갱스 오브 뉴욕 (2disc) - 아웃케이스 있음
마틴 스콜세지 감독,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외 출연 / 엔터원 / 2007년 8월
평점 :
품절


 포스터에 적힌 한 줄의 문구. AMERICA WAS BORN IN THE STREETS. 아아, 이 문장만큼 마틴 스콜세지를 극명하게 드러내주는 말이 또 어디 있을까? 어쩌면 스콜세지는 정말로 〈갱스 오브 뉴욕〉을 통해 자기 영화 인생의 토대를 다듬어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미 여러 편의 영화(그것도 대부분이 수작의 경계를 가볍게 뛰어넘고, 몇 편은 걸작의 반열에 올라버린)를 통해 뉴욕의 ‘거리’를 전면에 드러낸 그로서도, ‘태초의 뉴욕’을 다섯 개의 거리가 만나는 구역, 파이브 포인츠를 통해 그려낸다는 계획은 정말이지 저항하기 힘든 유혹이었을 것이다. 19세기 중반의 뉴욕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곧 토박이들과 이주민들, 남북 전쟁-흑인-정부, 분화되어가는 계층, 그 모든 모습을 담아내겠다는 것이었으며, 제대로만 된다면 사실상 미국의 창세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터. 아카데미가 또 상을 안준다 한들 무슨 상관이랴. 세기의 걸작 냄새가 물씬 풍기는데.

 사실, 모든 아이템은 다 갖춰져 있었다. 암스테르담(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과 빌(다니엘 데이 루이스)의 세계, 다시 말해 파이브 포인츠 갱들의 세계를 굳건히 다져내는 것만으로도 이 모든 요소를 다룰 수 있었단 말이다. 암스테르담과 빌의 대립은 이주민들과 토박이들의 대립이었고, 중국인, 흑인들을 포함한 이주민들을 모두 배척하면서 파이브 포인츠를 지배하는 빌의 갱들은 곧 남북전쟁 중인 정부의 대립항이었다. 그런가하면 그 와중에 유권자들의 표를 얻기 위해 갱들과 결탁하는 정치인들은 파이브 포인츠와 떨어진 번화가에서 살아가는 부유층이었고. 그러니까, 암스테르담과 빌의 세계 속에서 벌어지는 갈등 요소를 긴밀하게 다뤄낸다면 구태여 팔을 두르며 온갖 아이템을 끌어 모으려고 하지 않더라도 자연히 계획은 성공할 참이었다.

 그리고 마틴 스콜세지는 그런 걸 정말 잘 한다. 움직임 많기로 악명 높은 스콜세지의 카메라는 그렇게 사람들 사이를 휘저으며 파고들어, 이야기의 주인공들을 언제나 한 사람의 개인이 아니라 그가 몸담고 있는 세계에 대한 대유법으로서 존재하게 했다. 물론 인간이 사회적 존재인 이상 모든 등장인물은 그가 몸담고 있는 사회를 드러내기 마련이지만 스콜세지 정도로 깊고 넓게 그 작업을 행하는 이가 얼마나 되랴.

 〈갱스 오브 뉴욕〉에서도 그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아주 작심하고 돈을 퍼 부어서 지은 19세기 뉴욕의 세트(죽인다!) 속에서 영화는 정말 ‘창세기’의 뉴욕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눈이 쌓인 천국의 광장에서 벌어지는 토박이 파와 죽은 토끼 파의 혈투를 그려낸 오프닝부터가 보는 이의 눈과 귀를 흠씬 두들겨 패서 끌고 들어간다. 많은 이들이 엔딩 크레딧에서 흘러나오는 U2의 주제가 ‘The Hands That Built America’를 두고 칭송했지만 오프닝의 BGM 사용은 사실 그 이상이었다. ‘프리스트’ 발론(리암 니슨)이 이끄는 죽은 토끼 파의 박진감 넘치는 등장과, 전투가 시작되며 울리는 기묘하게 현대적인 음악 및 점점 빨라지는 컷 속에서 흩뿌려지는 피를 보고 있자면 거의 돌아버릴 지경이 된다. 이런 박력과 몰입은 절대, 저얼대, 저얼대로 물량 공세로 되는 게 아니다(자연히 〈브레이브 하트〉의 평원 회전과 〈반지의 제왕〉의 오프닝을 떠올리게 된다… 감히 고백하자면, 열등 비교를 위해서!).

 그 후에도 영화는 암스테르담에게 초점을 맞춰 일사천리로 진행되면서, 동시에 꼼꼼하게 주변을 담아낸다. 그가 막 출소해서 본토에 발을 디디는 장면은 이주민들에 대한 토박이들의 경멸과 분노를, 그가 친구 자니(헨리 토마스. 이 배우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E.T.〉의 엘리엇이다)를 만나 불타는 집을 터는 장면은 소방 기관 하나 없는―무정부 상태에서 힘의 논리에 의해 움직이는 뉴욕의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중반부 ‘도살자’ 빌과 정치꾼 트위드(짐 브로드벤트)가 부두에서 불화를 일으키는 장면은 사실상 영화의 핵심을 몽땅 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정부상태의 지배자인 갱과 타협하려드는 정치인들, 그 옆에서 막 이민 온 사람들, 급료 제공을 내세우며 이주민들을 입대시키려 하는 정부, 꼬임에 넘어가 군복을 입고 배를 타는 그들의 머리 위로 지나가는 전사자들의 관. 한 테이크에 이 모든 것을 담아내면서, 스콜세지는 〈갱스 오브 뉴욕〉에 퍼부은 자신의 야심을 명백히 드러낸다. 그리고 물론, 그 야심은 충분히 매혹적이고.

 익히 알려진 다니엘 데이 루이스의 연기는 ‘포스트 드 니로’ 운운하는 게 이해가 될 뿐만 아니라 사실 어떤 면에선 드 니로보다 더 매혹적이며(칼 던지기 시퀀스에서 그의 연기는 정말… 아아…), 어쩐지 싫었던 〈타이타닉〉 이후 꾸준히 미움 받고 있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조차 멋진 연기를 펼쳐 보인다. 그 외의 조역들도 충분히 좋은 연기를 하고 있고.

 무엇보다도 마음에 드는 건 결말인데, 스콜세지는 그렇게 두 시간 반 넘게 쌓아온 두 중심인물들의 세계를 한 방에 박살낸다. 사실 중심인물의 세계가 그 동안 스리슬쩍 얽혀왔던 주변세계에 의해 무너지는 건 여타 영화에서도 쉬이 볼 수 있는 설정이지만(갱들은 대게 그렇다) 특히나 〈갱스 오브 뉴욕〉의 라스트가 도발적인 것은 그런 설정이 단순히 무너진 주인공들에 대한 연민이나 운명적인 비극의 힘으로 느껴지기 보다는 뉴욕, 혹은 미국에 대한 처절한 풍자처럼 다가오기 때문이다. 핏물이 질척이는 토박이 파와 죽은 토끼 파의 세계, 그토록 공들여 쌓은 갱들의 세계, 그 원초적인 갈등과 폭력이 더 거대한 폭력, 정부의 폭력과 세월의 폭력 속에서 삽시간에 스러지며 덮여버리는 이 라스트는, 그래서 결국 끊임없이 미국 세계 아래 ‘거리’가 있음을 지적해왔던 스콜세지 테마의 결정판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반전(反轉) 영화’라는 게 정말 있다면(이라고 말하는 건 내게 이 개념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기 때문인데) 〈갱스 오브 뉴욕〉이야말로 그 중에서도 최고로 꼽혀야 하는 영화가 아닐까.

 …라고 말하고 이 글을 마칠 수 있다면 나도 정말 좋겠다. 그러나 여전히 사람들은 〈성난 황소〉가 (물론 취향에 따라서는 〈택시 드라이버〉나 〈좋은 친구들〉, 뭐 기타 등등이) 마틴 스콜세지의 최고작이라고 말하고 있으니, 아무래도 이야기를 여기서 마치긴 곤란할 듯 하다. 그래. 솔직히 말해서 이것은 그의 최고작이 아니다. 야심도 있었고, 능력도 됐고, 제반 여건도 대부분 따라줬지만, 어쨌든 결국 지금의 〈갱스 오브 뉴욕〉은 부족하다.

 제작을 맡은 미라맥스의 하비 와인스타인은 스콜세지가 내놓은, 네 시간 반이 넘는 편집본을 보고 얼굴을 찌푸렸고, 결국 스콜세지는 “그럼 대신 DVD는 열두 시간짜리로 할 테다!”라며 극장판을 두 시간 46분으로 편집해서 내놓고 말았다. 그러니까, 난 감독이 원래 계획했던 것에 비해서 약 두 시간이 부족한 버전을 본 것이다. 세상에, 두 시간이라니! 영화 한 편 분량이 없어졌다! 그리하여 아무리 뛰어난 연출력을 선보이며 19세기 뉴욕의 다양한 요소들을 겹쳐 넣었더라도 결국 영화 속의 고리들은 느슨해져 버린 것이다. 암스테르담과 빌이라는 인물들은 어느 정도 명확하게 구축되었지만 그들과 바깥세상을 연결해줄 끈은 사라지거나 짧아졌다. 토박이들과 이주민들의 대립은 암스테르담의 개인사, 혹은 빌의 개인적인 성향 정도에서 그치고 말았고, 따라서 가끔씩 보이는 남북전쟁과 흑인 문제도 다소 생뚱맞게 느껴진다. 클라이맥스에 해당하는 '폭동의 날' 연출로 미루어 볼 때, 그리고 이 영화의 기획을 볼 때, 분명 스토리상 일익을 담당했을 부층 정치꾼들의 비중은 그야말로 대폭 축소되어서, 여러 차례 제시되는 트위드의 존재만으로는 그들의 입장을 살리기 힘들어졌다. 게다가 포스터에 얼굴까지 박힌 제니(카메론 디아즈)의 경우 그 역할이 지나치게 밋밋해졌다. 홍보 문구에 나온 ‘복수와 사랑의 잔혹한 갈림길’ 운운하는 소리야 원래 스토리와 별 상관없지만, 그렇더라도 분명히 영화적 즐거움을 더함과 동시에 갈등 요소를 한층 복잡하게 만들어줬을(제니란 캐릭터는 빌로부터 암스테르담을 향해 움직이는, 가장 격렬한 갈등을 내포하고 있는 캐릭터가 아닌가) 캐릭터가 이렇게 단순화 된 것은 크나큰 비극이다. 카메론 디아즈의 나무랄 데 없는 연기를 생각하면 더욱더. 하비 와인스타인, 〈화씨 9/11〉 배급에 열을 올리기에 좋아해주려고 했더니 〈킬 빌〉이 두 조각 난 뒤(시기적으론 〈갱스 오브 뉴욕〉이 먼저지만)로 다시 한 번 미운 꼴이 보이는 구나(“처음부터 좀 더 꽉 짜여진 연출을 했으면 될 게 아니냐.”는 소리는 무의미하겠지. 다 찍어놓고 편집했는데 그래놨으니. 피터 잭슨처럼 필요하면 다시 촬영 하는 게 아무 여건에서나 되는 게 아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그래서 난 이 영화가 무척 마음에 든다(166분짜리 영화를 이틀 연속으로 반복 감상한다는 게 흔한 일은 아니잖은가). 그러니까, 거의 반 토막이 나서도 이 정도의 생명력을 자랑하는 영화라니. 스콜세지의 연출이라는 건 정말이지 믿을 수 없을 지경이다. 뼈대만 남았을지언정 핵심은 살아있고, 다소 여유 없이 나가긴 해도(당연히 좀 더 늦게 끊었으면 좋겠다 싶은 장면들이 있었다) 이야기를 끌어나가는 에너지는 철철 넘친다. 주역들의 연기야 말할 것도 없고, 다소 단순하게 다듬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몇몇 조역들은 여전히 매력적이며, 스콜세지 영화의 음악에 대해서는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스콜세지의 세계 전체를 담아내는 〈갱스 오브 뉴욕〉의 마지막 장면만으로도 이 영화는 충분히 훌륭하다.

 

 덧 하나. 위에서 말한 열두 시간짜리 DVD 말인데, 미확인 루머에 가깝다. 그러나 적어도 네 시간 반짜리 감독판에 대한 기대는 해볼만 하다고 본다. 2006년에 〈무간도〉의 리메이크 버전인 〈The Departed〉를 발표할 예정이라서 일정이 빡센 건 알겠지만… 그래도 이거 어떻게 좀 마무리 해주면 안 될까. 10주년 기념판 같은 걸 기다리긴 너무 힘들다(물론 리들리 스콧이 예전 디렉터스 컷도 성에 안 찬다며 〈블레이드 러너〉의 새 디렉터스 컷을 공개하려고 기획 중이라는데 고작 10년 가지고 무슨 투정이냐 싶기도 하지만). 〈반지의 제왕 확장판〉 기다리는 것보다 훨씬 더 애가 탈 지경. 좋아, 코폴라도 했는데 당신이라고 ‘리덕스’ 내지 말라는 법 있습니까! 기다릴게요, 스콜세지!


 덧 둘. 엔터원에서 나온 디스크 두 장짜리 DVD는… 음… 일단 세 시간도 안 되는 영화가 둘로 나뉘어져 담겨 있다는 데에 불만을 품어봄직 하지만 사실 나는 중간에 끊기는 거 신경 안 쓰니까 상관없다(실은 나는 내가 겪어보지 못한 ‘대작 영화의 인터미션’ 전통에 애절한 향수를 느끼는 인간이다). 하지만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디스크 둘에 영화도 나눠 넣고 서플먼트도 나눠 넣은 걸 보고 있으면 한심해죽겠다. 대체 왜 그러는데? 영화가 끊어지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구성 기획의 문제가 아닌가. DVD 디스크 한 장이면 두 시간 46분짜리 영화 통째로 넣고 음성해설 트랙까지 넣을 수 있다. 코드3 타이틀을 내놓은 엔터원의 문제가 아니라 애초에 코드1부터 그랬다고 하니 대체 무슨 속셈인지 이해할 수가 없다.


 덧 셋. 본편의 번역은 나름대로 마음에 든다. 각 조직의 이름을 의미를 살려 번역한 건 좋았다(그러나 개봉 당시에 ‘데드 래빗’을 뭐하러 ‘죽은 토끼’로 번역했냐고 하는 관객들도 있어서 좀 심란했다. 이름처럼 수 세대에 걸쳐 관습화된 고유명사라면 모를까, 조직명은 의미를 살려주는 게 좋지 않나? “네이티브 대 데드 래빗”하고 “토박이 파 대 죽은 토끼 파” 중 어느 게 좋다고 생각하시는지?). 다만 몇몇 조직들은 그게 조직명인지 아니면 그냥 일반 명사로 사용되는 건지 애매한 경우가 있었다(이를테면, ‘꼭두새벽’이라는 조직이 있다. 빌이 암스테르담 패거리에게 “꼭두새벽보다 먼저 털어야 해.”라고 지시를 내리는 부분에서 잠시 이게 어설프기 짝이 없는 직역이 아닌가 하고 의심했었다. 다행히 바로 다음에 그게 조직명이었음을 밝혀주지만). 작은따옴표로 묶거나 뒤에 ‘파’를 넣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극장 개봉 당시에 이미도가 번역했다고 하던가? 극장에서 보질 않아 번역이 얼마나 바뀐 건지는 모르겠는데 속어 사용에서 이미도 번역의 기미가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이 갱들의 세계를 볼 때 오히려 어울리는 역어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서플먼트의 번역은 정말 짜증난다. 자막을 넣어준다고 능사가 아니다. 제발 본편하고 대조하면서 검수 좀 해줬으면 좋겠다. 아직 마틴 스콜세지의 음성해설은 안 들었는데, 번역이 어떨지 좀 두렵다.


 덧 넷. '갱스 오브 뉴욕' 말고 '뉴욕의 갱들'이면 어디가 덧나? 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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