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벌 공장
이언 뱅크스 지음, 김상훈 옮김 / 열린책들 / 2005년 1월
평점 :
절판


 김상훈 씨의 새 번역작. 김상훈 씨의 빠돌이(…)로서 출간 정보가 뜬 당일 샀는데, 표지가 멋져서 두근거렸고, 변태 패륜 소설이라기에 두근두근했고, 다 읽고나니 가슴이 너무 뛰어서 죽을 지경. 그렇게 좋다는 게 아니라, 어딘가 미쳐버린 것 같은 느낌이 가슴을 옥죄어 들어오면서 괜히 무서워졌다는 이야기. 끝부분을 읽을 때쯤엔 몸이 떨려서 이불 속을 파고 들어가 봤다. 제길.

 대체 이 작품에 대해서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할까. 아마도 멀찍이 떨어져서 바라본다면 비교적 평이한 줄거리에 자극적인 소재로만 점철된 쓰레기 소설이라고 쉽게 단정 지을 수 있겠지만… 문제는 이 작품은 멀찍이 떨어질 수 없게 한다는 것. 불길하고 음침하면서 건조한 도입부는 확실히 읽는 이의 흥미를 유발하는 데가 있으며, 그렇게 살짝살짝 발길을 내딛다보면 어느새 강박적으로 미쳐버린 주인공 프랭크의 세계가 드러난다.

 프랭크는 아버지가 히피 시절 얻어놓고는 출생 신고를 하지 않은 탓에 공식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소년이며, 아버지와 둘이서 살고 있는 작은 섬의 ‘지배자’다. 흔히 자기의 생활공간 속에서 자기만의 비밀 장소를 선정하여 나름의 이름을 붙여 부르는 어린이의 특성이 프랭크의 폐쇄적인 생활 및 비밀스러운 과거와 얽히는 순간, 그건 그냥 '애들 장난'이 아니라 일종의 '신화 체계'로서 구현된다. 두려운 건 그 신화 체계가 지극히 상징적인 동시에 지극히 인공적이고, 분명한 목적을 가진 것처럼 느껴진다는 사실. 자신이 벌이는 신화적 행위들이, 한 발 떨어져 보았을 때는 우스꽝스럽고 유치한 짓일 수 있음을 알면서도 그 안에서 확신을 가지고 스스로의 세계를 구축해 나가는 프랭크의 모습은 정말 소름끼쳤다.

 『말벌 공장』은 전체적으로 일종의 추리소설적 구조를 띠면서 프랭크가 자신의 신화 체계 근원을 점점 드러내거나 파헤쳐 나가는 방향으로 전개되는데, 그렇게 모든 일의 근원이 되는 어린 시절의 이야기들이 하나씩 밝혀질 때마다 두려움은 더욱 커져서, 마지막 장(章)에 다가갈수록 정말 페이지를 넘기기가 싫어졌다. 그리고 결말. 이런 식의 소설에서 내가 좋아하는, 앞서의 이야기들이 뒤집혀 보이게 하는 훌륭한 반전이 나와 버리면 정말 미칠 지경이 된다. 책을 가득 채우는 온갖 폭력을 만들어낸 신화 체계는 단숨에 박살나 버리고 남는 건 이미 저질러진 폭력뿐이니. 그리고 거기까지 이르는 과정을 서술하는 이언 뱅크스의 필력은 놀랍도록 아름답고(!) 웃기기에(!!) 더욱 끔찍하다.

 그런 상황에서 여전히 주인공의 입을 통해 담담하게 사건의 전말을 서술하는 마지막 부분은 읽는 이에게 '꼬인 이야기를 설명해주기 위한, 안이한 서술 형태의 결말'을 제시해주지 못한다. 오히려 그렇게 단순히 설명하는 것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고, 부정할 수 없는, 질퍽한 핏물과 거기에 다가가는 과정을 강조해줄 뿐. 프랭크의 등 뒤에 있는 문은 프랭크 자신이 말한 것처럼 닫히지 않았다. 오히려 남는 건 지금까지 지나온 길이다. 비로소 자신의 신화 체계에서 벗어난 그의 미래가 어떻게 될까 궁금해지기보다는, 책을 다 읽자마자 서둘러 책의 가장 앞 장을 펴서 다시 읽어보게 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리라. 그래서 내게 『말벌 공장』은 반(反)성장소설처럼 느껴진다.

 지독히 끔찍한 마약 같은 책. 나는 결국 이 책을 다시 집어 들게 될 테고, 앞으로 열린책들에서 나올 이언 뱅크스의 다른 책들을 고려해보자면 이 책을 추천함으로써 출판사에 조금이나마 힘을 실어주는 게 독자로서의 도리라고 생각되긴 하지만… 어쩌랴, '추천하기엔 너무 먼 당신'인 것을. 역자 해설에는 이 작품에 관한 열네 편의 짤막한 서평(대부분 이 책이 처음 출간되었을 때 언론의 반응인 듯 하다)이 인용되어 있는데, 좀 뻔하긴 해도 「데일리 익스프레스」의 서평 한 토막을 인용하는 것으로 글을 끝내면 적당할 듯 하다. "용기가 있는 사람만 읽어 볼 것."

 덧. 표지 디자인은 올해 읽어본 책들 중 최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