헐리웃 문화혁명 - 어떻게 섹스-마약-로큰롤 세대가 헐리웃을 구했나
피터 비스킨드 지음, 박성학 옮김 / 시각과언어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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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적이라고까지 말할 필요는 없겠지만, 60년대 말~70년대 중반까지 할리우드에 찾아왔던 "뉴 아메리칸 시네마"의 시기는 적어도 다시 찾아오기 힘들 굉장히 희귀한 시대였던 것만은 틀림없다. 스튜디오 시스템은 텔레비전의 보급과 기획-투자-제작-배급-상영 수직구조의 해체로 인해 갈팡질팡했고, 고전 할리우드 영화의 세례를 통해 꽃핀 프랑스의 누벨바그/작가주의 이론이 역수입 돼서 감독을 예술가로 인지하게 된 "영화광"들이 등장했으며, 50년대 냉전 속에 가라앉았던 사회 분위기도 베트남전과 68혁명을 통해 달아올랐다.

 그 상황에서 체제를 유지하며 안이한 영화들만 만들던 스튜디오는 도저히 대중들이 뭘 원하는지를 이해할 수 없었고, 1946년에 주당 7,820만 명이었던 관객 수가 1971년에는 주당 1,580만 명으로 떨어졌다. 결국 스튜디오는 스스로를 예술가라고 생각하는 일련의 작가 감독들에게 상당한 무게를 실어줄 수밖에 없었다. 스튜디오 중역들은 이해하지 못했지만, 아무튼 그 젊은이들이 만드는 영화는 관객들이 좋아하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그러니까, "뉴 아메리칸 시네마"는 예술과 자본이 거대한 규모(이게 중요하다. 작은 몇몇 사례에서 예술과 자본이 성공적으로 합작한 경우를 찾아보긴 어렵지 않겠지만 10여년에 걸쳐 문화현상으로 일어난 건 극히 드물 테니)로 합작을 해냈던 시기다. 그리고 그 결과는 그야말로 어마어마해서, 이 시기에 쏟아진 미국 영화사에서 가장 논쟁적인 걸작들은 세기가 바뀐 지금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그 힘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물론 딱 보기에도 불가능해 보이는 이런 현상이 오래갈 수는 없어서, 70년대 말 이 흐름은 마지막 숨을 내뱉고 있었고, "레이건"이 상징이 될 무렵에는 이미 옛 이야기가 돼 버렸다.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가 씨를 뿌리고 스티븐 스필버그와 조지 루카스가 키워낸 대형 배급 체계는 스튜디오를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자본체계로 만들었고, 그 스튜디오가 아직도 할리우드와 전 세계를 장악하고 있으며, 그 흐름이 바뀔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배우였던 로널드 레이건의 처음이자 마지막 악역이 돈 시겔의 〈킬러(The Killers, 1964)〉에 나오는 CEO형 악당이었다는 사실은 참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바로 이 꿈결 같던(물론 꿈이라기보다는 LCD 환각에 가까웠다고 하는 편이 사실에 더 가깝기야하겠지만) 순간을 다룬 책 중에 우리나라에 소개된 책으로는 로빈 우드가 쓴 『베트남에서 레이건까지(Hollywood from Vietnam to Reagan)』와 피터 비스킨드의 『헐리웃 문화혁명 : 어떻게 섹스-마약-로큰롤 세대가 헐리웃을 구했나』(이하 『헐리웃 문화혁명』)가 있다. 전자는 뉴 아메리칸 시네마 시기의 영화들에 대한 성 정치학적 접근을 시도하는 책이며 후자는 이 시기의 영화산업에 발을 담그고 있던 제작자, 각본가, 편집자, 감독 등이 살아간 모습을 그려내는 풍속화에 가까운 책이다. 영화 자체에 대한 통찰을 보고 싶다면 전자가 좋은 선택이다. 성 정치학이라는 어휘가 전달해줄 버거운 무게와는 달리 로빈 우드의 서술은 필요 이상으로 어렵지 않으며(지식이 부족한 독자─바로 나 같은─도 꼼꼼히 읽으면 충분히 그의 논의가 어떤 것인지 이해할 수 있을 정도의 난이도), 그런 서술을 바탕으로 무시당했던 영화들, 특히 공포 영화들의 지위를 복권시키고자 하는 시도를 보는 것은 무척 흥분되는 경험이다. 그러나 두 가지 안타까운 점이 있다면 하나는 1986년에 나온 이 책은 2003년에 개정증보판이 나왔으나 우리나라에는 번역이 되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또 하나는 1986년판의 번역본조차 이미 (좋은 책들의 운명이 그렇듯) 절판되었다는 것이다.

 한편 피터 비스킨드의 책은 영화 자체에는 큰 관심이 없으며 그 영화들을 만드는데, 혹은 핍박하는데 한몫한 사람들의 모습을 담아내는 데에 주력한다. 수많은 인물들의 인터뷰로 이뤄진 이 책은 실로 적나라하기 짝이 없어서, 어떤 인물이 이 책에 등장했다면 그 자체로 이미 그가 꼴사나운 추태를 보인 인간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도 좋을 정도다. (참고로 이 책에는 현대 미국 영화의 중요한 거장들이 엄청나게 등장한다) 게다가 저자는 책머리에서 "따라서 해괴하고 소름끼칠 만한 내용이 반복해서 소개될 것이지만 이 책이 표면을 살짝 긁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할 필요가 있다. 실체를 파악하기 힘든 '진실'은 이보다도 더욱 기이하다."라는 말을 하고 있으니, 가히 복마전의 대문과도 같은 책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다.

 그렇다고 『헐리웃 문화혁명』이 단지 재미 삼아 찌라시용 뒷담화를 엮어놓은 책은 아니다. 만약 이 책이 과격하게 느껴진다면 그건 그만큼 이 책이 뉴 아메리칸 시네마의 할리우드를 잘 담아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생생함 속에서 저자는 (로빈 우드 정도로 공격적이고 노골적이지는 않지만) 이 광기의 시기에 대한 애정과, 더 이상 그런 애정을 보낼 수 없게 된 할리우드의 모습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하고 있다. 특히 이 책은 아서 펜 감독의 1967년 작 〈보니와 클라이드(Bonnie and Clyde)〉에서 마이클 치미노 감독의 1980년 작 〈천국의 문(Heaven's Gate)〉에 이르는 시기를 비교적 연대순으로 다뤄나가고 있기 때문에 갈수록 그런 안타까움과 연민은 짙어져 간다. 그리고 총 14장으로 구성된 이 책의 각 장에는 나름대로 주인공이라고 할 만한 인물들이 설정돼 있기 때문에─이를테면 9장 「1975년, 너드의 화려한 복수」는 스티븐 스필버그가 주인공이다─마치 소설 읽듯 주인공들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읽어나가며 이 시대의 불안함에 흠뻑 젖기도 쉬운 편이다.

 또 한 가지, 우리나라에만 특화된 사항. 『헐리웃 문화혁명』의 한국어판을 이야기할 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다. 바로 번역. 박성학이라는 이름의 역자는 역서와 저서를 통해 미루어 볼 때 영어와 영화에 큰 관심을 가진 사람으로 보이는데, 이 책에서 모든 고유명사를 최대한 원음에 가깝게 표기하는 번역 원칙을 내세우고 있다. 그래서 스콜세지scorsese는 '스콜쎄지'고 아서 펜Arthur Penn은 '아써 펜'인데… 이 정도는 그래도 괜찮다. 하지만 시드니 폴락Sydney Pollack이 '씻니 폴락'이 되고 클린트 이스트우드Clint Eastwood가 '클린트 이스트웃'이 되면 살짝 낯설다. 돈 시겔Don Siegel은 '단 씨걸'이 되고 숀 펜Sean Penn은 '샨 펜'이 되며 제임스 캐그니James Cagney가 '제임스 캑니'가 될 즈음에는 아무래도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그래도 이 정도는 괜찮다. 영화 제목은 더 당혹스럽다. 어떤 영화는 제목의 의미를 번역하고 어떤 영화는 하지 않는다. 그래서 밥 라펠슨의 〈파이브 이지 피시스(Five Easy Pieces, 1970)〉는 〈다섯 가지 쉬운 곡〉이 된 반면 테렌스 멜릭의 〈황무지(Badlands, 1973)〉는 〈뱃랜즈〉가, 스탠리 큐브릭의 〈시계태엽 오렌지(A Clockwork Orange, 1971)〉은 〈클락웍오린지(오'렌'지도 아니다!)〉가 되고 말았다. 그나마 제목의 의미를 옮긴 것도 항상 좋은 것은 아니어서, 피터 보그다노비치(물론 이 책에서는 복다노비치다)의 〈페이퍼 문(Paper Moon, 1973)〉이 〈종이달〉이 되거나 세르지오 레오네의 〈석양의 무법자(Il Buono, Il Bruto, Il Cattivo, 1966)〉가 〈선인과 악당, 그리고 추물〉이 된 건 좀 심했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더 심한 건, 영어 단어의 의미를 충분히 담아낼 수 있는 번역어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일반 명사를 그대로 옮긴 경우도 있다는 거다. shlock이 '쉴락'으로, suite이 '수잇'으로, boulevard가 '불러바드'로 표기된 게 그와 같은 예다. 불러바드하니까 생각나는 건데, 일반 명사 번역은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문장은 다음과 같았다.

 70년대는 또한 (중략) 헐리웃을 가썸으로 변모시킨 시대이기도 했다.

 대체 가썸이 뭘까? 다행히 영어 표기가 병기되어있다. Gotham이다. 배트맨 시리즈의 무대가 되는 그 고담시 말이다. 문장 구조를 따지기 전에 역어 선택이 이런 식이다보니 아무래도 이 책을 읽는 게 그렇게 쉬운 일만은 아니다. (그리고 문장도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니다)

 그리고 이 책을 읽는 일을 더 어렵게 하는 건, 보다 근본적인 문제인데, 이 책이 다루고 있는 범위, 혹은 이 책이 구성된 방식이다. 70년대 할리우드에서 날리던 사람들은 죄다 등장한 책이라서 등장인물의 수가 어마어마한데, 그나마도 서양인들 이름이 흔히 그렇듯 때에 따라 이름으로 표기되기도 하고 성으로 표기되기도 한다. 그리고 비록 각 장에 주인공들을 배치해두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연대순 서술을 지향하다보니 마틴 스콜세지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로만 폴란스키 이야기를 넣는 등 다소 난삽한 구성을 보여주는데, 이 때문에 등장인물들의 이름을 주워 담기 힘든 경우가 빈번히 발생한다. 다행히 권말에 수록된 목차는 이 어려움을 어느 정도는 덜어주지만 6백 페이지가 넘는 책의 권말 목차를 자주 뒤적이는 것도 좋은 독서 방식이 되기는 힘들다. 아마 어느 정도는 주인공들 외의 인물들을 무시하고 읽어야 할 텐데, 그래도 워낙 이 사람 저 사람이 교차되어 등장하다보니 신경이 쓰이는 게 사실이다.

 이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헐리웃 문화혁명』은 읽어볼 만한 책이다. 뉴 아메리칸 시네마를 경외의 눈길로 쳐다보던 (나 같은) 사람에게는 보다 균형 잡힌 시선을 제공해 줄 것이고, 현대 할리우드의 팍팍한 스튜디오 시스템에 진절머리 내던 사람에게는 할리우드가 거의 유일하게 자유로웠던 시기의 즐거움을 제공해줄 것이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역자 박성학의 원어 살리기 번역 원칙이 한 가지 빛을 발하는데, 바로 욕설 번역이다. 이 책은 욕설 번역만큼은 타의추종을 불허한다. 물론 어느 정도 타협을 하는 곳도 있긴 하지만 그래도 전체적으로 "씨팔"은 일상어처럼 들릴 정도다. 자, 이 책에서 인용된 우리의 서부 영웅 존 웨인의 대사 한 토막 들어보시라.

 "그 발그레한 하퍼 새끼 어디 있나? 그 염병할 날파리 개백정 같은 새끼가 UCLA에 가서 내 가녀린 딸들 앞에서 '똥'과 '좆빨기'라구 씨부렁거렸어. 내 이 씹새끼를 도륙을 낼 모양이다. 이 빨갱이 새끼 어디 숨었냐?"

 읽어보면 알겠지만 단순히 욕설을 잘 번역한 것뿐만 아니라 이 시기의 미치광이들이 했음직한 어투를 상당히 잘 살렸다. 워렌 비티(물론 이 책에서는 '베이티'다)가 〈보니와 클라이드(물론 이 책에서는 '바니와 클라잇'이다)〉의 각본을 읽은 뒤 각본가들에게 출연하겠노라고 말하는 대목에서 "다 읽었소."가 아니라 "내 다 읽었시다."라고 번역하는 식으로. 책의 상당부분이 실제 대화를 인용하는 것으로 구성된 만큼 이런 번역은 뉴 아메리칸 시네마의 분위기를 전달하는 데 큰 몫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 공기를 한껏 들이마신 상태에서 이 시기에 혜성처럼 등장한 인물들이 어떻게 위태위태한 방식으로 큰 성공을 거머쥐었는지, 그리고 어쩌다가 그 성공에 도취되어 몰락의 길을 걸었고 할리우드가 지금과 같은 꼴이 되었는지를 보는 것은 달곰쌉쌀한 경험이 될 것이다. 아무래도 상황이 상황인 만큼, 이 책의 후반부는 아스라한 한숨과 눈물 없이는 보기 힘들다. 주인공들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는 게 그 눈물을 더 진하게 만들고. 조지 루카스가 주인공인 제11장, 「1977년, 스타벅스」의 마지막 두 페이지에 실린 내용 중 인물의 증언만을 들어보자.

 〈스타워즈〉가 나타나고 스필버그가 나타났다. 우리에겐 종말이었다.

- 마틴 스콜세지 : 〈택시 드라이버〉의 감독

 내가 USC에 다닐 때 사람들은 〈확대〉에 몰려들었고 테마 파크의 탈 것 같은 값싼 오락에 취하려고 극장에 가지 않았다. 그러나 (루카스와 스필버그가) 훨씬 많은 돈을 벌 수 있음을 증명해냈고 스튜디오들은 이에 저항할 수 없었다. 고대 로마시대처럼 이런 식으로 부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아무도 하지 못했다. 이건 확실히 그들 덕분이다.

- 존 밀리어스 : 〈지옥의 묵시록〉의 각본가

 〈스타워즈〉는 테이블에 놓인 판돈을 싹쓸이했다. 〈스타워즈〉는 맥도널드가 나타나자 훌륭한 음식을 위한 입맛이 증발한 것 같은 현상이다. 우리는 이제 퇴화의 시대에 살고 있다. 모든 것이 뒷걸음질하여 커다란 빨판구멍 속으로 사라졌다.

- 윌리엄 프레드킨 : 〈엑소시스트〉의 감독

 〈스타워즈〉는 영화산업을 죽이지도 유아화하지도 않았다. 팝콘 영화는 언제나 산업을 지배해왔다. 만약 이런 영화가 훌륭하지 않다면 사람들은 왜 팝콘 영화에 몰려들겠는가. 대중들을 왜 그렇게 멍청하다고 생각하는가? 이것은 내 과오가 아니다. 나는 스티븐처럼 사람들이 보고 싶어하는 것을 이해하고 이를 추구할 뿐이다.

- 조지 루카스 : 〈스타 워즈〉의 감독

 사람들은 영화산업의 생태계, 돈을 벌지 못하는 작은 영화를 지원하기 위해서 엄청난 돈을 벌어들이는 영화가 필요한, 영화산업에 존재하는 공생관계의 고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쉽게 잊어버린다. 〈스타워즈〉가 벌어들인 15억 달러의 돈 중 절반 정도인 약 7억 달러가 극장주들에게 돌아갔다. 그리고 이 돈으로 극장주들은 무엇을 했는가? 그들은 멀티플렉스를 건설했다. 이들에게 여러 개의 가용화면이 생겼다는 사실은 이를 채워야 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과거에는 찾을 수도 없는 곳에 자리잡은 작은 극장에서 상영되던 예술영화가 갑자기 주류 극장에서 상영되고 돈을 벌기 시작한다. 그리고 일단 이러한 영화들이 돈을 벌기 시작하면 미라맥스와 파인라인이 성장하고 스튜디오들이 이러한 영화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여 미국에서 20년 전에는 존재하지도 않던 예술영화 산업이 번창하게 된다. 나는 헐리웃 영화산업을 파괴했다. 이것은 영화를 보다 유아적이 아니라 오로지 보다 지성적으로 만들어 가능해진 것이다.

- 조지 루카스

 블락버스터는 다른 영화들을 후원하지 않는다. 그게 전부다. 영화를 통해 할 말이 있는 사람은 50달러에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 그들은 모든 것을 질식시켰다.

- 마틴 스콜세지

 지난 여름 볼 만한 영화를 찾으려고 베벌리힐즈에 있는 멀티플렉스 두 곳에 갔다. 화면들은 모두 〈잃어버린 세계〉, 〈칸에어〉, 〈친구의 결혼식〉, 〈페이스 오프〉가 점령하고 있었다. 지성적인 사람이 '저걸 봐야겠군'이라고 생각할 만한 영화는 단 한 편도 없었다. 극장은 이제 대형 위락공원으로 변해버렸다. 영화는 죽었다.

- 로버트 알트만 : 〈내쉬빌〉의 감독

 오늘날 나는 미국 영화산업에 구역질이 난다. 좋은 영화는 너무나 드물고 적어도 나의 일부는 〈스타워즈〉가 부분적으로 영화산업에 이러한 방향을 제공한 책임이 있다고 믿기 때문에 나는 이 상황이 정말 유쾌하지 않다.

- 마샤 루카스 : 〈스타 워즈〉의 편집자. 조지 루카스의 아내

 로버트 알트만의 발언에 대해 할 말 있는 사람들이 많겠지만, 아마 알트만은 정말 볼만한 영화가 단 한 편도 없다고 말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오늘날의 할리우드에 뉴 아메리칸 시네마의 강렬함을 계승한 영화가 한 편도 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 하지만 그런 영화들이 거뜬히 박스오피스 1위에 오르며 시류를 휘어잡는 시대가 사라진지 오래인 것도 사실이다. 어쨌든 2005년까지도 승자는 〈스타 워즈 에피소드 3-시스의 복수(Star Wars Episode III-Revenge of the Sith, 2005)〉였다. 저자 피터 비스킨드는 이 시대를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이들(현대의 새로운 작가들, 올리버 스톤, 코엔 형제, 쿠엔틴 타란티노 등을 가리키고 있다-옮긴이 주)에게 자양분을 공급할 반문화 없이, 그리고 저항적 가치의 뒷받침 없이 독립이란 이름만의 독립이며 스튜디오들은 언제나 이들을 삼키고 부패시킬 위험이 있다. 루카스가 상상하듯 독립 영화들이 미국 전역에 있는 멀티플렉스에서 상영된다면 멋진 일이라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루카스는 최근 지역 멀티플렉스에 있는 여섯 개의 화면이 모두 〈잃어버린 세계〉, 또는 그와 유사한 영화를 상영하는 것이 현실인 샤핑몰에는 가보지 않은 것 같다. 불행하게도 이 이야기는 해피엔딩이 아닐 수도 있고 마지막 문장이 알트만의 말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에 의하면 "그림을 그리듯 영화를 완성하여 길모퉁이에 서서 1달러에 팔다보면 지치게 된다. 간혹 〈파고〉 같은 작품도 등장하지만 어쨌거나 잔돈푼으로 영화를 만들고 아무 보상도 받지 못한다. 이는 영화산업을 위해서는 재앙이며 영화예술을 위해서도 재앙이다. 나는 어떤 종류의 낙관적 견해도 가지고 있지 않다."

 다르덴 형제의 최신작 〈더 차일드(L'Enfant, 2005〉를 보기 위해서는 아무데나 널려 있는 멀티플렉스가 아니라 서울의, 광화문의, 씨네 큐브라는 극장에 가야만하는 나라에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 나는 피터 비스킨드의 말이나 로버트 알트만의 말에 반박하지 못한다. 『헐리웃 문화혁명』의 애잔함이 21세기 한국의 독자에게도 유효한 가장 큰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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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하던 새들도 지금은 사라지고 행복한책읽기 작가선집 2
케이트 윌헬름 지음, 정소연 옮김 / 행복한책읽기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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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편의 대가들이 펼쳐내는 솜씨를 맛볼 때는 두 번 놀라게 된다. 처음에는 작품을 읽어 나가면서 그 거칠 것 없는 속도에 놀라게 되고, 다음에는 작품을 다 읽고 나서 그 무자비한 속도 속에서도 필요한 모든 내용은 다 들어있었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즉, 대가들의 중편에서는 단편의 쾌속 무비함과 장편의 유장함 모두를 기대할 수 있다. 안타까운 것은, 중편 걸작들의 출간 정도는 그 만족감과 반비례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 그 길이 때문에 단행본으로도, 엮어내기도 좀처럼 쉽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기에, 케이트 윌헬름의 작품 『노래하던 새들도 지금은 사라지고』의 출간은 더할 나위 없이 반갑고, 축하해야 마땅할 일이다.

 물론 『노래하던 새들도 지금은 사라지고』는 300여 페이지 분량의 장편으로 소개가 되었고, 휴고상이나 로커스상 역시 장편 부문에서 수상한 작품이지만, 역자가 밝힌 그 집필 과정을 보면 처음에는 현재의 1부에 해당하는 「아름답게 노래하던 새들도 지금은 사라지고」만이 발표되었다가 그 뒤에 2부 「셰난도아」와 3부 「정점에서」가 덧붙여져 장편이 된 작품이다. 각 부는 중편 소설 한 편의 길이에 해당하며, (지금은 절판되어 전설이 돼 버린) 시어도어 스터전의 『인간을 넘어서』와 마찬가지로 각 부는 나름의 독자적 완결성을 갖춘 상태에서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다. 물론 이 느슨하다는 표현은 애초에 한 덩어리로 나온 다른 장편 소설들에 비해서 그렇다는 것이며 각 부가 명백히 일관적인 정서를 타고 흘러가기에, 결국 『노래하던 새들도 지금은 사라지고』를 읽는다는 것은 세 편의 훌륭한 중편과 한 편의 훌륭한 장편을 동시에 읽는 일이 될 것이다.

 이 "인류학적 포스트-홀로코스트 SF"의 중점, 혹은 작가의 뛰어난 솜씨는 1부 「아름답게 노래하던 새들도 지금은 사라지고」의 1장, 좀 부족하면 2장까지만 읽어봐도 분명히 드러난다. 주인공 데이비드의 어린 시절을 서술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인류 멸망의 전조를 포착한 데이비드의 가문이 생명 복제 연구를 시작하는 내용까지를 담고 있는 이 두 장(章) 속에서, 케이트 윌헬름은 작품의 중점을 잘 보여준다. (여전히 선입견 가진 독자들에게서 종종 발견되는) SF의 "S"에 대한 두려움을 불식시키기라도 하듯, 작가는 작품의 기반이 되는 생명 복제 "기술"에 집착하지 않는다. 오히려 펜이 더 많이 가 있는 부분은 데이비드가 어린 시절 겪어야 했던 일화들이다. 심지어 작품의 과학적 배경 설명에 대부분을 할애하고 있는 2장조차도, 인상에 남는 것은 그 마지막 끝맺음이다. "저기 언덕 위 좀 보세요. 말채나무가 곧 꽃을 피울 것 같네요. 벌써 나온 꽃봉오리도 있어요."라는 데이비드의 말은, 그가 과거 집을 떠날 때 할아버지에게 들었던 "나는 네가 우리를 미쳤다고 생각하며 떠날 것을 안다. 하지만 데이비드, 넌 돌아올 거야. 말채나무 꽃이 피기 전에 돌아오겠지. 네 눈에도 조짐이 보일 테니까."라는 말을 강하게 환기시킨다. 여기서 직접적으로 와 닿는 것이 데이비드가 돌아와야 했던 이유, 즉 인류의 절멸을 예고하는 위협이 아니라, 시간을 넘어서서 자연을 통해 이어지는 할아버지와 손자의 어떤 연결 고리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케이트 윌헬름은 SF의 "S"가 야기하는 변화 자체가 아니라 그 변화 속에서도 이어지는 인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따라서 "재난 이후의" 이야기라는 데에서 해볼 수 있는 예상과는 달리, 이 작품에서 중요한 것은 재난 이후의 공간이 아니라 재난 이후의 시간이라고 하겠다.

 글머리에 언급했던 것처럼, 이 작품이 중편 소설로서 취하고 있는 빠른 전개 속도는 바로 그 시간의 흐름을 충실히 담아내면서도 동시에 인간적인, 혹은 자연적인 지점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기능을 한다. 한 장과 다음 장 사이의 시간 간격, 심지어 한 페이지와 다음 페이지 사이의 시간 간격조차 크게 벌려두는 형식은 일견 이 작품을 냉혹하고 건조한 하드보일드 소설처럼 보이게까지 하지만, 냉정한 관찰과 조심스러운 절제는 다른 것이다. 케이트 윌헬름의 방법론이 후자라는 것은 이 무자비할 정도로 빠른 전개 속도 속에서도 작은 에피소드, 혹은 그 에피소드 속에서 마주치게 되는 자연 풍경을 묘사하는 지점에서는 아낌없이 유려한 필치를 선보인다는 점에서 확신할 수 있다. 특히, 내용을 밝힐 수는 없지만, 1부의 결말에서 우러나오는 뭉클함 역시 그 동안 절제해뒀던 감정들을 냉정한 대사 몇 마디와 자연에 대한 묘사를 대비하여 탁 풀어놓음으로써 이뤄지고 있으니, 이쯤 되면 클론이고 뭐고 간에 SF도 결국은 과학 자체가 아니라 과학을 이용해서 인간을 발견해내는 고유의 미덕을 지닌 예술품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나는 과거 테드 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에 관한 이야기를 하며 밝힌 바처럼, SF의 진정한 즐거움 또한 바로 그 냉혹하고 삭막할 것 같은 과학이 인간 존재를 들여다보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이며, 바로 그 상이한 두 대상을 훌쩍 뛰어 연결해내는 것이야말로 소위 SF의 "경이감"이 아닌가 생각해 보는데, (물론 방법론은 다르지만) 케이트 윌헬름의 『노래하던 새들도 지금은 사라지고』 또한 그런 즐거움, 경이감을 충실히 전달해주는 작품이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어쩌면 이 작품을 읽게 될 독자들 중에는 "내 인생의 책" 혹은 "내 인생의 작가"가 하나 더 늘었다는 기쁨까지도 함께 얻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나 또한 그런 심정임을 밝히는 데에 한 점 망설임도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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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의관 1 - 법의관 케이 스카페타 시리즈 15
퍼트리샤 콘웰 지음, 유소영 옮김 / 노블하우스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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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내가 추리소설을 읽을 때 사용하는 (지극히 자의적인) 구분법은 '레이먼드 챈들러 이전/이후'다. 챈들러 이전(BC)과 말로 이후(AM)라고나 할까. 이 구분법은 전적으로 내 빈약한 추리소설 독서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2003년에 (박찬욱 감독이 언급했다는 이유만으로 절판된 녀석을 출판사에 전화까지 해서 애써 구해서) 읽었던 페터 회의 『눈에 대한 스밀라의 감각』이 시발점이었다. 사건을 자꾸 부풀리고 인물도 계속해서 추가되는 그 복잡한 플롯 속에서 길을 헤매며 가까스로 작품을 다 읽었을 때, 나는 분명히 이 작품이 기존에 읽었던 아서 코난 도일이나 모리스 르블랑, 혹은 애거서 크리스티의 작품들과는 어딘가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2004년에 북하우스에서 출간을 시작한 레이먼드 챈들러의 필립 말로 시리즈를 보고 나서 그 느낌은 좀 더 분명해졌다. 작품들이 추리소설로서의 추리 구조 외에 다른 것을, 주인공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을 담아내려고 하고 있다는 느낌.

 그게 아마도 장르가 자의식을 갖게 된 일종의 분기점 같은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한 장르가 자신이 갖추고 있는 아이콘과 플롯, 이야기 방식 등을 엮어내는 즐거움 속에서 노닐다가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 그렇게 놀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그런 순간이 있다. 내가 지금까지 왜 이렇게 놀고 있었을까, 나는 왜 이런 놀이 방식을 좋아하는 걸까, 기타 등등. 자기 행동에서 의미를 찾아가기 시작하는 것, 그것이 장르가 겪게 되는 성장이라고 본다(물론, 사람의 발달 과정과 매우 흡사하다. 신생아들은 외부 환경이 가져다주는 자극에 익숙해진 다음에야 자신을 인식하지 않던가). 한 장르의 맥이 완전히 끊겨버리지 않는 한, 후대의 작가들은 선대의 작품들 위에서 자라나기 마련이며, 따라서 장르가 '자신을 돌아보는', 이 성장 과정은 필연적인 듯 하다.

 그리고 특히 수많은 장르들 중에서도 추리소설의 성장 과정은 무척 흥미롭다. 그것은 아마도 이 장르가 다루고 있는 '범죄'라는 요소가 사회 탄생 이래 단 한 번도 떨어져 본 적이 없는, 인간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기 때문인 듯 하다. 추리소설의 자기의식이 강해져 감에 따라, 이 장르는 점차 사람과 사회를 담아내는 데에 능숙해지고 있다. 아서 코난 도일의 시기만 해도 '아편쟁이 홈스' 운운하며 독자들에게 사소한 즐거움을 던져주는 정도의 요소에 불과했던 추리소설의 '캐릭터'는 이제 더 이상 범죄를 수사하는 역할을 맡는 데에 그치지 않고 사건과 관련을 맺는 유기적인 구성요소로서 존재하게 된다. 스밀라(『눈에 대한 스밀라의 감각』), 해리 보슈(마이클 코넬리의 해리 보슈 시리즈. 우리나라엔 『블랙 에코』와 『블랙 아이스』밖에 소개되지 않았다), 쿠르트 발란더(헤닝 만켈의 쿠르트 발란더 시리즈. 좋은책만들기 출판사를 통해 이 시리즈의 중요한 작품들 몇 편이 소개되었다) 등의 '탐정'들과 사건 사이의 거리는 셜록 홈스나 에르퀼 푸아로의 그것보다 훨씬 더 가깝다. 객관적인 관찰자, 해결사, 장르를 즐기는 태도… 오늘날의 추리소설들은 그런 것들을 상당부분 벗어던지고 있다.

 장르 이야기가 이토록 길었던 것은, 이번에 읽게 된 퍼트리샤 콘웰의 케이 스카페타 시리즈 제1작인 『법의관』이 바로 그러한 현대 추리소설의 특징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법의관』은 추리소설의 장르적 특징에도 충실한, 추리소설다운 추리소설이다. 역자 유소영 씨가 역자 해설에서 언급한 것처럼, 주인공인 버지니아 주 법의국장 케이 스카페타는 법의학자로서의 전문 지식을 최대한 동원하며 사건을 논리적으로 파헤쳐 나가는 20세기(본작은 1990년에 발표되었다)의 셜록 홈스와 같은 인물이다. 단서를 중심으로 사건의 구조를 밝혀내고 전체의 얼개를 그려내는 과정은 충분히 설득력 있게 제시되고 있다.

 그러나 『법의관』을 짜임새 있는 추리소설 이상으로 만드는 것은 이 소설이 담고 있는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력이다. 케이 스카페타는 더 이상 전대의 명탐정들 같은 '사고기계'가 아니다. 사건에 대한 수사 내용만큼이나 전면에 부각되고 있는 그녀의 삶은 독자들에게 단지 캐릭터에 대한 자그마한 즐거움(셜록 홈스가 코카인 상용자라는 사실이 셜록키언들에게 제공해주는 것과 같은)을 제공해주는 데에 그치지 않고 작품 전체의 내용과 맞물려가며 소설이 담고 있는 삶의 모습을 깊이 드러낸다. 연쇄 살인 사건의 네 번째 피해자이자 이 작품의 도입부에 등장하는 로라 피터슨의 살해 현장에서 그녀가 자신처럼 의사였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동질감을 느끼게 된다. 이런 케이의 모습은 이후 작품 속에서 여러 번 등장하면서 그녀가 범죄를 마주하며 느끼는 두려움과 분노를 보여줌과 동시에 사건 해결의 열쇠가 되기도 한다. 조카인 루시와의 관계도 마찬가지. 자식에게 무책임한 동생 대신 잠시 루시를 맡고 있는 케이는 사건을 수사하는 중간 중간 계속해서 조카를 의식하며 그녀와의 관계 맺기에 주의를 기울인다. "장미꽃에 양분을 공급하는 것은 토론이 아니며, 인간관계의 기반은 논리가 아니다. 나는 지성과 이성이라는 벽 뒤로 숨어버리는 것은 타인의 행복을 희생하여 자기 보호를 꾀하는 비겁한 행동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와 같은, 뼈를 저리게 하는 문장 속에서 이뤄져 가는 케이와 루시의 관계는 타인에 대한 이해의 과정에서 오는 잔잔한 즐거움을 제공해주는 동시에 사건의 전개와도 깊은 연관을 맺게 된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타인을 이해한다는 측면에서 특히 나를 감탄하게 했던 것은 저돌적인 형사 마리노가 아내가 죽은 지 몇 시간도 되지 않아 유창하게 진술을 하는 모습을 보고 의심하자 케이가 그 남편을 옹호하며 했던 말이었다. "그에게는 세상이 다 언어예요, 마리노. 미술가라면 그림을 그려줬겠죠. 피터슨은 말로서 그림을 그려준 거라고요. 그게 그 사람의 존재 방식이고 표현 방식이에요. 오로지 언어를 통해서. 이런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한다는 것은 그것을 언어로 표현하는 것과 다르지 않아요." 실로 심장과 폐부를 꿰뚫는 통찰력이 아닌가! 이런 말은 쉽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음성 언어와 문자 언어로 자신을 드러내는 일을 곧잘 하는 사람들이라면 케이의(혹은 콘웰의) 이 말 한 마디가 타인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 얼마나 깊은 지점을 건드리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이 작품이 '스릴러'임을 생각해 본다면 퍼트리샤 콘웰이 얼마나 글을 잘 쓰는 작가인지 실감이 날 듯 하다. 정교하고 복잡한 추리소설의 구조를 엮어내고, 그 속에서 인간에 대한 깊이 있는 시선을 유지하고, 출간 당시에는 생소한 영역이었던 법의학에 대한 전문적 지식을 알기 쉽게 제시하면서, 스릴러로서의 속도감까지 가꿔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콘웰은 그 쉽지 않은 일을 성공적으로 이뤄냈다.

 1990년에 시작된 이 시리즈를 이제야 제대로 만나게 됐다는 것이 아쉽게 느껴질 법도 하지만 나는 오히려 이제부터 접하게 될 케이 스카페타 시리즈에 대한 기대감 때문에 아쉬움을 느낄 겨를이 없다. 아무쪼록 노블하우스 출판사의 시도가 성공적으로 이뤄지길 간절히(정말 간절히 빌어야 한다. 그간 시장성 부족을 이유로 중도하차하는 시리즈 번역물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바란다.

 

 덧. 『법의관』은 두 권으로 분권 출간되었으며, 케이 스카페타 시리즈 제2작인 『소설가의 죽음』 역시 두 권으로 분권 출간되었다. 노블하우스의 분권 정책에 대해서는 여러 이야기가 오가고 있는데, 무조건 잘게 쪼개놓고 사 보라고 하는 밉살맞은 출판사들과 달리 노블하우스는 이 문제에 대한 견해를 밝히는 데에 주저함이 없어서 무척 반갑다. 『법의관』 이하 이 출판사의 분권에 관한 최근의 토의를 보시려면 국내 유명 추리소설 홈페이지인 HOWMYSTRY.COM의 자유게시판 2004년 12월 5일자 글과 그 글에 달린 여러 덧글들을 확인하시길. 주소는 다음과 같다.

http://www.howmystery.com/zeroboard/zboard.php?id=c1&page=7&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1332

 개인적으로 역시 분권은 싫어하는 입장이지만 출판사가 독자들과의 교류를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의사교환에 앞장선다면 (마음 넓은 나로서는) 이해해주고도 남는다. 분권과 별개로, 책의 판형과 표지 디자인, 종이질과 무게 모두가 마음에 들었다. 편집의 경우 더 빡빡한 편집을 원하는 사람도 있을 법 하다. 내 경우는 시각적으로 헐렁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아서(내가 페이지 당 줄 수가 줄어들고 글자 크기가 커지는 경향에 불만을 품는 이유는 물론 페이지 수가 늘어나 책값이 비싸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그게 시각적으로 헐렁해 보여서 종이를 낭비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별 불만이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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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wup 2005-10-13 1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 처음으로 읽어보는 작가라... 내용에 관한 것은 흐릿하게 보구요. 전반적인 평은 '제대로' 읽었습니다. 빽빽한 데도 아주 잘 읽히는 리뷰입니다.
 
갱스 오브 뉴욕 (2disc) - 아웃케이스 있음
마틴 스콜세지 감독,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외 출연 / 엔터원 / 2007년 8월
평점 :
품절


 포스터에 적힌 한 줄의 문구. AMERICA WAS BORN IN THE STREETS. 아아, 이 문장만큼 마틴 스콜세지를 극명하게 드러내주는 말이 또 어디 있을까? 어쩌면 스콜세지는 정말로 〈갱스 오브 뉴욕〉을 통해 자기 영화 인생의 토대를 다듬어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미 여러 편의 영화(그것도 대부분이 수작의 경계를 가볍게 뛰어넘고, 몇 편은 걸작의 반열에 올라버린)를 통해 뉴욕의 ‘거리’를 전면에 드러낸 그로서도, ‘태초의 뉴욕’을 다섯 개의 거리가 만나는 구역, 파이브 포인츠를 통해 그려낸다는 계획은 정말이지 저항하기 힘든 유혹이었을 것이다. 19세기 중반의 뉴욕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곧 토박이들과 이주민들, 남북 전쟁-흑인-정부, 분화되어가는 계층, 그 모든 모습을 담아내겠다는 것이었으며, 제대로만 된다면 사실상 미국의 창세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터. 아카데미가 또 상을 안준다 한들 무슨 상관이랴. 세기의 걸작 냄새가 물씬 풍기는데.

 사실, 모든 아이템은 다 갖춰져 있었다. 암스테르담(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과 빌(다니엘 데이 루이스)의 세계, 다시 말해 파이브 포인츠 갱들의 세계를 굳건히 다져내는 것만으로도 이 모든 요소를 다룰 수 있었단 말이다. 암스테르담과 빌의 대립은 이주민들과 토박이들의 대립이었고, 중국인, 흑인들을 포함한 이주민들을 모두 배척하면서 파이브 포인츠를 지배하는 빌의 갱들은 곧 남북전쟁 중인 정부의 대립항이었다. 그런가하면 그 와중에 유권자들의 표를 얻기 위해 갱들과 결탁하는 정치인들은 파이브 포인츠와 떨어진 번화가에서 살아가는 부유층이었고. 그러니까, 암스테르담과 빌의 세계 속에서 벌어지는 갈등 요소를 긴밀하게 다뤄낸다면 구태여 팔을 두르며 온갖 아이템을 끌어 모으려고 하지 않더라도 자연히 계획은 성공할 참이었다.

 그리고 마틴 스콜세지는 그런 걸 정말 잘 한다. 움직임 많기로 악명 높은 스콜세지의 카메라는 그렇게 사람들 사이를 휘저으며 파고들어, 이야기의 주인공들을 언제나 한 사람의 개인이 아니라 그가 몸담고 있는 세계에 대한 대유법으로서 존재하게 했다. 물론 인간이 사회적 존재인 이상 모든 등장인물은 그가 몸담고 있는 사회를 드러내기 마련이지만 스콜세지 정도로 깊고 넓게 그 작업을 행하는 이가 얼마나 되랴.

 〈갱스 오브 뉴욕〉에서도 그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아주 작심하고 돈을 퍼 부어서 지은 19세기 뉴욕의 세트(죽인다!) 속에서 영화는 정말 ‘창세기’의 뉴욕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눈이 쌓인 천국의 광장에서 벌어지는 토박이 파와 죽은 토끼 파의 혈투를 그려낸 오프닝부터가 보는 이의 눈과 귀를 흠씬 두들겨 패서 끌고 들어간다. 많은 이들이 엔딩 크레딧에서 흘러나오는 U2의 주제가 ‘The Hands That Built America’를 두고 칭송했지만 오프닝의 BGM 사용은 사실 그 이상이었다. ‘프리스트’ 발론(리암 니슨)이 이끄는 죽은 토끼 파의 박진감 넘치는 등장과, 전투가 시작되며 울리는 기묘하게 현대적인 음악 및 점점 빨라지는 컷 속에서 흩뿌려지는 피를 보고 있자면 거의 돌아버릴 지경이 된다. 이런 박력과 몰입은 절대, 저얼대, 저얼대로 물량 공세로 되는 게 아니다(자연히 〈브레이브 하트〉의 평원 회전과 〈반지의 제왕〉의 오프닝을 떠올리게 된다… 감히 고백하자면, 열등 비교를 위해서!).

 그 후에도 영화는 암스테르담에게 초점을 맞춰 일사천리로 진행되면서, 동시에 꼼꼼하게 주변을 담아낸다. 그가 막 출소해서 본토에 발을 디디는 장면은 이주민들에 대한 토박이들의 경멸과 분노를, 그가 친구 자니(헨리 토마스. 이 배우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E.T.〉의 엘리엇이다)를 만나 불타는 집을 터는 장면은 소방 기관 하나 없는―무정부 상태에서 힘의 논리에 의해 움직이는 뉴욕의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중반부 ‘도살자’ 빌과 정치꾼 트위드(짐 브로드벤트)가 부두에서 불화를 일으키는 장면은 사실상 영화의 핵심을 몽땅 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정부상태의 지배자인 갱과 타협하려드는 정치인들, 그 옆에서 막 이민 온 사람들, 급료 제공을 내세우며 이주민들을 입대시키려 하는 정부, 꼬임에 넘어가 군복을 입고 배를 타는 그들의 머리 위로 지나가는 전사자들의 관. 한 테이크에 이 모든 것을 담아내면서, 스콜세지는 〈갱스 오브 뉴욕〉에 퍼부은 자신의 야심을 명백히 드러낸다. 그리고 물론, 그 야심은 충분히 매혹적이고.

 익히 알려진 다니엘 데이 루이스의 연기는 ‘포스트 드 니로’ 운운하는 게 이해가 될 뿐만 아니라 사실 어떤 면에선 드 니로보다 더 매혹적이며(칼 던지기 시퀀스에서 그의 연기는 정말… 아아…), 어쩐지 싫었던 〈타이타닉〉 이후 꾸준히 미움 받고 있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조차 멋진 연기를 펼쳐 보인다. 그 외의 조역들도 충분히 좋은 연기를 하고 있고.

 무엇보다도 마음에 드는 건 결말인데, 스콜세지는 그렇게 두 시간 반 넘게 쌓아온 두 중심인물들의 세계를 한 방에 박살낸다. 사실 중심인물의 세계가 그 동안 스리슬쩍 얽혀왔던 주변세계에 의해 무너지는 건 여타 영화에서도 쉬이 볼 수 있는 설정이지만(갱들은 대게 그렇다) 특히나 〈갱스 오브 뉴욕〉의 라스트가 도발적인 것은 그런 설정이 단순히 무너진 주인공들에 대한 연민이나 운명적인 비극의 힘으로 느껴지기 보다는 뉴욕, 혹은 미국에 대한 처절한 풍자처럼 다가오기 때문이다. 핏물이 질척이는 토박이 파와 죽은 토끼 파의 세계, 그토록 공들여 쌓은 갱들의 세계, 그 원초적인 갈등과 폭력이 더 거대한 폭력, 정부의 폭력과 세월의 폭력 속에서 삽시간에 스러지며 덮여버리는 이 라스트는, 그래서 결국 끊임없이 미국 세계 아래 ‘거리’가 있음을 지적해왔던 스콜세지 테마의 결정판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반전(反轉) 영화’라는 게 정말 있다면(이라고 말하는 건 내게 이 개념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기 때문인데) 〈갱스 오브 뉴욕〉이야말로 그 중에서도 최고로 꼽혀야 하는 영화가 아닐까.

 …라고 말하고 이 글을 마칠 수 있다면 나도 정말 좋겠다. 그러나 여전히 사람들은 〈성난 황소〉가 (물론 취향에 따라서는 〈택시 드라이버〉나 〈좋은 친구들〉, 뭐 기타 등등이) 마틴 스콜세지의 최고작이라고 말하고 있으니, 아무래도 이야기를 여기서 마치긴 곤란할 듯 하다. 그래. 솔직히 말해서 이것은 그의 최고작이 아니다. 야심도 있었고, 능력도 됐고, 제반 여건도 대부분 따라줬지만, 어쨌든 결국 지금의 〈갱스 오브 뉴욕〉은 부족하다.

 제작을 맡은 미라맥스의 하비 와인스타인은 스콜세지가 내놓은, 네 시간 반이 넘는 편집본을 보고 얼굴을 찌푸렸고, 결국 스콜세지는 “그럼 대신 DVD는 열두 시간짜리로 할 테다!”라며 극장판을 두 시간 46분으로 편집해서 내놓고 말았다. 그러니까, 난 감독이 원래 계획했던 것에 비해서 약 두 시간이 부족한 버전을 본 것이다. 세상에, 두 시간이라니! 영화 한 편 분량이 없어졌다! 그리하여 아무리 뛰어난 연출력을 선보이며 19세기 뉴욕의 다양한 요소들을 겹쳐 넣었더라도 결국 영화 속의 고리들은 느슨해져 버린 것이다. 암스테르담과 빌이라는 인물들은 어느 정도 명확하게 구축되었지만 그들과 바깥세상을 연결해줄 끈은 사라지거나 짧아졌다. 토박이들과 이주민들의 대립은 암스테르담의 개인사, 혹은 빌의 개인적인 성향 정도에서 그치고 말았고, 따라서 가끔씩 보이는 남북전쟁과 흑인 문제도 다소 생뚱맞게 느껴진다. 클라이맥스에 해당하는 '폭동의 날' 연출로 미루어 볼 때, 그리고 이 영화의 기획을 볼 때, 분명 스토리상 일익을 담당했을 부층 정치꾼들의 비중은 그야말로 대폭 축소되어서, 여러 차례 제시되는 트위드의 존재만으로는 그들의 입장을 살리기 힘들어졌다. 게다가 포스터에 얼굴까지 박힌 제니(카메론 디아즈)의 경우 그 역할이 지나치게 밋밋해졌다. 홍보 문구에 나온 ‘복수와 사랑의 잔혹한 갈림길’ 운운하는 소리야 원래 스토리와 별 상관없지만, 그렇더라도 분명히 영화적 즐거움을 더함과 동시에 갈등 요소를 한층 복잡하게 만들어줬을(제니란 캐릭터는 빌로부터 암스테르담을 향해 움직이는, 가장 격렬한 갈등을 내포하고 있는 캐릭터가 아닌가) 캐릭터가 이렇게 단순화 된 것은 크나큰 비극이다. 카메론 디아즈의 나무랄 데 없는 연기를 생각하면 더욱더. 하비 와인스타인, 〈화씨 9/11〉 배급에 열을 올리기에 좋아해주려고 했더니 〈킬 빌〉이 두 조각 난 뒤(시기적으론 〈갱스 오브 뉴욕〉이 먼저지만)로 다시 한 번 미운 꼴이 보이는 구나(“처음부터 좀 더 꽉 짜여진 연출을 했으면 될 게 아니냐.”는 소리는 무의미하겠지. 다 찍어놓고 편집했는데 그래놨으니. 피터 잭슨처럼 필요하면 다시 촬영 하는 게 아무 여건에서나 되는 게 아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그래서 난 이 영화가 무척 마음에 든다(166분짜리 영화를 이틀 연속으로 반복 감상한다는 게 흔한 일은 아니잖은가). 그러니까, 거의 반 토막이 나서도 이 정도의 생명력을 자랑하는 영화라니. 스콜세지의 연출이라는 건 정말이지 믿을 수 없을 지경이다. 뼈대만 남았을지언정 핵심은 살아있고, 다소 여유 없이 나가긴 해도(당연히 좀 더 늦게 끊었으면 좋겠다 싶은 장면들이 있었다) 이야기를 끌어나가는 에너지는 철철 넘친다. 주역들의 연기야 말할 것도 없고, 다소 단순하게 다듬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몇몇 조역들은 여전히 매력적이며, 스콜세지 영화의 음악에 대해서는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스콜세지의 세계 전체를 담아내는 〈갱스 오브 뉴욕〉의 마지막 장면만으로도 이 영화는 충분히 훌륭하다.

 

 덧 하나. 위에서 말한 열두 시간짜리 DVD 말인데, 미확인 루머에 가깝다. 그러나 적어도 네 시간 반짜리 감독판에 대한 기대는 해볼만 하다고 본다. 2006년에 〈무간도〉의 리메이크 버전인 〈The Departed〉를 발표할 예정이라서 일정이 빡센 건 알겠지만… 그래도 이거 어떻게 좀 마무리 해주면 안 될까. 10주년 기념판 같은 걸 기다리긴 너무 힘들다(물론 리들리 스콧이 예전 디렉터스 컷도 성에 안 찬다며 〈블레이드 러너〉의 새 디렉터스 컷을 공개하려고 기획 중이라는데 고작 10년 가지고 무슨 투정이냐 싶기도 하지만). 〈반지의 제왕 확장판〉 기다리는 것보다 훨씬 더 애가 탈 지경. 좋아, 코폴라도 했는데 당신이라고 ‘리덕스’ 내지 말라는 법 있습니까! 기다릴게요, 스콜세지!


 덧 둘. 엔터원에서 나온 디스크 두 장짜리 DVD는… 음… 일단 세 시간도 안 되는 영화가 둘로 나뉘어져 담겨 있다는 데에 불만을 품어봄직 하지만 사실 나는 중간에 끊기는 거 신경 안 쓰니까 상관없다(실은 나는 내가 겪어보지 못한 ‘대작 영화의 인터미션’ 전통에 애절한 향수를 느끼는 인간이다). 하지만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디스크 둘에 영화도 나눠 넣고 서플먼트도 나눠 넣은 걸 보고 있으면 한심해죽겠다. 대체 왜 그러는데? 영화가 끊어지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구성 기획의 문제가 아닌가. DVD 디스크 한 장이면 두 시간 46분짜리 영화 통째로 넣고 음성해설 트랙까지 넣을 수 있다. 코드3 타이틀을 내놓은 엔터원의 문제가 아니라 애초에 코드1부터 그랬다고 하니 대체 무슨 속셈인지 이해할 수가 없다.


 덧 셋. 본편의 번역은 나름대로 마음에 든다. 각 조직의 이름을 의미를 살려 번역한 건 좋았다(그러나 개봉 당시에 ‘데드 래빗’을 뭐하러 ‘죽은 토끼’로 번역했냐고 하는 관객들도 있어서 좀 심란했다. 이름처럼 수 세대에 걸쳐 관습화된 고유명사라면 모를까, 조직명은 의미를 살려주는 게 좋지 않나? “네이티브 대 데드 래빗”하고 “토박이 파 대 죽은 토끼 파” 중 어느 게 좋다고 생각하시는지?). 다만 몇몇 조직들은 그게 조직명인지 아니면 그냥 일반 명사로 사용되는 건지 애매한 경우가 있었다(이를테면, ‘꼭두새벽’이라는 조직이 있다. 빌이 암스테르담 패거리에게 “꼭두새벽보다 먼저 털어야 해.”라고 지시를 내리는 부분에서 잠시 이게 어설프기 짝이 없는 직역이 아닌가 하고 의심했었다. 다행히 바로 다음에 그게 조직명이었음을 밝혀주지만). 작은따옴표로 묶거나 뒤에 ‘파’를 넣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극장 개봉 당시에 이미도가 번역했다고 하던가? 극장에서 보질 않아 번역이 얼마나 바뀐 건지는 모르겠는데 속어 사용에서 이미도 번역의 기미가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이 갱들의 세계를 볼 때 오히려 어울리는 역어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서플먼트의 번역은 정말 짜증난다. 자막을 넣어준다고 능사가 아니다. 제발 본편하고 대조하면서 검수 좀 해줬으면 좋겠다. 아직 마틴 스콜세지의 음성해설은 안 들었는데, 번역이 어떨지 좀 두렵다.


 덧 넷. '갱스 오브 뉴욕' 말고 '뉴욕의 갱들'이면 어디가 덧나? 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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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벌 공장
이언 뱅크스 지음, 김상훈 옮김 / 열린책들 / 2005년 1월
평점 :
절판


 김상훈 씨의 새 번역작. 김상훈 씨의 빠돌이(…)로서 출간 정보가 뜬 당일 샀는데, 표지가 멋져서 두근거렸고, 변태 패륜 소설이라기에 두근두근했고, 다 읽고나니 가슴이 너무 뛰어서 죽을 지경. 그렇게 좋다는 게 아니라, 어딘가 미쳐버린 것 같은 느낌이 가슴을 옥죄어 들어오면서 괜히 무서워졌다는 이야기. 끝부분을 읽을 때쯤엔 몸이 떨려서 이불 속을 파고 들어가 봤다. 제길.

 대체 이 작품에 대해서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할까. 아마도 멀찍이 떨어져서 바라본다면 비교적 평이한 줄거리에 자극적인 소재로만 점철된 쓰레기 소설이라고 쉽게 단정 지을 수 있겠지만… 문제는 이 작품은 멀찍이 떨어질 수 없게 한다는 것. 불길하고 음침하면서 건조한 도입부는 확실히 읽는 이의 흥미를 유발하는 데가 있으며, 그렇게 살짝살짝 발길을 내딛다보면 어느새 강박적으로 미쳐버린 주인공 프랭크의 세계가 드러난다.

 프랭크는 아버지가 히피 시절 얻어놓고는 출생 신고를 하지 않은 탓에 공식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소년이며, 아버지와 둘이서 살고 있는 작은 섬의 ‘지배자’다. 흔히 자기의 생활공간 속에서 자기만의 비밀 장소를 선정하여 나름의 이름을 붙여 부르는 어린이의 특성이 프랭크의 폐쇄적인 생활 및 비밀스러운 과거와 얽히는 순간, 그건 그냥 '애들 장난'이 아니라 일종의 '신화 체계'로서 구현된다. 두려운 건 그 신화 체계가 지극히 상징적인 동시에 지극히 인공적이고, 분명한 목적을 가진 것처럼 느껴진다는 사실. 자신이 벌이는 신화적 행위들이, 한 발 떨어져 보았을 때는 우스꽝스럽고 유치한 짓일 수 있음을 알면서도 그 안에서 확신을 가지고 스스로의 세계를 구축해 나가는 프랭크의 모습은 정말 소름끼쳤다.

 『말벌 공장』은 전체적으로 일종의 추리소설적 구조를 띠면서 프랭크가 자신의 신화 체계 근원을 점점 드러내거나 파헤쳐 나가는 방향으로 전개되는데, 그렇게 모든 일의 근원이 되는 어린 시절의 이야기들이 하나씩 밝혀질 때마다 두려움은 더욱 커져서, 마지막 장(章)에 다가갈수록 정말 페이지를 넘기기가 싫어졌다. 그리고 결말. 이런 식의 소설에서 내가 좋아하는, 앞서의 이야기들이 뒤집혀 보이게 하는 훌륭한 반전이 나와 버리면 정말 미칠 지경이 된다. 책을 가득 채우는 온갖 폭력을 만들어낸 신화 체계는 단숨에 박살나 버리고 남는 건 이미 저질러진 폭력뿐이니. 그리고 거기까지 이르는 과정을 서술하는 이언 뱅크스의 필력은 놀랍도록 아름답고(!) 웃기기에(!!) 더욱 끔찍하다.

 그런 상황에서 여전히 주인공의 입을 통해 담담하게 사건의 전말을 서술하는 마지막 부분은 읽는 이에게 '꼬인 이야기를 설명해주기 위한, 안이한 서술 형태의 결말'을 제시해주지 못한다. 오히려 그렇게 단순히 설명하는 것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고, 부정할 수 없는, 질퍽한 핏물과 거기에 다가가는 과정을 강조해줄 뿐. 프랭크의 등 뒤에 있는 문은 프랭크 자신이 말한 것처럼 닫히지 않았다. 오히려 남는 건 지금까지 지나온 길이다. 비로소 자신의 신화 체계에서 벗어난 그의 미래가 어떻게 될까 궁금해지기보다는, 책을 다 읽자마자 서둘러 책의 가장 앞 장을 펴서 다시 읽어보게 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리라. 그래서 내게 『말벌 공장』은 반(反)성장소설처럼 느껴진다.

 지독히 끔찍한 마약 같은 책. 나는 결국 이 책을 다시 집어 들게 될 테고, 앞으로 열린책들에서 나올 이언 뱅크스의 다른 책들을 고려해보자면 이 책을 추천함으로써 출판사에 조금이나마 힘을 실어주는 게 독자로서의 도리라고 생각되긴 하지만… 어쩌랴, '추천하기엔 너무 먼 당신'인 것을. 역자 해설에는 이 작품에 관한 열네 편의 짤막한 서평(대부분 이 책이 처음 출간되었을 때 언론의 반응인 듯 하다)이 인용되어 있는데, 좀 뻔하긴 해도 「데일리 익스프레스」의 서평 한 토막을 인용하는 것으로 글을 끝내면 적당할 듯 하다. "용기가 있는 사람만 읽어 볼 것."

 덧. 표지 디자인은 올해 읽어본 책들 중 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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