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드맨 The SandMan 1 - 서곡과 야상곡 시공그래픽노블
닐 게이먼 외 지음, 이수현 옮김 / 시공사(만화)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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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요사이 쏟아져 나오는 미국 그래픽 노블들의 한국어판을 보고 있노라면 참으로 감개무량하다. 프랭크 밀러, 알란 무어, 알렉스 로스 같은 이들의 이름을 외화 좀 쓰시는 분들의 글을 통해서만 듣고 또 일러스트 한두 장씩 훔쳐보면서 침을 꼴딱꼴딱 삼키던 때도 있었는데, 어느새 그래픽 노블 역사에 길이 남는(다는) 걸작들을 한국어로 볼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씬 시티(Sin City)] 한국어판이 나올 때만 해도 ‘거 출판사 참 용기 있네’하는 생각이 들었고(이즈음에는 나도 가끔씩 부모님의 힘을 통해 아마존에서 그래픽 노블 한두 권쯤 본 터라 감동하진 않았다), 이후 몇 편의 (덜 유명한) 작품들이 여러 출판사를 통해서 한꺼번에 나오자 ‘이렇게 모두들 바람 들려 나오다가 또 조만간 사업 다 접고 들어가 버리는 거 아닌가’하는 걱정이 밀려왔는데, 이 시장이 생각보다 오래 버티면서 설마 볼 수 있으랴 싶었던 작품들까지 나오니 이제는 정말로 그냥 기쁘게 환영하고 싶다. 특히 알란 무어의 [왓치맨(Watchmen)]은 워낙 마음에 들어서 한국어판을 사서 다 읽고는 원서를 또 샀고, 그림 좋고 강렬하기는 하지만 그냥 폼 잡는 마초맨 아닌가 싶었던 프랭크 밀러도 [배트맨: 다크 나이트 리턴즈(Batman: The Dark Knight Returns)]과 [배트맨: 이어 원(Batman: Year One)]까지 보고 나니 수퍼히어로 장르 안에 리얼리즘을 끌어들이고자 했던 그의 시도와 결과에 감탄하게 되었다. 이 작품들은 정말이지 몇 번이고 다시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샌드맨 1. 서곡과 야상곡]의 첫 번째 에피소드를 읽고는 정말 할 말을 잃어버렸다. 닐 게이먼이 아니라 알란 무어와 프랭크 밀러의 팬으로서 말하련다. 알란 무어와 프랭크 밀러는 [샌드맨] 앞에서는 입 다물고 엎드려야 한다. 이건 아예… 다른 차원에 놓인 작품이 아닌가. 작가 닐 게이먼의 작품으로서도 그러하다. 팬터지 소설에 익숙한 이라면 잘 알겠지만 닐 게이먼은 우리나라에 꽤 여러 작품이 소개된 작가다. 테리 프래쳇과 공저한 멋진 코미디 소설 [멋진 징조들(Good Omens)], 영화판과 발맞추어 나온 [스타더스트(Stardust)], [스타더스트] 출간한 김에 함께 나온 듯한 [네버웨어(Neverwhere)], 조만간 애니메이션이 나온다는 [코랄린(Coraline)], 동화책 [금붕어 2마리와 아빠를 바꾼 날(The Day, Swapped My Dad for 2 Goldfish)], 그리고 최근에 번역된 [신들의 전쟁(American Gods)]까지. 그가 시나리오를 쓴 영화 [베오울프(Beowulf, 2007)]와 [미러마스크(Mirrormask, 2005)]도 극장 개봉하거나 DVD가 나왔고. 그리고 먼 옛날, 대한민국이 아직 미국산 그래픽 노블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던 시절, 역시 그가 작가로 참여한 그래픽 노블 [흑란(Black Orchid)]이 출간된 적도 있다(물론 그래픽 노블에 목말라 하던 나는 그걸 냉큼 샀다. 시대를 너무 앞서 나가셨던 당시의 출판 관계자 분들께 심심한 감사와 위로의 뜻을 전하는 바이다). 몇몇 단편집에 그가 쓴 단편이 실리기도 했고. 이 모든 작품들을 전부 일별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웬만큼은 보았다고 생각하는데, 아, 그러나 [샌드맨] 만큼 경이감에 도취되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먼 옛날 DC 코믹스의 역사 속에 잠시 존재했던 수퍼히어로 캐릭터 샌드맨에서 출발한 아이디어는 여기서 닐 게이먼을 통해 그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진짜 샌드맨, 즉 서구 설화 속 잠과 꿈의 요정, 더 나아가 꿈의 세계를 관장하는 신에 관한 이야기로 탄생한다. 1권 [서곡과 야상곡]은 샌드맨이 흑마술사들에 의해 유폐 당했다가 자유를 되찾은 뒤 잃어버린 자신의 힘을 되찾기 위해 길을 떠나며 겪게 되는 사건들을 다루고 있다. 흔한 이야기라고? 그러나 보라! 마이크 미뇰라의 [헬보이(Hellboy)]를 연상시키는 선정적인 오컬트(절대 부정적인 의미로 쓴 표현이 아니다)에서 출발한 이야기는 성경과 그리스 로마 신화, 셰익스피어와 단테, 밀튼 등 지난 수백 수천 년 동안 서구 문화 속 상상의 세계를 다룬 온갖 요소들을 경유하면서 자신을 살찌운다. 어디 그뿐인가. 닐 게이먼은 [샌드맨]을 가능케 한 DC 코믹스에게 윙크를 보내는 듯 이 세계의 수퍼히어로들과 악당들을 인용하고, 그들을 플롯의 중심으로 삼기도 한다. 게다가 때로는 스티븐 킹과 맞먹으려 드는 “현대 미국 소도시 타블로이드 스타일 공포”까지 마음껏 펼쳐낸다. 다시 한 번 정말 미안하고 죄송하고 송구스럽지만 여기서 닐 게이먼이 펼쳐내는 공포의 강렬함에 비하면 [왓치맨]에 알란 무어가 이야기 속 이야기로 넣은 해적선 이야기 쯤은 그냥 습작 수준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물론 소재뿐만 아니라 이야기를 펼쳐내는 솜씨 또한 대단히 인상적인데, 운명의 세 여신과 대화하는 장면에서 컷마다 여신들의 위치가 바뀐달지, 아니면 예전에는 루시퍼가 독재하고 있던 지옥이 요즘은 파리대왕 벨제붑과 아자젤까지 가세하여 삼두체제로 운영되고 있다는 식의 자잘한 디테일들에서 시작하여 전체 줄거리를 풀어나가는 방식까지 모두 상상력이 물씬 묻어난다. 신과 악마급의 존재들이 나와서 갈등을 벌인다 하여 우당탕쿵탕 스테일 큰 “액션”으로 때려 부수고 그런 단순하고 손쉬운 전개는 없다. 등장인물들이 그냥 좀 “쎈 놈”들이 아니라 세상을 구성하는 추상적인 개념의 화신인 만큼 어디까지나 자신이 담당하고 있는 권능의 특질에 따라 행동하고 겨룬다. 특히 샌드맨이 자신의 힘을 되찾기 위해 지옥의 악마와 지옥의 논리, 꿈의 논리를 이용하여 겨루는 “지옥의 희망” 에피소드나, 마지막 에피소드 “그녀의 날개소리”는 이 작품이 초월적인 존재들을 다루는 방식을 가슴 절절히 담아낸 명편이다. 


 어디 이야기만 좋은가. 연출도 끝장이다. 딱 부러진 직사각형 컷에 얽매이지 않고 화면 구성을 자유자재로 하는 것이야 이 작품만의 특질은 아니지만 특히 여기서는 한 페이지, 혹은 두 페이지의 컷들이 물결치듯 이어지고, 또 컷이 없는 공간에도 그림들이 들어차면서 전체가 하나의 큰 그림을 그리는 쾌감을 맛볼 수 있다. 첫 번째 에피소드 “깊은 잠”의 두 번째 페이지에서부터 그러한 정조가 엿보이는데, 그래도 “깊은 잠”의 경우는 비교적 “평범한” 형태의 연출을 따라가는 편이다. 허나 샌드맨이 힘을 되찾은 다음부터는 연출이 본격적으로 과격해지면서 이야기뿐만 아니라 그것을 그려내는 방식에 있어서도 꿈과 환상의 세계(라고 하니 무슨 에버랜드 광고 같지만)를 나아간다는 느낌을 물씬 전해준다. 예컨대 “승객들” 에피소드에서 인간들의 꿈을 타고 자리를 옮겨 가는 샌드맨의 모습을 단 한 페이지로 뇌리 속에 박아 넣는 부분은 로저 젤라즈니의 [앰버 연대기(The Chronicles of Amber)]와, “지옥의 희망” 에피소드에서 지옥의 악마들이 집결한 모습을 두 페이지 한 컷으로 펼쳐낸 부분은 미우라 켄타로의 [베르세르크(ベルセルク)]와 맞먹으려 들면서 동작의 분절로 액션을 전달하는 대신 하나의 순간으로 이야기를 담아내는 그래픽 노블의 진가를 유감없이 발휘한다. 또 그렇게 박력 넘치던 연출이 스티븐 킹 식 타이블로이드 공포를 제공하는 에피소드 “24시간”에 이르면 다시 비교적 딱딱하고 침착한 직사각형의 컷 안에서 이야기를 전개하기도 하고, 1권을 마무리하는 편안한 에피소드 “그녀의 날개소리”에서는 컷의 테두리를 지우거나 넓게 잡아 샌드맨의 권태와 한가로움, 그 누나 죽음(Death)의 유쾌명랑발랄상큼따뜻아름다운 동생 사랑이 배어나오게 식으로 계속 형태를 달리하는 것을 보면 어떠한 이야기를 어떠한 표현 속에 담아낼까 하는 문제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권 단위, 에피소드 단위, 장면 단위로 능수능란하게 바뀌는 연출이 닐 게이먼의 환상적인 상상력과 결합하면서 정말 굉장한 예술품을 접하고 있다는 포만감과 희열을 제공한다.
 

 지금 내가 너무 미사여구를 많이 써서 마치 책 팔아먹자고 난리치는 것 같은 느낌마저 줄까봐 걱정스러운데, 그래, 격한 흥분 상태에서 이 글을 쓴 건 사실이다. 하지만 ① 솔직히 이런 경지에 이른 예술품은 많이들 좀 사 봐서 창작자들에게 보답해줬으면 좋겠다는 심정이고(평소 잘 안 쓰는 인터넷 서점 리뷰를 써서라도 그렇게 되도록 하고 싶단 말이다!), ② 아무런 알맹이도 없는 주례사 평 안 쓰려고 구체적인 예도 들어가며 느낀대로 말했으니 떳떳하고, ③ 내가 아무리 둔한 혀를 놀려 별 소리를 다 했어도 직접 보고 나면 이런 수준의 표현은 [샌드맨]이 해낸 일의 반의반에도 못 미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훌륭한 그래픽 노블뿐만 아니라 훌륭한 팬터지, 훌륭한 이야기를 맛보고 싶으시며 우리의 꿈과 환상이 밥 먹고 사는 데에는 아무 짝에도 도움 되지 않는 쓸데없는 망상이 아니라 매일의 생활을 풍요롭게 만드는 지고의 가치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 모든 이들에게 추천하고 싶다.
 

 

 덧 하나. 번역자 이수현 님은 1권은 좀 산만한 편이라고 우려 섞인 말씀을 하시던데… 아니 다소간 우려해야 할 수준의 작품이 이 정도라면 대체 다음 권들은 어떻다는 것인가. 앞으로 열 권이 더 남았는데, 그걸 다 소화할 수 있을지 내 정신이 무척 걱정스럽다.
 

 덧 둘. 한국어판임을 알아차리기 힘든 저 표지는 DC 코믹스 측의 요구사항이라고 한다. 책 내용을 토씨 하나 빼놓지 않고 그대로 전달하길 바란 모양인지 맨 뒷장에는 국내 출간 여부는 확실하지 않은 다른 책들의 광고까지 모두 번역되어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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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oshot 2009-02-13 2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벗님께 알라딘에서도 뽐뿌를 받고 가네요-_-
글 잘 읽었습니다. 책은 보관함으로~
 
밤 그리고 두려움 1 시공사 장르문학 시리즈
코넬 울리치 지음, 프랜시스 네빈스 편집, 하현길 옮김 / 시공사 / 2005년 12월
평점 :
절판


 예상 밖의 일이지만, 열두 편의 단편을 통해 코넬 울리치를 만난 다음 떠오른 이미지는 알프레드 히치콕이라기보다는 박찬욱이나 윌리엄 셰익스피어였다. 물론 (아마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가장 잘 알려진 그의 작품일) [환상의 여인(Phantom Lady)]의 '윌리엄 아이리시'를 통해 구축한 서스펜스 대가로서의 이미지는 이 탄생 100주년 기념 단편집인 [밤 그리고 두려움]을 통해서도 여실히 드러나긴 하지만, 그 서스펜스는 기교나 문장, 혹은 촉박한 시간에만 의존하고 있지 않다. 이 단편집에서 코넬 울리치가 훌륭한 작품을 이끌어 낼 때는 언제나 도덕적 선택의 문제가 깔려있고, 그 위를 숙명적인 세계관이 덮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코넬 울리치와 알프레드 히치콕이 만나 만들어낸 최고의 영화가 다름 아닌 [이창(Rear Window, 1954)]이라는 점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겠다.

 물론 [밤 그리고 두려움]에는 전적으로 시간과 공간 설정으로 인해 빚어지는 긴장감에 의지하는 작품도 있다. 단편집의 서두를 장식하는 [담배(Cigarette)]와 [동시상영(Double Feature)], [횡재(The Heavy Sugar)]는 그런 서스펜스의 전형을 보여준다. 독이 든 담배가 누군가의 입에 물리기는 것을 막기 위해 동분서주 하는 것은 시간과의 다툼이고, 동시상영극장을 무대로 인질범과 대치하는 경찰의 모습이나 우연히 장물 다이아몬드를 손에 넣은 거렁뱅이의 하룻밤을 담은 것은 공간에 의한 다툼이다. 이 단편집에서 가장 수준이 떨어지는 펄프 액션물인 [요시와라에서의 죽음(Death in the Yoshiwara)]도 어느 정도는 공간에 의지하는 서스펜스를 보여준다.

 한편 [색다른 사건_재즈 살인사건(The case of the Killer-Diller_A Swing-Murder Mystery)]이나 [유리 눈알을 추적하다(Through a Dead Man's Eye)], [죽음의 장미(The Death Rose)] 같은 경우는 좀 더 전형적인 서스펜스를 제공한다. 인물만 다를 뿐 구조는 동일하다고 볼 수 있는 [색다른 사건_재즈 살인사건]과 [죽음의 장미]는 연쇄살인범을 미끼로 낚으려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흔한 서스펜스를 다루고 있고 [유리 눈알을 추적하다]의 경우는 소년을 화자로 내세워 꽤 뻔한 수준의 추리를 토대로 아동 액션 모험극을 만들어 낸다.

 1930년대 중반에서 40년대 초반 사이에 발표된 이런 단편들은 대부분 그 설정 자체는 대단히 뻔해서, 그렇고 그런 할리우드 액션 영화에서도 이미 우려먹을 대로 우려먹은 것들이다. 하지만 히치콕이 탄생한지 10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이창]은 IMDB 인기순위 14위에 올라와 있고 [싸이코(Psycho, 1960)]는 공포영화의 '살아있는' 교과서이듯, 코넬 울리치의 단편들이 제공하는 서스펜스 역시 조금도 그 힘을 잃지 않는다. 서스펜스에서 중요한 것은 설정보다는 말하는 방식이고, 코넬 울리치의 군더더기 없는 문장과 빠른 전개는 거장으로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이 단편집에서 좀 더 중요하게 다뤄져야 할 것은 다른 단편들, [용기의 대가(Blue is for Bravery)], [목숨을 걸어라(You Bet Your Life)], [엔디코트의 딸(Endicott's Girl)], [죽음을 부르는 무대(The Fatal Footlights)], [하나를 위한 세 건(Three Kills for One)} 같은 단편들이다. 대게 경찰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는 이 단편들은 필름 누아르 혹은 하드보일드 탐정 장르의 정수를 꿰뚫고 있는 작품들이다. 여기서 주인공들은 환경에 의해 도덕적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된다. 특히 시대의 흐름에 따라 작가의 시각도 점점 변화해 갔는지 [용기의 대가]에서는 주인공이 단 한 번의 도덕적 선택을 한 다음부터는 시간과 다투는 액션 스릴러로 전개되던 것이 [목숨을 걸어라]에서는 주인공이 거의 끝까지 방관자의 입장에서 불의를 두고 갈등을 하는 것으로 바뀌고 [엔디코트의 딸]에 이르러서는 아예 주인공마저 독자가 심판할 대상으로 만드는 등, 울리치가 그려내는 세계가 점점 더 구원받기 힘든 음울한 세계로 변해가는 모습을 보는 것이 무척 흥미롭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넬 울리치의 단편이 표면적으로는 주인공이 승리하고 범인은 잡히는 해피엔딩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는 것은 생각해볼만한 일이다. 이는 고전기 할리우드 영화가 선택한 형식적인 해피엔딩이 종종 작품의 씁쓸함을 더해주었던 것을 연상시키는데, 특히 [윌리엄 브라운 형사(Detective William Brown)]의 결말은 이런 느낌을 확인하게 해주는 명작이라고 할만하다. (역시 오늘날의 시각으로는 도식적인) 둔하지만 청렴한 형사 조 그릴리와 재빠르지만 부패한 형사 윌리엄 브라운의 일대기를 다루는 이 작품에서, 윌리엄 브라운의 몰락은 이 작품 전체에 드리운 음울함을 걷어내지 못한다. 조 그릴리가 목격해온 그의 죄에 비해 속죄 의식은 너무 빠르고 가벼우며, 그 속죄는 죄의 희생자들을 보상해주지도 못한다.

 이런 암울함은 [죽음을 부르는 무대]나 [하나를 위한 세 건]에서 더욱 짙게 드러나는데, 이 작품들에서 사실상 서스펜스 액션의 명쾌함은 완전히 사라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범인을 잡기 위핸 형사들의 집요한 추적과 술책은 범인들과 마찬가지로 악랄하고 무자비하며, 결국 독자에게 엔딩에 대한 의구심마저 불러일으킬 정도다. [죽음을 부르는 무대]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형사의 수사 기법에 대한 부서장의 논평을 보자. "그 수사 기법은, 습관적으로 자주 사용하라고 권장할 만한 것은 아니로구만. (…) 하지만 이번에는 훌륭한 수사 결과를 이끌어냈고, 그게 무엇보다도 중요한 거야." 그러나 독자에게는 분명 이 말은 정반대로 읽힌다. 결과가 좋다면 다 좋은 것인가? (재밌는 일이지만, 이 물음은 불꽃같은 전개에 비해 결말은 다소 싱거운─물론 그것이 결함이라고 하긴 힘들다─울리치의 순수 서스펜스 작품들을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불의 앞에서 선택을 강요당하는 주인공을 그려내던 울리치는 이 시점에서 불의를 응징하기로 선택한 주인공은 또 다른 불의가 아닌지 판단해보게 만든다.

 이 정도만 해도 [밤 그리고 두려움]의 가치는 충분하다. 하지만 "밤은 젊고 그도 젊었다."([환상의 여인]의 첫 문장)로 얘기되는 코넬 울리치의 문장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물론 위의 단편들이 문장력이 떨어지는 작품들은 아니지만 문장력이 서스펜스나 도덕적 갈등에 눌리는 것도 사실이다. 적어도 재즈 시대의 대가 F. 스콧 피츠제럴드를 언급하며 격찬할 수준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다행히, 작품이 하나 더 있다. 3~40년대 작품으로만 엮인 이 단편집에서 유일하게 1970년에 발표된 작품, [뉴욕 블루스(New York Blues)]. 극단적으로 말해서, [밤 그리고 두려움]이 지닌 미덕의 절반 이상이 이 한 작품에 담겨 있다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 호텔방 안에서 찾아오고야 말 뭔가(혹은 누군가)를 기다리며 시간을 보내고 있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이 작품은 코넬 울리치 작품에서 기대할 수 있는 거의 모든 특징들을 포함하고 있다. 시적인 문장, 우울하고 숙명적인 분위기, 치밀한 묘사에서 우러나오는 서스펜스. 가히 잘 쓰여진 문장이 인간의 내면을 어디까지 파고들고 독자를 얼마나 끌고 들어갈 수 있는 가에 관한 명답이라고 할만하다.

 국내에 소개된 몇몇 장편을 통해서만 알려진 채 전설의 거장처럼 불려왔던 코넬 울리치의 작품들이 열두 편이나 쏟아진 것은 실로 축하할만한 일이다. 물론 여기 실린 열두 편의 작품 중 열한 편이 비교적 작가 활동의 전반부에 쓰여진 작품들인지라 이것만으로 코넬 울리치의 정수를 맛보았다고 하기는 힘들다. 코넬 울리치 스스로가 최초의 범죄 소설이라고 칭한 [검은 옷의 신부(The Bride Wore Black)]이 1940년에 발표된 것을 생각해보면 이 단편집은 대가의 정수를 눌러 담았다기보다는 오히려 대가의 탄생을 엿볼 수 있는 단편집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히치콕의 미국 시절 영화가 있다고 해서 영국 시절 영화를 버릴 필요가 없듯이, 이 작품들에 만족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없다. 게다가 편집자 프랜시스 네빈스가 쓴 단편 하나 분량의 풍족한 서문이 곁들여졌으니 더욱. (참고로 출판사 측에서는 "단편의 내용이 서문에 언급되기도 하고 글 자체가 워낙 작가, 작품에 대한 상세하고도 넓은 시각을 제공하기에, 만약 울리치의 작품을 처음 접하는 사람이라면 각 단편을 모두 읽고 서문을 읽어도 좋을 듯하다"는 이유로 서문을 책의 맨 뒤에 배치했다. 옳은 말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크게 신경 쓸 필요는 없다는 것이 내 의견이다) 이런 책을 앞에 둔 독자가 할 일은 읽고, 즐기고, 고민하고, 코넬 울리치 작품을 더 소개하고 싶다는 역자 하현길 씨의 바람이 이뤄지기를 기원하면서 주변에 추천하는 일 뿐이다.



 덧 하나. 코넬 울리치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들을 감독한 감독들의 이름은 언제 봐도 흥미롭다. 서스펜스의 대가 알프레드 히치콕이나 필름 누아르의 달인 로버트 시오드막, 혹은 필름 누아르 스타일을 통한 공포를 창출한 제작자 발 루튼 사단의 기수 자크 투르네 감독이 있는 것은 그리 놀랍지 않다. 하지만 프랑수아 트뤼포가 코넬 울리치 영화를 두 편이나 만들었다는 것은 누벨바그 감독들의 필름 누아르 애호 기질을 떠올려 봐도 꽤 재밌는 일. 거기다가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의 이름까지 더해지면 새삼 울리치의 세계가 품을(제공할) 수 있는 영역이 얼마나 넓은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덧 둘. 독자에 따라서는 순수 서스펜스 소설을 최고로 치고 경찰물은 힘이 떨어지며 [뉴욕 블루스]를 최악으로 꼽기도 하는 모양이다. 취향차라고 해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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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혹
크리스토퍼 프리스트 지음, 김상훈 옮김 / 열린책들 / 2006년 8월
평점 :
절판


 남자의 이름은 리처드 그레이. 그는 해안가의 요양소에 있다. 전직 스튜디오 촬영기사인 그는 어느 날 런던에서 벌어진 폭탄 테러에 휘말려 중상을 입고 수술을 받은 뒤 회복 중이다. 사고의 충격 탓에 사고 직전 몇 주 동안의 기억을 상실한 상태. 그러던 어느 날, 리처드의 앞에 수잔 큘리라는 여자가 등장한다. 그녀는 자신이 리처드가 기억하지 못하는 몇 주 동안 사귀었던 애인이라고 말하며, 그 말에 거짓은 없어 보인다. 리처드는 수와의 대화를 통해 과거 자신과 수가 수의 옛 애인 나이얼이 얽힌 문제 때문에 소원해진 상태로 헤어졌음을 알게 되지만, 그가 당시의 기억을 잃은 지금 두 사람은 다시금 서로에게 매력을 느낀다. 결국 둘의 관계는 점차 돈독해져 가지만, 리처드의 잃어버린 기억들이 다시 돌아오면서 나이얼의 존재 또한 서서히 둘의 관계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다…….

 아니, 로저 젤라즈니를 비롯한 남성적 액션 SF/팬터지, 혹은 머리가 빠개지는 과학적 사고의 전개로 출간 때마다 SF 팬덤을 요동케 했던 하드 SF들을 꾸준히 번역해왔던 장르 문학계의 믿음직한 번역자 김상훈이 오랜만에 "경계소설"이랍시고 번역한 작품의 실체가 삼각관계와 기억상실증이 교차하는, 공중파 미니시리즈스러운 트렌디 로맨스에 불과했단 말인가!

 「내가 말을 다 할 때까지 기다려 주십시오. 난 당신을 기억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마치 당신을 알고 있다는 듯한 느낌이 드는군요. 솔직히 말해서 내가 정말로 당신을 알기 때문에 그런 건지, 아니면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싶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게 뭐든 간에 내가 이곳에 온 이래 처음으로 느끼는 진짜 감정이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영국 작가 크리스토퍼 프리스트의 일곱 번째 장편 [매혹]에는 이와 같은 개탄을 방지하는 요소가 최소한 둘은 있다. ① 워낙 보기에 인상적이어서 용서가 된다. (심지어 지금까지 나온 몇 안 되는 [매혹] 감상문 중 가장 큰 혹평에도 '그래도 아름다운 풍경 묘사는 좋았다' 같은 말은 있었다) ② 리처드의 기억이 돌아온 뒤에도 그는 부잣집 도련님이나 수의 오빠/남동생이 아니며, 출생의 비밀도 밝혀지지 않는다.

 물론 이것은 반쯤은 농담에 불과하지만, 어쨌든 [매혹]의 특성에 관한 이야기다. 즉, ② 이 작품에서 기억은 기억하거나/말거나의 양면으로 나뉜 극적 도구로서의 기능("앗, 모르고 이랬는데 알고 보니 저 따위야! 어떻게 해!")을 하기보다는, 인간의 불확실한/깔끔하게 편집되지 않은 기억 자체를 강조하듯 매끄러운 전개 속에 군데군데 균열을 만들어 놓은 뒤, 그 빈자리를 어떻게든 흡족하게 메우려드는 등장인물과 독자의 시도를 계속 좌절시키는 소재이자 주제 자체로 활약한다. 다시 말해서, 여기서는 어느 순간부터 잃어버린 기억의 진실보다는 그 잃어버린 기억을 무마하려는 태도/과정 자체가 중요해진다.

 「기억이 모두 뒤죽박죽이야. 이사한 날 생각이 나는군. 밴 안쪽에 융단을 실어 놓았기 때문에 가져다 놓은 가구를 다시 치워야 했어. 또 나중에 당신이 거기 있었을 때의 기억도 나지만, 같은 장소라는 느낌이 들지 않아. 당시 모습들을 동시에 머리에 떠올릴 수 있거든. 겹친 상태로 말이야. 무슨 말인지 알겠어?」

 ① 그리고 그 과정은 있는 그대로를 세밀하게 옮겨내고자 하는 기나긴 묘사가 아니라, 순간순간을 지배하는 시각적 인상을 간결하게 잡아채는 주관적 시선을 통해 이루어진다. 계속해서 시점이 변화하며 전개되는 이야기 속에서 이 '시선'이란 등장인물의 시선이자 독자의 시선이기도 한데, 바로 이 시선을 통해 전달되는 정보가 기억의 뒤틀림 속에서 자꾸 어긋나고 충돌한다. 결국 기억상실 속에서 삼각관계를 추적하는 [매혹] 속의 이야기는 개개의 등장인물과 독자가 봤고 기억하는 것, 봤다고 기억하는 것, 보지 못했으나 짐작하여 기억하는 것, 봤으나 기억하지 못하는 것 사이의 관계를 두 인물(혹은 세 인물)이 끊임없이 의심하거나 정당화하려는 일종의 대결구도를 갖춘 스릴러이기도 하다.

 「자, 또 모르는 사람들의 모임에 갔다고 생각해 봐. 남자 열 명에 여자 한 명이 참석하고 있어. 당신이 방에 들어간 순간 아름답고 관능적인 그 여자는 춤을 추며 옷을 벗기 시작했어. 그녀가 옷을 벗어 던지자마자 당신은 그 방을 떠나. 그런 다음 그곳에 있던 남자들을 당신은 몇 명까지 묘사할 수 있을 것 같아? 아홉 명이 아니라 열 명 있었던 것이 확실한지, 또 있는지도 몰랐던 어떤 사람이 없었다고 단언할 수 있어?」

 삼각관계의 긴장이 세 사람이 한데 모인 자리에서 직설적으로 박 터지게 싸우는 과정보다는 세 사람이 2:1로 갈렸을 때 벌어지는 '눈치' 신경전에 의해 빚어짐을 생각해 보면, 이처럼 시선과 기억이 어쩌고 하는 추상적인 주제가 사실은 그 외피에 딱 들어맞음을 알 수 있다. 리처드-수-나이얼의 관계에서 나오는 세 쌍의 인물들(리처드-수 / 리처드-나이얼 / 수-나이얼)은 각각 작중에서 끊임없이 비교 · 대조되면서 서로를 제거하거나 차지하고 싶어 하는데, 그 알력은 물리적 힘이 아니라 그들이 서로를 보거나 보지 못하는 '인식의 차이' 속에서 발생한다. 그렇기에 삼각관계 로맨스라는 [매혹]의 외피는 보다 심각한 주제로 독자를 안내하기 위해 서두에서만 제시될 뿐인 당의/미끼/핑계라기보다는, 작품 전체에서 추상적 논의를 직접적/시각적/매혹적으로 반영하고 있는 체계라고 할 수 있다. [매혹]의 진정한 매력은 그처럼 작품의 여러 가지 층위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 가볍게 따사로운 로맨스를 읽으려던 독자든 심각하게 인상 쓰며 텍스트 분석에 매달리고 싶은 독자든 결국 그 모든 영역을 만끽하며 능동적으로 뛰어들게 하는 데에 있다.

 어긋나는 기억을 다루는 방식에 있어서도 이 작품은 매혹적이다. 다른 시각/기억 사이의 알력이라는 측면에서 이 작품을 보자면 (역자가 지적한 것처럼) 홍상수 감독의 [오! 수정(2000)]을 연상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매혹]에서 중심에 두고 있는 것은 인물에 따라서 달라지는 기억의 모습들 자체라기보다는 그렇게 기억이 달라지는 이유, 혹은 다른 기억들에 대한 해석, 그리고 같은 기억을 다르게 이해하는 방식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는 이 기억과 저 기억이 공유하는 지점과 달라지는 지점을 비교하면서 그 차이에서 흥미진진한 미스터리를 끌어낸다기보다는 (물론 중반까지는 그런 즐거움도 크지만) 그 차이를 직시하고 있는 인물/독자들이 차이를 해석하고 그 해석에 대해 반응하는 과정에 무게가 실려 있다. 그런 점에서 [매혹]은 일종의 SF로도 읽힐 수 있을 텐데, SF적인 소도구들을 구축하고 있는 실제적인 과학이 아니라 지극히 일상적인 삶의 풍경을 바라보는 방식으로서의 과학, 즉 대상에 접근하는 과학적 사고 자체를 다루고 있기에 '순수 문학'에 대한 '장르적 변용'을 보는 듯한 쾌감마저 느껴진다. (그렇기에 "프리스트가 경계 소설 기획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슬림스트림〉 개념의 중심축에 서 있는 작가"라는 역자의 말에는 십분 공감할 수밖에 없다)

 그레이는 자신이 영화관 안에서 그 영화를 보고 있는 동안 그의 실제 인생은 영화관 밖에서 진행되었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러나 그런 영화를 본 기억은 그가 실제 인생의 대용으로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었다.

 세계를 바라보는 태도 자체에 주목하는 작품인 만큼, 작가 크리스토퍼 프리스트는 이와 같은 주제를 중심 플롯과는 큰 상관이 없어 보이는 디테일한 지점에까지 심어두고 있다. 심지어 낭만적이기만 한 것처럼 보이는 남프랑스의 풍경 묘사조차도 다시 보면 예사로 읽히지 않을 지경. 작가는 언뜻 매끄러운 이야기를 펼쳐 나가고 있는 것 같은 태도를 취하면서도 중간 중간 '음? 이 부분 약간 이상하지 않나요? 하긴, 이러저러하게 설명될 수 있는 부분이니까 넘어가도 괜찮겠죠?' 같은 능글맞은 터치를 가하며, 그 때문에 (특히 이 작품을 다시 읽을 때) 독자는 (처음에는 지나쳤을 수 있는) 그 모든 부분을 의식하며 (오히려 처음보다 더) 적극적으로 글의 내용에 참여하게 된다. 리처드-수-나이얼이 그들의 차원에서 벌이고 있는 기억에 관한 알력이 독자와 책/작가 사이에서도 발생하는 셈이다. 그 과정에서 [매혹]의 전체 이야기는 허구의 등장인물 세 명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더 넓은 범위에서 그 이야기를 읽는 독자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함을 실감할 수 있게 된다.

 그제야 그레이는 스튜어 옆에 다른 사람이 서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젊은 여자였다. 그레이를 바라보던 그녀는 불안한 듯 우드브리지를 흘낏 보며 소개해 주기를 기다렸다. 여자를 지금까지 못 본 것은 그녀가 신문 기자와 함께 앉아 있었고, 일어섰을 때는 기자의 몸에 가려진 탓이리라.

 이런 치밀함은 특히 결말부에서 빛을 발한다. (역자 해설의 표현을 빌려) "본서가 읽는 이의 능동적 참여를 촉발하는 중층적 구조를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민감하게 받아들이지 못한 독자라면 경우에 따라 무책임하거나, 사기 같거나, 심지어 진부하게도 느껴질 수 있는 결말일 텐데, 그런 이들에게는 감히 재독을 권하고 싶다. (그럼 처음부터 결말을 흥미진진하게 읽은 독자는 재독할 필요가 없단 거? 설마. 그런 독자라면 누가 권하지 않아도 당연히 재독하게 될 거라고 생각한다) 감춰져 있던 미스터리 혹은 이 책이 유도하고 있는 방향을 한 번 본 다음 다시 읽는다면, 결말부에서 [매혹]이 지적하고 있는 바가 실은 첫 장부터 교묘하게 독자를 끌어들이고 있음을 반드시 실감할 수 있을 테니. 그렇게 처음부터 매번 다른 목소리로 술회되는 순간들을 기억해가며 그 기억들 사이의 울퉁불퉁한 어긋남과 맞서려 들 때, 나는 결국 [매혹]에 매혹 당했음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게 실은 이…

 여기까지.

 이 이야기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기억해 보려고 했다.



 덧 하나.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된 크리스토퍼 프리스트는 실로 흥미진진한 작품을 여러 편 써낸 거장급 작가인 모양이다. 역자 김상훈의 해설을 읽고 나면 언제나 그렇듯 줄거리만 살짝 소개된 다른 장편들을 직접 맛보고 싶어지는 가운데, 특히 휴고상 장편 부문 수상작의 자리를 두고 어슐러 K. 르 귄의 [빼앗긴 자들(The Dispossessed)]과 끝까지 맞장을 떴다는 세 번째 장편 [역전된 세계(The Inverted World)]와, 크리스토퍼 놀란이 연출하고 크리스천 베일, 휴 잭맨, 스칼렛 요한슨, 마이클 케인이 출연하는 영화로 제작 중인 아홉 번째 장편 [명성(The Prestige)]이 무척 궁금하다. 이 중 [명성]은 영화화에 힘입어 10월 중에 북앳(@)북스 출판사에서 출간을 준비 중이라고 한다. 다만 출판사 측에서는 그 작품을 스릴러로 밀려고 하는 모양인데, [매혹]을 읽어본 바로는 그렇게 단순하게 분류될 리가 없으니… 아무튼 모쪼록 좋은 번역(과 영화와 상관없는 디자인)으로 나와 주길 바랄 뿐이다. 설마 고마쓰 사쿄의 [일본침몰(日本沈沒)] 꼴이 나는 건 아니겠지. (← 영화 때문에 관심도 안 두고 계셨던 분들은 이번에 재간된 이 작품을 꼭 읽어보시라)


 덧 둘. 2001년에 [앰버 연대기-앰버의 아홉 왕자(The Chronicles of Amber Book1: Nine Princes in Amber)]를 만난 이후 지금까지 꾸준히 역자 김상훈의 열렬한 팬이었다. 아마 김상훈 이름을 달고 나온(강수백 이름도) 작품은 다 샀고, 다 읽어보지 않았나 싶은데… 그렇게 5년쯤 되고 나니 이제는 글에서 '상훈체'가 보여서 재미있다. 설명은 못하겠지만 "뉴스를 보내는 유일한 방법은 현상하지도 않은 필름을 가장 가까운 공항으로 직접 보내서 런던이나 뉴욕, 혹은 암스테르담 행 비행기에 싣는 것일 때조차 있었다."라든가 "일찍이 나는 이토록 깊은 고독을 경험한 적이 없었다." 혹은 "나 자신 그보다 나은 설명을 내놓을 수 없었기 때문에 적어도 그녀 이야기의 일부는 진실로 받아들였다." 같은 문장을 읽고 있노라면 이 사람 밖에 쓰지 않을 문장 구조와 번역어로 이뤄져있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자신"이라는 어휘는 굉장히 자주 등장한다. 어쩌면 역자가 번역을 다듬는 과정에는 "자신"을 솎아내는 과정도 있지 않을까?) 실제 작가의 문체와 번역가의 문체 사이의 결락에 대해서 고민하고자 하는 독자들이 있으리라는 것도 짐작 가능하지만 나 자신 그 차이를 지적할 능력이 없기에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다.


 덧 셋. 따지고 보면 얼마 전에 출간되어 아직 읽은 사람도 많지 않고 감상문은 더더구나 없는 책에 관해 이야기하기 위해 내가 읽고 기억하는 것, 읽었다고 기억하는 것, 읽지 않았으나 짐작하여 기억하는 것, 읽었지만 기억하지 못하는 것 사이를 교묘히 오간 이 감상문을 작성한 나의 태도는 [매혹]적인 현실 인식의 한 버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 시점에서 내 머리의 일단(一段)을 사로잡는 것은 "낚시"라는 어휘이지만, 나 자신 새로운 인식적 충격을 던지는 소설에 목말랐던 때를 돌이켜보면 낚시야말로 이상적이고 필수불가결한 감상문의 모습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조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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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9-25 00: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onebe 2006-11-18 15: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상훈씨의 해설보다 도리어 명쾌한 해제 라고 느꼈습니다 ^^
어떤 의미에서 재독해야지만 즉 되새겨봐야지만 비로소 그 재미가 발생하는 이야기라는 생각입니다.
근데 대다수 읽으시는 분들은 구태여 두번씩이나 읽지 않으시니 아쉽게도
이 책의 진가를 느끼시지 못하는 사태가...
곱씹어볼 구석이 충분한데 아쉽지요.
읽고 나서 흥미로웠던 건 이본이 5가지나 존재한다는 사실.
왠지 의미심장하지요.

가넷 2006-12-28 2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첫번째받은 인상이 흥미롭지 못하면(?) 다시 살펴보지는 않아서... 다시 한번 읽어 볼까 싶네요.

pjy 2009-05-03 1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멋진 리뷰를 쓰시는 분이 감탄하는 책이라...궁금해지네요~
 
죄와 벌 - 상 - 도스또예프스끼 전집 도스토예프스키 전집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홍대화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1월
평점 :
절판


 한 사람의 심리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죄와 벌]의 주인공 라스꼴리니꼬프의 성격, 심리 변화를 간추려서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혹은 그런 짓을 해서는 안 된다) 번역판으로 8백여 페이지에 이르는 이 소설 전부가 사실상 라스꼴리니꼬프의 심리에 대한 해부도이며, 라스꼴리니꼬프가 만나는 거의 모든 등장인물들이 사실 그의 일부분이다. 사실 [죄와 벌]은 라스꼴리니꼬프의 모노드라마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장광설'로 이야기되곤 하는(물론 빚에 허덕이던 도스또예프스끼가 원고료를 많이 받아먹기 위해 열심히 분량을 늘린 결과라는 말도 있고, 아마 어느 정도는 사실일 것이다. 그런 이야기는 도스또예프스끼의 아내인 안나 그리고리예브나 도스또예프스까야의 책을 보면 나와있지 않을까 싶은데, 아직 안 읽었다) 도스또예프스끼의 치열한 인물 탐구는 각각의 인물들이 처한 외부 환경을 넘어서 그들의 심리 상태까지를 담아냄으로써 그들을 라스꼴리니꼬프와 견주기 위한 수단으로 보인다.

 그리고 물론, 그 인물들은 서로 비슷비슷한 상황과 성격을 지니지 않았다. 즉, 라스꼴리니꼬프의 성격은 어느 하나로 규정될 수 없다. 라스꼴리니꼬프의 행위나 심리가 종종 그의 적대자인 뾰뜨르 뻬드로비치 루쥔이나 스비드리가일로프와 일치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건 흥미로운 일이다. 루쥔은 똑똑하지만 가난한 아내를 맞아들여 아내로 하여금 평생 자신을 경외하도록 하겠다는 생각을 가진 인물인데, 라스꼴리니꼬프는 그런 인물이 자신의 동생 두냐와 결혼하고자 한다는 사실을 참지 못한다. 그리고 (루쥔의 성품을 알 정도로 똑똑한) 두냐가 그런 인물과 결혼하는 데에 동의한 것은 오로지 가난해서 학업을 이어나가지 못하고 있는 대학생인 자신 때문이리라는 생각에 더욱 분노한다. 하지만 라스꼴리니꼬프 자신도 똑똑하지만 가난한 소냐 앞에서는 세상사는 이치에 통달한 것 마냥 일장연설을 늘어놓으며 잘난 척 하는 인물이며, 그가 노파를 살해한 이유 중 하나는 역시 자신의 가난 때문이었다. 두냐가 루쥔의 성품을 어느 정도 알면서도 그 안에서 자신의 입지를 세워나갈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갖고 자신을 희생하려 한 것은 라스꼴리니꼬프가 인간을 비범한 사람과 평범한 사람으로 나누어 비범한 사람은 자신의 이상을 위해 평범한 사람을 희생할 권리가 있다는 이론을 내세우며 노파를 죽이는 것과 유사해 보인다. 즉, 그는 루쥔이자 두냐다.

 그런가하면 스비드리가일로프는 파렴치한 욕정의 화신이지만 자신의 파렴치함을 잘 알고 드러내는 인물인데, 자기 주변의 인물들을 파멸시켜가며 자신의 욕망을 채우던 그가 스스로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인물이라고 규정한 두냐와의 만남에 이르러 흔들리고 구원/파멸을 향해 치닫는다는 것, 그리고 그런 동시에 소냐에게 자선을 베푼다는 것은 라스꼴리니꼬프를 연상시킨다. 한편 두냐와 소냐는 자기를 희생하여 가망 없는 가족을 부양하려는 인물로서 서로 동일시되는 인물이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라스꼴리니꼬프≒루쥔≒스비드리가일로프를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면서 그들을 변화시키고자 노력한다는 점에서 그들의 위에 서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결말부에서 소냐가 쓴 편지에 대해 두냐와 라주미힌은 그 편지가 일체의 사적인 해석 없이 사실만을 전달함으로써 오히려 라스꼴리니꼬프의 실제를 명확히 전달하고 있다고 하는데, 이것이 며칠이고 방 안에 틀어박혀 공상하며 만들어낸 자신만의 사상에 따라 살아가고, 타인의 행동 하나하나를 집요하게 파고들어 매번 의미를 부여해내는 라스꼴리니꼬프의 방법론과 완전히 반대되는 것임을 생각해보면 소냐(와 두냐)는 라스꼴리니꼬프의 대척점에 서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이처럼 자신이 적대하는 인물과 동일시되기도 하고 자신이 사랑하는 인물들과 대치되기도 하는 라스꼴리니꼬프의 심리가 하나로 규정될 수 없음은 당연한 일. [죄와 벌]은 노파의 살해, 즉 라스꼴리니꼬프가 스스로 만들어낸 사상을 실천으로 옮김으로써 한 극단에 이른 이후 그가 주변 사람들에게서 자신의 양면성을 발견하고 그 사이에서 방황하며 답을 구하는 내용이다. 우연처럼 등장과 퇴장을 반복하는 인물들은 계속해서 라스꼴리니꼬프의 심리를 파장으로 엮어가면서 그를 조금씩 옭아맨다. 재밌게도 읽는 도중 때때로 미국 현대 스릴러 소설들─퍼트리샤 콘웰의 케이 스카페타 시리즈 같은─이 떠올랐던 이유가 아마 그 파장의 느낌 때문이 아닐까 싶다.

 라스꼴리니꼬프를 에워싸는 압박이 다소 느슨해졌을 때 느끼는 안도감은 곧이어 또 다른 압박이 시작될 것임을 전제로 하고 있는데, 그 지점에서 독자로서 갖게 되는 심정은 스릴러 소설의 주인공들이 잠시 조연들과 짧은 휴식(쇼핑, 식사, 섹스, 대화, 기타 등등)을 가질 때 느껴지는 것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굳이 스릴러 소설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주인공을 둘러싼 긴장의 강약과 리듬을 조절하는 능력이야말로 이야기꾼으로서의 역량을 판가름하는 중요한 요소가 아닌가 싶은데, 비록 한 땀 한 땀 호흡이 길긴 하지만 도스또예프스끼도 그런 역량은 충분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영화를 볼 때 매 컷의 길이가 짧아서 빠르게 느껴지는 영화도 있고 매 컷의 길이는 긴데 컷과 컷이 연결될 때 그 전개 속도가 빨라서 빠르게 느껴지는 영화도 있는데 비유하자면 도스또예프스끼는 후자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이 전개에 힘을 더해주는 것은 물론 [죄와 벌]이 가지고 있는 추리소설로서의 기능이다. (그런 의미에서 스릴러 소설처럼 얘기했던 것도 썩 잘 어울린다) 굳이 분류하자면 도서추리(도치형 서술 추리inverted mystery : 누가 어떻게 범행을 저질렀나를 밝히는 고전 퍼즐 미스터리에서 벗어나 범인의 정체와 범행 방식 대신 범행 과정의 심리에 관심을 기울이는 형태의 미스터리)에 속할 이 작품은 살인 과정과 이후의 수사 과정을 대부분 범인 라스꼴리니꼬프의 시선 속에서 풀어내면서 심리적인 서스펜스를 만들어낸다. 특히 정체불명의 사나이가 갑자기 다가와 라스꼴리니꼬프를 살인자라고 부르는 장면, 그리고 라스꼴리니꼬프를 앞에 둔 예심판사 뽀르피리 뻬뜨로비치가 천연덕스럽게 범죄자의 심리에 대해서 논하는 장면에서의 긴장감은 최상급이다.

 또 도스또예프스끼는 라스꼴리니꼬프에게 집중되어 있던 시선을 잠시 돌려서 라스꼴리니꼬프가 죄를 고백하는 장면을 엿듣는 다른 인물을 보여줌으로써 긴장을 더하기도 하는데, 물론 이것은 히치콕식 맥거핀이 아니라 "반드시 사용되는 벽난로 위의 총"으로, 후반부에 이어질 또 한 차례의 설전(혹은 장광설)에 당위성을 부여해주는 복선으로서의 기능도 충실히 하고 있다. 그런가하면 정보의 공개가 지연됨으로써 앞부분에 일어났던 사건에 새로운 의미가 더해지기도 한다. 예를 들어 초반에 라스꼴리니꼬프가 노파를 죽이는 장면까지만 읽었을 때는 불명확하던 살인 동기는 그가 예심 판사 뽀르피리 뻬뜨로비치와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라스꼴리니꼬프의 과거에 의해 보다 구체화된다.

 이 마지막 전개 방식이야말로 [죄와 벌]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인물들의 생각이 점점 복잡해지면서 급기야 '돈이 궁한 대학생의 고리대금업자 노파 살해'가 법과 도덕, 신에 대한 논쟁으로까지 번져가기 때문이다. 그럼으로써 라스꼴리니꼬프의 갈등은 범죄와 처벌의 영역이 아니라 죄악과 징벌의 영역으로까지 나간다. (그래서 crime이라는 어휘를 사용한 영문 제목은 어쩐지 아쉽다. 물론 러시아어의 prestuplenie와 nakazanie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스케일 면에서는 문학사상 가장 대담한 추리소설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한 가지 의아한 점은, 이 거창한 갈등의 마무리다. 예상과는 달리 라스꼴리니꼬프의 갈등은 6장에서 끝난다고 하기 힘들며, 사실상 에필로그에서 마무리된다. 그런데 그 전까지의 전개가 라스꼴리니꼬프의 거울상인 인물들이 등장하여 그와 대화하면서, 즉 라스꼴리니꼬프가 자기 자신을 탐구하고 자신과 대화하면서 이뤄지고 있었다면 이 마무리는 신적인 장치, 꿈을 통해서 이뤄진다. 꿈이 무의식의 발현인 만큼 필시 앞의 전개 과정에서 이미 이런 결말을 암시하는 지점들이 있었으리라고 한다면, 사실 이 작품을 통째로 오도독오도독 씹어 먹었다고 할 수는 없으니 '아, 그런가요. 다시 읽어봐야겠네요.'하고 넘어가야겠지만…

 …그래도 이야기를 읽어나가는 독자의 마음에 깃드는 분위기의 흐름상 이 결말은 좀 갑작스럽다. 논할 거 다 논하면서 결국 '아, 제길, 나는 안 되는 녀석이야.'로 끝났는데 '아, 내가 잘못 생각했나.'하면서 분위기 전환이라니. 이 부분에서 도스또예프스끼의 서술 방식이 워낙 잔잔하게 심금을 울리는 구석이 있어서 대놓고 비판하기가 쉽진 않지만 그래도 결국 이건 고전기 할리우드 장르 영화의 관습적인 결말을 연상케 할 만큼 갑작스러운 끝맺음으로 느껴진다. 연재 중이던 잡지에서 페이지를 더 못 주겠다고 했을까? 혹은 그 부분은 그야말로 신의 영역인가? 아니면 라스꼴리니꼬프의 이론은 그만큼 일고의 가치도 없는 허황된 것이라 더 이상 따박따박 논하지 않고 결말로 나가도 될 거라고 생각했을까? 물론 8백여 페이지 동안 고생하는 꼴이 너무 안쓰러워서 조 홀드먼의 [영원한 전쟁(Forever War)] 결말처럼 '이렇게 끝내줘서 다행이야'하는 생각이 들긴 한다. 그래도 의문이 남는 건 어쩔 수 없지. '이렇게 끝나면 안 되는데 대체 왜 이 꼴이야!'가 아니라 '응? 왜 이랬지?' 정도의 의문이.

 뭐, 상관없다. 고전기 할리우드 장르 영화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이지만 [죄와 벌]은 하워드 혹스의 [연인 프라이데이(His Girl Friday, 1940)]나 [깊은 잠(The Big Sleep, 1946)]처럼 과정이 더 중요한 작품이 아니겠는가. [죄와 벌]은 장광설이 가득하다고 불만을 터뜨릴 게 아니라 장광설을 즐겨주는 데에 의미가 있는 거고, 죄를 밝히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어쩌다 그런 선택을 해야 하는 지경까지 가게 됐는가를 보는 데에 묘미가 있는 소설이다. 그 치열함에 뇌를 가득 담그는 것만으로도 멋진 경험이고.



 덧 하나. 간만에 [죄와 벌]을 다시 읽은 데에는 로베르 브레송의 [소매치기(Pickpocket, 1959)]가 보고 싶은 탓도 있고, 열린책들에서 [죄와 벌]과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Brat'ia Karamazoby)]을 제외한 도스또예프스끼 전집의 나머지 작품들을 절판시킨다기에 위협을 느끼고 하나씩 읽어치우며 사야겠다는 생각이 든 탓도 있고, 박찬욱이 자꾸 이야기를 해서인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세르게이 루키야넨코의 [나이트 워치(Nochnoy dozor)]를 재독하다가 답 안 나오는 문제로 끝까지 고민하는 소설이 읽고 싶어진 탓이 가장 크다. 그러고 보면 나는 첫 번째에나 두 번째에나 [나이트 워치]의 결말부도 이해를 못했다. 답이 없는 것 같은 이야기가 답이 있는 것처럼 끝났기 때문인 걸까?


 덧 둘. 러시아 문학이니까 원어 표기를 할 때 러시아 문자로 해야 하는 게 아닐까 하다가 훗날 아랍 문학에 심취하게 되면 골치 아파지겠다 싶어서 일단은 그냥 알파벳으로 표기하기로 했다. 이 블로그를 방문하실 지도 모를 러시아 분들께 미안함을 표하는 바입니다.


 덧 셋. 올해 읽은 책들 중 가장 오랫동안 읽은 책인데, 책 읽은 시간만큼 책 표지 바라본 시간도 길었다. 그러다보니 생긴 망상 하나. 열린책들에서 나온 신판 [죄와 벌]의 표지에는 라스꼴리니꼬프(로 추정되는 이)가 서 있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이 인물은 겉옷 아래에 녹색 바탕에 붉은 문양이 들어간 웃옷을 입고 있다. 그런데 이 붉은 문양의 윗부분, 어쩐지 DC로 보이지 않는지. 그러다보니 자연히 그 아래쪽에 지워진 것 같은 문양은 수퍼맨의 S 문양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더랬다. 라스꼴리니꼬프의 기묘한 사상에도 맞아 떨어지고, 또 결말부가 라스꼴리니꼬프의 새로운 탄생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걸 생각해 보면… 이것은 결국 [스몰빌(Smallvil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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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설이다 밀리언셀러 클럽 18
리처드 매드슨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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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통 영화 이야기를 할 때 하는 말이지만, 내용과 형식은 둘이 아니라 하나다. '어떻게'는 '무엇을'만큼 중요하고, 둘은 떼어놓을 수 없다.


 장르 문학에 대해서 생각할 때, 나는 곧잘 그 분량의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된다.  정말이지 작품의 분량은 많은 것을 결정한다. 예를 들어, 피터 잭슨의 [반지의 제왕] 3부작은 그 길이가 아니면 제대로 이야기가 되지 않는다. 그 내용을 두 시간 안에 다 넣으려 한다면 잘해봐야 'MTV 스타일(컷! 컷! 컷! 컷! 컷!)' 뮤직비디오나 되고 말 텐데, 그런 길이와 속도감에서는 [반지의 제왕]이 지금 가지고 있는 장중한 감흥이 사라지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또 다른 예로, 혹자는 로저 젤라즈니의 『내 이름은 콘래드』를 두고 [앰버 연대기]에 비해 통 하는 일 없이 작게 끝나버리는 이야기라고 투덜거리곤 하지만, 거꾸로 생각해보면 [내 이름은 콘래드]의 '소박한 여행'은 바로 그 중 · 장편에 해당하는 길이가 아니면 존재할 수 없다. 불사신 콘래드의 외계인 안내담을 다섯 권짜리 장편 소설로 써내면 분명히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돼야 할 것이다(아니면 다섯 권 내내 '쟤는 왜 지구에 왔을까? 나는 쟤를 보호해줘야 하나?'라며 고민만하는 주인공을 보여주든가. 끔찍하다).


 그런데 곧잘 한두 권으로 끝나곤 하는 외국의 작품들에 비해 우리나라의 작품들―창작 부문이 가장 활성화 돼 있는 팬터지와 무협의 경우를 떠올려보면 될 텐데―은 네댓 권을 쉽게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 듣기로는 그것이 대여점 수요에 판매량의 대부분을 의존하는 기형적인 시장 존립 형태 때문에 발생한 현상이라는데, 이유야 어쨌거나 지금 이 글을 통해 이야기할 문제는 아니고, 다만 결국 그 분량의 문제가 내용의 측면에 이르기까지 큰 아쉬움을 던져주는 경우가 많기에 아쉽다는 말을 하고플 뿐이다. 우리네 팬터지 시장에 암묵적으로(혹은 명시적으로. 나는 작가가 아니라서 모르겠다) 존재하는 그 분량의 문제는 작가와 독자 모두에게 많은 이야깃거리를 포기하도록 하고 있다.


 최근에 출간된 리처드 매드슨의 작품집 [나는 전설이다]에 눈길이 가는 것은, 열한 편의 작품으로 이뤄진 이 한 권의 책이 지금 우리가 창작 팬터지 시장에서 잃어버린 미덕이 어떤 것인지를 명백히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하려고 하는 이야기를 정확히 알고 있으며, 그 이야기의 중심을 밀고 나간 뒤 끝맺어야 할 지점이 어디인지 또한 정확히 알고 있다. 즉, 리처드 매드슨은 이야기를 그만두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작가이다. 그렇기에 그의 이야기는 오히려 제약 없이 풍성해질 수 있고.


 표제작이자 작가의 대표작인 「나는 전설이다」는 정체불명의 이유로 인간들이 죽어나가고 흡혈귀들만 남은 지구에서 마지막 생존자 로버트 네빌이 벌이는 생존 투쟁을 담아낸 작품이다. 총 네 부분으로 구성된 이 작품에서 작가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이 매혹적인 소재가 가진 여러 가지 측면을 탐구한다. 이야기의 중심을 이루는 것은 당연히 두 존재, 로버트 네빌과 흡혈귀들이며, 전개 역시 두 존재를 축으로 이뤄진다. 작가는 로버트 네빌을 통해 흡혈귀가 실존할 수 있다면 그것은 어떤 방식으로 가능한 것일까, 라는 흥미로운 허구적 가정을 전개해 나가면서, 동시에 적대적인 환경 속에서 한정된 거주지를 가지고 혼자 살아나가는 사람의 마음속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를 이야기한다. 이 '과학적 탐구'와 '심리적 공포'는 일견 어울릴 것 같지 않지만, 이 두 축 사이에 배치된 로버트 네빌의 과거 경험, 즉 독자들이 알고 있는 실제의 삶은 두 가지 축을 밀접하게 연결시키며 읽는 이의 몰입을 더해간다. 작품 초반에는 난데없이 황량한 세상에 내던져진 것 같던 로버트 네빌을 보여주다가 그가 투쟁을 하면서 정신적인 벼랑에 내몰릴 즈음에 아직 다른 사람들이 살아있던 과거의 이야기를 제시하고, 그 과거의 기억이 다시 현재의 투쟁에 힘을 부여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인상적인 것은 리처드 매드슨이 이런 이야기를 함에 있어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는 사실, 다시 말해 그가 자기 작품의 중심이 어디에 놓여있는지를 잘 알고 그 중심을 잃지 않은 채 내용을 재단해 나간다는 사실이다. 그는 이 작품에서 로버트 네빌이 겪게 되는 공포가 혼자 남았다는 공포, 그리고 그렇게 혼자서 무의미한 일상을 반복해야 한다는 공포임을 각인시켜 나가며, 흡혈귀에 대한 과학적 탐구 역시 그 공포와 맞물려 이뤄진다. 중요한 것은 그 모든 지점에 대한 탐구가 끝났을 때이다. 이제 자신이 어떤 존재와 대면하고 있는지 잘 알게 된, 그리고 그 속에서 사는 방법에 너무나 익숙해져 버린 인물이 남았는데, 여기서 이야기를 어떤 방향으로 전개하고 어떻게 끝맺어야 할 것인가? 작가는 여기서 온갖 안이한 결말들―흡혈귀와 싸워 마침내 그들을 멸종시키는 액션물이 되는 것, 혹은 그 일상적 공포에 짓눌려 자살하는 것 등, 이야기의 축 하나를 배제하는 방식으로 이뤄질 수 있는 수많은 결말들―을 피하여 이야기의 두 축을 한데 모으는 방식을 선택한다. 혼자 남은 자의 공포를 뼈저리게 알고 있으며, 심지어 그런 공포에 익숙해져 버린 사람의 앞에 자신과 똑같은 인간처럼 보이는 존재가 등장했을 때, 흡혈귀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그는 자신의 의심을 어떤 방식으로 다뤄나갈 것인가? 이후의 내용을 모두 말하는 것은 가혹할 테니 간단한 얼개만 이야기하자면, 작가는 이 새로워 보이지만 사실은 예정된 질문에 대한 탐구를 계속해 나가고, 결과 역시 새로운 요소의 힘을 빌리는 대신 이미 로버트 네빌이 알고 독자가 아는 사실 속에서 찾아낸다. 그리고 바로 거기서 망설임 없이 이야기를 끝내 버린다. 실로 자신이 떠올린 아이디어를 골수까지 빼먹고 버리는 흡혈귀 같은 작가라고 아니 할 수 없다.


 「나는 전설이다」는 결코 예기치 못한 극단적인 전개로 독자를 잡아끄는 작품이 아니다. 오히려 이 작품은 예정된 결말로 치닫는 듯한 인상을 준다. 비록 뒷내용을 쉽게 예상할 수는 없지만, 다음 페이지를 넘겼을 때 발견하게 되는 내용이 지극히 합리적인 것으로 보인다는 이야기다. 결국 「나는 전설이다」의 힘은 하나의 아이디어에 다른 자잘한 곁가지를 붙여 내용을 풍성하게 해나가는 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아이디어가 내포하고 있는 가능성을 간결하고 치밀하게 잡아내는 데에서 나온다. 그리고 리처드 매드슨은 정말 그걸 잘 한다. 214페이지의 분량 속에 군더더기라 할만한 부분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데에 뭐가 얼마나 필요한지 잘 알고 있는 작가의 작품이다.


 같은 책에 수록된 열 편의 단편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고자 한다. 확언할 수 있는 것은 이 단편들에서 모두 「나는 전설이다」에서 리처드 매드슨이 보여줬던 단호한 아이디어 전개 솜씨가 빛을 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한 눈 파는 일 없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아이디어가 제공할 수 있는 공포가 어떤 것인지를 잡아낸 뒤 그 요소만으로 이야기를 전개하고 끝맺는다. 덕분에 이 단편들의 밀도나 만족감 또한 최근에 소개된 이런저런 장르 문학 단편들 중에서도 단연 발군이라 할 만 하다.


 가격 대 성능비, 혹은 분량 대 밀도의 문제에 있어서 최상급이라고 할만한 [나는 전설이다]를 읽은 뒤 남는 의문은 오직 하나, 리처드 매드슨이 과연 긴 글을 다루는 데에도 이만한 재주를 가지고 있는 것인가 하는 문제인데, 그의 다른 작품들이 소개되기를 바라보는 수밖에 없을 듯 하다. 하지만 그가 장편은 별로 쓰지 않는 작가라고 한들 아쉬울 것은 없을 듯 하다. 자신의 이야기에 휘둘리고 늘어지는 게 문제이지 자신의 아이디어가 가진 힘 안에서 짜임새 있게 작품을 조각하는 건 작가로서의 미덕에 해당하는 일일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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