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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그리고 두려움 1 ㅣ 시공사 장르문학 시리즈
코넬 울리치 지음, 프랜시스 네빈스 편집, 하현길 옮김 / 시공사 / 2005년 12월
평점 :
절판
예상 밖의 일이지만, 열두 편의 단편을 통해 코넬 울리치를 만난 다음 떠오른 이미지는 알프레드 히치콕이라기보다는 박찬욱이나 윌리엄 셰익스피어였다. 물론 (아마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가장 잘 알려진 그의 작품일) [환상의 여인(Phantom Lady)]의 '윌리엄 아이리시'를 통해 구축한 서스펜스 대가로서의 이미지는 이 탄생 100주년 기념 단편집인 [밤 그리고 두려움]을 통해서도 여실히 드러나긴 하지만, 그 서스펜스는 기교나 문장, 혹은 촉박한 시간에만 의존하고 있지 않다. 이 단편집에서 코넬 울리치가 훌륭한 작품을 이끌어 낼 때는 언제나 도덕적 선택의 문제가 깔려있고, 그 위를 숙명적인 세계관이 덮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코넬 울리치와 알프레드 히치콕이 만나 만들어낸 최고의 영화가 다름 아닌 [이창(Rear Window, 1954)]이라는 점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겠다.
물론 [밤 그리고 두려움]에는 전적으로 시간과 공간 설정으로 인해 빚어지는 긴장감에 의지하는 작품도 있다. 단편집의 서두를 장식하는 [담배(Cigarette)]와 [동시상영(Double Feature)], [횡재(The Heavy Sugar)]는 그런 서스펜스의 전형을 보여준다. 독이 든 담배가 누군가의 입에 물리기는 것을 막기 위해 동분서주 하는 것은 시간과의 다툼이고, 동시상영극장을 무대로 인질범과 대치하는 경찰의 모습이나 우연히 장물 다이아몬드를 손에 넣은 거렁뱅이의 하룻밤을 담은 것은 공간에 의한 다툼이다. 이 단편집에서 가장 수준이 떨어지는 펄프 액션물인 [요시와라에서의 죽음(Death in the Yoshiwara)]도 어느 정도는 공간에 의지하는 서스펜스를 보여준다.
한편 [색다른 사건_재즈 살인사건(The case of the Killer-Diller_A Swing-Murder Mystery)]이나 [유리 눈알을 추적하다(Through a Dead Man's Eye)], [죽음의 장미(The Death Rose)] 같은 경우는 좀 더 전형적인 서스펜스를 제공한다. 인물만 다를 뿐 구조는 동일하다고 볼 수 있는 [색다른 사건_재즈 살인사건]과 [죽음의 장미]는 연쇄살인범을 미끼로 낚으려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흔한 서스펜스를 다루고 있고 [유리 눈알을 추적하다]의 경우는 소년을 화자로 내세워 꽤 뻔한 수준의 추리를 토대로 아동 액션 모험극을 만들어 낸다.
1930년대 중반에서 40년대 초반 사이에 발표된 이런 단편들은 대부분 그 설정 자체는 대단히 뻔해서, 그렇고 그런 할리우드 액션 영화에서도 이미 우려먹을 대로 우려먹은 것들이다. 하지만 히치콕이 탄생한지 10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이창]은 IMDB 인기순위 14위에 올라와 있고 [싸이코(Psycho, 1960)]는 공포영화의 '살아있는' 교과서이듯, 코넬 울리치의 단편들이 제공하는 서스펜스 역시 조금도 그 힘을 잃지 않는다. 서스펜스에서 중요한 것은 설정보다는 말하는 방식이고, 코넬 울리치의 군더더기 없는 문장과 빠른 전개는 거장으로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이 단편집에서 좀 더 중요하게 다뤄져야 할 것은 다른 단편들, [용기의 대가(Blue is for Bravery)], [목숨을 걸어라(You Bet Your Life)], [엔디코트의 딸(Endicott's Girl)], [죽음을 부르는 무대(The Fatal Footlights)], [하나를 위한 세 건(Three Kills for One)} 같은 단편들이다. 대게 경찰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는 이 단편들은 필름 누아르 혹은 하드보일드 탐정 장르의 정수를 꿰뚫고 있는 작품들이다. 여기서 주인공들은 환경에 의해 도덕적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된다. 특히 시대의 흐름에 따라 작가의 시각도 점점 변화해 갔는지 [용기의 대가]에서는 주인공이 단 한 번의 도덕적 선택을 한 다음부터는 시간과 다투는 액션 스릴러로 전개되던 것이 [목숨을 걸어라]에서는 주인공이 거의 끝까지 방관자의 입장에서 불의를 두고 갈등을 하는 것으로 바뀌고 [엔디코트의 딸]에 이르러서는 아예 주인공마저 독자가 심판할 대상으로 만드는 등, 울리치가 그려내는 세계가 점점 더 구원받기 힘든 음울한 세계로 변해가는 모습을 보는 것이 무척 흥미롭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넬 울리치의 단편이 표면적으로는 주인공이 승리하고 범인은 잡히는 해피엔딩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는 것은 생각해볼만한 일이다. 이는 고전기 할리우드 영화가 선택한 형식적인 해피엔딩이 종종 작품의 씁쓸함을 더해주었던 것을 연상시키는데, 특히 [윌리엄 브라운 형사(Detective William Brown)]의 결말은 이런 느낌을 확인하게 해주는 명작이라고 할만하다. (역시 오늘날의 시각으로는 도식적인) 둔하지만 청렴한 형사 조 그릴리와 재빠르지만 부패한 형사 윌리엄 브라운의 일대기를 다루는 이 작품에서, 윌리엄 브라운의 몰락은 이 작품 전체에 드리운 음울함을 걷어내지 못한다. 조 그릴리가 목격해온 그의 죄에 비해 속죄 의식은 너무 빠르고 가벼우며, 그 속죄는 죄의 희생자들을 보상해주지도 못한다.
이런 암울함은 [죽음을 부르는 무대]나 [하나를 위한 세 건]에서 더욱 짙게 드러나는데, 이 작품들에서 사실상 서스펜스 액션의 명쾌함은 완전히 사라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범인을 잡기 위핸 형사들의 집요한 추적과 술책은 범인들과 마찬가지로 악랄하고 무자비하며, 결국 독자에게 엔딩에 대한 의구심마저 불러일으킬 정도다. [죽음을 부르는 무대]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형사의 수사 기법에 대한 부서장의 논평을 보자. "그 수사 기법은, 습관적으로 자주 사용하라고 권장할 만한 것은 아니로구만. (…) 하지만 이번에는 훌륭한 수사 결과를 이끌어냈고, 그게 무엇보다도 중요한 거야." 그러나 독자에게는 분명 이 말은 정반대로 읽힌다. 결과가 좋다면 다 좋은 것인가? (재밌는 일이지만, 이 물음은 불꽃같은 전개에 비해 결말은 다소 싱거운─물론 그것이 결함이라고 하긴 힘들다─울리치의 순수 서스펜스 작품들을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불의 앞에서 선택을 강요당하는 주인공을 그려내던 울리치는 이 시점에서 불의를 응징하기로 선택한 주인공은 또 다른 불의가 아닌지 판단해보게 만든다.
이 정도만 해도 [밤 그리고 두려움]의 가치는 충분하다. 하지만 "밤은 젊고 그도 젊었다."([환상의 여인]의 첫 문장)로 얘기되는 코넬 울리치의 문장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물론 위의 단편들이 문장력이 떨어지는 작품들은 아니지만 문장력이 서스펜스나 도덕적 갈등에 눌리는 것도 사실이다. 적어도 재즈 시대의 대가 F. 스콧 피츠제럴드를 언급하며 격찬할 수준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다행히, 작품이 하나 더 있다. 3~40년대 작품으로만 엮인 이 단편집에서 유일하게 1970년에 발표된 작품, [뉴욕 블루스(New York Blues)]. 극단적으로 말해서, [밤 그리고 두려움]이 지닌 미덕의 절반 이상이 이 한 작품에 담겨 있다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 호텔방 안에서 찾아오고야 말 뭔가(혹은 누군가)를 기다리며 시간을 보내고 있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이 작품은 코넬 울리치 작품에서 기대할 수 있는 거의 모든 특징들을 포함하고 있다. 시적인 문장, 우울하고 숙명적인 분위기, 치밀한 묘사에서 우러나오는 서스펜스. 가히 잘 쓰여진 문장이 인간의 내면을 어디까지 파고들고 독자를 얼마나 끌고 들어갈 수 있는 가에 관한 명답이라고 할만하다.
국내에 소개된 몇몇 장편을 통해서만 알려진 채 전설의 거장처럼 불려왔던 코넬 울리치의 작품들이 열두 편이나 쏟아진 것은 실로 축하할만한 일이다. 물론 여기 실린 열두 편의 작품 중 열한 편이 비교적 작가 활동의 전반부에 쓰여진 작품들인지라 이것만으로 코넬 울리치의 정수를 맛보았다고 하기는 힘들다. 코넬 울리치 스스로가 최초의 범죄 소설이라고 칭한 [검은 옷의 신부(The Bride Wore Black)]이 1940년에 발표된 것을 생각해보면 이 단편집은 대가의 정수를 눌러 담았다기보다는 오히려 대가의 탄생을 엿볼 수 있는 단편집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히치콕의 미국 시절 영화가 있다고 해서 영국 시절 영화를 버릴 필요가 없듯이, 이 작품들에 만족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없다. 게다가 편집자 프랜시스 네빈스가 쓴 단편 하나 분량의 풍족한 서문이 곁들여졌으니 더욱. (참고로 출판사 측에서는 "단편의 내용이 서문에 언급되기도 하고 글 자체가 워낙 작가, 작품에 대한 상세하고도 넓은 시각을 제공하기에, 만약 울리치의 작품을 처음 접하는 사람이라면 각 단편을 모두 읽고 서문을 읽어도 좋을 듯하다"는 이유로 서문을 책의 맨 뒤에 배치했다. 옳은 말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크게 신경 쓸 필요는 없다는 것이 내 의견이다) 이런 책을 앞에 둔 독자가 할 일은 읽고, 즐기고, 고민하고, 코넬 울리치 작품을 더 소개하고 싶다는 역자 하현길 씨의 바람이 이뤄지기를 기원하면서 주변에 추천하는 일 뿐이다.
덧 하나. 코넬 울리치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들을 감독한 감독들의 이름은 언제 봐도 흥미롭다. 서스펜스의 대가 알프레드 히치콕이나 필름 누아르의 달인 로버트 시오드막, 혹은 필름 누아르 스타일을 통한 공포를 창출한 제작자 발 루튼 사단의 기수 자크 투르네 감독이 있는 것은 그리 놀랍지 않다. 하지만 프랑수아 트뤼포가 코넬 울리치 영화를 두 편이나 만들었다는 것은 누벨바그 감독들의 필름 누아르 애호 기질을 떠올려 봐도 꽤 재밌는 일. 거기다가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의 이름까지 더해지면 새삼 울리치의 세계가 품을(제공할) 수 있는 영역이 얼마나 넓은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덧 둘. 독자에 따라서는 순수 서스펜스 소설을 최고로 치고 경찰물은 힘이 떨어지며 [뉴욕 블루스]를 최악으로 꼽기도 하는 모양이다. 취향차라고 해둘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