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켈란젤로는 1475년에 피렌체(지도)의 근처 카프레제(Caprese)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성장기부터 1564년에 죽기까지, 즉 15세기 말부터 16세기 중엽까지 이탈리아 역사는 격변기였습니다. 평온을 유지하던 피렌체는 1492년 로렌조 디 메디치가 죽자 1494년에 프랑스로부터 침략을 당하고, 1495년엔 메디치家가 피렌체로부터 추방되었습니다. 그후 공화정이 주도권을 잡았으나 힘은 약하였고, 1512년엔 메디치家의 코지모(Cosimo I di Medici)가 장악하면서 피렌체는 거의 군주 국가가 되었습니다. 한편 로마의 교황청 국가는 1527년 신성로마제국(현재의 독일)의 침략과 약탈에 위기를 겪는 한편 1517년부터 시작된 종교개혁으로 카톨릭의 권위마저 흔들렸습니다. 메디치와 공화정의 집권이 번복되던 피렌체와 로마의 교황청은 위기감을 느낄수록 위안과 과시의 정치를 하게 되었으며 이는 미술주문으로 이어졌습니다. 미켈란젤로는 이 시대에 공화정과 메디치, 그리고 교황의 가장 큰 주문들을 받아왔으며 그의 작품들은 정치 속에서 예술가가 겪는 보호와 갈등, 그리고 개인의 종교적 구원의 모습을 드러내 보여줍니다.

 

 
 

미켈란젤로는 13살에 기를란다이오(Domenico Ghirlandaio)의 제자로 들어갔으나 이듬해 로렌초 디 메디치의 주목을 받으면서 메디치家가 수집한 고대조각들을 자유로이 접하고 이를 통해 조각의 기술을 익혀갔습니다. 이 시기에 제작한 <센토들의 싸움>과 로마체제 중 제작한 <바쿠스>는 그의 초기 학습과정을 잘 보여줍니다(도1, 2).

 

도1 미켈란젤로<센토들의 싸움>, 1492년경,
대리석, 84.5×90.5㎝, 피렌체, 부오나로티의 집
 
 
도2 미켈란젤로 <바쿠스>
1497년, 대리석, 높이 203㎝,
피렌체, 바르젤로 미술관
 

 

<바쿠스>(도2)는 로마의 조각을 그대로 모사한 듯하며 그리스 신화를 부조로 새긴 <센토들의 싸움>(도1) 또한 주제와 기법면에서 고대조각을 연상시킵니다. 그러나 20세를 전후하여 제작한 이 두조각에서 우리는 벌써 미켈란젤로의 특징을 느낄 수 있습니다. <센토들의 싸움> 의 수많은 군상들이 서로 부딪치고, 밀고, 당기는 투쟁과 갈등, 술에 취한 듯 넘어질 것 같은 <바쿠스>의 불균형 등은 그의 긴 생애에서 남긴 작품들 속에 언제나 배어있는 요소입니다.

 
 

1494년 그는 피렌체를 떠나 볼로냐에 잠시 머문 후 로마에 체재하였습니다. 이 기간 중 제작한 <피에타>(Pieta,도3)와 피렌체로 되돌아가 제작한 <다비드>(도4)는 그가 이전기간에 습득한 고전적인 조각기법의 완성을 보여줍니다.

 

도3 미켈란젤로 <피에타>, 1499년, 대리석, 높이 174㎝
바티칸, 베드로 대성당
 
 

 

마리아의 섬세한 옷주름과 죽은 예수의 시신의 축 늘어진 근육묘사는 대리석으로 할 수 있는 가장 사실적인 묘사의 단계로 이끌었습니다. 24세였던 미켈란젤로도 자신이 이룬 기술의 완성에 만족한 듯 합니다. 수많은 그의 작품들이 미완성으로 끝나고, 모두 서명이 없는데, 이 작품에만 그가 싸인을 남겼다는 것만으로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의 싸인은 마리아의 가슴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띄에 새겨있습니다. 그러나 이 작품의 세부묘사는 사실적이지만 구조나 도상은 임의의 설정이 우선적으로 적용되었습니다. 이 작품은 피라밋형의 안정된 구조를 지니고 있는데 미켈란젤로는 이 안정감을 만들기 위해 마리아의 어깨와 치마폭을 좀 더 넓게 잡고 있습니다. 마리아가 죽은 예수를 무릎에 앉혀놓는 자세는 중세부터 내려온 도상인데, 이와 더불어 마리아는 33살의 아들이 있는 어머니이기보다 수태고지를 받던 10대의 소녀 나이입니다. 순결한 성처녀 마리아를 강조한 도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1500년경 미켈란젤로가 피렌체로 돌아왔을 때 공화정의 피렌체는 그에게 다비드 상을 주문합니다. 어느 조각가도 다루지 못하던 4m가 넘는 거대한 석재에서 다비드상을 완성하였을 때 피렌체의 이목이 집중되었습니다. 그리고 조각상의 공적인 효과를 잘 알고 있던 피렌체 공화정은 이를 시청 앞에 놓음으로써 <다비드>(도4,5)로 하여금 나라를 구한 소년 영웅의 역할을 하게 하였습니다. 미켈란젤로가 구현한 고대 남성 조각의 조형미, 사실과 이상의 조화는 조각으로서 완전할 뿐만 아니라, 새로워진 공화정의 이념으로서도 더 없이 적절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돌팔매 하나로 거인 골리앗을 죽인 다비드 이야기를 상기한다면 미켈란젤로의 <다비드>(도4)는 행동하는 영웅이기보다 도덕적인 이상의 영웅인 듯 합니다.

 

도4 미켈란젤로 <다비드>
1504년, 높이 4.1m, 대리석
피렌체, 아카데미아
 
 
 
도5 미켈란젤로의 <다비드>가 놓여있던 피렌체 시청 앞
현재는 복제품이 놓여있다.
 
 
 
 
 
피렌체가 아직 공화정으로 있을 때 시장은 곤팔로니에레(Gonfaloniere, 군대 최고 지휘자)의 커다란 방 양쪽 벽에 피렌체가 치룬 전쟁의 그림을 주문하였습니다. 하나는 1440년 밀라노군을 퇴각시킨 <앙기에리 전투> 이며, 다른 하나는 피사 근처에서 치룬 <카시나 전투> 전자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에게(1503) 후자는 미켈란젤로에게(1504) 주어졌습니다. 두 대가의 그림이 한방에서 한 시기에 그려지고 있다는 사실은 그것 자체만으로도 사회의 커다란 관심이었습니다. 두 대가에게 경쟁을 붙여놓은 것이지요. 아쉽게도 두 그림은 완성되지 못하였고, 피렌체는 공작정치로 변하였습니다. 그리고 1563년 공작은 이 자리를 바자리의 그림으로 대치시켰습니다. 원작은 남아있지 않으나, 후대의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던 이 그림은 루벤스와 상갈로의 드로잉으로 그 모습을 다소나마 짐작할 수 있습니다(도6,7).

 

도6 피터 폴 루벤스, 레오나르도의 <앙기에리 전투>
(1503)를 모사한 드로잉, 1600-08년, 펜과 잉크
45.2×63.5㎝, 파리, 루브르 박물관
 
 
도7 세바스티아노 다 상갈로(?) 미켈란젤로의 <카시나 전투>를
모사한 그리자유 패널, 홀크햄 홀, 라이체스터경 수집
 
 
 
 
 
레오나르도는 기마병들이 서로 엉켜 싸우는 격동적인 순간을 택하였습니다(도6). 우리가 2주제에서 본 <동방박사들의 경배>(주제2, 도4) 배경에 그려졌던 말 탄 모습은 화면 중앙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반면 미켈란젤로는 피렌체 군인들이 강에서 목욕을 한 후 대장의 부름에 다시 준비하는 순간을 택하였습니다. 미켈란젤로는 이러한 설정으로 많은 누드의 다양한 포즈를 그릴 수 있는 여건을 만든 듯합니다. 그가 17세에 제작한 <센토의 싸움>(도1)부터 <천지창조>(도8)와 <최후의 심판>(도20)에 이르기까지 그는 군상이 주는 에너지를 매우 선호했습니다.

 

 
 
교황 줄리오 2세(Julio Ⅱ , 즉위 1503-)는 1506년 미켈란젤로에게 교황청 안의 시스틴 예배실 천장화를 주문하였습니다. 교황의 처음 주문은 창문들 사이에 12사도를 그리고 나머지 부분은 장식 모티브를 그려달라는 주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미켈란젤로는 훨씬 거대한 계획을 세워 교황을 설득하고 지금의 천장화를 남겼습니다. 그는 빛의 창조에서 노아의 홍수에까지 이르는 <천지창조>의 주제를 택하였습니다(도8,9). 그는 기존의 건축구조를 바탕으로 하면서, 천장에 이와 연결된 건축구조를 그림으로 만들었습니다(도8,11). 즉 그리자이유의 단색 기법으로 대리석 조각이 새겨진 기둥을 이은 것이지요. 이렇게 하여 생긴 9개의 면적에 천지창조이야기를 그리고, 창문 위 삼각형 사이의 큰 공간엔 예언자와 무녀들을 그렸습니다. 이 장대한 프로그램을 일일이 설명할 수는 없지만 빛의 창조, 아담과 이브의 창조와 그들의 원죄, 노아의 타락에 이르기까지 하느님의 창조와 인간의 타락의 과정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양쪽의 예언자와 무녀들은 구원자가 오실 것임을 알려준 존재들입니다.

 

도8 미켈란젤로 <천지창조>
1508-12년, 프레스코
바티칸, 시스틴 예배실
 
 
도9 <시스틴 예배실>
 
 
 
 
 
 
 
도10 미켈란젤로 <아담과 이브의 유혹과 낙원 추방> 도8의 부분
 
 
 
 

이러한 대규모의 구상과 우리를 매료시키는 인체묘사들은 과연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신기에 가까운 묘사력을 보면 미켈란젤로는 르네상스가 낳은 천재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부분들을 보면 그가 이전의 그림들을 참고하였음도 분명합니다. <낙원추방>(도10) 부분을 보면 여러분들도 금방 마사치오의 <낙원추방>(8주 주제3 도17)이 떠오를 것입니다. 미켈란젤로에게 입력되었던 수많은 이미지들은 다시 새로운 이미지로 태어나는 것 같습니다. 또한 인체의 온갖 포즈를 시도하기 위하여 준비 드로잉이 수없이 그려졌을 것입니다(도11,12).

도11 <리비아의 무녀> 도8의 부분
 
 
 
 
도12 미켈란젤로 <리비아의 무녀>를 위한 드로잉
1511년, 종이에 목탄, 29×21㎝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교황 줄리오 2세는 미켈란젤로에게 자신의 무덤도 주문하였습니다. 이 또한 오랜 기간에 걸친 큰 프로젝트였고, 완성되지는 못하였습니다. 여기서는 이의 부분으로 제작한 일명 노예상 두 점을 보겠습니다. 16점의 노예상중에서 완성된 것은 현재 루브르에 소장되어있는 1점뿐이며(도13), 미완성 몇 점이 피렌체 아카데미에 소장되어 있습니다(도14). 가슴을 천으로 묶인 누드의 남자는 이를 벗기려하는 동작이지만, 그의 표정은 오히려 내적인 구속과 갈등임을 보여줍니다(도13). 미완성 작품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궁금증을 불러일으킵니다(도14). 우선 우리는 일반적으로 돌을 깨어낼 때 겉의 큰 부분을 털어내고 부분으로 들어간다고 생각하는데 미켈란젤로는 그렇게 하지 않고 가슴과 무릎부분은 거의 완성 단계까지 이끌고 나머지는 아직 돌덩어리로 남겨놓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그의 제작과정을 말해주는데 즉 미켈란젤로는 완성될 작품과 같은 크기의 석고 모형을 만들고 이를 큰 컴퍼스를 이용한 점 기법으로 옮김으로써 대리석으로 완성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도13 미켈란젤로 <노예상>
1513년경, 대리석, 높이 229㎝
파리, 루브르 박물관
 
도14 미켈란젤로 <노예상>
1519-36년경, 대리석, 높이 267㎝,
피렌체, 아카데미
 
 
 
그래도 궁금한 것은 왜 어느 부분은 돌덩어리 채로 남겨두고, 어느 부분은 마광까지 낸 완성단계에까지 이끌었을까 하는 점입니다. 우리는 이 미완성을 보면 생명력이 느껴지는 그의 누드 조각부분과 돌덩어리의 대비를 크게 느끼게 됩니다. 생명력 없는 돌이라는 재료에서 마치 영혼이 담긴 듯한 인간의 몸이 생성되는 느낌입니다. 미켈란젤로는 훌륭한 시인이기도 하였는데 그가 남긴 詩중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미술가라도, 대리석 덩어리가 스스로는 지니지 못한 어떤 개념을 갖게 할 수는 없다. 그것은 오로지 지성의 명령에 따르는 손에 의해서만 얻어질 수 있다." 즉 대리석이 어떤 개념을 지니는 것은 예술가의 손에 의해서만 가능하며, 손은 지성에 따를 뿐이라는 것입니다. 사물의 현상계와 본질인 이데아사이의 이러한 관계는 신 플라토니즘적인 사고입니다. 미켈란젤로는 그가 메디치家 주변의 인문학자들과 교류하면서 깊이 공감한 신 플라토니즘을 예술로서 구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1513년에 교황 줄리오 2세가 죽고, 로렌초 일 마니피코의 아들 죠반니가 교황에 올라 레오 10세(Leo X:등극 1513-1521)라 이름하였습니다. 그는 1515년에 그의 고향 피렌체에 개선장군처럼 입성하였으며, 이후 그의 조카 줄리오 추기경(후의 교황 클레멘테 7세)과 함께 메디치家의 재건을 서두르면서 미켈란젤로에게 메디치家의 가족묘를 주문하였습니다. 미켈란젤로는 건축과 조각, 회화가 어우러진 묘실을 구상하였으나 완성되지는 못했습니다.

 

도15 미켈란젤로 <메디치 예배실>, 1520-34년, 피렌체, 산 로렌조
 
 
 
 
 
우리 나라에서 미대입시를 위해 외우다시피하는 석고상 줄리앙은 쥴리아노의 불어 발음으로 바로 이 가족묘 중 일부입니다. 줄리아노(Giuliano di Medici, Duke of Nemours:1478-1516)는 레오 10세의 형제이며, 마주하고 있는 묘의 주인공 로렌조(Lorenzo di Medici, Duke of Urbino: 1492-1519)는 레오 10세의 조카였습니다(도16,17).

 

도16 미켈란젤로 <줄리아노 디 메디치의 무덤>
1526-33년, 피렌체, 산 로렌조
 
 
도17 미켈란젤로 <로렌조 디 메디치의 무덤>
1526-33년, 피렌체, 산 로렌조
 
 
도18 도16의 부분
 
 
 
도19 도18의 부분
 
 
 

그러나 미켈란젤로가 만든 묘의 주인공들은 미켈란젤로가 직접 보았거나, 초상화가 남아있던 인물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닮은 바가 없습니다. 줄리아노의 얼굴은 오히려 그가 젊은 때에 제작한 <다비드>(도4)의 얼굴과 같은 유형이어서, 구체적인 한 인물의 얼굴이기보다 이상적인 인간형의 모습임을 알 수 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이 두 조각상을 통하여 인간의 두 유형 즉 행동하는 유형(칼을 들고 있는 줄리아노)과 명상하는 유형(생각하는 자세의 로렌조)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명상하는 로렌조의 석관 위엔 아침과 저녁을, 행동하는 줄리아노의 석관 위엔 낮과 밤을 놓음으로써 시간의 운행과 영원함을 동시에 설정해 놓고 있습니다.

 

 
 
파르네제家의 교황 바오로 3세(PaoloⅢ: 즉위 1534-49)는 교황이 되자마자 메디치 예배실에 전념하고 있던 미켈란젤로를 로마로 불러들여 <최후의 심판>(도20)을 주문하였습니다. 언제나 그랬듯이 미켈란젤로는 주문내용을 훨씬 뛰어넘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도20 미켈란젤로 <최후의 심판>
1534-41년, 프레스코, 14.6×13.41m
바티칸, 시스틴 예배실
 

 

우선 무엇보다도 수많은 누드의 인물들이 힘없이 떨어지는 모습이 충격적입니다. 천당과 지옥이 좌·우로 나뉘던 중세의 도상은 연옥을 사이에 둔 상·하 구조로 바뀌었습니다. 연옥의 인물들마저도 구원의 상승보다는 추락의 가혹함이 강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르네상스 원근법의 화면 구성과는 반대로 화면 위의 인물들이 더 크고, 아래 인물들이 더 작기 때문입니다. 마치 중세의 인물비례처럼 예수와 주요 성인 몇몇은 거인 같고, 지옥의 인물들은 버러지 같은 미물로 그려졌습니다. 자비와 보호의 역할을 하던 마리아는 예수에게 몸을 움츠려 기대어 있고, 심판자는 단호하며, 공중에 떠있는 듯한 연옥의 인물은 공포에 떨고 있습니다(도21). 그리고 미켈란젤로의 자화상은 껍질만이라도 구원받으려는 듯 바르톨로메오 성인의 손에 매달려있습니다(도22).

 

도21 도20의 부분
 
도22 자기의 껍질을 들고 있는 <성 바르톨로메오>
도20의 부분, 껍질의 얼굴은 미켈란젤로의 자화상 이다.
 
 
말년의 미켈란젤로는 누구로부터 주문을 받지 않고, 자신을 위한 피에타상들을 제작하였습니다. 도23의 <피에타>는 그의 나이 70세쯤에 자기무덤에 놓기 위해 만든 것이다. 이 또한 미완성이지만 종래의 피에타 도상과는 전혀 다른 이 <피에타>의 구성은 그의 종교관을 짐작케 합니다. 양쪽의 두 마리아가 시체를 부축이고 있지만 시신은 그들에게 의존하지 않는 듯 미끄러져 내리는 듯합니다. 그리고 그의 뒤에 있는 거대한 니코데모는 마치 건물의 도움과 같이 그를 보호하며 얼굴엔 미켈란젤로 자신의 자화상을 새겨놓았습니다. 니코데모는 원래 예수를 비난한 율법학자들과 같은 유대인이었으나 모험을 무릎 쓰고 예수의 무덤을 제공한 사람입니다. 그의 존재를 이렇게 크게, 그리고 그의 얼굴엔 자신의 모습을 새긴 미켈란젤로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요. 학자들은 카톨릭세계에 있었던 미켈란젤로가 자신의 개혁적인 성향을 이렇게 나타낸 것이 아닐까 짐작하고 있습니다. 개혁성향의 사람들을 다시 탄압하던 1555년경 그가 이 상을 부수려 했던 행동은 이를 반증하는 증거일지도 모릅니다.

도23 미켈란젤로 <피에타>
1546-55년경, 대리석, 높이 233cm
피렌체, 두오모 박물관
 
 
 
일명 <론다니니 피에타>(도24)라고 부르는 또 다른 피에타는 미켈란젤로가 죽기 며칠 전까지 붙들고 있던 작품입니다. 시신은 길게 늘려있고 예수를 부축하여야 할 마리아는 오히려 시신에 얹혀있는 듯 불안정합니다. 죽음이 가까운 시기에 만든 이 <피에타>는 그가 청년기에 만든 바티칸 소장의<피에타>(도3)와 너무나 큰 대조를 보입니다. 아름다운 균형과 완전한 기법은 모두 사라지고 절절한 간구만이 남았습니다. 그러나 이 피에타는 무르익던 르네상스 시대가 가고, 종교개혁과 반 종교개혁의 소용돌이 속에서 생을 마감하던 미켈란젤로가 구원을 갈구하는 참 모습일 것입니다. 미술의 세계도 조화를 버리고 왜곡과 과장으로 새로운 방향을 찾는 매너리즘으로 향한지 벌써 반세기가 되는 시기입니다.

도24 미켈란젤로 <론다니니 피에타>
1552-64년, 대리석, 높이 195cm
밀라노, 스포르제스코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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