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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벌 - 상 - 도스또예프스끼 전집 ㅣ 도스토예프스키 전집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홍대화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1월
평점 :
절판
한 사람의 심리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죄와 벌]의 주인공 라스꼴리니꼬프의 성격, 심리 변화를 간추려서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혹은 그런 짓을 해서는 안 된다) 번역판으로 8백여 페이지에 이르는 이 소설 전부가 사실상 라스꼴리니꼬프의 심리에 대한 해부도이며, 라스꼴리니꼬프가 만나는 거의 모든 등장인물들이 사실 그의 일부분이다. 사실 [죄와 벌]은 라스꼴리니꼬프의 모노드라마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장광설'로 이야기되곤 하는(물론 빚에 허덕이던 도스또예프스끼가 원고료를 많이 받아먹기 위해 열심히 분량을 늘린 결과라는 말도 있고, 아마 어느 정도는 사실일 것이다. 그런 이야기는 도스또예프스끼의 아내인 안나 그리고리예브나 도스또예프스까야의 책을 보면 나와있지 않을까 싶은데, 아직 안 읽었다) 도스또예프스끼의 치열한 인물 탐구는 각각의 인물들이 처한 외부 환경을 넘어서 그들의 심리 상태까지를 담아냄으로써 그들을 라스꼴리니꼬프와 견주기 위한 수단으로 보인다.
그리고 물론, 그 인물들은 서로 비슷비슷한 상황과 성격을 지니지 않았다. 즉, 라스꼴리니꼬프의 성격은 어느 하나로 규정될 수 없다. 라스꼴리니꼬프의 행위나 심리가 종종 그의 적대자인 뾰뜨르 뻬드로비치 루쥔이나 스비드리가일로프와 일치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건 흥미로운 일이다. 루쥔은 똑똑하지만 가난한 아내를 맞아들여 아내로 하여금 평생 자신을 경외하도록 하겠다는 생각을 가진 인물인데, 라스꼴리니꼬프는 그런 인물이 자신의 동생 두냐와 결혼하고자 한다는 사실을 참지 못한다. 그리고 (루쥔의 성품을 알 정도로 똑똑한) 두냐가 그런 인물과 결혼하는 데에 동의한 것은 오로지 가난해서 학업을 이어나가지 못하고 있는 대학생인 자신 때문이리라는 생각에 더욱 분노한다. 하지만 라스꼴리니꼬프 자신도 똑똑하지만 가난한 소냐 앞에서는 세상사는 이치에 통달한 것 마냥 일장연설을 늘어놓으며 잘난 척 하는 인물이며, 그가 노파를 살해한 이유 중 하나는 역시 자신의 가난 때문이었다. 두냐가 루쥔의 성품을 어느 정도 알면서도 그 안에서 자신의 입지를 세워나갈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갖고 자신을 희생하려 한 것은 라스꼴리니꼬프가 인간을 비범한 사람과 평범한 사람으로 나누어 비범한 사람은 자신의 이상을 위해 평범한 사람을 희생할 권리가 있다는 이론을 내세우며 노파를 죽이는 것과 유사해 보인다. 즉, 그는 루쥔이자 두냐다.
그런가하면 스비드리가일로프는 파렴치한 욕정의 화신이지만 자신의 파렴치함을 잘 알고 드러내는 인물인데, 자기 주변의 인물들을 파멸시켜가며 자신의 욕망을 채우던 그가 스스로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인물이라고 규정한 두냐와의 만남에 이르러 흔들리고 구원/파멸을 향해 치닫는다는 것, 그리고 그런 동시에 소냐에게 자선을 베푼다는 것은 라스꼴리니꼬프를 연상시킨다. 한편 두냐와 소냐는 자기를 희생하여 가망 없는 가족을 부양하려는 인물로서 서로 동일시되는 인물이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라스꼴리니꼬프≒루쥔≒스비드리가일로프를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면서 그들을 변화시키고자 노력한다는 점에서 그들의 위에 서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결말부에서 소냐가 쓴 편지에 대해 두냐와 라주미힌은 그 편지가 일체의 사적인 해석 없이 사실만을 전달함으로써 오히려 라스꼴리니꼬프의 실제를 명확히 전달하고 있다고 하는데, 이것이 며칠이고 방 안에 틀어박혀 공상하며 만들어낸 자신만의 사상에 따라 살아가고, 타인의 행동 하나하나를 집요하게 파고들어 매번 의미를 부여해내는 라스꼴리니꼬프의 방법론과 완전히 반대되는 것임을 생각해보면 소냐(와 두냐)는 라스꼴리니꼬프의 대척점에 서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이처럼 자신이 적대하는 인물과 동일시되기도 하고 자신이 사랑하는 인물들과 대치되기도 하는 라스꼴리니꼬프의 심리가 하나로 규정될 수 없음은 당연한 일. [죄와 벌]은 노파의 살해, 즉 라스꼴리니꼬프가 스스로 만들어낸 사상을 실천으로 옮김으로써 한 극단에 이른 이후 그가 주변 사람들에게서 자신의 양면성을 발견하고 그 사이에서 방황하며 답을 구하는 내용이다. 우연처럼 등장과 퇴장을 반복하는 인물들은 계속해서 라스꼴리니꼬프의 심리를 파장으로 엮어가면서 그를 조금씩 옭아맨다. 재밌게도 읽는 도중 때때로 미국 현대 스릴러 소설들─퍼트리샤 콘웰의 케이 스카페타 시리즈 같은─이 떠올랐던 이유가 아마 그 파장의 느낌 때문이 아닐까 싶다.
라스꼴리니꼬프를 에워싸는 압박이 다소 느슨해졌을 때 느끼는 안도감은 곧이어 또 다른 압박이 시작될 것임을 전제로 하고 있는데, 그 지점에서 독자로서 갖게 되는 심정은 스릴러 소설의 주인공들이 잠시 조연들과 짧은 휴식(쇼핑, 식사, 섹스, 대화, 기타 등등)을 가질 때 느껴지는 것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굳이 스릴러 소설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주인공을 둘러싼 긴장의 강약과 리듬을 조절하는 능력이야말로 이야기꾼으로서의 역량을 판가름하는 중요한 요소가 아닌가 싶은데, 비록 한 땀 한 땀 호흡이 길긴 하지만 도스또예프스끼도 그런 역량은 충분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영화를 볼 때 매 컷의 길이가 짧아서 빠르게 느껴지는 영화도 있고 매 컷의 길이는 긴데 컷과 컷이 연결될 때 그 전개 속도가 빨라서 빠르게 느껴지는 영화도 있는데 비유하자면 도스또예프스끼는 후자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이 전개에 힘을 더해주는 것은 물론 [죄와 벌]이 가지고 있는 추리소설로서의 기능이다. (그런 의미에서 스릴러 소설처럼 얘기했던 것도 썩 잘 어울린다) 굳이 분류하자면 도서추리(도치형 서술 추리inverted mystery : 누가 어떻게 범행을 저질렀나를 밝히는 고전 퍼즐 미스터리에서 벗어나 범인의 정체와 범행 방식 대신 범행 과정의 심리에 관심을 기울이는 형태의 미스터리)에 속할 이 작품은 살인 과정과 이후의 수사 과정을 대부분 범인 라스꼴리니꼬프의 시선 속에서 풀어내면서 심리적인 서스펜스를 만들어낸다. 특히 정체불명의 사나이가 갑자기 다가와 라스꼴리니꼬프를 살인자라고 부르는 장면, 그리고 라스꼴리니꼬프를 앞에 둔 예심판사 뽀르피리 뻬뜨로비치가 천연덕스럽게 범죄자의 심리에 대해서 논하는 장면에서의 긴장감은 최상급이다.
또 도스또예프스끼는 라스꼴리니꼬프에게 집중되어 있던 시선을 잠시 돌려서 라스꼴리니꼬프가 죄를 고백하는 장면을 엿듣는 다른 인물을 보여줌으로써 긴장을 더하기도 하는데, 물론 이것은 히치콕식 맥거핀이 아니라 "반드시 사용되는 벽난로 위의 총"으로, 후반부에 이어질 또 한 차례의 설전(혹은 장광설)에 당위성을 부여해주는 복선으로서의 기능도 충실히 하고 있다. 그런가하면 정보의 공개가 지연됨으로써 앞부분에 일어났던 사건에 새로운 의미가 더해지기도 한다. 예를 들어 초반에 라스꼴리니꼬프가 노파를 죽이는 장면까지만 읽었을 때는 불명확하던 살인 동기는 그가 예심 판사 뽀르피리 뻬뜨로비치와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라스꼴리니꼬프의 과거에 의해 보다 구체화된다.
이 마지막 전개 방식이야말로 [죄와 벌]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인물들의 생각이 점점 복잡해지면서 급기야 '돈이 궁한 대학생의 고리대금업자 노파 살해'가 법과 도덕, 신에 대한 논쟁으로까지 번져가기 때문이다. 그럼으로써 라스꼴리니꼬프의 갈등은 범죄와 처벌의 영역이 아니라 죄악과 징벌의 영역으로까지 나간다. (그래서 crime이라는 어휘를 사용한 영문 제목은 어쩐지 아쉽다. 물론 러시아어의 prestuplenie와 nakazanie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스케일 면에서는 문학사상 가장 대담한 추리소설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한 가지 의아한 점은, 이 거창한 갈등의 마무리다. 예상과는 달리 라스꼴리니꼬프의 갈등은 6장에서 끝난다고 하기 힘들며, 사실상 에필로그에서 마무리된다. 그런데 그 전까지의 전개가 라스꼴리니꼬프의 거울상인 인물들이 등장하여 그와 대화하면서, 즉 라스꼴리니꼬프가 자기 자신을 탐구하고 자신과 대화하면서 이뤄지고 있었다면 이 마무리는 신적인 장치, 꿈을 통해서 이뤄진다. 꿈이 무의식의 발현인 만큼 필시 앞의 전개 과정에서 이미 이런 결말을 암시하는 지점들이 있었으리라고 한다면, 사실 이 작품을 통째로 오도독오도독 씹어 먹었다고 할 수는 없으니 '아, 그런가요. 다시 읽어봐야겠네요.'하고 넘어가야겠지만…
…그래도 이야기를 읽어나가는 독자의 마음에 깃드는 분위기의 흐름상 이 결말은 좀 갑작스럽다. 논할 거 다 논하면서 결국 '아, 제길, 나는 안 되는 녀석이야.'로 끝났는데 '아, 내가 잘못 생각했나.'하면서 분위기 전환이라니. 이 부분에서 도스또예프스끼의 서술 방식이 워낙 잔잔하게 심금을 울리는 구석이 있어서 대놓고 비판하기가 쉽진 않지만 그래도 결국 이건 고전기 할리우드 장르 영화의 관습적인 결말을 연상케 할 만큼 갑작스러운 끝맺음으로 느껴진다. 연재 중이던 잡지에서 페이지를 더 못 주겠다고 했을까? 혹은 그 부분은 그야말로 신의 영역인가? 아니면 라스꼴리니꼬프의 이론은 그만큼 일고의 가치도 없는 허황된 것이라 더 이상 따박따박 논하지 않고 결말로 나가도 될 거라고 생각했을까? 물론 8백여 페이지 동안 고생하는 꼴이 너무 안쓰러워서 조 홀드먼의 [영원한 전쟁(Forever War)] 결말처럼 '이렇게 끝내줘서 다행이야'하는 생각이 들긴 한다. 그래도 의문이 남는 건 어쩔 수 없지. '이렇게 끝나면 안 되는데 대체 왜 이 꼴이야!'가 아니라 '응? 왜 이랬지?' 정도의 의문이.
뭐, 상관없다. 고전기 할리우드 장르 영화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이지만 [죄와 벌]은 하워드 혹스의 [연인 프라이데이(His Girl Friday, 1940)]나 [깊은 잠(The Big Sleep, 1946)]처럼 과정이 더 중요한 작품이 아니겠는가. [죄와 벌]은 장광설이 가득하다고 불만을 터뜨릴 게 아니라 장광설을 즐겨주는 데에 의미가 있는 거고, 죄를 밝히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어쩌다 그런 선택을 해야 하는 지경까지 가게 됐는가를 보는 데에 묘미가 있는 소설이다. 그 치열함에 뇌를 가득 담그는 것만으로도 멋진 경험이고.
덧 하나. 간만에 [죄와 벌]을 다시 읽은 데에는 로베르 브레송의 [소매치기(Pickpocket, 1959)]가 보고 싶은 탓도 있고, 열린책들에서 [죄와 벌]과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Brat'ia Karamazoby)]을 제외한 도스또예프스끼 전집의 나머지 작품들을 절판시킨다기에 위협을 느끼고 하나씩 읽어치우며 사야겠다는 생각이 든 탓도 있고, 박찬욱이 자꾸 이야기를 해서인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세르게이 루키야넨코의 [나이트 워치(Nochnoy dozor)]를 재독하다가 답 안 나오는 문제로 끝까지 고민하는 소설이 읽고 싶어진 탓이 가장 크다. 그러고 보면 나는 첫 번째에나 두 번째에나 [나이트 워치]의 결말부도 이해를 못했다. 답이 없는 것 같은 이야기가 답이 있는 것처럼 끝났기 때문인 걸까?
덧 둘. 러시아 문학이니까 원어 표기를 할 때 러시아 문자로 해야 하는 게 아닐까 하다가 훗날 아랍 문학에 심취하게 되면 골치 아파지겠다 싶어서 일단은 그냥 알파벳으로 표기하기로 했다. 이 블로그를 방문하실 지도 모를 러시아 분들께 미안함을 표하는 바입니다.
덧 셋. 올해 읽은 책들 중 가장 오랫동안 읽은 책인데, 책 읽은 시간만큼 책 표지 바라본 시간도 길었다. 그러다보니 생긴 망상 하나. 열린책들에서 나온 신판 [죄와 벌]의 표지에는 라스꼴리니꼬프(로 추정되는 이)가 서 있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이 인물은 겉옷 아래에 녹색 바탕에 붉은 문양이 들어간 웃옷을 입고 있다. 그런데 이 붉은 문양의 윗부분, 어쩐지 DC로 보이지 않는지. 그러다보니 자연히 그 아래쪽에 지워진 것 같은 문양은 수퍼맨의 S 문양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더랬다. 라스꼴리니꼬프의 기묘한 사상에도 맞아 떨어지고, 또 결말부가 라스꼴리니꼬프의 새로운 탄생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걸 생각해 보면… 이것은 결국 [스몰빌(Smallvil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