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4세기의 이탈리아 중·북부(지도) 미술과 사회

프랑스에서 파리와 근교를 중심으로 고딕미술이 발달하는 동안 이탈리아에서는 중·북부 지방(지도)이 새로운 미술의 근원지가 되었습니다. 현대의 이탈리아는 반도 전체가 하나의 국가이지만 당시엔 우리 나라의 도(道)크기 정도의 여러 국가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특히 중·북부지역은 남쪽의 교황국가와 북쪽의 신성로마제국(현재의 독일지역)의 다툼 속에서 자치권을 키워나갔습니다. 상·공업중심의 도시국가로 발달하면서 도시엔 시청과 광장이 형성되었습니다. 시청과 광장이 생긴다는 것은 단순히 건물이 지어졌다는 사실을 넘어 다수에 의한 정치와 시민의 모임이 활발해졌음을 의미합니다. “도시는 공기마저도 자유롭다”는 기록은 당시의 활발한 도시 분위기를 잘 말해줍니다.

 
 

종교는 여전히 사람들의 삶에 가장 큰 중심이었지만, 그러나 종교의 태도는 많이 달라졌습니다. 교리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보다는 예수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예수의 영원하고 절대적인 신성보다는 이 땅에서 고통을 겪은 인간으로서의 예수를 강조하면서 고통에 동참하고자 하였습니다. 1000여 년 동안 지속되어 온 교회의 방향을 바꾸어 놓은 사람은 바로 아씨지의 프란체스코 (S. Francesco d'Assisi)였습니다. 이탈리아 역사에서는 르네상스를 태동시킨 이 시대의 인물로 세 사람을 꼽습니다. 「신곡(神曲)」을 저술한 단테(Dante)와 성프란체스코(Francesco, S. Francesco) 그리고 화가 지오토(Giotto, 1267-1337)입니다. 세 사람은 문학, 종교, 미술에서 위대한 업적을 남긴 분들인데 이들에게서 우리는 공통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즉 현실을 그렸다는 점입니다. 단테는 「신곡」이라는 제목을 붙였지만 이 소설의 지옥과 연옥에 나오는 인물과 사건은 당시 사회의 것이었습니다. 프란체스코는 이 세상에서 산 예수를 되찾아주었죠. 그리고 화가 지오토는 당시 이탈리아에서 행해지고 있던 상징적인 비잔틴 방식의 그림을 현실의 모습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이탈리아의 14세기 미술을 우리는 프로토 르네상스(Proto-Renaissance)라고 부릅니다. 원시적인 르네상스라는 뜻이죠. 역사에서 중세 말이라고 부르는 이 시대가 이탈리아에서는 르네상스의 문을 연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상

이제 미술로 들어가야겠습니다. 그럼13-14세기의 그림은 어떻게 그리고 왜 변하였을까요. 여기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를 그린 네 점의 패널화를 비교하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십자가모양의 나무패널에 템페라기법으로 그린 것으로 교회에 걸려있던 것입니다. 그 앞에서 기도를 하던 성물이죠. 13세기 초에 베를링기에리(Berlinghieri)가 그린 첫 번째 그림은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이지만 마치 팔을 벌리고 서 있는 것 같습니다(도1). 눈도 뜨고 있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으로써 부활하여 영원하게 된 승리의 예수인 것입니다. 이보다 10년쯤 뒤에 쥰타피사노(Giunta Pisano)가 그린 예수님은 이와는 달리 십자가에 매달려 고통스러운 모습입니다(도2,3). 성프란체스코는 자신도 예수의 고통에 동참하고자 하였는데, 바로 이러한 종교운동은 그들의 기도 대상이었던 예수님의 모습까지 바꾼 것입니다(도3,4). 그리고 이보다 40-50년 후에 치마부에(Cenni de Pepo, 일명 Cimabue, 1272-1302)가 그린 예수는 고통스런 표정과 함께 인체의 볼륨감까지 살린 인간의 형상입니다(도5). 우리가 비잔틴 회화에서 본 금색도 사라졌죠. 예수의 몸도 십자가에 매달려 휘어진 모습입니다. 이제 1290년대에 지오토가 그린 예수상은 더욱 사실적입니다(도6). 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히면 이렇게 고개는 앞으로 숙여지고, 엉덩이는 뒤로, 그리고 무릎은 앞으로 튀어나올 것입니다. 어깨도 이렇게 아래로 쳐지고요. 13세기의 100여년 사이에 기독교의 예수는 영원한 절대자에서 인간의 모습으로, 회화는 상징에서 사실로 변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단순한 종교의 변화, 미술의 변화가 아니고 더 크게 보아서는 사회의 요구였던 것입니다.

도1 베를링기에리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1220-30년경, 나무 패널에 템페라
루카, 빌라 쥬니지 국립박물관
 
도2 쥰타 피사노,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1230-50년경, 나무 패널에 템페라
볼로냐, 산 도메니코
 
도3 도2의 부분
 
 
 
도4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부분
 
 
 
도5 치마부에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1280년경, 피렌체, 산타 크로체
 
 
도6 지오토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1290년경, 피렌체, 산타 마리아 노벨라
 
 
 
 

마리아 신앙과 제단화

마리아의 모습도 많이 변하였습니다. 13세기 초에 제작된 일명 <눈이 큰 성모>(도7)에서 마리아는 정면으로 앉아 아기를 안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아기이지만 크기만 작을 뿐 어른 형상이죠. 바로 심판하러 오실 예수입니다. 테오토쿠스(Theotokus)라는 이 유형은 어머니로서의 마리아가 아니고 예수의 육화(肉化)를 증명하기 위한 도구로서의 마리아였습니다.

도7 마에스트로 디 트레사 <눈이 큰 성모>
13세기 초, 높이47×67cm
시에나, 오페라 박물관
 
도8 지오토 <옥좌의 성모자>
1300-03년, 높이325×204cm
피렌체, 우피치
 

그러나 14세기 초에 제단화로 제작된 지오토의 <옥좌의 성모자>(도8)는 엄마와 아기의 관계이며, 예수의 비례도 이전의 어른 비례에서 벗어나 4등신에 가까운 아기의 비례로 그려졌습니다. 13-14세기 동안 확산된 마리아 숭배 신앙은 어머니의 미덕을 중요시하여서 바닥에 앉아 젖을 먹이는 <겸손한 마리아>(도9)로 또는 최후의 심판에서 우리를 보호해 주는 <자비로운 마리아>(도10)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도9 죠반니 다 볼로냐 <겸손한 마리아>
14세기 후반, 템페라
베네치아, 갈레리아 델 아카데미아
 
도10 니콜로 디 세냐 <자비로운 마리아>
1331-45년, 템페라
시에나, 피나코테카
 
 

지오토의 회화

이러한 사회의 변화는 중세의 종교개혁자라 일컫는 프란체스코로부터 변화의 계기를 맞이하였는데 그가 죽은 후 아시지는 그의 무덤 위에 교회를 크게 짓고 지오토에게 프란체스코의 일생을 벽화로 주문하였습니다. 교회는 밀려드는 순례자들을 수용하기 위해 내부의 기둥 없이 단일 한 공간으로 지어졌고, 양쪽 벽 창문 아래엔 프란체스코의 일생이 그려졌습니다(도11).

도11 <바실리카 디 산프란체스코>
윗 성당 내부
아시지, 성 프란체스코
 
도12 지오토 <세상의 물건을 거부하는 프란체스코>
1297-99년, 프레스코, 장면의 크기 270×230cm
아시지, 성 프란체스코
 
25장면의 일화 중 하나인 도12의 그림은 프란체스코가 하느님이 주시는 것을 받기 위해, 현세의 아버지로부터 받은 옷을 아버지에게 돌려주는 장면입니다. 그림의 상하좌우를 보면 위엔 석가래 모양이 아래엔 커튼이, 그리고 좌우엔 기둥이 그려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즉 이 장면은 건물의 창 밖 풍경처럼 그려진 것입니다. 우리가 로마 회화에서 본 창으로서의 회화 개념인 것이죠. 배경의 건물 또한 원근법을 적용시킨 공간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또 다른 두 장면을 봅시다. 도14의 장면은 새들마저도 프란체스코의 설교를 경청하였다는 이야기입니다. 같은 주제를 그린 1235년경의 그림(도13)과 비교해 보면 지오토는 나무와 사람, 그리고 새의 비례를 사물의 크기대로 잡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중요한 것을 크게 그리던 중세의 방법에서 사물외관의 비례를 중요시하는 객관적인 방식으로 변화시킨 것입니다.

도13 보나벤투라 베를링기에리 <새에게 설교하는 프란체스코>
1235년, 나무패널에 템페라, <프란체스코 제단화>의 부분
페샤, 성 프란체스코 교회
 
도14 지오토 <새에게 설교하는 프란체스코>
1297-99년, 프레스코
아씨지, 성 프란체스코 교회
 
 
 

지오토는 또한 성경의 주제를 매우 인간적인 감정으로 해석하였습니다. 파도바의 스크로베니 예배당에 그려진 예수의 일생 중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슬퍼하는 장면을 봅시다(도15).

도15 지오토<그리스도의 죽음을 슬퍼함>
1304-06년, 프레스코, 높이200×185cm
스크로베니 예배당, 파도바
 
 
예수의 시신을 껴안고 고통스러워하는 어머니 마리아, 양팔을 벌린 채 놀라워하는 여인과 두 손을 뺨에 대고 슬퍼하는 여인, 예수의 발을 만지면서 못 박힌 자국을 보며 애통해 하는 여인, 그리고 두 팔을 뒤로 젖힌 채 탄식하는 제자 등에서 우리는 인간의 감정을 풍부히 느낄 수 있습니다.
 
 

시에나의 마리아 신앙과 사회

앞에서 마리아 신앙에 대해 잠시 언급하였습니다만 마리아 신앙이 가장 크게 발달한 곳은 이탈리아 중부 도시 시에나였습니다. 당시의 종교는 단순히 종교적 기능만 지닌 것이 아니고 정치적인 기능도 지녔습니다. 마리아는 시에나의 수호성인이었습니다. 시에나는 전쟁에도 마리아상을 가지고 갔으며, 승전의 기쁨도 마리아와 함께 하였습니다. 화가 두치오(Duccio, 1255-1319)에게 의뢰한 <존엄한 마리아>(도16) 를 대성당으로 옮기던 날 시에나 도시는 상점도 문을 닫고 축제를 벌였습니다. 말하자면 국가행사인 셈이지요. 마리아 제단화는 시에나에서 점점 크게 제작되어서 두치오의 <존엄한 마리아>는 높이214cm에 폭이 412cm에 달했습니다.

도16 두치오 <존엄한 마리아>, 1308-11년
나무패널에 템페라, 높이214×412cm
시에나, 두오모 박물관
 
 

시에나의 경우 마리아는 교회만이 아니라 시청에도 그려졌습니다. 시모네 마르티니(Simone Martini, 1280/85-1344)의 <존엄한 마리아>(도17)는 높이가 713cm에 폭이 970cm에 달하는 거대한 벽화로 시청에서 도시의 수호자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도17 시모네 마르티니 <존엄한 마리아>
1315년, 프레스코, 높이763×970cm
시에나, 팔라쪼 푸블리코
 
 
 
 

시에나의 시청과 벽화

시에나의 시청(Palazzo Pubblico)과 그 앞에 펼쳐진 광장은 중세 말에 형성된 공공 건축의 대표적인 예이다. 교회가 생활의 중심이던 중세의 도시는 주로 대성당 주변에 주요기관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시에나의 9인정부는 시청을 지어 행정, 사법, 경찰서 등의 공공업무실을 모으고 그 앞에 넓은 광장을 마련함으로써 시민사회를 형성한 것입니다.

 

도18 시에나의 시청건물 정면
1297년경 시작
 
 
도19 시에나의 캄포광장
 
 
 
 
 

당시 9인 정부의 회의실이었던 방은 3면이 벽화로 가득합니다. 여기 그려진 <좋은 정부와 나쁜 정부의 알레고리와 효과>(도20)는 중세 회화 중에서 드물게 보는 비(非)종교 회화입니다. 벽화는 <좋은 정부의 알레고리>(도21), <좋은 정부의 도시에서의 효과>(도22), <좋은 정부의 시골에서의 효과>, 그리고 <나쁜 정부의 알레고리>(도23), <도시에서의 효과>, <시골에서의 효과> 등 6부분으로 구성되었습니다.

 

도20 암브로지오 로렌제티 <좋은 정부와 나쁜 정부의 알레고리와 효과>
1338-40년, 프레스코, 시에나, 시청
 
 
 
도21 암브로지오 로렌제티 <좋은 정부의 알레고리>
1338-40년, 프레스코, 시에나, 시청
 
 
 
도22 암브로지오 로렌제티 <좋은 정부의 도시에서의 효과>
1338-40년, 프레스코, 시에나, 시청
 
 
 
 
 

도23 암브로지오 로렌제티 <나쁜 정부의 알레고리>
 
 
 
 
탐욕과 불공정과 허영에 둘러싸인 나쁜 정부의 독재자는 거칠음과 사기, 공포와 전쟁을 상징하는 대신들이 보좌하며, 나쁜 정부가 들어서면 도시에는 군인들이 갑옷을 입고 활보하고, 시민을 잡아가고, 길바닥에는 시체가 널브러져 있으며, 농촌은 황폐해 집니다. 반면 좋은 정부의 왕은 믿음과 자비와 희망이 도와주고 있으며 평화와 현명함, 인내와 정의의 대신들이 보좌하고 있습니다. 도시에는 결혼식에 가는 즐거운 춤 행렬과 구두 가게, 포도주 가게가 즐비하며 학교에서는 교사가 학생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좋은 정부의 건물들은 시에나의 실제건물을 닮게 함으로써 좋은 정부는 바로 9인 정부의 시에나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현실의 사회를 반영하는 듯한 이 그림의 실제 목적은 9인 정부가 평화를 가져왔다는 정치선전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벽화는 당시 삶의 구체적인 모습을 전해주는 생생한 이미지들입니다.
 

* 도판을 누르시면 큰 크기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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