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라는 용어
서양의 4세기부터 14세기까지를 일컫는 '中世'(middle age)라는 용어는 말 그대로 중간시대라는 뜻입니다. 르네상스 시대의 사람들이 자신의 시대를 현대(modern era)라 부르고 그들이 모범으로 삼았던 그리스 로마 시대를 고대라고 부르며 그 사이의 시대를 중간시대라 일컬은 데서 유래하는 용어입니다. 물론 역사의 한 구간을 중간에 끼어있는 시대라고 인식한 것은 르네상스인들의 편견이며 자기 시대를 중심으로 한 역사인식의 결과입니다.
천년 이상의 기간에 걸쳐있는 중세를 흔히 암흑기라고 부르곤 했지만 이 또한 인간 중심적인 사고를 중시한 르네상스인들이 神중심적인 중세를 비하한 표현이었습니다. 그러나 실제의 중세는 지중해 중심의 라틴민족과 유럽북방의 게르만민족이 융합하여 근대의 유럽국가의 원형을 형성하고 그 문화를 낳은 참으로 역동적인 역사의 연속이었습니다.

중세의 기간
중세의 시작 연대는 학자들마다 조금씩 달리 잡고 있습니다. 3세기경에 중세의 징후가 이미 나타나기 때문에 3세기를 시작으로 삼는 이도 있고, 서 로마가 멸망한 476년을 기준으로 삼는 학자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세의 공통된 특징이 기독교이므로 기독교가 공인된 313년을 중세의 시작으로 삼는 학설이 일반적입니다. 중세의 끝 경계는 분명히 자를 수 없지만 이탈리아의 경우 르네상스의 시작을 15세기로 삼으므로 그 이전 즉 14세기까지로 볼 수 있습니다.

 

 
 

중세 미술과 오늘의 미술: 사회적인 역할의 차이
중세 미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오늘의 미술을 바라보던 시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예술 자체에 대한 자각이나, 문명의 진단이나 예견을 요구하는 현대미술과는 달리 중세의 미술은 종교적인 또는 정치적인 필요와 주문에 따라 공방에서 만들어진 제조품입니다. 중세 미술품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공예나 조각들은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 장이의 생산품이었으며 이러한 익명성은 중세미술을 폄하하는 또 다른 요인이 되었습니다.

생활 속의 미술: 부수미술(minor art)라는 용어에 대한 비판
19세기 이후 순수미술 운동이 벌어지면서 미술은 예술자체를 목적으로 한 소위 순수 미술(fine art)과 쓸모를 위해 만들어진 응용 미술(applied art)분야로 크게 나뉘었으며 현대 미술에서 이 분류는 회화, 조각 위주의 소위 주요 미술(major art)과 공예나 상업 디자인의 부수 미술(minor art)이라는 개념과 비슷한 의미로 통용되고 있습니다. 만약 이러한 시각에서 바라보면 중세 미술은 모두 응용 미술이며 대부분이 부수 미술이니 현대적인 의미에서의 예술은 없는 셈입니다. 그러나 미술의 범위를 넓혀 인간이 사회 생활하는 과정에서 만들어 낸 모든 조형물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중세 미술은 무궁무진한 흥미를 불러일으킵니다. 중세의 미술품은 예술가 혼자의 몸짓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종교와 사회의 주문에 의한 것이어서 당시 사회의 특별한 관심들을 정확히 나타내주기 때문입니다.

 

 
 

중세의 미술이 고대의 것과 다른 가장 큰 특징은 객관적인 사실묘사를 무시하고 추상적이고 상징적인 힘을 높였다는 점입니다. 19세기까지만 해도 이러한 비사실적인 성격을 부정적으로 판단하였으나 20세기 초의 미술사 연구에서는 큰 전환을 이루어 추상적이고 상징적인 전달력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실적 묘사의 거부는 로마말기부터 시작된 현상입니다. 우리는 지난주에 로마황제 초상들을 살펴보면서 4세기 전반에 제작된 콘스탄티누스황제상이 (5주, 주제2, 도26) 비현실적이고 초월적인 황제 상임을 이미 보았습니다.
같은 황제의 <콘스탄티누스 개선문>(도1)에 새겨진 <황제의 훈시>(도2,3)는 같은 개선문에 새겨진 이전 황제시대의 부조(도4)양식과 현격히 다릅니다. 양감은 없어지고 평면에 깊이 새기는 방식의 낮은 부조로 변하였으며, 주변의 인물보다 훨씬 크게 묘사된 황제는 중앙에 정면으로 배치되었습니다. 황제이지만 주변인물과 비슷한 방식으로 묘사한 아드리아누스 황제의 부조(도4)와 비교하면, 4세기의 콘스탄티누스 황제 시대엔 대상을 보이는 대로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부각시키고자 하는 중요성에 따라 크기와 위치를 정하였던 것입니다.

 

도1 <콘스탄티누스 개선문>, 312-315년, 로마
 
 
 
 
도2 <황제의 훈시> 부조
 
 
 
 
도3 <황제의 훈시> 도2의 중앙부분 콘스탄티누스 개선문 부조
315년경, 로마
 
 
도4 <아드리아누스 황제의 사냥 축하 의식 중
다이아나신에게의 헌주>
130년경, 대리석,,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아드리아누스 황제
로마 콘스탄티누스 개선문
 
 

4세기에 콘스탄티노플의 마차 경기장에 세워진 <데오도시우스의 오벨리스 기단부> 부조 (도5,6)를 보면 위의 변화가 더욱 심화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황제와 대신은 소위 로얄 박스로 차별화하고, 황제는 한 가운데 제일 크게 위치해 있습니다. 사실적인 요소는 전혀 없어서 모든 사람은 일률적이고, 따라서 개별화 시킬 수 없으며 시선을 집중시키는 것은 오로지 크기가 큰 황제뿐입니다.

 

도5 <데오도시우스 황제의 오벨리스 기단부>
39년, 대리석, 콘스탄티노플의 마차 경기장
왼쪽엔 황제와 가족이 로얄 박스에, 오른쪽엔 황제와 대신들이
로얄 박스에 새겨져 있다.
도6 도5의 부분, 마차 경기를 관람하는 장면이며
윗단엔 황제와 대신들, 아랫단엔 관중석이 새겨졌다.
 
 
 
 

로마 말기에 사실성을 거부하는 것은 바로 특별한 존재를 우상화하기 위하여 택한 방법이라고 생각됩니다. <데오도시우스 황제의 미소리움>(도7)에서는 황제에게 두광까지 씌워서 신성시하고 있습니다. 이제 황제는 보통 사람과는 완전히 다른, 절대적이고 영원한 존재이며, 미술은 그렇게 믿도록 설득하는 매개체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역할은 기독교 주제가 주를 이루는 중세 미술에 더욱 효과적으로 적용되었습니다. 이제 미술의 양식은 더욱 추상화되고 상징적인 힘은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도7 <데오도시우스 황제의 미소리움>
또는 <데오도시우루스 황제 취임 20주년 기념 쟁반>
388년, 은, 지름 74cm 무게 15kg
마드리드, 왕립 역사 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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