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

우리는 문화가 발달한 시대를 르네상스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부르기 시작한 것은 15세기부터 16세기 전반에 걸쳐 이탈리아에서 부흥한 예술을 높이 평가하면서 비롯된 것입니다. 르네상스(Renaissance)라는 용어는, ‘다시re’, ‘태어나다naissance’라는 뜻입니다. 중세에 죽었던 문화가 15세기에 다시 태어났다는 의미를 내포한 이 명칭에서 우리는 15세기 문화의 태도를 알 수 있습니다. 즉 그들의 원형은 그리스·로마의 고대에 있었던 것입니다. 고전을 번역하고 연구하는 학문을 인문주의(人文主義, Humanism)이라 하였으니 고전을 통하여 신(神) 중심의 중세사고에서 벗어나 인간 중심적인 사고를 지향하고자 함입니다. 이 시대는 또한 경험적이고 과학적인 사고의 결과로 지리상의 발견이나 지동설을 밝힌 시대이기도 합니다.

 
 

미술에서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등 아마도 미술사에서 가장 천재로 칭송되는 예술가들이 활동하여 인류역사에 귀한 업적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르네상스 시대의 미술은 순수 미술품이 아니라 주문을 받아 제작한 것이며 사회적인 기능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은 수도원 식당의 벽화였으며,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은 시민들의 애국심을 고취시키기 위하여 공화정 정부가 시청앞에 놓았던 주문한 상입니다. 그 시대에도 많은 돈을 들이는 사업에는 특정한 목적과 그만한 효과를 기대하였던 것입니다. 이 시대의 이탈리아가 특별히 좋은 예술품들을 많이 낳을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목적과 효과를 위하여 새로운 방식의 혁신적인 미술을 좋아하고 선택하였으며 미술가는 서로 경쟁적으로 이에 부응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움직임은 15세기 초 피렌체(지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몇몇 작품들의 주문과 제작을 살펴보면 교회나 상·공업자, 정부 등의 주문자와 미술의 관계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피렌체 세례당 문을 위한 부조 공모

피렌체(지도) 대성당의 세례당엔 현재 3개의 청동문이 있습니다. 1401년 교회에서는 그 중 한 문의 작가선정을 위해 공모를 했습니다. 청동문의 부조는 성경의 여러 주제로 구성되어 있는데 공모에서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주제를 내도록 하였습니다. 그 중 기베르티
(Ghiberti, 1416-1696) 와 브루넬레스키(Brunelleschi, 1377-1446)가 낸 두 작품을 봅시다(도1,2).

도1 브루넬레스키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아브라함>
1401년, 피렌체 세례당 문을 위한 공모작
 
 
도2 기베르티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아브라함>
1401년, 피렌체 세례당 문을 위한 공모작
 
 
여러분은 어느 작품을 선정하겠습니까. 안정감을 중요시하는 사람은 기베르티 것을, 현장감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브루넬레스키 것을 선호할 것입니다. 당선은 기베르티 것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선정의 기준엔 단순히 미감만 작용한 것이 아니라 기술적인 면도 작용하였습니다. 기베르티의 것은 하나의 부조에 이삭부분만 따로 붙인 것인데 브루넬레스키 것은 7개의 부분으로 주물하여 붙이게 되어 있습니다. 브루넬레스키 것은 한 부분이 잘못되면 그것만 주물을 따로 떠서 붙이면 되는 장점을 지니고 있지만 만약 그의 것을 선정하였다면 주물값이 더 들고, 시간도 더 들었을 것입니다. 심사위원들은 기베르티의 더 발달된 주물기법을 높이 산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 현대의 학자들은 또 다른 측면에서 두 작가를 평가합니다. 기베르티는 이삭의 묘사에 고전적인 방법을 구사했지만,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이려는 긴박한 장면의 표현으로는 브루넬레스키의 표현이 더 현장감 있다고 말입니다. 또한 공간 사용의 문제에서도 기베르티는 반원형과 사각의 모서리로 구성된 외곽의 틀에서 한 가운데의 면적만 이용했지만 브루넬레스키는 반원형이 이루는 공간을 모두 이용함으로써 확장된 공간을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실제로 두 작가의 이후 활동을 보면 근본적인 지향점이 매우 달랐음을 알 수 있습니다. 기베르티는 이 공모를 계기로 주문을 가장 많이 받는 조각가가 되었지만 조형상에서는 르네상스적이기 보다 후기 고딕의 장식성을 띄었습니다. 반면 브루넬레스키는 이후 조각보다는 건축에 주력하면서 피렌체 대성당의 둥근 지붕을 비롯한 르네상스 건축의 새로운 공간 개념을 실현시킨 것입니다. 15세기 당시의 기준과 현대에서 평가하는 르네상스는 서로 다르다는 점을 알 수 있는 예입니다.

 
 

길드의 수호성인상 주문

피렌체의 대성당과 시청을 잇는 시내 한 가운데엔 오르산미켈레(Orsanmichele)라는 성당이 있습니다. 건물 외벽에 있는 14개의 감실에는 기베르티의 <세례요한>(도3), 도나텔로(Donato di Niccolio di Betto Bardi 일명 Donatello, 1386-1466)의<성 죠르지오>(도6), 베로키오(Andrea di Francesco di Cine 일명 Verrocchio, 1435-1488)의 <도마의 의심>등 당대에 가장 뛰어난 조각가들이 제작한 성인상들이 있습니다. 그럼 이 성인들은 왜 선택되고, 제작에 필요한 비용은 누가 냈을까요. 이 성인들은 모두 카톨릭의 성인들이지만 복음사가라던지, 순교자라던지 하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지는 않습니다.

도3 기베르티 <세례요한>
오르산미켈레 성당 전면, 피렌체
 
 
도4 기베르티 <마태오>
오르산미켈레 성당 측면, 피렌체
 
 
 
 

당시 피렌체의 공식적인 정치와 경제는 일종의 동업자 조합인 모직상 길드, 면직공업자 길드, 갑옷제조업자 길드, 건축가와 조각가 길드 등 길드의 대표자들에 의해 운영되었습니다. 이 성인들은 바로 길드의 수호성인으로, 예를 들면 원래 세리였던 마태오는 은행가 길드의 수호성인이며, 낙타털을 입고 다녔던 세례요한은 모직상 길드의 수호성인이고, 용을 창으로 찔러 공주를 구한 죠르지오는 갑옷제조업자의 수호성인이었고, 이교의 상 제작을 거부하였던 기독교 초기의 순교자 4명은 건축가와 조각가의 수호성인이었습니다. 이들 성인은 종교적인 기능보다 피렌체 사회의 정치, 경제적 역할을 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길드는 거의 공공장소라 할 수 있는 중요한 자리에 자신들의 수호성인을 놓고, 이의 제작비를 부담함으로써 자신들의 조합의 위치를 확고히 한 것입니다.

도5 난니 디 방코, <네 성인>
돌과 나무를 다루는 건축가와
조각가 길드의 수호성인, 1411-13년경,
대리석, 피렌체, 오르산미켈레
도6 도나텔로, <성 죠르지오>
갑옷제조업자 길드의 수호성인
1415년경, 대리석
피렌체, 오르산미켈레
도7 도5의 아래 기단부
 
 
 
도8 도6의 아래 기단부
 
 
 
 
 
 

길드에서는 조각상에 조합의 특성을 넣는 것도 잊지 않았습니다. 면직 공업자들은 그들의 수호성인 마르코에게 면 쿠션을 밟고 있게 하였으며, 건축 조각가 길드는 그들의 작업 광경을 새겨 넣었습니다(도5,7). 각 길드에서는 당연히 다른 길드의 상보다 돋보이는 작품을 놓으려 하였고, 조각가들은 서로 경쟁적으로 새로운 방법의 조각을 제작하였습니다. 은행가 길드는 기베르티에게 <성 마태오>(도4)를 주문하면서 이 작품은 모직상 길드가 주문한 <세례요한>(도3)과 크기가 같거나 더 커야하며, 청동주물은 몸과 머리 두 부분으로 주조해야한다고 계약서에 명시하였습니다. 기베르티는 물론 계약사항을 이행하였고 또한 이 상보다 4-5년 전에 설치된 도나텔로의 <죠르지오>(도6)상이 지닌 양감과 고전적인 구조를 참고하여 그가 전에 만든 <세례요한>(도3)의 약점이었던 장식성을 극복하였습니다. 기베르티가 참고한 도나텔로의 <죠르지오>(도6)는 제작 당시부터 당대의 가장 훌륭한 작품이라고 평가받았습니다. 약간의 콘트라포스트 포즈를 구사한 당당한 자세와 늠름한 양감등은 르네상스인들이 추구하였던 고대 조각의 이상을 충분히 되살렸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조각상 밑의 부조에는 원근법을 적용함으로서 매우 낮은 부조임에도 불구하고 깊은 공간감을 주는 스키아챠토(schiacciato)식 부조기법을 창안하였습니다(도8). 이는 당시의 화가들이 큰 관심을 가지고 연구에 몰두하던 회화의 원근법을 부조에 적용시킨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었던 것입니다.

 
 

난니 디 방코의 <네 성인>(도5)의 얼굴 부분을 보면 여러분들도 금방 로마의 초상이 떠오를 것입니다(도9,10비교). 르네상스의 소설가와 철학자들이 고대의 문헌을 참고함으로써 현실을 묘사하였듯이 조각가들 또한 고대 조각을 모범으로 삼음으로써 15세기에 요구되고 있던 사실적 묘사의 방법을 키워나간 것입니다.

도9 도5의 왼쪽에서 두 번째 인물부분
 
 
 
도10 로마시대의 초상조각
 
 
 
 
 

가족 예배실의 벽화

이번엔 회화의 예를 보겠습니다. 르네상스 화가들에게 수많은 기회를 주었던 교회의 벽화들은 무슨 이유로 그토록 수요가 많았고, 주문자들은 무엇을 원했을까요. 르네상스 교회들은 규모가 크건 작건, 양쪽 벽면이나 제단 양쪽에 가족 예배실을 두고 있습니다. 피렌체의 아르노 강가에 가까이 있는 작은 교회 산타 트리니타의 사세티(Sassetti)家 예배실도 그 중 하나입니다(도11). 이를 사세티 예배실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예배실의 벽화 제작비용을 사세티家에서 대고 그 대신 이 공간에 가족의 석관들을 놓았기 때문입니다.

도11 도메니코 기를란디이오
사세티 예배실
피렌체, 산타 트리니타
 
 

 

도12 도메니코 기를란다이오 <목동들의 경배>와 <사세티 부부의 경배> 도11의 부분
1483-85년, 목동들의 경배는 패널에 템페라 기법, 사세티 부부는 프레스코
 
 
 
우선 하단부분을 보면 한 가운데 <목동들의 경배>가 제단화로 그려져 있고, 그 좌우엔 사세티 부부가 기도하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좌우의 벽엔 그들의 석관이 안치되어있습니다(도11,12).
 
 

중앙과 좌우 벽면의 중간과 윗단엔 우리가 주제1에서 살펴 본 성 프레체스코의 일생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 중 중앙 윗단의 그림을 자세히 보도록 합시다(도13).

 

도13 도메니코 기를란디오
<교황으로부터 수도원 인증을 받는 프란체스코>
1482-86년, 프레스코, 피렌체, 산타 트리니타
 
 
도14 도13의 왼쪽 부분
 
 
 
도15 도13의 오른쪽 부분
 
 
 
이 그림엔 성 프란체스코와 수도사들 이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 중 오른쪽 앞에서 두 번째 인물은 아래 하단에 그려졌던 이 예배실의 주인 프란체스코 사세티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이 벽화에 자신의 가족과 가문의 주변을 모두 등장시켰습니다. 왼쪽엔 이미 성장한 세 아들을 두고 아직 어린 넷째 아들은 자기 옆에 그리게 하였습니다(14,15). 자신의 오른쪽에 있는 검은머리의 옆면 인물은 로렌조 디 메디치(Lorenzo di Medici)이며 그 옆은 피렌체에서 명망 있던 안토니오 푸치(Antonio Pucci)로 사세티의 사돈입니다. 그리고 계단으로 올라오고 있는 어린아이들과 젊은이들은 로렌조의 아들들과 그들의 가정교사였던 인문주의자들입니다. 메디치 은행의 제노바 지점장이었던 사세티는 메디치家의 총수인 로렌조를 자신의 옆에 그리고, 그의 가족까지 함께 넣음으로써 그들 가문과의 결속을 과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프란체스코는 로마에서 교황으로부터 인증을 받았지만 이 그림의 배경은 로마가 아닌 피렌체이며, 그 중에서도 정치의 중심인 시뇨리아 광장입니다(도17). 이 그림은 당시의 사람들에게 어떤 인상을 주었을까요. 지금으로 비유한다면 대기업의 계열사 사장이 시청 앞에서 행해지고 있는 큰 행사에 자신과 기업의 총수 가족이 함께 참가하고 있는 모습 같다고 할까요. TV나 신문이 없던 시대에 교회라는 공공장소는 남에게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을 것입니다. 이 프레스코의 덕분에 우리까지 그의 가족과 위치를 알게 되었으니 그의 주문 목적은 달성된 셈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를 통해 당시의 종교와 정치, 경제 그리고 미술의 관계를 더 구체적으로 느끼게 되었습니다.

 
 

시청 앞 광장과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미켈란젤로(Michelangelo Buonarroti, 1475-1564)의 대표작으로 손꼽는 <다비드>(도16)상은 피렌체의 시청 앞에, 넓은 시뇨리아 광장을 바라보며 놓여있습니다(도17,18). 다비드는 구약성경에 나오는 가장 지혜로운 왕으로 어린 목동이었을 때 돌 팔매하나로 거인 골리앗을 처치하여 나라를 구한 영웅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구약성경의 인물이 왜 교회가 아닌 시청 앞에 놓여 있을까요.

도16 미켈란젤로 <다비드>
1501-1504년, 대리석, 높이410cm
피렌체, 아카데미아
 
 
도17 시뇨리아 광장과 베키오 궁 전면
 
 
 
도18 베키오궁 앞에 놓인 <다비드>
원래의 자리엔 복제품이 놓여있으며 원작은
피렌체 아카데미아에 소장되어있다.
 
 
 

이 상은 원래 피렌체 대성당에 놓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다른 어느 조각가도 감당하지 못하던 높이 410cm의 거대한 조각이 당시 스물 여섯 살의 미켈란젤로에게 맡겨지자 이의 완성에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는 것은 당연하였습니다. 1504년 작품이 완성되자 이 작품의 위치를 다시 정할 위원회가 소집되었고 이 자리에서 건축가이자 조각가인 안토니오 다 상갈로(Antonio da Sangalo)는 다음과 같이 발언했습니다.

 

"나는 코지모가 제안한 것처럼 사람들이 지나다니며 볼 수 있는 대성당의 코너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조각상은 공공적인 상이고 대리석은 기후에 약하기 때문에 … 가장 좋은 자리는 시뇨리아 회랑 중앙이라고 생각한다. 중앙 아치 밑에 놓으면 그 주변을 둘러 볼 수도 있고 … 마치 작은 채플처럼 뒤가 어두운 감실처럼 되어서 좋다. 만약 외부에 내놓으면 쉽게 상할 것이니, 지붕이 있는 곳이 더 좋다."

 

조각가인 상갈로는 공공 장소이면서도 미술품으로 더 어울리는 곳, 더 안전하게 보존할 수 있는 곳을 선택한 것입니다(도19).

 

도19 <다비드>를 시뇨리아 회랑에 놓았을 경우의 가상 화면
 
 
 
 
 

그러나 시장 대변인의 의견은 그와 달랐습니다.

 

"내 판단으로는 그 상에 적합한 장소는 두 곳이 있다. 첫 번째는 현재 <유디트>(도20-21)가 있는 곳이고 두 번째는 (도나텔로가 청동으로 만든)<다비드>가 있는 시청 의 중정 한 가운데이다. 첫 번째 장소를 택한 이유는 (도나텔로의)<유디트>가 매우 격렬하게 죽이는 장면이라는 점인데 이는 (붉은) 십자가와 백합으로 상징되는 우리(피렌체)와 어울리지 않는다. 여자가 남자를 살해하는 것이 적합지 않다. 더욱 나쁜 것은 (…)그 상이 그곳에 놓인 이후로는 피사에 패하는 등 나쁜 일만 일어났다는 점이다. 또한 중정에 놓여있는 (도나텔로의)<다비드>는 뒤쪽에 놓인 다리가 매우 어색하다. 따라서 (미켈란젤로의)<다비드>는 이 두 장소 중 한 곳에 놓여야 하는데 나는 <유디트>자리를 선호한다."

 

당시 시청의 문 앞에는 도나텔로의 <유디트>상이 있었는데(도20,21) 이와 교체하자는 의견입니다.

 

도20 <유디트>의 원 위치를 재현한 모습
 
 
 
도21 도나텔로 <유디트>
1453-64년, 청동
피렌체, 베키오궁
 
 
 
 

결국 <다비드>상은 시청 앞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당시 피렌체는 어려움에 놓여 있었습니다. 1494년엔 프랑스에게 공격당하고, 이탈리아 안에서도 로마와 밀라노, 베네치아 사이에서 외교적인 줄타기를 해야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피렌체는 나라를 구한 애국적인 영웅이 필요했으며 힘과 지혜를 겸비한 다비드는 방어와 자유를 상징하는 영웅으로 민심을 통일하기에 적합했던 것입니다.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미켈란젤로의 <다비드>라는 미술품은 광장에서 이렇게 정치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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