기 위하여 넓은 공간을 확보하면서, 로마 건축에서 사용하던 넓은 폭의 베럴 볼트로 천장을 처리함으로써 제단까지 확 트인 시야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도1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 <산 안드레아>
1472년 만토바
 
 
 
도2 도1의 내부
 
 
 
 
 
 
 

인문주의 교육을 받은 루도비코 곤자가는 고대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였으며 그 이미지를 자신의 궁에 적용하였습니다. 그가 고대 유적에 관심이 많던 화가 안드레아 만테냐를 궁정화가로 채용한 것은 이전의 국제 고딕 양식으로부터 과감히 단절하고 고전주의를 택하는 모험을 의미합니다. 그는 2년이 넘는 기간동안 만테냐를 설득하고, 화가가 만토바에 체류하는 동안 큰집과 충분한 재정을 약속했습니다. 1460년에 궁정화가가 된 만테냐가 46년 동안이나 곤자가 가문을 위해 일하였음은 주문의 성격과 화가의 관심이 어느 정도 일치되었기 때문에 얻어진 결과일 것입니다.

 
 

만테냐가 이 곳에 남긴 가장 큰 성과는 현재 <신혼의 방>이라 불리는 방의 벽화입니다. 당시에 일종의 접견실이었다고 짐작되는 이 방은 도3에서 보는 바와 같이 사방과 천장에 모두 벽화가 그려져서 '그림이 그려진 방'(Camera Picta)라고도 불렸습니다. 벽면의 그림들은 파노라마식으로 펼쳐져 있습니다. 오른쪽 벽의 벽난로 위엔 루도비코와 부인이 앉아 있고 그의 아들, 딸, 궁정인, 시종들이 그들을 둘러싸고 있습니다. 그리고 왼쪽 벽엔 추기경이 된 그의 아들 프란체스코가 편지를 받아 든 장면입니다(도4). 어떤 사건을 나타낸 것인지는 정확하지 않으나 그림 전체의 주제는 가문의 번영과 영광을 나타낸 것입니다. 만테냐는 많은 인물들을 옆면으로 배치하여 그림의 기념비적인 성격을 높였으며, 멀리 배경엔 로마의 상징적인 건물들을 넣음으로써 고전의 이미지를 주고 있습니다.

 

도3 안드레아 만테냐, <신혼의 방>, 1465-74년
프레스코 벽화, 만토바, 성 죠르지오 城
 
 
 

 

도4 도3의 부분, 루도비코 곤자가(화면왼쪽)와
그의 아들 프란체스코(화면 중앙)
 
도5 도3의 천장부분
 
 

이 방을 특별히 유명하게 만든 것은 천장부분입니다. 만테냐는 아래서부터 위로 쳐다 본 원근법을 처음으로 적용함으로써 마치 하늘의 천사들과 사람들이 이 방의 장면들을 내려다보고 있는 듯한 효과를 낸 것입니다(도5). 이러한 획기적인 회화기법은 화가를 유명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작은 도시 만토바의 문화적 수준, 즉 가문의 위상을 높여주었습니다.

 

 
 

1478년 루도비코가 죽은 후에도 만테냐는 그의 후손들이 이끄는 궁정의 화가로 계속 남아있었습니다. 그 중 미술에 가장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은 루도비코의 손자인 프란체스코의 부인, 이사벨라 데스테(Isabella d'Este)였습니다. 이사벨라는 라틴어를 구사하고 문인들과 논의할 정도로 출중한 여성으로 궁 안에 자신의 서재를 만들어 고대조각을 전시하고 만테냐에게 고대신화 그림을 주문하였습니다. 장신구나 종교화 주문에 제한되었던 당시 여성들의 주문과 비교하면 이사벨라는 대단히 지적인 여성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만테냐가 그녀의 주문으로 그린 <파르나소스>(도6)는 과도할 정도로 사실적이던 만테냐의 이전 그림과 비교할 때 매우 우아한 모습이어서 주문자의 성향이 반영되었다고 생각됩니다. 비너스와 마르스의 사랑이 그림의 주제이지만 이사벨라의 남편이 용병이었음을 상기한다면 이 주제는 단순히 고대 신화에의 관심에서 비롯되었다기보다 자신을 미화시키는 방편이었음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도6 안드레아 만테냐 <파르나 소스>, 1497년, 캔버스에 유채
160×192cm, 원래 이사벨라의 서재에 있었으며 현재는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됨
 
 

이제 잠시 이사벨라의 초상화주문을 통해서 르세상스시대의 여성초상화를 살펴보겠습니다. 이사벨라의 주문은 매우 격이 높아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게도 닿았습니다. 그가 그린 이사벨라의 초상화는 완성되지 못한 채 드로잉으로 남아있지만 초상화의 의도를 짐작하게 합니다(도7). 우선 옆면의 얼굴은 특정인의 얼굴이기보다 레오나르도의 아름다운 마돈나 상들과 매우 비슷한 유형입니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가리키고 있는데, 현재는 아랫부분이 잘려있지만 이 그림을 보고 그린 다른 드로잉을 참고해보면 그녀는 책을 가리키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도8). 즉 아름답고 지적인 여성으로 그려지기를 바란 것이지요.

 

도7 레오나르도 다빈치 <이사벨라 데 스테의 초상>
1499년, 63×46㎝, 파리, 루브르 박물관
 
 
 
도8 작가미상, 도7을 보고 그린그림
1499년 이후 옥스퍼드, 에쉬몰린 박물관
 
 
 
 
 

르네상스시대엔 특히 초상화가 많이 그려졌습니다. 자신만 주문한 것이 아니라, 남이 주문하여 선물하기도 하였고, 외교적으로 다른 나라에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현재의 사진과 같은 역할이라 할 수 있지만 화가가 그린 것이기 때문에 사실과 다르게 그릴 가능성이 아주 높지요. 특히 여성초상의 경우엔 특정인을 닮기 보다 아름다운 유형으로 그려지는 예가 아주 많았습니다. 티치아노가 그린 도9의 <이사벨라 초상>은 그녀가 60세 때에 주문한 것이어서 매우 충격적입니다(도9). 티치아노는 물론 그녀를 보지도 않고 그렸으며 일명 <벨라>(도10) 즉 '아름다운 여자'라는 유형의 여성초상화에 옷 만 이사벨라의 것을 입힌 것 같습니다. 마치 나이 많은 여배우가 젊은 때 사진만 내보이는 것 같은 셈이니 당시 초상화는 인상관리 품목이었던 것입니다.

 

도9 티치아노 <이사벨라 초상>
1534-36년, 캔바스에 유채
빈, 미술사 박물관
 
 
도10 티치아노 <벨라>
1536년, 피렌체, 피티궁
 
 
 
 
 

이탈리아 중부도시 우르비노의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Federico da Montefeltro)는 미술을 통하여 지배자의 이미지를 부각시킨 남성 초상화의 예를 보여줍니다. 르네상스 당시 궁 안에서의 서재는 거의 외교적인 공간이었는데, 페데리코는 그 곳에 시저와 한니발 등 역사적인 영웅들의 초상을 걸어놓았고 자신과 아들이 함께 있는 초상도 그 중 한자리를 차지함으로써 자신을 역사적인 인물과 동일시하였습니다(도11,12)

도11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의 서재, 우르비노 공작궁,
초상화들이 있었던 이 서재엔 현재 복사본들이 전시되었고,
원본 초상화는 파리, 루브르에 소장되어있다.
 
 
도12 후스반 겐트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와
그의 아들 구이도발도>, 1474-76년경
우르비노, 마르케 국립 미술관
 
 
 
 
 

아들과 함께 있는 도12의 초상화를 보면, 페데리코가 자리에서 일어나면 천장을 뚫을 듯이 거대하게 묘사되어있습니다. 그는 무거운 갑옷 위에 붉은 망토를 두르고, 책을 읽고 있으며, 옆에 서있는 아들은 홀을 들고 있습니다. 물론 자연스러운 장면은 아니지요. 용병장이었던 그는 갑옷을 입어 무인이었음을 나타내고, 책을 읽는 자세로서 문무를 겸비한 모습으로 자신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들에게 홀을 들려, 후계자임을 이미지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즉 여기 등장하는 갑옷, 책, 홀 등은 모두 메시지 전달을 위한 도상이며 초상은 지도자 이미지를 전달하는 효과적인 수단이었던 것입니다.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Piero della Francesca: 1415-1492)가 그린 몬테펠트로 부부초상은 르네상스 초상화 중 아주 중요한 작품입니다. 마주하고 있는 두 개의 초상과 함께 뒷면엔 이들의 덕성을 나타내는 양면초상입니다(도13,14,15,16,17). 우선 페데리코는 정 옆면이며, 작은 초상임에도 불구하고 아주 거대하다는 느낌을 줍니다(도15).

배경이 이렇게 멀리 보이게 하려면 아마 높은 건물의 발코니에서 주인공을 아주 가까이 놓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 또한 실제 장면이기보다는 일종의 세팅이죠. 배경이 멀리 있음으로써 주인공이 기념비적으로 크게 보이는 것입니다. 또한 고대의 메달에 그 근원을 두고있는 옆면 얼굴은 정치가들이 즐겨 사용하였는데, 3/4각도의 초상이 많이 그려지던 15세기 후반에 페데리코만이 정 옆면을 사용한 것은 전투에서 잃은 한쪽 눈의 흉한 모습을 보완하기 위함입니다. 눈 사이가 푹 들어가고 메부리 같이 강하고 큰 코의 묘사에서 우리는 이 초상을 사실적이라고 판단하기 쉽지만, 이렇게 특정부분을 사실적으로 한 반면 전체가 전달하는 이미지는 매우 치밀하게 이상화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도13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 부부초상>
1474년 이후,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도14 도13중 부인 <바티스타 스포르차 초상>부분
도15 도13중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 초상>부분
 
 

남자의 초상은 단순하고 강한 반면 여자의 초상은 같은 옆면이라도 마네킹같이 유형화되어 있으며, 그녀를 돋보이게 하는 것은 머리장식과, 목걸이, 옷 무늬 등의 장식들입니다(도14,15). 이렇게 남자의 미덕과 여자의 미덕은 서로 구분되었으며 이는 뒷면에 그려진 덕성의 상징들에서 잘 나타나있습니다(도16,17). 즉 페데리코는 정의와 신중함, 꿋꿋함과 절제의 상징과 함께 하고 있는 마차에서 명예의 여신으로부터 승리의 관을 받고 있습니다(도16). 반면 부인 스포르차는 순결을 상징하는 일각수가 이끄는 마차에서 믿음과, 사랑, 그리고 희망의 세 덕성이 부인을 승리로 이끌고 있습니다(도17). 뒷면의 도상을 알고 나면 이제 앞면 초상의 성격을 더욱 분명히 알 것 같습니다.

 

도16 도15의 뒷면
 
 
 
 
도17 도14의 뒷면
 
 
 
 
옆면 초상과 세부묘사, 원경의 배경 등의 조화로운 절충은 화가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창의력에 의한 것이지만 이는 바로 주문자의 여러 요구를 충족시키는 방법이었던 것 같습니다. 즉 현존했던 실제 부부의 초상이면서 이상화되어야 했으며 우르비노 지방을 통치하는 군주의 초상으로 부각시켜야 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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