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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트
엘리 위젤 지음, 김하락 옮김 / 예담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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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영화 <피아니스트(The pianist)>
 
       <우크라이나에서 온 편지(Everythin is illuminated)>
 
책    <운명> by 임레 케르테스 
 
나의 머릿속에 기억나는 유대인에 대한 잔향을 다룬 영화와 책이다. 이 외에도 스쳐 지나갔던 수많은 영화와 책이 있을테지만, 단지 나는 이 세 가지의 기록들이 선명하다. 그리고 이 책. 엘리 위젤의 나이트. 
  

그래서 입을 열었다. 그렇지만 나는 말을 감싸고 있고 나아가 말을 초월하는 침묵을 더 신뢰했다. 유골로 뒤덮인 비르케나우 벌판이 비르케나우에 대한 어떤 증언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 말로는 형언하기 어려운 것을 어떻게든 명확히 표현하려고 애썼지만 여전히 그 한계를 절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담아두기에는 너무나도 엄청난 기록들이며 가해자들을 위한 침묵이 더이상 소용이 없다고 생각한 작가는 천천히 그 날을 일을 이야기 하기 시작한다.
 

시게트 마을의 소년. 모이셰. 나는 먼 곳을 바라보는, 모이셰의 커다란 눈이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마을에서 추방되어 다시 돌아온 모이셰의 눈에는 더 이상의 미래는 없는 듯 보였다.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마을에 쳐들어 온 독일군. 그리고 마을 전체를 이송시킨다는 청천벽력 같은 엄포. 그렇게 사건은 시작되었고, 처참한 상황과 절망의 끝도 함께 다가오고 있었다. 

"아우슈비츠"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이름이었다. 긴 시간동안 이유도 모른 채 가축 수송용 열차에서 보내다가 내린 곳. 그 곳에서 남자와 여자로 나뉘었고, 그리고 아버지와 나는 곁에 있었지만 화장장으로 가고 있었다. 너무나도 선명한 불꽃 앞에서 몇 발짝만 디디면 죽을 수 있는 찰나에 중얼거리는 기도. 죽음의 천사를 만나서 가까스로 면하게 된다. 그리고 첫날 밤을 잊지 않으리라는 다짐도 함께.

그 밖에도 몇 번인가 교수형을 목격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희생자가 우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쇠약해진 몸뚱어리들은 오래전에 눈물의 쓴 맛을 잊어버렸다. 매일같이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은 나날들. 순간마다 생사의 갈림길을 경험하는 나날들. 언제나 끝인지를 모르며 죽어가는 모든 사람들. 그렇게 숨막히는 노동을 하면서 그 중 많은 사람들은 하나둘씩 사라져갔다. 아버지와 나만이 저 끝에, 아니 더이상의 죽는 사람들은 없었으면 했지만 실제는 그와 반대로 일어난다는 것을 처절하게 깨닫는 동안에 머릿속의 꿈들은 사실로만 바뀌어져간다. 끝내는 아버지의 죽음마저도 남의 일이 되어버린 듯이. 

아버지는 점점 쇠약해져갔고, 나또한 미친듯이 머릿속까지 지쳐갔다. 더이상 쇠약해지는 아버지를 돌봐야겠다는 생각마저 희미해져가고 있었다. 그러자마자 순간의 후회가 밀려왔지만 현실의 벽앞에서의 동정이나 배려따위는 안중에 없는 그런 것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나마저도 죽음의 문턱에 다다르고 있었다. 나는 그 때 열여섯살이었다. 

뿌리없는, 지구상에 번호로 존재하는 유일한 사람들. 그렇게 아버지의 죽음을 눈앞에서 보고도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던 나에게는 죄책감이 들지 않았다. 아버지의 무덤에서 기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죽음 이후로 4월 11일까지의 삶은 나에게 무의미했고, 지워버렸다. 4월 6일 운명의 수레바퀴가 방향을 바꾼 그 날. 부헨발트에서의 자유. 그렇게 기나긴 고통속에서의 허우적거림은 끝이 나 버렸다. 그러나 그 상처는 가슴 속에 아로새겨 존재할 것이며,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밤이 깊었다. 친위대가 와서 내리라고 했다. 죽은 사람은 열차안에 그대로 버려졌다. 설 수 있는 사람만 떠날 수 있었다.

"행동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가장 큰 위험인 무관심에 대한 유일한 치유책입니다."

by 엘리 위젤

 

p.122 내 뒤에서 아까 그 사람이 다시 묻는 소리가 들렸다.

“하나님은 어디에 있는가?”
그때 내 안에서 어떤 목소리가 대답하는 것을 들었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여기 교수대에 매달려 있지.”
그날 저녁 수프는 시체 맛이 났다. 

p.155 발이 몹시 쑤셨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몸이 후들거렸다. 몇 미터만 더 가면 다 끝나리라. 쓰러지고 말리라. 작은 붉은 불꽃. 발포. 죽음이 나를 에워싸고 질식시켰다. 죽음이 끈덕지게 달라붙었다. 죽음을 잡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는다, 끝난다는 생각이 나를 유혹하기 시작했다.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 더 이상 발의 통증을 느끼지 않는 것. 피로고, 추위고 더 이상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 것. 열에서 이탈해 길옆에 나둥그러지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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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전달자 블루픽션 (비룡소 청소년 문학선) 20
로이스 로리 지음, 장은수 옮김 / 비룡소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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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마을은 사랑이나 우정과 같은 인간적인 감정에 따르는 어떠한 종류의 고통도 없는 완벽한 행복에 이르기 위하여, 개인의 선택에 따르는 어떠한 종류의 잘못도 있을 수 없는 완전한 사회를 이루기 위하여, 피부색이나 언어와 같은 차이에 따르는 어떠한 종류의 차별도 없는 평등한 세상을 만들기 위하여 분란의 소지를 모두 제거해 버린 곳입니다.'

아무리, 마찰이 없으며 완벽한 행복이 가능하다고 해도 이렇게 획일화 된 곳이 모두에게 기쁨을 가져다 줄 수 있을까.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아주 협소한 곳에서, 우물 밖을 모르던 개구리. 그 개구리는 점점 우물 밖의 일들을 알게 되고 충격에 휩싸이며 그리고 결국은 놀람과 당황을 경험하게 된다. 그러나, 우물 밖의 개구리는 어땠을까. 우물 밖의 개구리가, 실수로 우물안에 들어와 갇히게 되었을 때의 답답함과 좌절은 이루말할 수 없을 것이다. 모든 것은 상대적이기 마련이니까.

어쩌면, 기억 보유자가 되는 조너스의 과정도 이렇게 말 할 수 있겠다. 점점 더 새로운 것을 알아가지만 아직은 그것을 감당하기에 어린 나이에 충격으로 다가오는 미래에 대한 이야기들. 그것을 겪어나가는 과정. 책에서는 과거에 대한 이야기라고 하지만, 그 목적지는 어쩌면 내가 지금 살고 있는 현재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래서 조너스는 과거의 삶이다.

편견을 버리고 조너스의 삶에 대한 관찰을 시작했어야 했나. 중간부분쯤, 조너스가 기억보유자의 후계자로 직위가 부여되고 나서 '사물 너머를 보는 일'이라는 게 색을 구별하는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책을 다시 읽어야 하나. 잠시 고민했다. 나는 당연하게, 아니 그런 것은 생각해보지도 않았다. 색이 없는 사회가 배경이라는 것을. 책을 읽을 때는 대개 그 장면들을 상상하기 마련인데, 책의 중반부까지의 상상은 색깔이 화려한 그런 마을이었다. 그러나, 여기까지 읽은 이상, 지금부터 상상 속의 장면들을 모두 흑백으로 만들고, 다시 몰입했다. 사물의 너머를 볼 수 있는 능력, 사과의 색깔, 피오나의 머리 색, 그리고 기억 보유자로부터 받은 기억 속의 전쟁에 대한 흔적, '눈'이라는 개념들. 조너스에게는 신비롭고 다소 고통스럽지만 그것들이 모두 놀랍게만 느껴졌다.
그러다가, 친구 애셔의 직위인 오락부장. 그리고 오락부장의 역할로서 전쟁놀이라는 것을 기억을 토대로 다시 보게 되었을 때 느끼게 되는 슬픔, 그것을 조너스가 받아들이기는 힘들었을 테다. 또, 기억보유자의 권한에는 과거의 일이 녹화되어 있는 테이프를 볼 수 있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거짓말. 

점점 자신이 살아온 마을이 돌아가는 방식, 사람들도 모두 자신과 같은 기억을 보유하고 전체가 바뀌어야 한다는 사명을 띠고, 떠나기로 결심한다. 떠나기로 미리 정해둔 다음 날 새로 들여온 아이 '가브리엘'이 임무해제, 즉, 세상에서 사라져버린다는 것을 알게 되어 가브리엘도 함께. 그 목적지에는 무엇이 있을까. 자전거 페달을 힘껏 밟으며 조너스는 달리고 또 달렸다.

그리고, 그 목적지에는 기억 보유자로부터 처음 받았던 기억, 눈 위를 썰매를 타고 내려가는 그 기억. 가브리엘의 몸을 꼭 잡고는 점점 더 빠르게 내려갔다. 그 때에 들려오는 '음악'. 저 너머에는 자신의 가족이 서 있을 것을 기대하고 있었고, 점점 내려갈수록 아마 자신의 기억이 마을 사람들에게 꼼꼼하게 하나씩 주입되고 있을 터였다. 그렇게 마을은 조금씩 바뀌어 갔다. 조너스가 꿈꾸어 온 마을의 모든 사람들이 기억이란 것을,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다 알 수 있게 만드는 그 꿈을.

책을 읽으면서, 정확한 단어 선택과 깔끔한 문장 속에는 가볍다고도 볼 수 있는 내용속에는 꽤 심오한 것을 담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쌍둥이가 태어났을 때, 몸무게가 적게 나가는 아이를 죽게 하고, 그리고 노인들이 더이상 기력이 빠져 일을 할 수 없게 되었을 때 행해지는 임무해제. 즉, 안락사의 문제. 장애인의 태어나도 사라지게 해 버리는 그 사회속에는, 우리가 살고 있는 더 불안정하고 불공평한 이 시대에도 행해지기 힘든 문제와 해결책들이 당연하게 행해지고 있다. 마을의 모든 사람들이 획일적으로 평등한 기회들을 얻고 있는 듯 하지만, 그런 곳에서 일어나기에는 꽤 아이러니한 문제들이다. 오히려 그 곳에서는 사람들의 성욕을 억제하지도 않고, 노인들을 안락사 시켜서도 안되며, 쌍둥이는 그 둘이 같다는 것이 그 이상의 특권으로 받아들여, 자유로운 삶을 지향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 반대였다.

'아는 것이 모르는 것이다.'. 더 많이 알면 알수록, 그에 따라서 모르는 것은 훨씬 더 많아지게 마련이다. 앎과 모름, 그리고 세상에 일어나고 있는 모든 문제들을 약간은 느슨하게 비판해주는 듯한 책이다. 조너스의 꿈이 이루어져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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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토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17
장 폴 사르트르 지음, 방곤 옮김 / 문예출판사 / 199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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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closer> 중에서

Dann: I love you

Alice: Where?
Dann: What?
Alice: Show me
Dann: ...
Alice: Where is this love?
I can't see it, I can't touch it, I can't feel it
I can hear, I can hear some words but I can't do anything with your easy words.
Whatever you say, it's too late. 


눈에 보이지 않는 추상의 명사. 그리고 갖가지 물건들. 내가 접촉하는, 접촉하지 않는 존재들.

존재란 무엇인가. 끊임없이 주변의 사물에 관한 자신의 감정들을 써내려 간 글들. 그리고, 그 존재하는 물건이란 것에 바치는 길고도 길은 단어와 문장들. 한 마디로 말하면 책을 읽는 내내 나도 사르트르와 마찬가지로 '구토'가 일었다.


'최선의 방법은 그날그날 일어난 일들을 적어두는 것이다. 뚜렷하게 관찰하기 위하여 일기를 적을 것. 아무리 하찮게 보이는 일이라도, 그 뉘앙스며 사소한 사실들을 놓치지 말 것. 특히 그것들을 분류할 것.' 사르트르는 이렇게 말해놓고 자신의 일기를 써내려갔다. 작년 1월 1일부터 일기를 써야겠다고 마음먹은 뒤로는 지금까지 하루도 빼놓지 않고 일기를 쓰고 있다. 나도. 그러나, 나의 일기를 어쩌다가 들춰보면 그건 그저 하루 동안에 있었던 굵직한 일들의 요악일 뿐이다. 나의 감정이란, 단지 기뻤다, 슬펐다, 내일을 기대하자 등등. 그것뿐이었다. 그러나 사르트르의 일기, 길고 길은 하루의 일기. '1932년 1월 29일 월요일'로 시작하는 일기, 화요일이 될 때까지, 정말 24시간이 흐르는 듯 했다. 나는 사르트르와 함께 호흡하고 있다. 화요일이 될 때까지, 1932년 1월 29일인 월요일 아침에 같이 일어나서 잠들 때까지, 그리고 화요일 아침이 되면 다시 화요일을 함께 보냈다. 함께 '구토'라는 것을 느끼면서.


사물을 보면서, 그것에 대해 느끼는 존재에 대한 가치와 그 자체. 우리 모두도 하루, 아닌 지금까지의 생을 살면서 존재에 대해 고찰한다. 나는 어디에서 왔으며, 지금 내가 있는 여기는 정말 내가 있는 것인지, 나는 존재하는지, 아니면 존재한다고 느끼는 것 뿐인지. 정말 끊임없이, 끊임없이. 쉬지 않고 생각하고 나서 또 한 번 생각하면 그 자리엔 '나'라는 존재가 서있을 뿐이다. 

'구토는 나의 내부에 있지 않다. 나는 거기에서, 벽이나 멜빵에서, 그리고 온갖 내 주위에서 구토를 느낀다.' 어쩌면 구토란, 존재라는 의미의 생물에서 나오는 생리적인 현상, 즉 내부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런데 나의 내부에 있지 않다니. 온갖 주위에서 구토를 느낀다니. 그것과 일체를 이루고 있을 뿐이다. 그 속에 내가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단지, 흐름이 있을 뿐이다. 카페에서 엿듣는 대화라든지, 주변 사람과의 관계, 그리고 안니와의 만남 등 사건은 있지만, 그것들이 중점은 아니다. 그저 사건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그 사건의 과정, 일이 끝나고 난 후의 감정들, 아니 매 순간마다의 감정이 흘러가는 대로 적어내려갔다는 생각이 강하게 느껴진다. 어느 순간, '구토'가 다시 생길 것을 알지만 예전과 달리 존재에 대한 인식이 바뀌는 부분부터의 대립이 인상깊다. 그래, 존재에 대한 관찰의 사상이 바뀌어진다. 


사물을 관찰하고 거기에서 느끼는 흔한 감정들을 예리하게 잡아낸다. 무의미하고 심심하고 아무것도 하기 싫은 귀찮음의 절정에서 보여주는 관찰이지만 전혀 무미건조하지 않다. 행동은 비록 여전할지라도 머릿속에서의 관찰에 대한 생각의 흐름의 속도는 빠르기만 하다. 그래서, 좀처럼 그 속도를 따라가기 힘든 내용이지만, 사색, 존재에 대한 사색에 관한 한 이처럼 정확할 순 없다.


나의 이 글도, '구토'가 치미는 계속적인 관찰에 대한 반복적인 리듬을 따르고 있는 듯 하다. 그래서, 계속적이며 동시에 반복적이다. 같은 말을 하고 있다. 


 

p.29 무릇 물체들, 그것들이 사람을 ‘만져’서는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살아 잇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을 사용하고, 그것을 정리하고, 그 틈에서 살고 있다. 그것들은 유용하다 뿐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데 그것들은 나를 만지는 것이다. 나는 그것을 참을 수가 없다. 마치 그것들이 살아 있는 짐승들인 것처럼 그 물체들과 접촉을 갖는 게 나는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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