헐리웃 문화혁명 - 어떻게 섹스-마약-로큰롤 세대가 헐리웃을 구했나
피터 비스킨드 지음, 박성학 옮김 / 시각과언어 / 2001년 12월
평점 :
품절


 기적이라고까지 말할 필요는 없겠지만, 60년대 말~70년대 중반까지 할리우드에 찾아왔던 "뉴 아메리칸 시네마"의 시기는 적어도 다시 찾아오기 힘들 굉장히 희귀한 시대였던 것만은 틀림없다. 스튜디오 시스템은 텔레비전의 보급과 기획-투자-제작-배급-상영 수직구조의 해체로 인해 갈팡질팡했고, 고전 할리우드 영화의 세례를 통해 꽃핀 프랑스의 누벨바그/작가주의 이론이 역수입 돼서 감독을 예술가로 인지하게 된 "영화광"들이 등장했으며, 50년대 냉전 속에 가라앉았던 사회 분위기도 베트남전과 68혁명을 통해 달아올랐다.

 그 상황에서 체제를 유지하며 안이한 영화들만 만들던 스튜디오는 도저히 대중들이 뭘 원하는지를 이해할 수 없었고, 1946년에 주당 7,820만 명이었던 관객 수가 1971년에는 주당 1,580만 명으로 떨어졌다. 결국 스튜디오는 스스로를 예술가라고 생각하는 일련의 작가 감독들에게 상당한 무게를 실어줄 수밖에 없었다. 스튜디오 중역들은 이해하지 못했지만, 아무튼 그 젊은이들이 만드는 영화는 관객들이 좋아하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그러니까, "뉴 아메리칸 시네마"는 예술과 자본이 거대한 규모(이게 중요하다. 작은 몇몇 사례에서 예술과 자본이 성공적으로 합작한 경우를 찾아보긴 어렵지 않겠지만 10여년에 걸쳐 문화현상으로 일어난 건 극히 드물 테니)로 합작을 해냈던 시기다. 그리고 그 결과는 그야말로 어마어마해서, 이 시기에 쏟아진 미국 영화사에서 가장 논쟁적인 걸작들은 세기가 바뀐 지금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그 힘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물론 딱 보기에도 불가능해 보이는 이런 현상이 오래갈 수는 없어서, 70년대 말 이 흐름은 마지막 숨을 내뱉고 있었고, "레이건"이 상징이 될 무렵에는 이미 옛 이야기가 돼 버렸다.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가 씨를 뿌리고 스티븐 스필버그와 조지 루카스가 키워낸 대형 배급 체계는 스튜디오를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자본체계로 만들었고, 그 스튜디오가 아직도 할리우드와 전 세계를 장악하고 있으며, 그 흐름이 바뀔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배우였던 로널드 레이건의 처음이자 마지막 악역이 돈 시겔의 〈킬러(The Killers, 1964)〉에 나오는 CEO형 악당이었다는 사실은 참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바로 이 꿈결 같던(물론 꿈이라기보다는 LCD 환각에 가까웠다고 하는 편이 사실에 더 가깝기야하겠지만) 순간을 다룬 책 중에 우리나라에 소개된 책으로는 로빈 우드가 쓴 『베트남에서 레이건까지(Hollywood from Vietnam to Reagan)』와 피터 비스킨드의 『헐리웃 문화혁명 : 어떻게 섹스-마약-로큰롤 세대가 헐리웃을 구했나』(이하 『헐리웃 문화혁명』)가 있다. 전자는 뉴 아메리칸 시네마 시기의 영화들에 대한 성 정치학적 접근을 시도하는 책이며 후자는 이 시기의 영화산업에 발을 담그고 있던 제작자, 각본가, 편집자, 감독 등이 살아간 모습을 그려내는 풍속화에 가까운 책이다. 영화 자체에 대한 통찰을 보고 싶다면 전자가 좋은 선택이다. 성 정치학이라는 어휘가 전달해줄 버거운 무게와는 달리 로빈 우드의 서술은 필요 이상으로 어렵지 않으며(지식이 부족한 독자─바로 나 같은─도 꼼꼼히 읽으면 충분히 그의 논의가 어떤 것인지 이해할 수 있을 정도의 난이도), 그런 서술을 바탕으로 무시당했던 영화들, 특히 공포 영화들의 지위를 복권시키고자 하는 시도를 보는 것은 무척 흥분되는 경험이다. 그러나 두 가지 안타까운 점이 있다면 하나는 1986년에 나온 이 책은 2003년에 개정증보판이 나왔으나 우리나라에는 번역이 되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또 하나는 1986년판의 번역본조차 이미 (좋은 책들의 운명이 그렇듯) 절판되었다는 것이다.

 한편 피터 비스킨드의 책은 영화 자체에는 큰 관심이 없으며 그 영화들을 만드는데, 혹은 핍박하는데 한몫한 사람들의 모습을 담아내는 데에 주력한다. 수많은 인물들의 인터뷰로 이뤄진 이 책은 실로 적나라하기 짝이 없어서, 어떤 인물이 이 책에 등장했다면 그 자체로 이미 그가 꼴사나운 추태를 보인 인간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도 좋을 정도다. (참고로 이 책에는 현대 미국 영화의 중요한 거장들이 엄청나게 등장한다) 게다가 저자는 책머리에서 "따라서 해괴하고 소름끼칠 만한 내용이 반복해서 소개될 것이지만 이 책이 표면을 살짝 긁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할 필요가 있다. 실체를 파악하기 힘든 '진실'은 이보다도 더욱 기이하다."라는 말을 하고 있으니, 가히 복마전의 대문과도 같은 책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다.

 그렇다고 『헐리웃 문화혁명』이 단지 재미 삼아 찌라시용 뒷담화를 엮어놓은 책은 아니다. 만약 이 책이 과격하게 느껴진다면 그건 그만큼 이 책이 뉴 아메리칸 시네마의 할리우드를 잘 담아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생생함 속에서 저자는 (로빈 우드 정도로 공격적이고 노골적이지는 않지만) 이 광기의 시기에 대한 애정과, 더 이상 그런 애정을 보낼 수 없게 된 할리우드의 모습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하고 있다. 특히 이 책은 아서 펜 감독의 1967년 작 〈보니와 클라이드(Bonnie and Clyde)〉에서 마이클 치미노 감독의 1980년 작 〈천국의 문(Heaven's Gate)〉에 이르는 시기를 비교적 연대순으로 다뤄나가고 있기 때문에 갈수록 그런 안타까움과 연민은 짙어져 간다. 그리고 총 14장으로 구성된 이 책의 각 장에는 나름대로 주인공이라고 할 만한 인물들이 설정돼 있기 때문에─이를테면 9장 「1975년, 너드의 화려한 복수」는 스티븐 스필버그가 주인공이다─마치 소설 읽듯 주인공들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읽어나가며 이 시대의 불안함에 흠뻑 젖기도 쉬운 편이다.

 또 한 가지, 우리나라에만 특화된 사항. 『헐리웃 문화혁명』의 한국어판을 이야기할 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다. 바로 번역. 박성학이라는 이름의 역자는 역서와 저서를 통해 미루어 볼 때 영어와 영화에 큰 관심을 가진 사람으로 보이는데, 이 책에서 모든 고유명사를 최대한 원음에 가깝게 표기하는 번역 원칙을 내세우고 있다. 그래서 스콜세지scorsese는 '스콜쎄지'고 아서 펜Arthur Penn은 '아써 펜'인데… 이 정도는 그래도 괜찮다. 하지만 시드니 폴락Sydney Pollack이 '씻니 폴락'이 되고 클린트 이스트우드Clint Eastwood가 '클린트 이스트웃'이 되면 살짝 낯설다. 돈 시겔Don Siegel은 '단 씨걸'이 되고 숀 펜Sean Penn은 '샨 펜'이 되며 제임스 캐그니James Cagney가 '제임스 캑니'가 될 즈음에는 아무래도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그래도 이 정도는 괜찮다. 영화 제목은 더 당혹스럽다. 어떤 영화는 제목의 의미를 번역하고 어떤 영화는 하지 않는다. 그래서 밥 라펠슨의 〈파이브 이지 피시스(Five Easy Pieces, 1970)〉는 〈다섯 가지 쉬운 곡〉이 된 반면 테렌스 멜릭의 〈황무지(Badlands, 1973)〉는 〈뱃랜즈〉가, 스탠리 큐브릭의 〈시계태엽 오렌지(A Clockwork Orange, 1971)〉은 〈클락웍오린지(오'렌'지도 아니다!)〉가 되고 말았다. 그나마 제목의 의미를 옮긴 것도 항상 좋은 것은 아니어서, 피터 보그다노비치(물론 이 책에서는 복다노비치다)의 〈페이퍼 문(Paper Moon, 1973)〉이 〈종이달〉이 되거나 세르지오 레오네의 〈석양의 무법자(Il Buono, Il Bruto, Il Cattivo, 1966)〉가 〈선인과 악당, 그리고 추물〉이 된 건 좀 심했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더 심한 건, 영어 단어의 의미를 충분히 담아낼 수 있는 번역어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일반 명사를 그대로 옮긴 경우도 있다는 거다. shlock이 '쉴락'으로, suite이 '수잇'으로, boulevard가 '불러바드'로 표기된 게 그와 같은 예다. 불러바드하니까 생각나는 건데, 일반 명사 번역은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문장은 다음과 같았다.

 70년대는 또한 (중략) 헐리웃을 가썸으로 변모시킨 시대이기도 했다.

 대체 가썸이 뭘까? 다행히 영어 표기가 병기되어있다. Gotham이다. 배트맨 시리즈의 무대가 되는 그 고담시 말이다. 문장 구조를 따지기 전에 역어 선택이 이런 식이다보니 아무래도 이 책을 읽는 게 그렇게 쉬운 일만은 아니다. (그리고 문장도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니다)

 그리고 이 책을 읽는 일을 더 어렵게 하는 건, 보다 근본적인 문제인데, 이 책이 다루고 있는 범위, 혹은 이 책이 구성된 방식이다. 70년대 할리우드에서 날리던 사람들은 죄다 등장한 책이라서 등장인물의 수가 어마어마한데, 그나마도 서양인들 이름이 흔히 그렇듯 때에 따라 이름으로 표기되기도 하고 성으로 표기되기도 한다. 그리고 비록 각 장에 주인공들을 배치해두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연대순 서술을 지향하다보니 마틴 스콜세지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로만 폴란스키 이야기를 넣는 등 다소 난삽한 구성을 보여주는데, 이 때문에 등장인물들의 이름을 주워 담기 힘든 경우가 빈번히 발생한다. 다행히 권말에 수록된 목차는 이 어려움을 어느 정도는 덜어주지만 6백 페이지가 넘는 책의 권말 목차를 자주 뒤적이는 것도 좋은 독서 방식이 되기는 힘들다. 아마 어느 정도는 주인공들 외의 인물들을 무시하고 읽어야 할 텐데, 그래도 워낙 이 사람 저 사람이 교차되어 등장하다보니 신경이 쓰이는 게 사실이다.

 이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헐리웃 문화혁명』은 읽어볼 만한 책이다. 뉴 아메리칸 시네마를 경외의 눈길로 쳐다보던 (나 같은) 사람에게는 보다 균형 잡힌 시선을 제공해 줄 것이고, 현대 할리우드의 팍팍한 스튜디오 시스템에 진절머리 내던 사람에게는 할리우드가 거의 유일하게 자유로웠던 시기의 즐거움을 제공해줄 것이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역자 박성학의 원어 살리기 번역 원칙이 한 가지 빛을 발하는데, 바로 욕설 번역이다. 이 책은 욕설 번역만큼은 타의추종을 불허한다. 물론 어느 정도 타협을 하는 곳도 있긴 하지만 그래도 전체적으로 "씨팔"은 일상어처럼 들릴 정도다. 자, 이 책에서 인용된 우리의 서부 영웅 존 웨인의 대사 한 토막 들어보시라.

 "그 발그레한 하퍼 새끼 어디 있나? 그 염병할 날파리 개백정 같은 새끼가 UCLA에 가서 내 가녀린 딸들 앞에서 '똥'과 '좆빨기'라구 씨부렁거렸어. 내 이 씹새끼를 도륙을 낼 모양이다. 이 빨갱이 새끼 어디 숨었냐?"

 읽어보면 알겠지만 단순히 욕설을 잘 번역한 것뿐만 아니라 이 시기의 미치광이들이 했음직한 어투를 상당히 잘 살렸다. 워렌 비티(물론 이 책에서는 '베이티'다)가 〈보니와 클라이드(물론 이 책에서는 '바니와 클라잇'이다)〉의 각본을 읽은 뒤 각본가들에게 출연하겠노라고 말하는 대목에서 "다 읽었소."가 아니라 "내 다 읽었시다."라고 번역하는 식으로. 책의 상당부분이 실제 대화를 인용하는 것으로 구성된 만큼 이런 번역은 뉴 아메리칸 시네마의 분위기를 전달하는 데 큰 몫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 공기를 한껏 들이마신 상태에서 이 시기에 혜성처럼 등장한 인물들이 어떻게 위태위태한 방식으로 큰 성공을 거머쥐었는지, 그리고 어쩌다가 그 성공에 도취되어 몰락의 길을 걸었고 할리우드가 지금과 같은 꼴이 되었는지를 보는 것은 달곰쌉쌀한 경험이 될 것이다. 아무래도 상황이 상황인 만큼, 이 책의 후반부는 아스라한 한숨과 눈물 없이는 보기 힘들다. 주인공들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는 게 그 눈물을 더 진하게 만들고. 조지 루카스가 주인공인 제11장, 「1977년, 스타벅스」의 마지막 두 페이지에 실린 내용 중 인물의 증언만을 들어보자.

 〈스타워즈〉가 나타나고 스필버그가 나타났다. 우리에겐 종말이었다.

- 마틴 스콜세지 : 〈택시 드라이버〉의 감독

 내가 USC에 다닐 때 사람들은 〈확대〉에 몰려들었고 테마 파크의 탈 것 같은 값싼 오락에 취하려고 극장에 가지 않았다. 그러나 (루카스와 스필버그가) 훨씬 많은 돈을 벌 수 있음을 증명해냈고 스튜디오들은 이에 저항할 수 없었다. 고대 로마시대처럼 이런 식으로 부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아무도 하지 못했다. 이건 확실히 그들 덕분이다.

- 존 밀리어스 : 〈지옥의 묵시록〉의 각본가

 〈스타워즈〉는 테이블에 놓인 판돈을 싹쓸이했다. 〈스타워즈〉는 맥도널드가 나타나자 훌륭한 음식을 위한 입맛이 증발한 것 같은 현상이다. 우리는 이제 퇴화의 시대에 살고 있다. 모든 것이 뒷걸음질하여 커다란 빨판구멍 속으로 사라졌다.

- 윌리엄 프레드킨 : 〈엑소시스트〉의 감독

 〈스타워즈〉는 영화산업을 죽이지도 유아화하지도 않았다. 팝콘 영화는 언제나 산업을 지배해왔다. 만약 이런 영화가 훌륭하지 않다면 사람들은 왜 팝콘 영화에 몰려들겠는가. 대중들을 왜 그렇게 멍청하다고 생각하는가? 이것은 내 과오가 아니다. 나는 스티븐처럼 사람들이 보고 싶어하는 것을 이해하고 이를 추구할 뿐이다.

- 조지 루카스 : 〈스타 워즈〉의 감독

 사람들은 영화산업의 생태계, 돈을 벌지 못하는 작은 영화를 지원하기 위해서 엄청난 돈을 벌어들이는 영화가 필요한, 영화산업에 존재하는 공생관계의 고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쉽게 잊어버린다. 〈스타워즈〉가 벌어들인 15억 달러의 돈 중 절반 정도인 약 7억 달러가 극장주들에게 돌아갔다. 그리고 이 돈으로 극장주들은 무엇을 했는가? 그들은 멀티플렉스를 건설했다. 이들에게 여러 개의 가용화면이 생겼다는 사실은 이를 채워야 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과거에는 찾을 수도 없는 곳에 자리잡은 작은 극장에서 상영되던 예술영화가 갑자기 주류 극장에서 상영되고 돈을 벌기 시작한다. 그리고 일단 이러한 영화들이 돈을 벌기 시작하면 미라맥스와 파인라인이 성장하고 스튜디오들이 이러한 영화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여 미국에서 20년 전에는 존재하지도 않던 예술영화 산업이 번창하게 된다. 나는 헐리웃 영화산업을 파괴했다. 이것은 영화를 보다 유아적이 아니라 오로지 보다 지성적으로 만들어 가능해진 것이다.

- 조지 루카스

 블락버스터는 다른 영화들을 후원하지 않는다. 그게 전부다. 영화를 통해 할 말이 있는 사람은 50달러에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 그들은 모든 것을 질식시켰다.

- 마틴 스콜세지

 지난 여름 볼 만한 영화를 찾으려고 베벌리힐즈에 있는 멀티플렉스 두 곳에 갔다. 화면들은 모두 〈잃어버린 세계〉, 〈칸에어〉, 〈친구의 결혼식〉, 〈페이스 오프〉가 점령하고 있었다. 지성적인 사람이 '저걸 봐야겠군'이라고 생각할 만한 영화는 단 한 편도 없었다. 극장은 이제 대형 위락공원으로 변해버렸다. 영화는 죽었다.

- 로버트 알트만 : 〈내쉬빌〉의 감독

 오늘날 나는 미국 영화산업에 구역질이 난다. 좋은 영화는 너무나 드물고 적어도 나의 일부는 〈스타워즈〉가 부분적으로 영화산업에 이러한 방향을 제공한 책임이 있다고 믿기 때문에 나는 이 상황이 정말 유쾌하지 않다.

- 마샤 루카스 : 〈스타 워즈〉의 편집자. 조지 루카스의 아내

 로버트 알트만의 발언에 대해 할 말 있는 사람들이 많겠지만, 아마 알트만은 정말 볼만한 영화가 단 한 편도 없다고 말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오늘날의 할리우드에 뉴 아메리칸 시네마의 강렬함을 계승한 영화가 한 편도 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 하지만 그런 영화들이 거뜬히 박스오피스 1위에 오르며 시류를 휘어잡는 시대가 사라진지 오래인 것도 사실이다. 어쨌든 2005년까지도 승자는 〈스타 워즈 에피소드 3-시스의 복수(Star Wars Episode III-Revenge of the Sith, 2005)〉였다. 저자 피터 비스킨드는 이 시대를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이들(현대의 새로운 작가들, 올리버 스톤, 코엔 형제, 쿠엔틴 타란티노 등을 가리키고 있다-옮긴이 주)에게 자양분을 공급할 반문화 없이, 그리고 저항적 가치의 뒷받침 없이 독립이란 이름만의 독립이며 스튜디오들은 언제나 이들을 삼키고 부패시킬 위험이 있다. 루카스가 상상하듯 독립 영화들이 미국 전역에 있는 멀티플렉스에서 상영된다면 멋진 일이라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루카스는 최근 지역 멀티플렉스에 있는 여섯 개의 화면이 모두 〈잃어버린 세계〉, 또는 그와 유사한 영화를 상영하는 것이 현실인 샤핑몰에는 가보지 않은 것 같다. 불행하게도 이 이야기는 해피엔딩이 아닐 수도 있고 마지막 문장이 알트만의 말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에 의하면 "그림을 그리듯 영화를 완성하여 길모퉁이에 서서 1달러에 팔다보면 지치게 된다. 간혹 〈파고〉 같은 작품도 등장하지만 어쨌거나 잔돈푼으로 영화를 만들고 아무 보상도 받지 못한다. 이는 영화산업을 위해서는 재앙이며 영화예술을 위해서도 재앙이다. 나는 어떤 종류의 낙관적 견해도 가지고 있지 않다."

 다르덴 형제의 최신작 〈더 차일드(L'Enfant, 2005〉를 보기 위해서는 아무데나 널려 있는 멀티플렉스가 아니라 서울의, 광화문의, 씨네 큐브라는 극장에 가야만하는 나라에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 나는 피터 비스킨드의 말이나 로버트 알트만의 말에 반박하지 못한다. 『헐리웃 문화혁명』의 애잔함이 21세기 한국의 독자에게도 유효한 가장 큰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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