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스 티볼리의 고백
앤드루 손 그리어 지음, 윤희기 옮김 / 시공사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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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 언제나 픽션이냐, 논픽션에 근거를 둔 픽션이냐를 이야기하지만 이 책에 대해선 그 자체가 논픽션이라는 것에 힘을 실어주고 싶다. 곁에서 누가 나에게 진실이 아니라고 떠들어대든 그냥 나는 이 치명적인 사랑에 대한 찬사를 보내고 싶다는 것이다. 물 흐르듯이, 조용한 음악이 내 귓가에 스쳐 지나가듯 읽어버리다가 갑자기 한 번에 몰아치는 폭풍처럼 내 마음 시린 한 구석을 휩쓸어 간 이 책에 대한 나의 감동은 이러저러한 말보다 책 속의 글들을 나열하는 게 더 현명하지 않은 가 싶다. 문장을 읽다가 나는 문득문득 이런 느낌을 느꼈다. 아, 뇌속의 주름이 쫘악 펴지는 것 같아. 

p.402
때로 나는 그 말벌을 생각한다. 나의 앨리스에게 침을 쏜 그 말벌을. 황금색 털에 호랑이 눈처럼 몸통에 줄무늬가 있던, 사우스파크 어딘가에 매달린 벌집에서 생을 보낸 그 말벌. 물론 지금은 죽고 없다. 이미 40년 전에 짓이겨져 죽었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생각하고 싶다. 살아 있을 때 그놈이 거실 창문을 통해 아름다운 앨리스를 지켜보았을 것이라고. 그놈은 날이면 날마다, 나의 예쁜 소녀가 질 나쁜 소설책을 읽을 때나 머리를 매만질 때나, 아니면 창문과 창문 사이의 거울을 보며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를 때나 그녀를 지켜보고는 자기만의 방에서 윙윙거리며 뭐라고 중얼거렸다. 그놈은 꿀을 만들지도 않았고, 벌집을 짓지도 않았다. 그놈은 남을 괴롭히는 일 말고는 이 지상에서 다른 어떤 목적도 없었다. 땅주인이 조금만 신경을 썼다면 몇 달 전에 벌써 죽었어야 할 놈이다. 아무런 가치도 없는 벌레. 하지만 그놈은 그녀를 사랑했다. 그녀를 지켜보기 위해 자신의 생을 산 놈이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말벌의 생은 짧다-자신의 집을 폐쇄하고 등 달린 현관에서 나와 두 차례 공중에서 하강하더니, 마침내 그녀의 삶 속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죽은 것이다. 갈색 핏자국. 용감하지만 바보 같은 놈이었다. 아름다운 놈이었다. 사랑을 위해 자신의 생을 바친 놈이었다.

책의 마지막쯤 등장한 이 단락을 정말 수도 없이 읽을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이 글들을 왜 써내려갔는지, 70살의 외모로 태어나 진짜 나이가 70살이 되었을 때에는 자신의 생을 마감할 수밖에 없는 기구하고도 특이한 삶을 가진 막스 티볼리라는 사람이 왜 글들을 주절주절 쓰고 있었는지, 왜 이러한 말들을 했는지 앨리스를 왜 죽도록 사랑했는지...끝도 없는 왜, 라는 단어에 대한 답이기도 했다. 한 여자를 한평생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다고 고백하는 막스 티볼리를 두고, 어리석다고 한없이 바보같다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돌을 던지고 싶었는데, 정작 그, 막스 티볼리는 그 돌을 피해갈 것만 같았다. 그만큼 아련하고도 먼 존재인 막스 티볼리. 

우리는 얼마나 보이는 것만큼 믿을 수가 있을까. 보이지 않는 것만큼 생각해줄 수 있을 만큼 타인을 배려하는 모습을 내보일 수가 있을까. 타인의 고통을 얼마나 잘 이해해 줄 수 있을까. 우리는 그러지 못한다. 나조차도 나를 알 수 없는 가련한 존재가 바로 내가 되고 네가 되고 우리이지 않았던가. 그리고 막스 티볼리는 그 모든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인지, 자신에 대한 오해, 존재 자체를 알리고 싶어서였는지 글을 썼다. 아, 어쩌면 자신이 사랑했던 앨리스, 앨리스와 자신의 아들인 새미, 막스 티볼리 자신을 사랑했다고 믿고 싶은 휴이에게 만큼은 모든 걸 이야기해주고 싶어서 였을지도 모르겠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지만, 모든 걸 말해주지는 않는다. 우리의 얼굴, 손동작, 말투 등이 그 사람의 인격을 말해준다고 하지만 모든 것을 다 내보여주지는 않는다. 어딘가에는 종종, 아니 항상 모순이 있게 마련이다. 막스 티볼리의 삶 속에는 외모에서 보여지는 것과 실제의 나이가 한없이 동떨어진 모순을 보여주었지만 그 모순이 불행을 말하지는 않는다. 그저 나는 텍스트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그의 진심만을 읽을 수 있었을 뿐이다.

피해가고 싶은 것들, 살아가는 동안 내가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들을 나열한다는 것은 지나친 용기가 필요하다. 막스 티볼리는 고백이라는 이름하에 자신의 모든 것을 써내려갔지만 그 속에서 나는 사랑밖에 느낄 것이 없었다. 글자 하나하나, 문장 그 모든 것이 사랑으로 시작해서 마침내 사랑을 위한 것이 되어버렸듯이, 자신의 삶은 한참 제쳐두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살아갔던 막스 티볼리의 삶은 나에게 감성적이지만 한편으로는 진실되고 진부한 게 되어버렸다. 그만큼 진심으로 다가왔다. 진심이라며 나에게 말하는 그 목소리를 두고 나는 그것을 거짓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소설이라는 픽션, 허구 속에 가둔 그의 진실된 이야기가 나는 어쩌면 그 틀 밖으로 뛰쳐 나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책은 소설이라는 이름을 지우고 그 위에 아주 똑바른 글씨로 이렇게 쓰고 싶다. "고백, 그 자체".

책을 읽는 내내 나를 뒤흔들었던 그 문장들, 읽다가 펜을 꺼내들고 옆에 있는 아무종이나 집어들어 베껴 적은문장들. 이 이 책이 나에게 주었던 감동을 그대로 보여줄 수 있지 않을까. 


 

p.41
마지막 머리카락을 작은 속에 넣고 나는 흘긋흘긋 어머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당시만 해도 어머니는 아직 젊었다. 비 갠 하늘의 아련한 아름다움이 어머니에게는 있었다.

p.53
우리는 창밖의 주차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여행길에 지루하기도 했고 쉬지도 못한 우리는 뭔가 눈에 친숙하고 나익은 것을 보고 싶었다. 우리는 다시 신문으로 그리고 아우성치는 위장으로 관심을 돌렸고, 아무 말 없이 또 한 시간을 보냈다. 오랜 친구와 같이 있다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이다.

p.83
그 하룻밤이 나에게 안긴 고뇌란! 그 혈관의 푸른빛이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같은 색으로 채색해버렸다. 매일 밤, 나는 이 세상에서 그려는 지워야 했다. 잠을 자기 위해, 또 하루를 살아내기 위해.

p.91
그러나 기억은 때로 거구로 움직이기도 한다. 우리가 일상으로 행하는 모든 일은 작은 점이 되어 흐릿해지고, 특이한 사건이나 우연한 만남 같은 것이 마치 종이 위에 번지는 잉크처럼 크게 떠오르기도 한다.

p.103
그녀의 커피잔 속에 떨어진 달을 보았다. 커피잔 속에서 나방처럼 꿈틀대는 달. 그때 나는 보았다. 그녀가 몸을 앞으로 기울이면서 말없이 그 달에 키스하는 모습을. 그리고 그녀가 커피를 식히기 위해 그 표면에 입김을 불어 골을 낼 때 달이 폭파되어 산산이 흩어지는 모습을 보았다.

p.215
앨리스, 팔찌를 감은 어느 발목도, 캉캉을 추는 어느 다리도 문가에서 당신이 보인 그 부끄러움만큼 선정적이지는 않을 거요. 그리고 모든 것이 우리가 만나기 전과 똑같이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오. 아니, 훨씬 더 안심이 되는구려. 갑자기 한순간에 몰려왔으니. 가슴속 차가운 얼음처럼, 뇌를 울리는 종처럼, 신을 갈망하는 공포가 밀려왔으니.

p.264
몸뚱어리를 구슬처럼 장식하는 뿌연 공기. 풀협죽도 향기를 품은 기억. 두 번씩이나 응답을 받은 십대 시절의 기도. 사랑하는 이름. 잘못된 이름을 부르는 작은 목소리.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환희. 그리고 그 밖의 것들.

p.266
내가 누릴 수 있었던 유일한 호사는 당신의 미소, 상쾌함을 주는 당신의 그 미소를 구매하는 일이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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