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스 E. M. 포스터 전집 2
E. M. 포스터 지음, 고정아 옮김 / 열린책들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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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스와 클라이브. 두 사람의 이름이 머리속에서 뱅뱅 맴돌기만 한다. 둘의 사랑은 시대를 잘못 타고났다. 그래서 헤어진거야. 이내 끝나버린 그들의 사랑을 보고 있자니 지속되지 못한 것에 대한 그리움을 부정하기 위해 나는 이런식으로 위안을 줄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온전히 둘의 사랑만이 존재할 수 있는 때가 있을까. 아마 찾기 힘들 것이다. 어쩌면 영영 오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더 서글퍼진다. 

영화를 먼저 보았다. 그 둘을 지켜보면서 나는 속으로 슬퍼했다. 손짓 하나에 감정이 스며들어간 그들의 연기가 나의 가슴을 아프게 만들었다. 영화를 본 후 읽은 E.M 포스터의 이 책은 나를 더 참담하게 만들었고 심란해졌다. 섬세한 듯 다가오는 클라이브와 어딘지 마음의 문을 닫고 사는 듯한 모리스. 클라이브는 자신의 숨길 수 없는 마음을 모리스에게 고백해버렸지만 모리스는 이내 달아났다.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저 클라이브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 척 숨기고 싶었을까. 

그러나 둘은 사랑하게 되었고 헤어진다. 금기사항을 지켜내버리기에는 서로에 대한 갈망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리스 여행을 갔다 온 뒤 클라이브는 앤과 결혼을 하게 된다. 클라이브의 마음이 돌아서버렸다. 모리스는 혼자 남아버렸고 그 슬픔의 몫은 온전히 모리스 혼자만의 것이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클라이브가 결혼을 하게 되었다고 해서, 이제는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다고 해서 모리스에 대한 마음이 없어져 버렸을까. 클라이브는 모리스를 가슴에서 떼어낸 게 아니라 아마 가슴 속에 묻어버리지 않았을까. 내가 뱉어버린 그 말이 나의 진심이 아닐 때가 있듯이, 클라이브는 모리스를 사랑하는 마음을 사회적인 통념, 도덕성에 위반되는 것이라 여겨지던 그 시대의 부산물이자 찌꺼지처럼 내던지지는 못하고 그저 자신의 가슴 속 공간을 하나 남겨두었을 것이다. 모리스를 위한 그만의 사랑. 

시간이 흐른 뒤 더이상 클라이브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다는 것을 알아버린 모리스는 새로운 사랑을 찾아 떠나버렸다. 함께 도망쳐버렸다. 나는 아직도 의아하다. 모리스에게 그 새로운 사람, 알렉이 진정한 사랑이었는지. 클라이브를 잊기 위한 도구도 새로운 사랑에 대한 갈망의 돌출구도 아니라 느껴진다. 그저 자신을 이해해주는 누군가가 필요한 것이었는지도. 나를 알아주는 그 누구, 살아가면서 나에게는 그런 사람이 있었는가. 사람이 살아가면서 어떠한 사람, 나만의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그 누군가를 얻는다는 것은 힘든 일이고 나는 항상 갈망한다. 모리스는 얻기 힘든 그 사람을 찾았고 사랑했고 헤어졌지만 가슴 속에 남아있다는 그 자체가 나에게는 부럽기만 한 것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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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삐돌리오 언덕에 앉아 그림을 그리다
오영욱 지음 / 샘터사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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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다녀 온 사람들의 가슴 속에 남는 것은 무엇일까. 찬란했던 그 곳에 대한 기억일까, 아니면 입 안 가득 넣고 오물거렸던 핫초콜릿의 쌉싸름함일까. 나 자신을 발견하고 돌아오는 과정. 여행에 관한 글을 읽으면 그들의 외로움이 먼저 들린다. 

아르노 강가에서 스케치북 하나 찢어달라는 외국인에게 오기사는 이렇게 말했다. 엽서 크기의 종이 12장이 묶여 6유로가 나가는 종이를 찢어줄 수 없어서 미안하다고. 어쩌면 종이의 값이 아니라 그릴 수 있는 그림 한 점이 통째로 달아나는 느낌이었을 테다. 그만큼 소중한 그림이 펼쳐져 있는 이 책을 들고 있으니 작가가 이 그림들을 그렸던 그 시간 모두를 내가 가진 느낌이다. 

여행은 내가 집 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시작된다는 말.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든지 모든 것을 가지고 떠나든지 다시 돌아왔을 때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기억이라는 단 한가지. 찰칵! 소리가 나는 카메라 셔터소리를 대신해서 슥슥 소리가 나는 펜으로 여행지에서 본 것을 그림으로써 표현한다. 단지 나는 그림 한 점을 보는 것 뿐인데도 많은 것을 느낀다. 어떤 것을 찍을까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 또 어떤 것을 이 종이 위에 그려넣을까 고민하는 작가의 시간과 감성, 그 모든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기억에 대한 집약. 작가가 끄적 거려놓은 짧은 메모는 한참동안 생각하게 만든다. 당신은 도대체 무얼 보고 어떤 것을 느낀 건가요, 라고 외치고 싶게끔. 공감이 일지 않는다고 말하기보다 작가가 느꼈을 감정을 이해하고 싶은 애틋함이 더 크게 느껴진다. 


p.71
지구가 잠시 자전을 멈춘 듯
세계는 어둠 속에 묻혀 고요하다.
그 침묵을 깨우는
방음시설이 형편없는 호스텔의
요란한 변기 물 내리는 소리가
인류의 문명을 느끼게 해준다.

p.223
여행을 시작한 지 1년째 되는 날이다.
다만 지구는 작년 이날과 거의 비슷한 위치로 돌아왔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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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조너선 사프란 포어 지음, 송은주 옮김 / 민음사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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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마지막장을 덮고는 내 가슴속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너무나도 가슴이 벅차다고. 그리고 책을 읽는 내내 느껴졌던 감성적인 문장들은 나의 가슴을 후벼 팠고, 나의 글 또한 그 감성적인 내용에 맞추어 한층 더 부슬부슬한 느낌이 되지 않을까 싶다.

영화 <우크라이나에서 온 편지>(Everything is illuminated)의 원작을 쓴 작가라는 말에 반해서, 읽기 시작한 이 책. 사실 영화의 원작을 읽고 싶었지만, 번역서가 없어서 그의 다른 책을 찾아보다가 이 책이 눈에 들어왔다. 레코드숍에서 사고 싶은 음반을 뒤적거리다가 옆에 있는 마음에 드는 표지의 음반도 같이 집어 온다. 그리고 집에 와서 틀어보자, 흘러나오는 매력 있는 사운드. 우연히 얻게 되는 행복감.

텍스트와 텍스트의 어지러움이 조합된 ‘하나의 엮음’이라고 할 수도 있을까. 글 안에는 손잡이, 창문을 응시하는 모습의 사진이라든지 지나치게 반복되는 숫자와 글자라든지. 책을 읽는 내내 감정을 증폭시킬 수 있는 요소가 간간히 섞여있었다. 많은 것을 담아내려는 작가의 모습이 새로웠고 거의 500페이지에 달하는 글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만약에 한 장소에 아주 오래 앉아있을 수 있는 내성마저 가지고 있다면, 책을 한 번 읽고 다시 한 번 더, 한 번 더. 이 책을 손에서 떨어뜨리는 상상이란 아주 불쾌한 것 마냥 여기지 않았을까, 몇 번은 더 읽을 수 있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 해가 뜨고, 지고 다시 뜰 때 동안, 눈은 깨어있듯이. 감성만은 충만하듯이.

9.11 테러에, 아빠를 잃은 어린 아이 오스카. 그리고 오스카의 주변을 둘러싼 가족들의 모습, 그의 할아버지와 할머니, 엄마. 자신의 아빠를, 그러니까 9.11 테러에 목숨을 잃은 아빠가 어떻게 죽었는지, 그리고 아빠에 대한 과거, 자신이 알지 못하는 그 무언가의 열쇠를 찾기 위해 찾아 떠나는 여행. 수많은 Blank, 그리고 열쇠, 편지, 그리고 소통.

이야기는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한다. 할아버지가 자신의 아들 토마스 셸에게 보내는 편지, 할머니가 오스카에게 보내는 편지, 그리고 오스카의 슬프지만 유쾌한 일상들 그리고 가장 최악이었던 날의 기억들. 모든 것이 한편으로는 아이러니하게 엮여 있고, 풀리지 않을 것 같은 모호함을 주며 이야기는 흘러간다. 그러나 결국에는 오스카의 기억 속에 자리 잡고 있던 애매한 기억들이 하나씩 풀리면서 알게 되는 이야기. 퍼즐을 하나씩 맞춰가듯이 조심스레 읽다보면, 어느새 나는 사랑이라는 5,6,8,3을 누르고 있다. 책을 읽는 내내 감동적인 숫자, 5,6,8,3. ‘사랑’을 뜻하는 그 숫자.

그리고 찬란한 결말. 15장의 사진들. 그 사진을 찬찬히, 때로는 빨리 넘기면서 그 전까지의 책 내용을 더듬어 볼 수가 있는, 그간의 감정들까지 되돌이켜 볼 수 있는 사진들. 이 책의 감동은 그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은 그 15장의 사진을 보는 시간 속에 있지 않을까. 그리고 모두들 이 책의 끝, 그 15장의 사진들을 보고 난다면 지금의 나처럼 가슴이 벅찰 것이다. 또, 이 책을 다시 아니 몇 번이고 되뇌어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까.

너무 흔히 쓰여서 하기 싫은 "사랑한다"는 말을 정말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해야 하듯이, 언제나 하기 쉬운 말 "엄청나게 좋다"라는 말은, 이 책에서는 정말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Extreme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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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08-05-16 08: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주의 마이리뷰, 축하드려요.
덕분에 저도 이 리뷰를 읽게 되었네요. 그리고 책도 보관함에 살짝 넣었습니다.
잘 읽고 갑니다.
:)

yez 2008-05-19 1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책이라서 이렇게 리뷰를 올리게 되었는데, 감사할 따름이에요, 꼭 한 번 읽어보시면 좋을 책이에요, 더불어 이 책 작가의 아내, 니콜 크라우스의 <사랑의 역사>도 함께요, ^^

다락방 2008-05-20 23:29   좋아요 0 | URL
yez 님. [사랑의 역사]는 작년에 읽었답니다. 그 작가의 아내가 이 작가로군요. 그러고보니 작품해설에서 읽은 기억이 나요. 매치를 못시켰네요. :)
 
방황하는 칼날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이선희 옮김 / 바움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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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완벽한 것은 없다. 만인 앞에 평등하다고 하는 법조차도.
읽는 내내,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영화보다 섬뜩하다고 느꼈다. 텍스트로 이루어진 글을 읽는 도중 책을 내려놓기 일쑤였다. 조금씩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내 곁을 흐르고 있는 공기가 차가워졌다. 단지 묘사의 끔찍함, 이야기의 전개 등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살고 있는 지금 현재에 사회 곳곳에 만연하게 퍼져있는 그런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떻게 이런 일이, 라는 생각 따위는 접어둔지 오래다. 어쩌면 내가 능동적으로 보게 되는 영화나 책보다 tv 리모콘을 누르고 뉴스가 시작되면서 나오는 그 모든 이야기들이 대개 생각지도 못했던 끔찍한 일들 일색이기 때문이다. 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일들이 이제는 당연하다기 보다 사건자체가 새롭지 않다고 해야할까. 그만큼 이 모든 세상이 나빠지고 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아, 전에도 있었던 일들이 그저 은패되었기 때문인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은 두 번째이다. <흑소소설>을 접하면서 이 작가, 참 사회에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가보다, 라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그러나 가장 유명하다는 <용의자 X의 헌신>은 읽어보질 못했다. 아마 그 책도 이런류의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방황하는 칼날>. 법은 도대체 누굴 위해 존재하는가, 라는 단순하지만 심각한 주제를 가지고 읽기에는 흥미진진하지만 생각해보면 거북하기만 한 사건을 제대로 다루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서 미성년자를 보호한다는 명목아래 지켜지고 있는 소년법에 대한 문제이다. 이 책의 사건은 범인이 미성년자라는 점에 대해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종전에도 생각해 본 적이 있는 문제이다. 미성년자는 아무리 끔찍한 살인을 저질렀다 하더라도 갱생이라는 이유로 형이 적게 내려진다는 소리를 듣고 말도 안돼! 를 외쳤던 나에게 있어서는 이 사건이 살인사건의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충동적인 가해자로 바뀐 나가미네의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다. 

자신의 딸이 불꽃놀이를 갔다가 미성년자인 소년 3명에게 끌려가 아쓰야와 가이지라는 동물보다 못한 것들로부터 성폭행을 당하게 된다. 그리고 다른 소년인 마코토가 익명의 전화로 알려준 정보에 의해 아쓰야의 집에 들어갈 수 있게 되고 충동적으로, 아니 에마가 성폭행 당하는 장면을 담은 비디오테이프를 보고 살인을 결심한 나가미네는 아쓰야를 무차별적으로 살해하게 된다. 그 사건 바로 전, 범행의 주도자인 가이지는 나가노로 도망을 치게 된다. 경찰측에서는 가이지를 잡으려 혈안이 되어 있었고 동시에 살인사건을 저지른 나가미네까지 목적으로 추격을 하게 된다. 하지만 나가미네의 살인을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물론, 살인이라는 것은 머릿속에서 흔하게 나올 수 있는 생각이 아니다. 사이코패스, 정신착란자가 범죄를 저지르는 것에 희열을 느낀다는 납득하기 힘든, 납득할 수도 없는 것이 존재하고는 있지만 살인이라는 것이 절대 일어나서는 안되는 것중에 하나이다. 하지만 곳곳에 어떤 이유에서든 살인이 버젓이 일어나고 있고 날이 갈수록 그 범죄의 잔인함과 수법이 다양해지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미성년자임을 이유로 그러한 성폭행과 살인을 저지르고 더불어 그 일에 관해 자책감이나 반성 따위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이코패스 아닌 사이코패스에게 갱생을 목적으로 형이 적게 내려져야 할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양립할 수 있는 의견들이 건재한다. 미성년자에게 기회를 준다는 것에 어느정도 동의는 하지만, 딸이 죽어가는 모습을 본 아버지가, 또 어느 누가 그러한 모습을 보고 죽이고 싶지 않겠는가. 단지 법이 그렇게 정해져 있으니까 못하는 것인가. 나가미네처럼 자신이 죽는 한이 있더라도 딸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하고 싶지 않을까. 

말은 이렇게 하고 있지만, 이 책의 사건을 이끌어 가는 사람은, 그리고 우리 모두의 의견을 대신 말해주는 사람은 당연히 와카코이다. 사건의 가해자 가이지를 찾아내도록 옆에서 나가미네를 돕고는 있지만 가이지를 발견할 때까지의 와카코의 입장은 계속해서 갈등하게 된다. 미성년자이고 나가미네의 범행을 이쯤에서 그만두도록 하기 위해 그를 자수하게끔 설득하지만 가이지를 어떻게 죽이지 않을 수 있을까 라는 양립 가능성의 의견이 계속해서 혼재하는 와카코. 꼭 나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이 책은 단지 어떤 사건이 일어나고 진행되는 것에만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다. 사회에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는 작가가 내뱉는 그 모든 글을 읽으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미성년자에게 형을 적게 내려주는 것에 반대한다, 충동적이거나 어떤 동기에서의 살인은 정상참작을 해주어야 한다는 점 등이 문제가 아니다. 그것보다 먼저 도대체 납득할 수 없는 없어져야 할 범죄들이 이땅에서 사라졌으면 좋겠다. 완벽한 것은 없듯이 계속해서 보완되고 있는 그 법이 언젠가는 완벽해져서 더이상 고칠 필요가 없을 때쯤이면 우리가 원하는 그런 세상이 올까.  

 
p.s 그러나 작가의 글보다도 더 무서웠던 것은, 옮긴이의 마지막 말이었다.
"어쩌면 지금 당신 옆에 끔찍한 사이코패스가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책을 쾅! 하고 덮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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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스 티볼리의 고백
앤드루 손 그리어 지음, 윤희기 옮김 / 시공사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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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 언제나 픽션이냐, 논픽션에 근거를 둔 픽션이냐를 이야기하지만 이 책에 대해선 그 자체가 논픽션이라는 것에 힘을 실어주고 싶다. 곁에서 누가 나에게 진실이 아니라고 떠들어대든 그냥 나는 이 치명적인 사랑에 대한 찬사를 보내고 싶다는 것이다. 물 흐르듯이, 조용한 음악이 내 귓가에 스쳐 지나가듯 읽어버리다가 갑자기 한 번에 몰아치는 폭풍처럼 내 마음 시린 한 구석을 휩쓸어 간 이 책에 대한 나의 감동은 이러저러한 말보다 책 속의 글들을 나열하는 게 더 현명하지 않은 가 싶다. 문장을 읽다가 나는 문득문득 이런 느낌을 느꼈다. 아, 뇌속의 주름이 쫘악 펴지는 것 같아. 

p.402
때로 나는 그 말벌을 생각한다. 나의 앨리스에게 침을 쏜 그 말벌을. 황금색 털에 호랑이 눈처럼 몸통에 줄무늬가 있던, 사우스파크 어딘가에 매달린 벌집에서 생을 보낸 그 말벌. 물론 지금은 죽고 없다. 이미 40년 전에 짓이겨져 죽었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생각하고 싶다. 살아 있을 때 그놈이 거실 창문을 통해 아름다운 앨리스를 지켜보았을 것이라고. 그놈은 날이면 날마다, 나의 예쁜 소녀가 질 나쁜 소설책을 읽을 때나 머리를 매만질 때나, 아니면 창문과 창문 사이의 거울을 보며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를 때나 그녀를 지켜보고는 자기만의 방에서 윙윙거리며 뭐라고 중얼거렸다. 그놈은 꿀을 만들지도 않았고, 벌집을 짓지도 않았다. 그놈은 남을 괴롭히는 일 말고는 이 지상에서 다른 어떤 목적도 없었다. 땅주인이 조금만 신경을 썼다면 몇 달 전에 벌써 죽었어야 할 놈이다. 아무런 가치도 없는 벌레. 하지만 그놈은 그녀를 사랑했다. 그녀를 지켜보기 위해 자신의 생을 산 놈이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말벌의 생은 짧다-자신의 집을 폐쇄하고 등 달린 현관에서 나와 두 차례 공중에서 하강하더니, 마침내 그녀의 삶 속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죽은 것이다. 갈색 핏자국. 용감하지만 바보 같은 놈이었다. 아름다운 놈이었다. 사랑을 위해 자신의 생을 바친 놈이었다.

책의 마지막쯤 등장한 이 단락을 정말 수도 없이 읽을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이 글들을 왜 써내려갔는지, 70살의 외모로 태어나 진짜 나이가 70살이 되었을 때에는 자신의 생을 마감할 수밖에 없는 기구하고도 특이한 삶을 가진 막스 티볼리라는 사람이 왜 글들을 주절주절 쓰고 있었는지, 왜 이러한 말들을 했는지 앨리스를 왜 죽도록 사랑했는지...끝도 없는 왜, 라는 단어에 대한 답이기도 했다. 한 여자를 한평생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다고 고백하는 막스 티볼리를 두고, 어리석다고 한없이 바보같다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돌을 던지고 싶었는데, 정작 그, 막스 티볼리는 그 돌을 피해갈 것만 같았다. 그만큼 아련하고도 먼 존재인 막스 티볼리. 

우리는 얼마나 보이는 것만큼 믿을 수가 있을까. 보이지 않는 것만큼 생각해줄 수 있을 만큼 타인을 배려하는 모습을 내보일 수가 있을까. 타인의 고통을 얼마나 잘 이해해 줄 수 있을까. 우리는 그러지 못한다. 나조차도 나를 알 수 없는 가련한 존재가 바로 내가 되고 네가 되고 우리이지 않았던가. 그리고 막스 티볼리는 그 모든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인지, 자신에 대한 오해, 존재 자체를 알리고 싶어서였는지 글을 썼다. 아, 어쩌면 자신이 사랑했던 앨리스, 앨리스와 자신의 아들인 새미, 막스 티볼리 자신을 사랑했다고 믿고 싶은 휴이에게 만큼은 모든 걸 이야기해주고 싶어서 였을지도 모르겠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지만, 모든 걸 말해주지는 않는다. 우리의 얼굴, 손동작, 말투 등이 그 사람의 인격을 말해준다고 하지만 모든 것을 다 내보여주지는 않는다. 어딘가에는 종종, 아니 항상 모순이 있게 마련이다. 막스 티볼리의 삶 속에는 외모에서 보여지는 것과 실제의 나이가 한없이 동떨어진 모순을 보여주었지만 그 모순이 불행을 말하지는 않는다. 그저 나는 텍스트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그의 진심만을 읽을 수 있었을 뿐이다.

피해가고 싶은 것들, 살아가는 동안 내가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들을 나열한다는 것은 지나친 용기가 필요하다. 막스 티볼리는 고백이라는 이름하에 자신의 모든 것을 써내려갔지만 그 속에서 나는 사랑밖에 느낄 것이 없었다. 글자 하나하나, 문장 그 모든 것이 사랑으로 시작해서 마침내 사랑을 위한 것이 되어버렸듯이, 자신의 삶은 한참 제쳐두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살아갔던 막스 티볼리의 삶은 나에게 감성적이지만 한편으로는 진실되고 진부한 게 되어버렸다. 그만큼 진심으로 다가왔다. 진심이라며 나에게 말하는 그 목소리를 두고 나는 그것을 거짓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소설이라는 픽션, 허구 속에 가둔 그의 진실된 이야기가 나는 어쩌면 그 틀 밖으로 뛰쳐 나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책은 소설이라는 이름을 지우고 그 위에 아주 똑바른 글씨로 이렇게 쓰고 싶다. "고백, 그 자체".

책을 읽는 내내 나를 뒤흔들었던 그 문장들, 읽다가 펜을 꺼내들고 옆에 있는 아무종이나 집어들어 베껴 적은문장들. 이 이 책이 나에게 주었던 감동을 그대로 보여줄 수 있지 않을까. 


 

p.41
마지막 머리카락을 작은 속에 넣고 나는 흘긋흘긋 어머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당시만 해도 어머니는 아직 젊었다. 비 갠 하늘의 아련한 아름다움이 어머니에게는 있었다.

p.53
우리는 창밖의 주차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여행길에 지루하기도 했고 쉬지도 못한 우리는 뭔가 눈에 친숙하고 나익은 것을 보고 싶었다. 우리는 다시 신문으로 그리고 아우성치는 위장으로 관심을 돌렸고, 아무 말 없이 또 한 시간을 보냈다. 오랜 친구와 같이 있다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이다.

p.83
그 하룻밤이 나에게 안긴 고뇌란! 그 혈관의 푸른빛이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같은 색으로 채색해버렸다. 매일 밤, 나는 이 세상에서 그려는 지워야 했다. 잠을 자기 위해, 또 하루를 살아내기 위해.

p.91
그러나 기억은 때로 거구로 움직이기도 한다. 우리가 일상으로 행하는 모든 일은 작은 점이 되어 흐릿해지고, 특이한 사건이나 우연한 만남 같은 것이 마치 종이 위에 번지는 잉크처럼 크게 떠오르기도 한다.

p.103
그녀의 커피잔 속에 떨어진 달을 보았다. 커피잔 속에서 나방처럼 꿈틀대는 달. 그때 나는 보았다. 그녀가 몸을 앞으로 기울이면서 말없이 그 달에 키스하는 모습을. 그리고 그녀가 커피를 식히기 위해 그 표면에 입김을 불어 골을 낼 때 달이 폭파되어 산산이 흩어지는 모습을 보았다.

p.215
앨리스, 팔찌를 감은 어느 발목도, 캉캉을 추는 어느 다리도 문가에서 당신이 보인 그 부끄러움만큼 선정적이지는 않을 거요. 그리고 모든 것이 우리가 만나기 전과 똑같이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오. 아니, 훨씬 더 안심이 되는구려. 갑자기 한순간에 몰려왔으니. 가슴속 차가운 얼음처럼, 뇌를 울리는 종처럼, 신을 갈망하는 공포가 밀려왔으니.

p.264
몸뚱어리를 구슬처럼 장식하는 뿌연 공기. 풀협죽도 향기를 품은 기억. 두 번씩이나 응답을 받은 십대 시절의 기도. 사랑하는 이름. 잘못된 이름을 부르는 작은 목소리.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환희. 그리고 그 밖의 것들.

p.266
내가 누릴 수 있었던 유일한 호사는 당신의 미소, 상쾌함을 주는 당신의 그 미소를 구매하는 일이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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