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미티브 아트(primitive art)

신석기 혁명이후 나일, 유프라테스, 그리고 갠지즈와 황하와 같은 비옥한 충적층을 기반으로 원시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는 거대한 규모의 국가 공동체사회가 등장하면서 인류 미술의 역사는 새로운 장을 맞게 됩니다. 기원전 수 천년 전에 등장하는 이러한 고대국가는 신권에 가까운 권력자와 성문화된 율법을 바탕으로 보다 조직된 사회체제입니다. 미술의 규모와 기능도 이러한 사회의 변화에 걸맞게 보다 기념비적인 규모로 추진되며 그 기법은 더욱 세련되고 정교해집니다 그리고 이러한 전개의 과정은 서양미술사의 큰 줄기를 이루는 흐름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 포스트 모던을 주장하는 21세기 현재의 지구촌 사회에도 문명을 받아들이기 이전의 원시부족사회의 미술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나름대로의 신앙과 전설을 바탕으로 한 종교적인 제의품이나 여러 공예적인 생활용품들, 장신구들을 대대로 전수되어온 솜씨로 만들어 냅니다. 그들이 생산한 민속미술, 혹은 장식품들은 관광객을 위한 상품으로 개발되기도 하고 도시의 미술관에 수집되어 전시되기도 합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최근에 문신이 유행하는 것처럼 원시미술은 이국적인 패션의 하나로 현재에도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도1 관광기념품으로 팔리는 아프리카 마스크
 
 
 
 
도2 몸에 문신을 한 남자
 
 
 
 
도3 마르케사스 섬
문신을 하고 곤봉을 든 전사
19세기, 에칭
 
 
 
 
일반적으로 역사이전의 선사시대 미술이나 부족의 미술을 일컬어 '원시미술', '프리미티브 아트'라고 부릅니다. 지역적으로는 크게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중앙 아메리카의 프리 콜롬비아 미술을 통칭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공예적인 생산품에 대해서 어떻게 미학적 가치를 매기고 미술의 역사에서 어떤 위상을 부여할 수 있을까요. 부족미술의 경우 그 양식이 수천년에 걸쳐서 크게 변화하지 않고 있을 뿐 아니라 동서양의 타 미술과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진 것도 아닙니다. 근래에 들어 이러한 지역의 미술에 대한 연구와 유적의 발굴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원시미술을 미술사에서 어떻게 위치 지울지 하는 것에 대해서는 많은 생각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현대미술과 프리미티비즘 : 모더니즘 속의 프리미티비즘

19세기 프랑스의 개성적인 후기 인상주의 화가 폴 고갱은 남태평양의 섬으로 떠나며 자신이 현대의 야만인임을 자랑스럽게 자처하였습니다. 그의 회화 <그리스도의 탄생>(도4)은 어두운 마스크를 쓴 인물, 장식적인 패턴의 문양이 새겨진 기둥 등 남태평양 부족미술의 신비한 색채와 도상으로 가득합니다. 서구의 전통적인 기독교 주제가 원시미술의 조형방식으로 표현되어 있다고 하겠지요. 도6과 같이 그가 즐겨 제작하였던 거친 목판화에서도 마찬가지로 원시미술의 영향이 두드러집니다.

 

도4 폴 고갱 <그리스도의 탄생, 신의 아들 테 타마리 노 아투아>
1896년, 캔바스에 유채, 뭔헨 시립미술관
 
 
도5 파푸아 뉴기니 민속의상
1953-54년 사진
 
 
도6 폴 고갱 <십자가의 그리스도>
나무조각
 
 
도7 마르케사스 부족의 지팡이 장식
 
 
 
 
 
20세기 큐비즘으로 이행하는데 선구적인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는 피카소의 <아비뇽의 여인들>(도8)은 그가 당시 민속박물관에서 보았던 아프리카의 조각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습니다(도9). 오랫동안 이 그림을 공개하지 않았던 피카소는 수 차례에 거쳐 화면의 구성과 여인들의 포즈를 변경하였는데 오른쪽 두 여자의 얼굴이 처음과 달라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도10의 사진을 보면 젊은 시절 피카소의 작업실에 다양한 아프리카 조각과 가면들이 수집되어 있었던 것이 보이지요? 이러한 예는 20세기 미술사에서 너무 쉽게 발견됩니다. 마티스나 드렝과 같은 야수파의 회화, 브랑쿠지와 자코메티의 조각에 이르기까지 현대미술의 선구자들은 원시미술의 단순함과 과감한 생략, 왜곡을 높이 찬양하고 그것으로부터 많은 영감을 받았습니다.

도8 파블로 피카소 <아비뇽의 여인들> ,
1907년캔바스에 유채, 244×234 cm
뉴욕 근대미술관
 
 
도9 아비뇽의 아가씨와 아프리카 조각의 비교
 
 
 
 
 
도10 바토 라브와르 작업실에 있는 피카소
파리 1908
 
 
 
 
 
이러한 현대미술과 부족미술, 혹은 원시미술간의 유사성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은 1984년 뉴욕의 근대미술관 (Museum of Modern Art)에서 열린 대규모 전시 《20세기 미술 속의 원시주의: 부족적인 것과 현대적인 것의 유사성 Primitivism in 20th Century Art: Affinity of the Tribal and the Modern》에서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도11은 이 전시회의 성과물로 나온 도록의 표지입니다. 피카소의 여인의 두상과 아프리카 조각의 형태상의 유사성을 두드러지게 강조한 편집이 눈에 띄는군요. 이 도록에는 피카소 뿐 아니라 원시미술과 유사한 현대작가들의 예를 수없이 제시하고 있습니다. 여기 언급된 파울 클레의 회화와 뉴기니아 전사들의 나무 방패의 채색문양은 그 선의 패턴과 색채에 있어서 정말 흡사하지 않습니까?(도12, 도13)

 

도11 <20세기 미술 속의 프리미티비즘 >
뉴욕 근대미술관 1984년 전시 도록
 
 
 
도12 파울 클레 <의도> 1938
캔바스에 채색과 신문 접착, 75×112 cm
베른 미술관
 
 
도13 뉴기니아, 전사들의 방패, 목재에 채색
 
 
 
 

이 전시회를 기획하였던 미술관의 의도는 현대미술과의 형태적인 유사성을 통해 부족미술의 독특한 미학적인 특질을 드러내고 그 가치를 높이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형태적인 측면만을 강조함으로써 원시미술의 제의적인 측면이나 서사적인 내용, 그리고 장소성 등은 배제될 수밖에 없었겠지요. 형식을 중시했던 현대미술의 이념에 부족미술의 본모습이 가려졌던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20세기 초 원시주의는 서구미술에서 바라본 입장이 주가 되었던 것입니다.

 

 

19세기 유럽의 원시미술 수집 붐 : 트로카데로 인류학박물관

원시미술에 대한 수집 붐은 19세기 프랑스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식민지에 대한 영토적, 학문적인 확장의 결과로 인류학, 인종학의 발달과 고고학적인 발굴이 진행되었으며, 이때 수집된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등지의 부족미술품은 박물관에 수집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만국박람회와 같은 전시를 통해 유럽인들에게 소개되었습니다. 아래 도14의 삽화는 1978년 만국박람회를 기념하기 위해 제작된 것인데 왼쪽에 트로카데로 박물관이 눈에 띄는군요. 오른쪽(도15)은 그 내부의 모습입니다. 현재 파리의 에펠탑을 마주보고 있는 트로카데로 인류학 박물관은 1887년 파리 만국박람회를 위해서 건립된 볼거리의 하나였습니다.

 

도14 왼쪽에 트로카데로 민속박물관과 오른쪽의 샹 드 마르
1887년 파리 만국박람회 일러스트레이션
 
 
 
도15 파리, 트로카데로 박물관
오세아니아 갤러리, 1930년
 
 
 
 

 

 
 
원래 프리미티브 미술이란 유럽이외 지역의 미술이라는 말과 함께 단순하면서도 순수한 느낌을 주는 전성기 르네상스 이전의 15세기 이탈리아 미술을 일컫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원시미술이라는 뜻은 공간적인 의미와 함께 시간적인 의미도 함께 갖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주로 과거, 그러니까 미술이 진보하기 이전의 원형의 시기를 의미합니다. 영국의 19세기 중반 라파엘전파 미술가들은 회화에 있어서 순수함의 원형을 바로 15세기에서 찾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19세기 후반부터는 지리적인 의미가 더욱 강해집니다. 처음에는 파리에서 멀리 떨어진 브류타뉴나 퐁타벵과 같은 도시 밖의 미술을 지칭하는 데서 더 나아가 점차 유럽이외의 오지의 미술을 일컫게 되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현대미술에서의 원시주의는 서구인들이 자신과는 다른 문명, 소외된 타자의 미술을 정의하는 식민주의적인 측면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19세기 일어난 원시적인 것에 대한 동경과 충동은 물론 근대화에 따른 자연에 대한 희구와 문명 밖으로의 도피심리의 결과이기도 하였습니다..

 

일반적으로 부족미술이라 할 수 있는 원시미술로는 크게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콜럼부스의 아메리카 대륙발견 이전의 중남미 미술과 북미의 인디안 미술 등이 있습니다.

 

 

아프리카미술

현재 52개의 국가로 형성된 아프리카는 사실은 그 지형적 다양성 못지 않게 수 백 여 개의 다른 인종, 언어 문화적인 집단들로 이루어진 부족사회의 모습을 지금도 가지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부족미술이 그렇듯이 아프리카 미술에는 고급미술과 응용, 혹은 공예와의 구분이 존재하지 않을 뿐 아니라, 최근에 이르기까지도 시각미술을 지칭하는 'art' 즉 '미술'이라는 개념을 대부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아프리카 미술은 사후세계에 대한 염원과 통치자에게 신성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고대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 미술에서 기원한 문화적인 양식을 공유하고 있다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초기 아프리카 조각(도16, 17)은 영원한 느낌을 주는 양식화된 표정을 하고 있습니다. 도16의 수염을 기른 남자의 두상은 메소포타미아에서 발굴된 조상(2주 두 번째 주제 참조)과 그 인상이 흡사합니다.

 

도16 <턱수염이 있는 남자>
기원전 500년경, 테라코타
20×14.5×8.5 cm, 튜니지아, 바르도 박물관
 
 
도17 <여인상> 나이지리아, 노크문명
대략 기원전 500년-기원 400년, 테라코타
볼티모어 박물관
 
 

 

 
 
그러나 11-12세기, 나이지리아 서쪽지역인 이페(Ife)에서는 사실적인 표정과 모델링이 돋보이는 자연주의적인 양식이 등장하기도 하였습니다(도18, 19). 이페에서 출토의 통치자상(도18)은 얼굴이 신체보다 커 비례상의 어색함은 남아 있으나 인물의 표정이 자연스럽게 묘사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비례상 머리가 커진 것은 솜씨의 미숙함 때문이 아니라 머리를 지혜가 머무르는 곳으로 중시하는 토속신앙에 따라 통치자의 이상화시키는 한 방편이었다고 합니다. 특히 강렬한 눈빛까지도 포착한 도19의 청년의 두상은 그 다부진 표정에 있어서나 근육의 해부학적인 묘사에 있어서 뛰어난 자연주의 초상의 예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도18 <왕의 초상> 나이지리아 이페 출토
, 11-12세기
아연합금, 높이 약 183 cm 이페 박물관
 
 
도19 <왕의 초상>
이페 출토, 황동, 13세기
 
 
 
도20 제단, 나이지리아, 베닌
17-18세기, 청동, 높이 약 45 cm
 
 
 
도21 여왕의 두상, 상아
나이지니아 베닌, 16세기 중반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한편 아프리카는 역사적으로 상아해안이라 알려진 서부의 해안을 따라 문명과 교류가 활발하였고, 13세기에서 18세기까지 이 곳에서는 베닌(Benin)이라는 도시국가가 번성하였습니다. 15세기 포르투칼과 무역을 하기도 하였던 이 도시국가는 신전에 앉은 통치자를 묘사한 개인용 제단(도20)이나 상아로 만든 인상적인 왕의 모후의 조각상(도21)에서 보듯 상당히 정교한 청동조각과 궁정미술을 남기고 있습니다.

 
 

 

유럽인들의 식민지가 된 이후의 아프리카의 미술

19세기까지 유럽과 관계가 활발하였던 서부해안 지역의 아프리카 많은 지역은 이슬람이나 기독교로 개종하게 되면서 토착의 신앙과 문화에 많은 변화를 겪게 되었습니다. 선교사들에 의해 이교의 우상숭배의 증거로 혹은, 개인이나 상인들에 의해 민예품으로 아프리카의 많은 부족 미술품들이 유럽으로 유입되었고 많은 컬렉션들이 생겨났습니다. 이것들은 현재 아프리카 미술의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콜럼부스 이전의 아메리카 미술

1492년 콜럼부스가 신대륙을 발견하기 이전 중남미에서는 현재의 멕시코, 과테말라, 페루 등을 중심으로 기원전 2세기이후 부터 화려하고 강력한 문명이 꽃피었습니다. 수학과 천문학이 발달하여 정교한 달력을 만들 줄 알았으며 거대한 도시를 건설하였던 마야문명이 그 대표적인 예일 것입니다(도22, 23, 24). 도23과 같이 토템신앙을 바탕으로 장식적인 문양이 두드러진 거석들이 고원도시의 광장에 세워져 있었습니다. 또한 최근의 고고학적인 발굴로 알려지기 시작한 서부 멕시코 일대의 기원 7세기 경의 테오티후아칸 유적에서는 건축물을 뒤덮은 다양한 타일장식에서 보듯 도자기 공예에 있어서 뛰어난 솜씨가 발휘되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도25, 26). 현재 페루에서 발견되는 사람의 얼굴모양을 한 부장용 용기(도27) 역시 사실성과 높은 표현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도22 피라미드 성전, 과테말라
마야문명,
기원후 700년 경
 
 
도23 <통치자상>
온두라스, 코판 계곡
높이 약 357cm
 
 
도24 온두라스
코판 계곡, 마야의 대성전 상상복원도
하버드 대학 피바디 박물관
 
 
도25 멕시코, 테오티후아칸 유적의 조망도
앞쪽 <달의 피라미드>, 뒤쪽 <태양의 피라미드>
기원후 50-200년 경에 건설
 
 
도26 멕시코, 테오티후아칸 유적
신전의 벽돌 부조장식
기원후 3세기
 
 
도27 <통치자의 초상을 한 물병>
도기, 높이 35.6 cm, 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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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럼부스의 상륙을 역사적인 기점으로 삼는 이유는 현재 신대륙의 문화를 이 지역의 토착문명과는 그 뿌리를 달리하는 유럽문명의 확장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중남미의 문명은 콜럼부스 이후 포르투칼과 스페인의 식민지정책에 의해 완전히 사라졌으며, 다만 그 미술이 토착민들에 의해 공예적인 방식으 로 전승되고 있을 뿐입니다.
 
 
미술에서 '원시적인 것'에 대한 관심의 변모과정 역시 서구의 식민지 확장의 역사와 같이 하였다는 점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19세기에서 20세기 초반 현대미술의 형성기에 고갱, 마티스, 블라맹크, 드렝, 피카소에 이르는 여러 미술가들과 개인 콜렉터들에게 깊은 영향을 준 원시주의, 프리미티비즘은 부족의 실재 미술이기보다는 서구 모더니즘의 한 양상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 문명의 외곽에 있는 이러한 원시미술은 먼저 앞 시간에 보았던 선사시대의 미술이 그러하였던 것 같이, 사회 공동체 내에서의 시각이미지의 본래의 기능을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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