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 시대의 로마(지도) 교황청은 종교만을 주관하는 기관이 아니라 로마를 중심으로 한 이탈리아 중부와 북동부에 이르는 큰 영토를 지닌 교황청국가였습니다. 또한 로마는 카톨릭의 중심일 뿐만 아니라 고대 로마제국의 전통이 있었기 때문에 카톨릭과 고대문화가 자연스럽게 융화될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야심이 있는 교황들은 언제나 '세계의 머리'(Caput mundi)로서의 로마를 재건하려 하였고 그때마다 고대의 유산을 바탕으로 한 고전주의 경향의 미술이 적용 또는 이용되었습니다. 교황 식스투스 4세(Sixtus Ⅳ: 재임 1471-84)는 로마의 도시계획을 정비하고, 옛 문서를 모아 도서관을 설립하였으며, 고대 조각들을 모아 박물관을 지었습니다. 바티칸 도서관의 벽면에 그려졌던 <플라티나를 도서관장으로 임명하는 식스투스 4세>(도1)는 도서관과 고대가 교황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말해줍니다.

 

도1 멜로초 다 포를리 <플라티나를 도서관장으로 임명하는 식스투스4세>
1476-77년, 프레스코, 370×315cm,
원래는 바티칸 도서관에 벽화로 있었으나 현재는
캔버스에 옮겨져 바티칸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교황은 로마의 황제같이 옥좌에 앉아 있고 관장은 무릎을 꿇고 임명을 받습니다. 그러나 화면 가운데에는 관장보다 더 중요하게 차지한 인물이 있습니다. 교황의 조카인 줄리아노 델라 로베레 추기경으로 훗날 교황 줄리오 2세가 될 인물입니다. 줄리오 2세가 이 도서관을 증축하였을 때 한 설교자는 "(당신의 삼촌 식스투스 4세가)배움의 전당을 세우고, 당신은 이에 액자를 끼웠다. 그가 교황청 도서관을 세웠으니 여기에 아테네를 가져온 것이다." 라고 칭송하였습니다. 교황이 고대에 관심을 갖는 것은 바로 고대의 영광을 현재에 가져오는 것이었습니다.

 
 

줄리오 2세는 교황이 되자 로마가 고대의 위용을 다시 갖추는데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베드로 대성당의 개축을 계획하고, 고대 조각들을 열성적으로 모아 바티칸박물관을 만들었으며, 조각전시를 위한 정원도 조성했습니다. 또한 궁 안에는 미켈란젤로에게 <천지창조>를 의뢰하고, 라파엘에게는 <서명실>의 벽화를 주문했습니다. 교황의 이 왕성한 미술사업은 로마제국을 되살리고, 자신이 줄리우스 시저의 이미지를 갖추는 것이었습니다. 줄리오 2세가 브라만테에게 설계를 의뢰한 <벨베데레>정원은 실로 기념비적이었습니다(도2,3,4). 8각형의 정원에 고전적인 건축방식의 감실이 만들어지고 그 안에 배치된 조각의 전시방법은 실로 쾌적하고 품위 있는 모습이어서 이 후에도 조각 전시방법의 모델이 되었습니다.

도2 빈첸초 페올리 <벨베데레 정원>, 18세기
 
 
 
 
도3 <아폴로 디 벨베데레>
기원전 2세기 그리스 원작의 로마시대 모작
바티칸, 벨베데레 정원
 
도4 <라오콘>
기원전 2세기
바티칸, 벨베데레 정원
 
고대조각을 공부할 때 언제나 언급되는 <아폴로 디 벨베데레>(도3)와 <라오콘>(도4)도 이때 수집, 전시된 것이었습니다. 당시 고대조각의 수집은 이탈리아 전역에서 크게 유행하였으며 발굴할 수 있는 좋은 조건을 지닌 로마는 이 시대의 관심을 리드하였습니다. 부와 종교권력을 지닌 교황청은 도서관과 박물관을 조성함으로써 문화의 중심지가 된 것입니다.
 
 

매우 정치적이었던 교황 줄리오 2세는 이미지의 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1506년엔 4세기에 세워진 바실리카 형태의 <베드로 성당>을 완전히 다시 지을 계획에 착수하고, 1508년엔 미켈란젤로에게 <천지창조>를 주문하여 그의 삼촌인 교황 식스투스 4세가 시작한 시스틴 예배실을 완성하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엔 라파엘에게 현재의 서명실벽화를 주문하였습니다. <아테네 학당>(도6)과 <성체에 대한 논쟁> 등의 주제로 그려진 소위 <서명실> 벽화는 라파엘 회화의 가장 완숙한 모습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줄리오 2세의 고전주의 정책을 잘 반영하고 있습니다. 주문자의 정책과 화가의 스타일이 일치되었기 때문이죠.

 
 

현재 <서명실>이라 부르는 바티칸의 이 방은 줄리오 2세 당시엔 개인 도서실이었습니다. 당시의 서재는 외교적인 공간이었고, 이 그림들은 물론 많은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과시물이었습니다. 그럼 카톨릭의 수장인 교황이 어떻게 이교의 학문인 <아테네 학당>을 이러한 공간에 그리게 되었을까요. 교황 줄리오 2세는 군사원정도 마다하지 않던 정치적인 인물이었음을 고려할 때 그가 단순히 그리스 철학에 대한 관심에서 이 그림을 주문하였다고 볼 수는 없을 듯 합니다.

도5 교황청의 <서명실>
 
 
 
 
 

네 벽면에 그려진 이 방의 회화는 각기 신학을 나타내는 <성체에 대한 논쟁>, 詩를 나타내는 <파르나소스>, 법학을 나타내는 <세 덕성>, 그리고 철학을 나타내는 <아테네 학당>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신학, 철학, 문학, 법학 등의 이들 네 주제는 당시 도서관에서 책을 정리하는 분류이기도 하며 대학의 전공분류이기도 하였으니 학문의 네 영역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도6 라파엘로 <아테네 학당>, 1509-11년, 프레스코
폭770cm, 바티칸, 서명실
 
 
도7 플라톤과 아리스토 텔레스
도6의 중앙부분
 
 
도8 피타고라스

도6의 왼쪽 부분

 
 
 
도9 유클리드
도6의 오른쪽 부분
 
 
 
도10 톨로메오와 조로아스터
도6의 오른쪽 끝부분
 
 
 
브라만테가 설계한 베드로 대성당의 르네상스식 건축물 아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도7)를 비롯한 그리스 철학자와 과학자들이 서로 토론하고 있습니다. 피타고라스(도8)는 제자가 받쳐주고 있는 작은 판에 그려진 도형을 보며 음악의 조화에 대하여 쓰고 있으며 유클리드(도9)는 컴파스로 두 개의 삼각형을 그려 보이며 그의 기하학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의 법칙에 몰두한 어린 학생들의 놀라워하는 표정은 진지한 배움의 과정을 보여줍니다. 이밖에도 그 오른쪽에서 지구를 들고 있는 톨로메오, 천계를 들고 있는 조로아스터(도10) 등 서로 다른 시대의 철학자, 수학자와 천문학자들이 모두 모여 <아테네 학당>을 이루고 있습니다. 어느 누구보다도 중요한 인물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입니다. 라파엘로는 이 두 철학자를 원근법의 소실점에 배치함으로써 시선의 중심에 놓이게 하였습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얼굴로 그려진 플라톤은 오른손을 들어 하늘을 가리키고, 왼손에는 자연에 대한 그의 저서 『티마우스』를 들고 있음으로써 자연의 근원은 하늘에 있음을 웅변적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왼손에 그의 저서 『윤리학』을 들고 오른손 바닥을 펴 땅을 가리킴으로써 인간행동에 대한 도덕적 철학자임을 나타내는 등 라파엘로는 각각의 철학자를 나타내는 도상을 효과적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 것에 대한 지식'인 철학은 맞은편에 그려진 '신성한 것에 대한 지식'인 신학과 함께 인간의 지식은 모두 신의 선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라파엘로의 조화로운 화풍은 이들이 이룬 질서의 세계를 눈앞에 펼쳐 보여주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실제같이 느끼게 하는 사실적인 기법과 관객을 끌어들이는 연극적인 제스춰들은 보는 이를 그림에 참여시키기에 충분합니다. 그림에 있는 고대의 인물과 이를 보고 있는 현대의 인물이 함께 있는 고대와 현대의 공존은 '다시 태어난 로마'를 이루고자 했던 교황 줄리오 2세의 정책에 부합되는 이미지였던 것입니다.

 
 

'다시 태어난 로마'라는 이미지는 로마의 정치적 위상을 높이고자하는 교황의 정책이었습니다. 15세기에 전성기를 누리던 이탈리아는 프랑스, 신성로마제국, 스페인 왕정의 세력 확장 속에 힘이 약화되었으며, 교황청은 그들의 침략으로부터 로마를 보호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정세 속에서 교황 줄리오 2세는 비록 자신이 직접 갑옷을 입지는 않았으나 군사원정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로마를 지키고자 했던 교황의 의지는 라파엘로가 그린 교황의 초상화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도11).

 

도11 라파엘로 <교황 줄리오 2세>
1511-12년, 런던, 국립미술관
 
 
교황은 1510년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대패하고 볼로냐에서 중병을 앓았는데 그때부터 수염을 길렀으며 교황은 "프랑스 왕 루이를 이탈리아에서 몰아낼 때까지는 수염을 깍지 않겠다"고 공언하였습니다. 그리고 1512년 4월 라벤나에서 프랑스를 몰아낸 후 수염을 깎고 공식석상에 나타났습니다. 1512년에 제작된 교황의 초상은 흰 수염이 그득하며 고심에 찬 표정입니다. 교황의 정치성을 비판한 에라스무스는 교황을 낙원으로부터 추방하였으며, '군인왕', '새로운 시저'라고 풍자하였습니다. 실제로 교황은 기독교의 수장이었으나 정치가 시저의 야망을 지녔으며, 위기의 로마를 '새로운 예루살렘'이라 부르며 로마 시대 이후 가장 큰 제국으로 발전시키려 했습니다. 이러한 노력은 이후의 교황들도 끊임없이 지속하였습니다. 베드로 대 성당의 개축은 브라만테, 라파엘로를 거쳐 미켈란젤로에게 맡겨져 오늘의 위용을 낳았으며, 교황 파올로 3세가 주문하고 역시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캄피돌리오 광장 또한 16세기 로마에 고대 로마의 유적을 되살린 사업이었습니다.
 
 

'미술을 동원한 이러한 이미지 메이킹은 전성기 르네상스의 로마를 예술의 중심이 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교황의 정치적인 목적은 쉽게 달성되지 못하였습니다. 프로테스탄트 혁명이라는 카톨릭 역사상 최악의 현실에 부딪힌 것입니다. 현실을 개혁하기보다 고전적인 이미지로 미화시킨 정책은 진정한 해결책이 되지 못한 것이지요. 라파엘로의 아름다운 양식도 곧 매너리즘을 맞아 붕괴되었으니 이 시대 고전주의는 이룰 수 없는 유토피아의 추구였는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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